존 칼빈의 주석 분석 (선지서)
신원균 목사
序論.
칼빈 주석 중에 선지서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전체 주석 중에서 선지서 주석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분량으로도 그 중요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그는 매우 많은 분량을 이 선지서 주석에 할애하므로 선지서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이런 많은 분량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선지서 주석의 특징을 살펴보면 죤 오웬의 "칼빈은 본문에 충실하며, 본문이 엄격히 요구하는 의미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그가 본문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는 기술은 자연스럽고 명백하며 뛰어나다"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에서 후자에 대한 더욱 탁월함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자신의 시대에 선지서의 내용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적용되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자신의 시대에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었던 정신은 이미 선지서 자체에서 선지자들의 중요한 정신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칼빈은 모세 오경의 주석에서도 밝힌바 있지만 선지자들의 역할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계명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있었던 모세 오경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시대에 해석하고 적용해 주는 것이라고 제시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칼빈은 선지자들이 이처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해석하고 적용해 주었던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선지서를 주석 하면서 십계명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칼빈 자신의 시대에 더욱 풍성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면에 있어서 칼빈 자신이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다음과 같은 자신의 예레미야 헌사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세상에 살아 있고 제가 속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추천사를 덧붙일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예언이 저에 의해서 경건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게 설명되었음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더욱이 그는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 유효하게 적용되었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칼빈의 선지서 주석의 정신을 분석해 봄으로 우리 시대의 흐름과 나아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보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 성경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어져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本論.
칼빈의 선지서 주석의 분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체를 몇 가지의 주제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선지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를 중심으로 소선지서들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조화 있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대선지서들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내용들. 둘째로,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심판의 내용들, 셋째로,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심판의 경고. 넷째로 심판 후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구속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 성취). 이제 이런 구조에 의해서 각 대선지서를 중심으로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선지서는 이런 대선지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1. 이사야서(요엘, 요나/호세아, 아모스, 미가)
1)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내용들.
이사야는 전체 내용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핵심적인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먼저 그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각 계명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 죄들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을 요약하면 결국 이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사30:11)". 칼빈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그들의 죄를 가중시킨 엄청나기 짝이 없는 그 사악함의 원인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묵인하거나 조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하고 능한 의사로서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행사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거부하는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사30:9)".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곳 하나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이렇게 고소함으로써 모든 악의 근원, 즉 그들의 사악함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멸을 폭로하는 말씀에 대한 경시를 밝히 지적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하면서 감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가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핵심적인 죄의 내용은 "(사8:20)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에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적으로 그의 말씀에 의지해야 하는 것과 무엇이든지 그들이 알아서 유익한 것을 그것에서 배워야 할 것과 그분께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다. -- 하나님께서는 율법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붙드시려고 뽑으신 우리와 그 율법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시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또 필요한 모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의 가르침과 착하고 행복한 삶의 규범을 포함하는 율법의 매우 높은 위탁이다. 이 때문에 그는 또한 당연하게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것에서부터 외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우리가 전적으로 그의 말씀에 의지하고 우리의 지식이 그 한계에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핵심적인 죄는 그들이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형식들을 실천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했던 핵심적인 내용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런 의식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소중하게 여기면 당연히 오직 하나님만을 깊이 경외하고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사33:6)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라는 말씀에서 가르쳐 지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내용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우세할 때 교회의 힘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가르침을 잘 받을 때 교회의 구원은 영원할 것이다. -- 이사야가 설명을 위해, 즉 자기가 말한 지식이 경건을 가르치는 스승이며 차갑거나 생명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으로 강하게 꿰뚫고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하니님을 경외하게'한다는 것을 보다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첨가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2)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심판의 내용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의 내용들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심판의 내용은 이사야의 시대에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시대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서 당시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돌이키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망하게 되고 결국 이방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서 무서운 고통을 받을 것임을 신4:27을 통해서 예언 했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이사야 시대에 와서는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이사야는 곳곳의 멸망에 대한 심판의 내용으로 자신의 시대에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심판의 내용은 멸망과 포로 생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심판의 성격을 칼빈은 사29:3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선지자는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내리 덮친 모든 악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죄악을 자행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시켜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성경 안에서 이 교훈은 자주 나타나므로 우리는 이것을 보다 조심스럽게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야만 한다. 성령께서 이 교훈을 그토록 자주 반복하시고 깨우치시는 것은 선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3)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심판의 경고
선지서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부분은 당시의 이스라엘 주변국에 대한 깊은 선지자들의 관심과 그리고 이들의 존재의 성격에 대한 예리한 관점이라할 수 있다. 그러면 선지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이 주변국들의 흥망성쇠를 자세하게 제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선지자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에 대한 중요한 사고를 살펴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바빙크(H. Bavinck)의 지적처럼 개혁신학이란 것은 인간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찾고자 하는 하나님 중심에 대한 세계관이 개혁신학의 중요한 세계관임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주변국에 대한 선지자의 관점에 있어서 이런 중요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주변국에 대한 이해는 이미 모세를 통해서 "(출9:16) 네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라고 정확하게 그 성격이 제시되었던 내용인 것이다.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높으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선지서에 와서는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성격을 칼빈은 사40:22-26 주석에서 밝혀 주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특별히 인간을 다스리는 섭리를 칭송한다. -- 주께서는 특별히 인류를 더욱더 주의 깊게 내려다보시므로 선자자는 이 분야를 지적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칭송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범위가 아주 광범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뜻에 따라서 지도하고 통치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의 행사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 하나님은 그의 손을 부단히 움직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그의 뜻과 기쁨에 의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이상, 곧 견고하고 확고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들이 얼마 못가 쇠퇴해 버리고 마는 것을 보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절대 섭리에 돌리자".
이처럼 전체 세계에 대한 관점은 철저하게 예정론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온 우주 만물의 존재와 질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드러내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들이라는 사고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칼빈은 사46:10-11 주석에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선지자가 이 말을 이토록 자주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진리를 납득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 자신의 예지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정(예정)하신 것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드러내 왔음을 말한다. -- 우리에게 아무리 멀리 떨어진 거리나 긴 시간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음을 일러준다. 따라서 하반절에서 '먼 나라에서'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권능에 대해서 읽은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우도록 하자. 그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도록 사용케 하려는 말이다".
4) 심판 후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구속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 성취)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회복의 내용과 그 방식에 있어서도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 시대의 역사적인 해방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소망과 그리고 장차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성취 등이 조화롭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런 약속은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모세 오경의(십계명) 중요한 약속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신30:1-6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셨던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창17:7-8)"이라고 약속했던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중요한 내용이 선지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얻게 되는 가장 값진 복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런 내용이 당시에도 여러가지 세상적인 축복과 땅을 다시 얻는 복의 형태로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런 중요한 내용을 칼빈은 사60:17-22 주석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예언은 백성들의 외적인 회복 면에서나, 그 회복 초기에 그대로 이루어진 일이 없으며 후에 세워진 성전 역시 전의 것보다 훨씬 못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영으로 완전한 구속을 내다본 입장에서 백성들이 귀환한 다음에 곧 있을 사건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적 성전, 곧 그리스도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까지 강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예언이 있은 뒤부터 중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에게까지 내려와야 한다. 오직 그의 통치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이전 성전의 영광보다 뛰어난 영광이 드러났다. 요컨대 여호와께서는 금, 은,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성령의 은사를 쏟아 놓으신 것이다. -- 다음으로 제아무리 어두운 흑암 속에서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신자들에게 비취어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점을(이것이 핵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 깨닫도록 하자.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거나 우울한 면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고 있다는 사실로 만족할 줄 알아야겠다. --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했던 내용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① 요엘
요엘서에서는 대선지서에서 요약한 4가지 구조가 간략하게 모두 언급되고 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지적되고 있는데 그 죄의 내용은 암시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오히려 심판의 내용이 더욱 강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1-2장). 그러나 2:13에서 "마음을 찢고"라는 말씀을 통해서 다른 선지서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마음을 통한 진실됨이 사라지고 오직 종교적인 외적 형식주의만 남은 것이 죄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판의 내용은 "여호와의 날"이란 표현을 통해서 메뚜기 떼, 가뭄, 기근 등으로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1-2장). 세 번째로는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두로, 시돈, 블레셋등으로 소개되고 있다(3장). 이 나라에 대한 심판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명백한 확인의 성격으로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의 내용으로 성령의 부어 주심이 소개되고 있다(2장).
② 요나
요나서는 오바댜, 나훔서와 같은 구조로 대선지서의 3번째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선지자 자신의 소명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우주적인 통치와 권세와 섭리를 드러내시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요나로 하여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명을 주시고 이 소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세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나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이 주변 국가에 대한 심판 내용이 1번 내용인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내용을 지적하는 것과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내용 속에 메시야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즉 요나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는 성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1장).
③ 호세아
호세아서는 대선지서의 1, 2, 4번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죄의 내용은 1-13장에 이르는 많은 분량이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죄의 깊이와 내용들을 아주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죄의 내용을 호세아와 고멜이라는 부부관계를 통해서 백성의 죄의 내용이 절정에 다다르기도 한다. 죄의 내용으로는 우상 숭배, 하나님의 말씀 버림, 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의 부패, 이방민족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죄, 거짓되고 호화스러운 제단의 형성 등이 소개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1-13장안에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멸망이 간헐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네 번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의 내용으로는 이스라엘의 정결성과 종교의식의 핵심이 회복될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14장)
④ 아모스
아모스서에는 대선지서의 요약 내용이 모두 소개되고 있다. 특히 2번의 심판의 내용이 다양한 환상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방식은 에스겔서의 형식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지적되고 있다(3-9장). 죄의 내용으로는 우상 숭배, 거짓된 제단과 예배의 변질, 여인들의 탐욕, 거짓된 평안, 거짓 제사장, 그리고 일반적인 윤리적 죄들이 소개되고 있다. 두 번째로 심판의 내용은 메뚜기 환상, 가뭄 환상, 다림줄 환상, 과일 광주리 환상, 부서지는 문설주 환상 등의 내용을 통해서 국가적인 멸망과 함께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계시에 대해 무지함를 맞보게 되는 단절을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주변 국가의 심판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대상으로는 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등이 제시되고 있다(1-2장). 네 번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9장). 이것은 에스겔의 새 성전 건축 소명과 학개, 스가랴서의 성전 건축과 이스라엘 땅의 회복과 분배의 형식과 연결된 내용이기도 하다.
⑤ 미가
미가서에서는 대선지서의 요약된 내용중에 1. 2. 4번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알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전체의 장들을 통해서 지적되고 있다(1-7장). 그 죄의 내용들을 보면 우상 숭배, 탐욕, 거짓 선지자들과 지도자들, 일반 백성들의 5-10계명에 해당되는 일반 윤리적인 죄들이 소개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의 심판이 국가의 멸망으로 소개되고 있다(1장), 네 번째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4,5), 죄의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6-7장). 결국 이런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 자신과 동행'하는 것과 '오직 그분만을 경외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2. 예레미야서(나훔, 오바댜, 하박국, 스바냐)
1)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내용들.
예레미야서는 다른 선지서에 비해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 대한 죄의 내용을 가장 심각하고 세세하게 책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절반 이상이 죄의 내용과 심판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선지자가 지적했던 그 죄의 성격들과 또한 숨겨진 죄의 내용들을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레미야서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십계명을 기초로 해석하고 적용되는 형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칼빈도 예레미야의 이런 내용의 독특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율법서가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의 공상에 빠져 수많은 불경한 예배형태를 고안해 냈다는 점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러한 방종이 횡행하던 시기에는 난폭한 자들이 많이 일어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순수한 교리를 애써 왜곡시키며 스스로 무수히 부조리한 것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사실 만일 제사장들이 올바르게 가르쳤다면 그들은 모든 지식을 율법서에서 끌어내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 율법서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교회가 어떻게 하늘로부터 받은 것에 따라서 규제되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배울 수 없었다"
지적되는 내용은 전체적으로 이사야서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핵심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또한 그 외의 세세한 부분을 함께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가장 핵심적인 죄로 칼빈은 예레미야 2:13 주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거부한 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백성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날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보상도 없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유익도 줄 수 없는 우상들에게로 넘어감으로써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의미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이 거짓되고 공상에 불과한 우상에게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우상들을 깨지거나 '터져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에 비유한다. -- 우리는 이제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점이 자신 속에 우리를 위한 모든 축복을 충만히 가지시고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떠날 때에는 죄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을 버리는 죄는 곧 인간들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모습(이것을 우상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에서부터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정신은 후에 신약에 와서 바울을 통해서 "자의적 숭배"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종교적 모습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결국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무시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신앙을 표현한 죄는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칼빈은 예레미야1:10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분리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위엄이 하늘의 모든 천사 위에와 온 세상 위에 뛰어나심과 같이 그와 똑같은 위엄이 그의 말씀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돼지나 개가(당시 교황과 신부들)모든 참된 교의와 경건에 결해 있으므로 그들이 왕들과 나라들 위에 권위를 갖는다고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철면피하고 어리석은 짓인가?".
이와 같은 핵심적인 죄에 빠져 있으므로 해서 갖가지 여러 가지 죄들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 이미 성전의 가치와 종교적인 예법이 이 핵심을 가지지 못했을 때는 이런 것도 전혀 무가치 한 것임이 예레미야7:21-23서에 지적되고 있다. 칼빈은 이런 모습을 "이 절에서 오로지 희생 제물을 바치는 데에만 끊임없이 관심을 쏟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유대인들을 힐책한다. -- 하나님께서는 이런 짓은 결코 나와는 상관이 없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그러한 의식에서 제외시키시는 것이다. --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데 있어서 그 목적을 등한시하는 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단지 잔치를 벌이는 것뿐이다. -- 하나님께서는 결코 희생 그 자체를 기뻐하시지 않았으며, 단순한 외형적인 의식에 의거한 예배를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번제물, 희생, 분향과 이런 종류의 일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제물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으므로,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명확한 진리를 상기시킨다. 희생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오로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제시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영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받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 로마 카톨릭자들은 자신의 공상과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황주의의 의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율법이나 복음에서 연유한 권위를 전수 받지 못했다"
2)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심판의 내용들
예레미야서에서 제시하는 심판의 위의 첫 번째 주제와 연결해서 제시되고 있으며 특히 이사야서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좀더 특이한 것은 시기적으로 예레미야의 시대가 멸망의 예언과 함께 이미 멸망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 중에서 매우 특별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예레미야가 70년의 포로 생활을 예언하고 있으면서 멸망 직전에 있는 백성들에게 이 하나님의 뜻을 제시해야 할 때 다른 예언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성들로 하여금 바벨론에게 저항하도록 하려 했지만 예레미야는 오히려 이 포로 생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제시하면서 저항하지 말고 포로로 순순히 잡혀갈 것을 예언하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심판의 과정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한 중요한 사고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예레미야27:8-10의 주석에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극단적인 심판에 대해 어떤 손을 쓰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부성애적인 질책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우리가 이제 다시 보겠지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불쾌한 징조를 보이실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인내로써 그것을 감수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분의 자비에 의지해야 한다. 고집을 부려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그분의 진노만 더욱 자극할 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멸망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정신은 칼빈의 시대에 칼빈 자신이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칼빈의 여러 가지 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기독교 강요가 프란시스 왕에게 드리는 글로 제시가 되면서 당시의 역사적 형편을 이런 하나님의 전체의 섭리 가운데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당시 제네바의 성도들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도 칼빈은 (롬13:1)의 정신과 이 예레미야서의 내용이 동일하게 연결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바울의 말은 모든 권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이 원리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자에게는 지배하고 통치할 능력을 주신다. 칼의 힘과 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자면 모두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이 비록 독재자이거나 도둑일지라도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때가 오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3)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심판의 경고
예레미야서에도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주변 민족들에 대한 선지자의 독특한 관점과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애굽(46장), 블레셋(47장), 모압(48장), 암몬(49장), 에돔(49장), 아람(49장), 아라비아 족속들 및 엘람(49장), 바벨론(50-51장)의 멸망에 있어서 이미 이사에서 지적하였던 것처럼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그 뜻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먼저 칼빈은 예레미야49:19-20 주석에서 이런 심판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어리석게도 사람의 교만함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위에서 말한 진리가 그렇게 평범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분께 온당하게 돌려드리는 사람은 백 사람 중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이 원리를 받아들이는 자들까지도 조그마한 방해가 있을 때 헛된 상상에 빠져서 결국 버림받은 자식이 된다. -- 사실 신실할 사람들까지도 가장 작은 것을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은 파리나 곤충을 하나님의 반대편에 두고 심지어 그것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삼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어는 시대에나 흔히 퍼져 있었던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자가 없다'라는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선포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엄청난 선포다. -- 하나님께서 이런 구절을 통해서 온 세상이 자신의 권능 아래 있음을 보여주신다. -- 사람의 마음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를 지키시고 생명을 주시며 견고히 서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라도 우리의 영을 쇠약하게도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어느 때나 행하신다"
4) 심판 후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구속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 성취)
예레미야서에도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구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가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는 구속주가 '다윗의 의로운 가지(23장)', 새 언약(31장)등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31장에서 회복의 핵심적인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칼빈은 31:33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시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역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당시에 이 은총이 정당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단언하시며, 친히 그 은총의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는 이상 사람들이 이것을 감히 자신의 것으로 칭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함인가? -- 따라서 그 누구도 성령에 의해 거듭남을 입지 않는 한 돌이킴 받고 율법에 복종하도록 될 수 없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난다. --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단언하실 때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자애로운 부성의 사랑을 베푸시며 우리의 구원이 자신의 배려의 목적이 되었다고 선언하신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약속은 자체 안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온갖 것을 구비한다. 오늘날 복음 하에서의 경우가 그렇다. 선지자는 이 구절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주된 목적은 그분께서 우리가 구원을 찾고 기대해야만 하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리라는 것과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간결히 암시한다"
결국 이런 회복의 핵심적인 정신은 신약으로 이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음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① 나훔
나훔서는 전체가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대선지서의 구조를 통해서 보면 3번째의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해당하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온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대한 표현이 나훔1:2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몇군데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내용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1:15, 2:2).
② 오바댜
오바댜서도 나훔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전체 내용이 에돔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에돔의 죄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망각한 죄로서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생각한 교만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죄를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통치와 섭리의 영광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자리를 더욱 드러내심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이 "시온산 회복"으로 소개되고 있다.
③ 하박국
하박국서는 전체적으로 나훔서의 성격처럼 대선지서의 3번째 내용인 주변 국가에(갈대아)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직접적인 이방 국가에 대한 선언보다는 선지자 자신이 격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인 통치과 섭리의 구조에 대한 놀라움을 자신의 고백으로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1-2장). 그리고 선지자의 하소연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내용도 정리되고 있으며(1장), 또한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해 주고 있다(3장).
④ 스바냐
스바냐서에는 대선지서의 4가지 내용이 모두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즉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서 우상 숭배와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죄가 지적되고 있다(1,3장). 둘째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호와의 날(멸망)"이 준비되어 있음을 경고해 주고 있다(1, 3장). 세 번째로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이 소개되고 있다(2장). 넷째로는 이방인의 구원와 이스라엘의 회복이 약속되고 있다(3장). 그리고 회복의 내용도 여전히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소개되고 있다(3장).
3. 에스겔서(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
에스겔서의 서문 중에서 베자(Beza)가 칼빈의 주석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선지서에 대한 중요한 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싸움에 있어서 각하를 강건하게 할 것은 역사서와 선지서를 부지런히 비교, 검토하시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과거의 사건을 주시함으로써 언제나 미래의 사건을 추측하는 것처럼 역사서와 선지서는 헛된 것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선지자) 이 시대의 어느 나라보다 강대한 대제국, 위대한 왕과 방백들, 가장 큰 나라를 보존하고 멸망시키시기 위해 심판대에 앉아 계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선지서의 내용입니다. -- 마지막으로 저는 시대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시대의 조류가 변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와 의인에 대한 자비와 불경건한 자에 대한 진노는 동일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어떤 유의 사건에 확고함과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와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의 대상을 지난 시대와 비교해 보기만 하면 보편적으로는 율법에서, 그리고 특별히 선지서에서 이러한 원리를 명백히 선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프랑스 교회가 뽀아시의 대화에서 평화와 안녕을 약속한 것이 4년 전이었습니다. 반대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칼빈은 다니엘서 주석을 교회에 헌정하면서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미친 듯이 날뛰는 불경건한 자들과 더 이상 싸워야 한다면(제가 이미 여러분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에 계신 주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주께서 마지막까지 강건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그가 참된 선지자적 정신으로 이러한 말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곧 이어 수많은 재난이 일어났으며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그러한 예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아십니까? 분명한 것은 그 당시 그가 강의하고 있던 선지서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범죄하면 혹독하게 징계하고 그 대적들에게도 정당한 보응을 내리시므로 그가 프랑스에 창궐하는 악을 보았을 때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질 재난을 왜 경고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베자는 프랑스의 대제독이었던 '콜리니'각하에서 헌사를 드리면서 이 성도가 자신의 참된 신앙을 자신의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는지를 칼빈의 예를 들어서 소개해 주는 내용인 것이다. 즉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국가가 위급한 정세에 놓였을 때 그 원인과 또한 회복의 방법을 선지자의 관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자도 콜리니 제독이 당시의 시민 정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할지에 대해서 이런 선지자적인 정신을 철저히 배워야만 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내용들.
에스겔서에서 지적되는 죄의 내용들도 여전히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모세 오경(십계명)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범죄의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에스겔서는 이런 죄의 내용들이 다양한 환상과 묵시적인 예언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스겔서에 나타나는 죄의 내용들 중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리와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오직 인간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종교적인 내용들을 바꾸어 버린 죄이다. 이런 죄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알미니우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죄의 모습임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칼빈은 에스겔17:21-29 주석에서 이런 내용을 소개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 이러한 불신앙과 타락의 근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인간들은 창조자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평가하고, 우리의 저울로 그것을 달아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되겠는가? -- 사람들이 창조자에게 감히 불평할 뿐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상관이나 되듯이 공공연히 규탄하고 정죄할 때 자기들의 상황과 위치를 완전히 망각한 것과 같다. -- 우리의 자세는 비록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찬양하고, 우리의 의견과 판단에는 하나님의 모든 일이 서로 부합되지 않으며 일관성을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찬양을 돌려야 한다".
이처럼 선지자 시대에도 지금 우리 시대에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인간의 자리에 대한 내용들이 동일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망각하고 인간의 자리를 세우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죄악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성경에서 명백하게 가장 심각한 죄로 지적하고 있는 신학적 내용들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거짓된 내용이 마치 참된 내용처럼 거의 그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인 것이다.
2)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심판의 내용들
심판의 내용들도 여전히 환상과 묵시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은 이사야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에스겔서에는 심판의 내용으로 멸망과 포로 생활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런 내용을 통해서 이들이 실제적으로 심판을 통해서 잃어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나가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상관 없는 나라로 전락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심판의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다. 칼빈은 에스겔10:18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이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의 가장 주요한 요점인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리셨음을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멀리 추방해 놓고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을 자기들에게 매에 놓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이 순전하고 경외롭게 칭송 받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내용을 버리고 단지 하나님께서 성전에 갇혀 있다는 헛된 생각을 가져서 성전 자체만 경외하는 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3)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심판의 경고
에스겔서도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주변 이방 민족들의 존재와 가치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와 예정론적 관점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런 심판적 성격을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또한 거룩함과 존귀를 온 세상에 드러내시는'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암몬(21. 25장), 바벨론(21장), 모압(25장), 에돔(25. 35장), 블레셋(25장), 두로(26-28장), 시돈(28장), 애굽(30-32장), 마곡, 바사(38-39장) 등의 멸망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이 20장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성격을 보이고 있는 다니엘 주석을 통해서 이부분의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다니엘서에서는 심판의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다니엘서에도 바벨론을 비롯해서 이후의 왕조에 대한 예언이 1-2장을 통해서 제시되어 있고, 느부갓네살왕과 벨사살왕의 흥망성쇠(4-5장), 메대와 바사(7-11장) 등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다니엘서도 에스겔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환상의 내용을 통해서 이런 심판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다니엘서에는 바벨론의 성격과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제시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리와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인간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제시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다니엘4:17-37 주석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실로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만 한다. 즉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며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 때에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후에 보게 되겠지만, 그분은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의지가 법과 이성의 근거이며 정의의 최종적 수단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절대적인 주권자로서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분의 제국을 지배하시며 모든 변화에 대한 위험을 넘어서 계시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확고하고 순수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는 이 원칙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 무엇이든 인간으로부터 유래된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세와 나라를 경멸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며 그 은혜는 매 순간 우리를 지켜 주고 새로운 활력을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보여주면서 그것에 만족하도록 명령한다 해서 경건치 못한 자들의 비방에 따라 하나님을 폭군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에 왜곡되고 불의한 것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영향으로도 돌려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반대할 때 우리의 무모성이 얼마나 곡해되었고 만용되었는지를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제의 고삐를 씌우는 가르침이 왜 필요한지 밝혀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하시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오만이 내던져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정당하게 칭송받을 수 없고 인간이 수치 속에 묻히고 먼지 속에 휩싸이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영광받으실 수 없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찬하고 존경하지만,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은 아무것도 아님을, 조금도 칭찬 받을 것이 없고 오직 수치를 당해 마땅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4) 심판 후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구속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 성취)
에스겔에서의 회복에 대한 방식과 내용들은 주로 환상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데 본질적인 내용은 다른 선지서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심판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간 것을 제시했기 때문에 회복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회복은 새로운 성전과 땅의 분배의 형태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40-48장). 이와 같은 성전의 새로운 건축에 대한 정신은 다분히 모세 오경의 시내산에서 성막 건축 명령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건축 명령을 통해서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을 소개해 주었던 것처럼 에스겔에서는 새로운 성전 건축을 통해서 이 언약이 다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연결해서 다니엘서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한 나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니엘7:13-28 주석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권능과 이름으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자신의 왕국을 일으키기까지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과 동시에 많은 원수가 그분을 대적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을 보게 된다. -- 우리는 또한 그분의 왕국의 시작과 마지막 완성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다. 의미는 어떻든지 이 이상은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 것과 아주 잘 부합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권능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마28:18). --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지배가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행복한 삶과 영원한 유업으로 그리스도 왕국의 변하지 않는 내구력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 교회를 지키시므로 누구도 감히 교회가 멸망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 예언자의 주된 의도는 내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건과 경건한 자들의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맹목적인 우연의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항상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는 경건한 자들의 희생과 안전에 대한 모든 시련과 소요를 경감시키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경멸당하고 거의 배척받으신 후에 수많은 변화를 통해 세상의 구주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왕국을 택한 백성에게 주시고 언제 성령의 능력에 의한 거룩한 복음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① 학개.
ⓐ 죄의 내용
학개서에서 죄의 내용은 포로 후의 새로운 성전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죄의 핵심적인 내용은 위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을 무시한 죄가 가장 무섭게 책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은 에스겔의 새 성전 건축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학개1:2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배은망덕함이 얼마나 큰지를 마치 거울을 보듯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음을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특별히 기억해 둘 가치가 있으며, 그 영광을 세상 끝날 까지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것 외에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장막도 세우지 않고 노천에서 희생 제물을 드렸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의로 하나님을 소흘히 섬기면서 훌륭하게 지은 집에서 편안히 살았다. --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모든 사람은 오히려 자기에게만 이로운 일을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관심에만 사로잡히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 회복 내용
에스겔서의 새 성전 건축의 소명과 동일한 내용이 학개1:9절에 소개되고 있다. "왜 학개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그렇게 계속 주장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옛 백성을 종교적 의무라는 측면에서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성전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은 중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보이는 성전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성전을 소흘히 대한 것에 대해 진노하신 것은 그들에게 종교적 관심도 열정도 없음이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성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으며, 거의 경멸해 왔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② 스가랴
스가랴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변국에 대한 심판(1-11장), 성전 건축에 환상과 소명으로(1-9장) 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소명(6. 9. 10-14장)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③ 말라기
말라기에서도 전체적으로 두 구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로는 성전과 예배 의식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과 내용들을 잃어 버린 것에 대한 책망이 제시되어 있으며, 둘째로는 메시야의 소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죄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면 말1:7을 통해서 예배 의식에 대한 본질적인 죄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3:8에서는 십일조와 헌물의 잘못된 사용을 이런 맥락에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메시야의 소망은 언약의 사자(3:1), 의로운 해(4:2)등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結論.
본인은 지금까지 칼빈이 가지고 있었던 선지서에 대한 중요한 정신을 그의 주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먼저 그는 자신의 시대에 만나게 된 여러 가지 국제 정세를 하나님의 전체적인 주권과 예정론적인 사고와 또한 섭리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또는 그 시대를 꿰뚤어 보면서 이 시대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선지자적 정신에서 그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리고 성도들이 이런 변화의 격동기에 격게 되었던 여러 가지 혼란하고 어려운 삶들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판단하고 또한 말씀의 바른 의미를 따라서 살아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선지자적 정신으로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칼빈의 선지자적 정신의 확립은 새천년을 앞두고 오늘날 목회자로 하여금 또는 성도로 하여금 우리 시대에 부딪히는 모든 내용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야 할 것인지를, 그리고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 속에서 어떻게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이 글을 마감하면서 본 발체자가 바라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의 귀한 스승이었던 칼빈의 주석이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원하며, 그래서 부지런히 이 내용을 연구하고자 하는 도전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우리는 이런 값진 스승과 그 스승을 통해서 남겨진 자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이 "진정한 교리의 옹호자들을(목회자)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풍성하고 귀한 자료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칼빈 주석의 가치를 베자의 다음의 말 한마디로 그 중요성을 대신하고자 한다.
"하나님 아들의 교회들아,
너희들은 이 위대한 칼빈 선생님의 주석들을 쉬지 말고 정독하여라(Beza)"
"주님, 우리에게 이 선지서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셨던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 (애1: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같은 근심이 있는가,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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