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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토착화 신학에 대한 비평적 연구 / 이 상 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baromi 2008. 1. 2. 08:30

한국 토착화 신학에 대한 비평적 연구



                                              이    상  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목              차 





       I. 들어가면서

       II. 토착화 신학(문화신학)에 대한 개념 정립

       II.I 토착화 신학에 대한 성서적 근거

       II.I.1 구약성서의 경우

       II.I.2 신약성서의 멧시지

       II.II. 교회사적 전통과 문화신학

       II.III 최근 주요 신학자들의 문화신학

       II.III.1 바르트(K. Barth)와 계시신학

       II.III.2 틸리히(P. Tillich)의 문화신학

       II.III.3 ‘신 없이 신 앞에서’ -본훼퍼(D. Bonheoffer)의 세속화 신학

       II.III.4 '제 3 세계‘와 서구의 토착화 신학

       III. 한국 신학 속의 토착화 신학

       III.I 토착화 신학의 논의, 그 유형과 전개

       III.I.1 비교 종교학적- 문화 인류학적 유형

       III.I.2 역사신학적- 선교론적 유형

       III.I.3 성서신학적-해석학적 유형

       III.I.4 종교신학적-다원주의대화론적 유형

       III.I.5 문화초월적-변혁주의 유형

       IV. 토착화 신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

       IV.I 한국토착화신학 논의에 대한 이해

       IV.II 한국토착화신학에 대한 평가

       IV.III 토착화신학 논의를 위한 제언

       V. 나가면서; 한국 기독교의 향후 전망과 과제

     

      








 I. 들어가면서;


   소위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한 논의가 한국 기독교계에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아마도 1960년대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여 세계종교박람회의가 1893년 9월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개최되어 종교간의 대화운동이 시도된 이후1), 종교간의 벽을 허물고 타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종교간의 대화’ 운동의 기운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1962-65년에 걸쳐 소집되었던 ‘제2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교리를 채택하면서 당시 신학적 이슈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  이 후 개신교에서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중심이 되어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증진을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면서 W. C 스미스, 레이몬드 파니카, 폴 니터 그리고 죤 캅 같은 학자들이 나타나 이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세우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와같은 일련의 세계 학계의 흐름에 대하여 상당한 기간 관망적 자세를 유지해 오던 한국의 신학계에는 1965년 윤성범의 ’기독교와 한국종교‘ 논문이 발표된 이후, 작금에 이르기 까지 지속적으로 보편적 멧시지로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특수한 상황, 즉 한국적 정황 속에 수용, 유지, 발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논의 (이같은 일련의 논의를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한 논의‘라고 정리하자)가 시도되었다. 이같은 논의는 그동안 한국에 기독교를 소개해 준 대부분 서양 중심의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멧시지와 함께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다분히 서양 문화의 옷을 입고 있었던 한국기독교를 어떻게하면 좁게는 한국, 보다 넓게는 동양(아시아)적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를 묻는 자기 정체성의 자각 속에서 제기된 신학적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중동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기독교가 자신의 케리그마(Kerygma)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각 시대와 각 지역의 문화와 만나 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는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편적 범주의 텍스트(Text)와 함께 개별적 특수성의 콘텍스트(Context)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기독교교회사가 전하고 있는 일관된 멧시지라고 할 때, 어쩌면 이같은 거시적 맥락 속에서 소위 ‘토착화(Indigenous)'에 관한 논의는 단지 한국적 상황에서만 야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고에서 주로 한국적 테두리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집중하면서도 여타의 보다 넓은 범위에서 논의되어 왔던 동일 주제의 전개를 함께 다루어 보고자 한다. 과거 한국의 토착화 신학(또는 문화신학, 종교신학등)2)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 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특히 성서적, 계시적 특수성과 문화적, 인류적 보편성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같은 맥락(Context) 중심의 신학에서 야기될 수 있는 논의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고 이에 대한 종합적, 미래 지향적 논의의 방향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II. 토착화신학 (문화신학)에 대한 개념 정립


 II.I 토착화신학에 대한 성서적 근거


 II.I.1 구약성서의 경우


   성서는 기독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인 규범(Norm)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신학적 체계는 성서적 관점에서 합당성을 인정받는 한에 있어서 그 정당성이 유지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감안하여 토착화 신학에 있어서도 먼저 그 신학적 근거를 성서적 배경을 언급함으로써 출발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성서, 특히 구약성서는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을 토대로 이루어진, 그래서 특수한 선민의식을 통해 경험해온 신 체험에 대한 고백적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서는 일부의 멧시지 (이를테면, 니느웨성에 요나를 파송함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야훼의 의지 등)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유대인들과 주변의 기타 종교인들와의 극단적 변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의 다신교를 숭앙하는 이교 문화로부터 아브람은 야훼의 음성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먼 여정의 길을 떠난다. 그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으로 성장하는 일련의 긴 역사를 여는 시조로서 그 출발에 있어서 주변의 영향으로부터 확실히 구별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문화적 패러다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같은 독특성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애굽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더욱 공고히 성장하는 바, 출애굽의 여정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주변의 다른 여러 형태의 타문화를 경험하는데 이 때 그들이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는 주로 소위 ‘십자군이념(Crusade)'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정복‘과 ’쟁취‘에 근거하는 이념이었다.3) 야훼 신앙을 모르는 이교도와 이교문화는 남김없이 정복되어야 하고 이들과 타협할 어떠한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입장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순수한‘ 야훼의 종교와 문화이외의 그 어떠한 토착 종교를 포용하거나 이들을 용납하는 일은 존재할 수 없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토착화‘는 곧 타협이요, 자신들의 정체성의 상실이며, 야훼와의 계약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이같은 야훼의 단일 신앙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독자적 종교 문화형태로서의 헤브라이즘은 이렇게 그 초기 형태에 있어서 근동의 다른 종교와 문화를 철저히 배격하는 방법으로 성장, 확대, 발전, 정착했던 것이다.

    이상과같은 상황에서 예견할 수 있는 주변 문화에 대한 폐쇄적이며 닫힌 모습으로서의 구약적 주제는 왕조 형성 이전의 제정(祭政)일치의 통치형태였던 사사기 시대, 그리고 주변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왕국의 형성을 도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를 형성하고 이에 대한 유지에 힘을 기울였던 중기 왕조시대4), 그리고 그 후 왕조의 분립과 멸망의 제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기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같은 주변 문화에 대한 배타성 때문에 이스라엘이 결국 주변 국가에 의해서 훼파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도 그들의 역사의 일부였다.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는 처음에는 앗시리아에 복종하다가 나중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추방되고 만다. 므낫세의 계승자였던 요시야는 왕이라기 보다 오히려 예언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신명기적 이념을 부흥시켰으며 자발적으로 모여든 군대를 재건함을 통하여 극단적 야훼주의와 주변 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고취시킨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요시야는 바로왕의 군대의 통과를 방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B.C 609년 므깃도에서 살해당하였고 그 후부터 이스라엘은 노예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던 포로기에도,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점령되었던 포로기에도 야훼를 중심으로 삼는 그들의 구심점을 쉽게 잃지 않는 독특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비록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지 않고 이방 민족에게 사로잡혀가는 고통을 주셨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흔들어놓거나 주변 문화에 배타적인 그들의 삶의 양식을 돌이키도록 부추기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의 패망은 하나의 응징, 즉 야훼와의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지 못한 응징으로 이해하였기에 그들은 더욱 신명기적 계약의 내용에 매달리면서 자신들의 재건을 암중 모색할 수 있었다.‘5)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 국가에 대하여 주로 ‘정복’과 ‘투쟁’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결코 그들이 기본적으로 평화를 존중하고 또한 이를 위해 노력하기를 게을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모하고 바라는 평화, 즉 샬롬(Shalom)은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평화는 기본적으로 야훼의 은총이며 인간은 단지 야훼와의 계약을 성취하는 한에서 그 대가로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의를 수반하지 않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따라서 불의한 자가 천성적으로 일으키는 갈등에 대하여 그들은 인간의 힘에 의지하여 이를 물리치기 보다는 주로 야훼께 의존함으로써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6) 이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과 고난을 야훼의 어린 양이 대신하여 담당해 주실 것이라는, 곧 ‘구속자(사 53장)’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발전되어 나간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II.I.2 신약 성서의 멧시지


  신약 성서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는 멧시지를 선포함으써 시작되는 그의 공생애, 자신의 제자에게 팔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그리고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리는 그의 제자들의 증언등에 대한 ’예수 사건‘을 전하고 , 아울러 이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예수의 새로운 공동체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약의 유대교 공동체와 병존의 기간을 공유한다. 피터 버거의 지적처럼 ’종교는 하나의 성스러운 우주를 이룩하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정의아래 새로운 종교의 탄생과정에서 과거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상징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보았을 때,7) 새로운 공동체 곧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세계의 파라다임을 형성해온 여러 종교적 상징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 ’회당중심‘의 구약적 제의는 새롭게 생겨나는 ’예수의 공동체‘ 또는 예수를 ’주‘요 또한 ’메시야‘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로 대체되면서 과거 종교적 상징들이었던 아브라함의 혈통, 모세의 율법, 그리고 여러 종교적 제의에 대해 과감한 새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었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과거 구약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혈통과 전통에 근거하여 독점적 특권을 누리는 체계를 뒷받침해 주시는 그러한 ‘폐쇄적’ 신의 모습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들은 공교롭게도 자신들의 혈육에게서가 아닌 소위 ‘이방인’ 즉, 이방종교의 전문적 점성술사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이었다 (마 2:1-12).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는 이스라엘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믿음’을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에게서 발견하고 그의 놀라운 믿음에 감탄하신다(마 8:10). 또한 예수는 동일한 놀라운 믿음을 이방여인(수로보니게 족속의 헬라여인)에게서 발견하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다 (막 7:24-30).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유대교의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그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백안시하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는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눅 10:29-37). 무엇보다도 그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였을 때 그의 신성(神性)을 알아보고 이를 고백한 인물은 로마의 백부장이었다(막 15:39).

   이같은 일련의 복음서 기록들은 사도행전을 거쳐 바울의 서신에도 지속적으로 연결된다. 사도행전에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당시 ‘기둥처럼’ 여겨졌던 사도적 공동체의 지도자 베드로에 대한 일화와 또한 사울로부터 바울로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유대교 지향적이며 이방인 배타적인 성향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베드로는 처음에는 이방인에 대하여 교제의 악수를 나누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청함을 받기 전에 베드로는 모세의 율법에서 먹기를 금하는 각종 짐승들을 환상중에 목도한 이후 “하나님께서 깨끗케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6)”는 음성을 듣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왔노라(행10:28)”고 고백한다. 사실 사도행전에는 원시 기독교 초기에 이방인의 문제를 둘러싸고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적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된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이방인에게도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 그같은 격론의 한가운데 언제나 바울이 있었다. 바울은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직후 그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는 극적인 부르심을 입게 된다. 그 이후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된다.    

    이상의 신약 성서의 멧시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한가지 원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열망하시는 신의 의지는 결코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민족, 그리고 특정한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위 ‘지역주의(Localism)'으로부터 ’보편주의(Universalism)'로 ‘배타주의(Exclusivism)'로부터 ‘포괄주의(Inclusivism)'로, 그리고 '민족주의(Nationalism)'로부터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으로의 전환을 지향하고 있다. 신약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이같은 ‘복음(Gospel)'을 증거하는 일에 전심을 쏟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처럼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려는 그러한 욕망(고전 9:19-23)에 불타있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바울은 자신의 처한 형편을 최대로 이용하였던 바, 그가 당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던 사실을 그의 선교에 최대한 사용하였고, 동시에 가말리엘 문화에서 배워 유대인의 율법에 능통한 사실을 통해 유대인들과 논쟁에서 늘 그러한 자신의 입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이방인었던 헬라인들을 위해 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소위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언급도 불사하고 있는 장면(행 17:16-31)은 이상의 신약적 원시 공동체가 이방인 (혹은 이교문화, 이교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 바울과 원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목적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타종교와의 대화나 그들을 이해하는 범위를 벗어나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이같이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결국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따라서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차별이 없고, 한 주께서 만민의 주가 되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롬 10:12)”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택의 의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바,  1) 구원에 관계되는 한 유대인이 먼저요, 그 다음이 이방인이다 (롬 3:2) 2) 유대인은 ‘야곱’의 후손이요 참 올리브나무이며 (롬 11:24) 선택된 자이다. 이방인은 ‘에서’의 후손이요 직적접으로 선택되지 않은 돌 올리브나무이다 (롬 11:17) 3) 참 올리브나무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므로 돌 올리브나무인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옮겨졌다.( 롬 11:7)  4) 따라서 참 올리브나무를 아끼지 않고 꺽어버리신 이가 돌 올리브나무도 그렇게 하실 수 있기에 구원에 접붙임을 받은 돌 올리브나무인 이방인들은  이같은 사실에 감격하고 겸손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롬11:21). 그런데 이같은 구원의 역사적 섭리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은 불공평한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닌가? 이같은 질문에 대한 바울은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으로 받는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지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19-20)” 라고 대답한다. 인간이 신의 선택에 대한 절대적 권한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임을 그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II.II 교회사적 전통과 문화신학


  상기한 피터 버거의 이론에 의하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지향하는 신흥종교들의 경우 ‘ 1) 전통적인 상징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상징들이 생겨나며, 2) 새로운 공동체들은 기존의 전통들에 저항하면서 자기 정체를 규정하며, 3) 성스러운 새로운 질서가 탄생되어 그 공동체에 의해서 모든 권력과 의미의 원천이 새롭게 자각되며, 4) 새로운 제의들이 생겨서 제의적인 예배 행위에서 이러한 성스러운 질서를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공동체에다 성스러운 질서를 기억하게 하며, 5)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보존하고 주위의 변화하는 환경에 그것을 적응시키기 위한 메카니즘이 확립되며, 6)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통합된 세계관이 출현하면서 그 안에 신학의 체계들과 성스러운 경전과 공동체에게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다른 모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교권적인 직책이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8) 이상의 제반 사회학적 분석의 틀을 초기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 대입해 볼 때 주로 유대교적, 구약적 전통과의 대립과 재 해석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을 상기의 1)- 4)의 과정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이제 새로운 질서의 확립을 통한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5)와 6)의 단계일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다시금 편의상 ‘세계-건설(World-Construction)'과 ’세계-유지(World-Sustaining)'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제반 과정을 정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즉, 새로운 종교 질서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세계-건설’의 과제가 원시 기독교 공동체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는 주요 임무라 한다면 ‘세계-유지’의 과제는 이제 초대 기독교가 교회적 공동체를 이룩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하는 교리(Dogmas), 직제(Ordnances), 제의 (Liturgy), 그리고 윤리적 실천 (Praxis)등의 제반 사항에 대한 도전과 이에 대한 공동체의 응전 형태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겠다.

   ‘세계-건설’의 과정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 부분은 원시 기독교가 구약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와의 관계 설정을 어떠한 원리를 가지고 이루어 나가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특히 원시 기독교는 구약 경전을 그들의 것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적쟎은 진통을 겪은 것으로 보여진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구약의 경전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모세 오경을 비롯, 역사서, 선지서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내용 중 특히 유대교의 핵심적 교의를 형성하는 부분과 아울러 예전( Liturgy)들을 원시 기독교가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이들을 문자 그대로 새로운 공동체에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경우 기독교는 또 다른 유대교의 한 분파에 그치고 말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의 경전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이에 대하여 과감히 거부할 것인가? 이 경우 소위 ‘구약적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주장되었던 예수의 출생과 공생애 그리고 그의 수난과 부활의 모든 기록들이 그 뿌리를 잃어 버리는 위기를 겪게 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9)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기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유행하던 성서해석의 방법, 즉 ‘알레고리해석 (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원칙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래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은 당시 희랍 문화의 센터로 새롭게 부상하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그들의 구약 경전을 희랍적 세계관에 익숙한 동시대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개발해 내었던 해석의 한 방편이었다. 이를 통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옮긴 ‘70인역 성서’와 더불어 유대교의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는데 이 때 활동했던 학자로는 ‘필로(Philo)'같은 이들이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필로가 중심이되어 개발했던 ’알레고리즘‘을 통해 구약 경전을 자신들의 유산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원시 기독교 초기부터 형이상학적, 추상적, 영지(靈知)적 희랍의 사유방식을 도입하는 일에 있어서 문화적 충돌이 불가피 하였던 바, 교회사가 하르낙 등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그 초기부터 심각하게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10)   

  ‘세계-건설’의 과정에서도 역시 그같은 현상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를 표방한 원시기독교공동체는 이제 그의 구호에 걸맞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문화와 타종교, 그리고 타전통과의 충돌을 경험하게 되는 바,  이같은 현상은 처음 1세기가 넘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사도들을 잇는 속사도 교부 시대의 저술들 속에서 이같은 원시 기독교 멧시지의 타문화에 대한 '적응(Adaptation)'노력들이 드러난다. A.D 90년 경의 로마의 클레멘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호머의 글에 등장하는 ’불사조‘에 대한 설화를 사용하고 있다.11) 이같은 적응의 노력은 곧 이어 등장하는 소위 ’변증신학자(Apologists)'들에게는 더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변증신학자들은 그들 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향한 외부의 혐오적 의도들에 대하여 다분  히 수동적으로 대처했던 것에 비해12)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비호하고 또한 외부 세계와의 대화를 위해 그들의 언어와 사상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가 자신을 비호해야 했던 외부의 위협에는 크게 2가지가 있었다. ‘먼저는 기독교의 멧시지가 로마제국의 체제 유지를 위협한다고 하는 일종의 정치적 고발이었고, 또 다른 한가지는 주로 철학적 고발이었던 바, 기독교는 죽은자의 부활을 믿고 또한 신의 성육등을 믿는 다분히 미신적인 종교라는 점이었다.’13) 이같은 공격에 대한 ‘변증론자’들의 대응은 크게 2가지 방향이었다. ‘첫째는 먼저 자신들을 비방하는 이들에게 의미있는 응답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어떠한 사상적인 공통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같은 공통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어떠한 대화도 불가능하게 되며 당시 이방인들에게 의미있는 진술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다음으로는 이교 사상안에 있는 약점을 지적해 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교 사상에 있는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에 대한 비판을 모색하는 일을 통해 기독교의 수월성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모색하는 해법이었다.’14) ‘변증론자’들 중 순교자 져스틴은 당시 로마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던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논점은 기독교인은 로마인들이 고발하는 것 처럼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신에 대하여 참 예배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그의 서열은 하나님 다음이고 또한 성령은 세 번째 서열을 갖는 그러한 구조로 기독교 기본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15) 특히 져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첫아들이시기는 하지만 그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말씀(이성, 로고스)이라는 사실은 그 이전에 이성(로고스)에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종종 무신론자들로 분류된다 할지라도-기독교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그리고 아브라함, 엘리야 등은 비록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일지라도 로고스의 원리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16)

  이같은 변증론자들의 신학적 인식은 기독교가 지중해 세계의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철학적, 문화적 내용들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발전하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교회사적 전통에 있어서 처음 2-3세기의 기독교는 마치 토양을 뚫고 새롭게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어린 싹을 외부의 모진 비바람과 해충들이 그 자라남을 방해하는 위협을 가하는 것과 같은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외부의 비바람이 기독교 세계를 향한 외적 박해와 공격이라면 해충으로 인한 어려움은 아마도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 멧시지에 대한 다양한 왜곡과 변질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는 영지주의(Gnosticism), 가현설주의, 성부수난설, 사모사타의 바울, 마르시온주의등과 같은 다양한 비정통주의자들의 도전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그 중 영지주의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 폭넓게 퍼져있었던 일종의 혼합 종교적 양상을 띄고 있는 분파였는데, 이들은 주로 전통적인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도전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산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17) 영지주의는 나름대로 정교한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신흥종교였던 바, 특히 인간의 육체는 저급하고 영혼은 고귀하기에 인간의 육체를 지은 성경의 창세기의 신은 필경 악신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강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악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일 뿐 (Doceo), 실제로는 순수한 영의 존재였다고 주장한다. 지구는 가견적 물질로 구성된 열등신의 산물인데 인간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영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존재의 차원을 넘어 순수한 영들의 세계(에온)로 상승 비행하는 한에 있어서 그 자유와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순수한 영들의 세계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 (영지)는 영으로 오신 예수의 계시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바, 예수를 육체로만 믿는 이들은 아직도 저급한 그리스도인들이며 이같은 비밀스러운 영지를 통해서 예수를 옳게 발견하는 이들이 영적 그리스도인 (Gnostic Christian)들이라고 가르쳤다. 

   이상의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그 내용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믿고 고백되어져 왔던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심각한 교리적 도전으로 사료되었다. 이같은 영지주의의 경향성에 대하여 교회사가 하르낙은 ‘기독교의 예리한 헬라화 (an acut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라고 정의하고 있다.18) 이같은 지적은 당시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면서 기독교의 전통적 멧시지를 변형, 왜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같은 기독교의 세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전통과 새로운 해석과의 마찰은 초대 교회에서 소위 ’정통(Orthodox)'의 개념 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교부들을 배출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라틴 교부로 알려진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등이 바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앙의 규범(Regula Fidei)'등의 형식을 빌어 전통적으로 사도들(Apostles)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기독교 가르침을 확립하고 또한 교회의 직제, 즉 군주적 감독제 (Monarchical Episcopacy)등의 체제를 돈독히 함으로써 기독교 멧시지의 왜곡과 변형현상에 대하여 대처하고 있다.19)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멧시지의 정통성을 가늠하는 잣대는 무엇보다도 ’사도적 권위‘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권위는 이단을 대처하는 도구로써 사용했던 각종 방안들, 즉 신약성경의 정경화, 신앙의 규범(Regula Fidei), 신조(Creeds)의 확립, 그리고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등과 관련된 핵심적 내용이었다.20)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란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가의 공인을 받는 종교로 부상되면서 기독교는 또 한번의 전환의 기회를 맞게 된다. 기독교는 탄생부터 줄곧 외부세계로부터 일정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부터 당당히 로마제국의 핵심적 종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당시 제국의 지배 이념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종교적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로인해 기독교회는 여러 가지 내.외적 전환을 맞고 있다. 기독교가 ‘제도적 종교 (Institutional Religion)'로 자리잡게 되면서 그동안의 ’소수(Minority)종파'의 특성을 벗어나 보다 광범한 제국의 통일이념을 제공하는 일정한 ‘세속화(Secularization)'의 과정을 겪게되는 것이다. 특히 교리의 통일, 기독교 건축과 예술의 확장, 예전의 발전 등을 위한 발전적 전기를 맞이한다. 특히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당시 교회가 이후 기독교 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삼위일체’ ‘기독론’ ‘신학적 인간론’등을 정립하게 된 것은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또 다시 기독교는 당시 주변 세계와의 폭넓은 교감을 시도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당시의 용어들 ‘후포스타시스’ ‘페리코레시스’ ‘프로소폰’같은 용어들은 한결같이 당시 로마와 그 주변 철학 세계의 문화적, 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들이었다. 이를테면 3위일체의 ‘위격(位格)’을 정의할 때 사용되었던 ‘후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폴리비우스(Polybius, 210-120 B.C‘ 때 부터인데 그는 처음에 철학에서 사용하는 뜻 ’...나타나는 것 뒤에 숨어있는 실재 (Reality)'로서 사용하다가 점차로 ‘계획(Plan)' '목적(Purpose)' ’관심(concern)' 혹은 ‘기획(Enterprise)'의 의미를 더 첨가하여 사용하고 있다."21) 이같이 후대에 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확립함에 있어서 당시 로마세계와 그 주변 세계의 세계관과 문화관, 그리고 언어철학이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영향들은 나름대로 기독교의 세계화에 기여했고 또한 주변세계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름하여 ’토착화‘의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II.III 최근 주요 신학자들의 문화신학


   과거 기독교의 주요 교리 형성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적응’과 ‘변용’의 과정을 겪으면서 역사 속에 자리잡았던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이제 근. 현대에 들어와서 제 신학자들의 신학함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Subject Matter)'와 ’소재'로서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 주요 신학자들은 ‘복음과 상황’ ‘텍스트와 콘텍스트’ ‘문화속의 그리스도’에 관한 주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한 평가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연구는 향후 ‘토착화 신학’의 방향을 가늠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전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같은 논의를 위하여 오늘의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주요 신학자들 중 몇몇의 선정하여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제 개념들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한다.


II.III.1 바르트와 계시신학(Theology of Revelation)            

    

  오늘의 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신학적 작업을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선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 계시되고 있는 신적 특성은 본질상 인간에게 드러날 수 없는 ‘은폐성(Deus Absconditus)’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화 될 수 있는 속성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신 분으로서 창조-화해-구원의 행위와 활동에 함께 하신다. 이같은 신적 행위와 활동의 구체적 현현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이 하나님은 자신을 통해서만 자기를 계시하신다. 계시는 이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며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 관계인 동시에 하나님 단독의 주권적 행위이기에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이 계시 가운데에도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즉 계시로서의 하나님(Deus Revelatus)는 동시에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적 진술들은 그들의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에게ㅔ 말하여진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는 그의 대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말씀의 모든 재생은 비록 가장 높고 가장 잘 생각되었고 진술된 것이라 할지라도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은 대상들에 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다.”22) 이같은 ‘은폐성’은 그의 본질이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유비(Analogia Entis)’가 있을 수 없고 다만 ‘신앙유비(Analogia Fidei)'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같은 신앙유비는 자신을 인간으로부터 오직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존속하고자하는 신적 의지로부터 연유한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인간에 대하여 타자이고 인간 자신으로부터 구분된 자이며 인간 자신을 만드시는 자이기에 그 자신이 자기를 대상으로 만드실 대만 우리에게 대상이 되는 존재,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신앙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타자로서‘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은 자신이 스스로 계시하시는 계시의 영역 안에서 배타적으로 인간이 그 인식에 참여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종교가 종교임을 의식하게되는 순간, 세상에서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있음직한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되는 순간, 그것은 그 내적 본성으로부터, 그 진리로부터 우상에로 전락되어버리는 것이다. 종교의 진리성은 그 타계성(他界性)이요, 신성스럽다는 관념의 거부요, 그 비역사성(非歷史性 )이다.”23)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활동은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그 어떠한 경험이나 이성의 영역의 연장 속에서 사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경험과 역사적 사유 그리고 심리적 투영으로서의 종교형태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근거도 가지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신학의 ’학문성‘은 이성의 보편적인 길을 통해서 근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시를 통하여서만이 근거된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관계한다.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수용, 즉 그것에 대한 앎과 긍정이 아니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닐 것이다.”24)       이상의 칼 바르트의 신학은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시작되는 소위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김균진의 지적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 하나님의 존재와 유한한 세계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지혜, 계시와 역사,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유한과 무한의 모든 종합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기독교와 신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25) 주지하는 바와같이 19세기의 신학은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신학적‘ 명제를 극복하고 인간 중심, 인간 경험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헤겔의 절대이성에 근거한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속화(Secularization)26)가 나타나는가 하면, 쉴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이란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도식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경험의 차원에서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신학‘을 지양하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은 ’유한이 무한의 포촉한다 (Finitum Capax Infinitum)‘는 전제 하에 계시적 영역을 인간의 경험의 영역과 화해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이같은 신학의 무대에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 통해 ’아니오(Nein!)'을 선언함으로써 그 어떠한 존재의 유비로서의 하나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유일회적인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에서 온전히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던 바, 그로부터 모든 소위 ‘기독교성’이 검증받아야 하며 또한 그로인해 모든 규범적 사유의 잣대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934년에 선포된 바르멘 선언의 제 1절은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듣고, 살든지 죽든지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교회가 그의 선포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사건들이나 힘들을, 형태들이나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한다는 거짓된 이론을 우리는 배격해야 한다.”27)   

  이상의 바르트의 신학에서 우리는 어떠한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과 암시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성경에서 계시된 말씀외의 그 어떠한 다른 형태로서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안셈의 명제에서 따온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erens Intellectum)’의 ‘이성’은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이해 (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복음의 계시 이전의 어떠한 ‘익명의(Anonymous 그리스도인’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은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 신학의 세속화를 막는 일에 어느정도 공헌한 바 있으나 판넨베르그, 몰트만 등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가지는 극단적 사유로 인해 종종 그 역사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전망을 결여하고 있다고 사료된다.28)  아무튼 바르트에게 있어서 소위 ‘토착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의 본질’을 보존하는 한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II.III.2 틸리히 (Paul Tillich)의 문화신학


  폴 틸리히는 여러 면에서 상기한 칼 바르트와 대조를 이루는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신학은 일종의 변증신학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에 일차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보통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하여 폴 틸리히는 ‘존재’ 혹 ‘존재 자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를 즐겨한다.29) 존재 자체 혹은 존재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자신 외의 다른 모든 존재자와 하등의 점진적인 차이가 없는 오직 무한한 비약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면 모든 유한자는 존재 자체와 그의 무한성에 어느 형태로든지 참여한다. 이같은 전제는 일종의 모순율을 형성하는 바, 일면에 있어서 ‘신과 유한한 존재자는 단절된 상태’이며 또한 다른 일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 곧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의 힘에 유한자가 참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유한한 존재자는 참여와 상호관계의 상태, 즉 양자는 존재론적 관계를30)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이같은 ‘상호관계’를 이루는 관계성에는 크게 세가지 영역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종교적 상징과 이 상징에 의하여 상징되어지는 것 사이의 상호관계, 즉 ‘종교적 인식’의 문제가 그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영역과 관계된 개념들과 신의 영역과 관계된 개념들 사이의 관계, 즉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진술’이 그것이며, 셋째는 인간의 종교적으로 사로잡힌 존재와 그를 사로잡는 것, 즉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것이다. 결국 ‘신-인’ 사이의 관계는 상호관계로서 양자 사이에는 상호 의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폴 틸리히에게 있어서 주목할 만한 신학적 사유는 상기한 무한과 유한이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무한히 초월하는 유한’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31) 이처럼 그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존재 자체,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이로인해 존재자체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경외심, 곧 성(聖)을 이루는 핵심이다. “거룩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 관심을 갖게 하는 어떤 질(quality)이다. 거룩한 것 만이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을 줄 수 있고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을 줄 수 있는 것 만이 거룩의 질(質)이 된다.”32) 그러나 이 거룩함을 이룩하는 궁극과 실재로 존재하는 존재자 사이에는 상호 의존 관계가 성립된다. 이같은 ‘상호의존관계’는 결국 ‘거룩한 것(聖)과 부정한 것(俗)’ 사이에 엄격한 구별을 시도하지 않는다. 유한한 현실의 한 부분은 무한한 것에 대한 진술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다.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는 존재유비 (Analogia Entis)가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 

  폴 틸리히의 하나님은 또한 역사의 과정 속에 내재해 계시는 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가 계속하여 분리되고 또 양자가 재 결합됨으로써 이 분리가 극복되는 영원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은 인격이라 부를 때  그것은 하나님이 유한한 인격들에 대하여 유한한 인격이란 뜻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무한히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자가 그의 존재로부터 분리되고 또한 분리된 존재와 결합하는 과정, 곧 역사의 과정을 뜻한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이렇듯 역사에 내재하신다. 이러한 역사 내재의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나타난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의 관계는 주객도식을 극복되어야 하며 주체와 객체는 결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폴 틸리히의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폴틸리히는 또한 실존적 인간들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 유한한 존재는 실존하면서 동시에 본질에 참여하고 있다. 이로부터 갈등이 존재한다. 이 갈등 속에서 인간은 ‘비존재의 위협’을 받는 데 이 위협은 바로 불안으로 나타난다. 존재자의 유한성은 다음의 3쌍의 요소로 된 존재론적인 기본 구조를 이룬다.33) 먼저 개체화와 참여에 대한 구조가 그것이다. 존재자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의 개체를 이루고자하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또한 참여 없이 어떤 개체도 실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참여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같은 양극성은 늘 균형상실의 위험에 직면하여 갈등을 유발한다. 다음으로는 역동성과 형식의 구조이다. 역동성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새로운 형식들을 창조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이다. 반면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형식을 자기 초월의 기초로서 유지하고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또한 불안이 경험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존재자는 세계에 대하여 존재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운명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에 속한다 이점에서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반면 존재자의 운명은 그의 자유의 기초이며 또한 그의 운명은 그의 형성에 참여하기도 한다. 폴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상기의 존재론적 양극성이 파괴되지 아니하고 평형을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비존재로 추락되는 위협을 극복하고 계속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힘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폴틸리히가 궁극과 궁극 이전의 것과의 합일을 기본적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존재유비가 가능하다. 바르트의 ‘위로부터의 계시’는 틸리히에게 있어서 ‘계시실증주의’에 다름 아니다. 틸리히에게서는 먼저 전제되고 그에따라 인간이 순종과 예배와 헌신을 드리고 또 축복과 행복을 얻어내는 하향적 방향으로서의 신 내지는 계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실존의 세계 속에 이미 하나님의 궁극성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 관심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은 대상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사건 내지 실존적 관심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틸리히의 멧시지는 소위 ‘문화신학’의 지평을 한껏 열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는 본문(Text)와 상황(Context)의 이원론적 구분을 넘어서 상황(Context)속에 이미 본문(Text)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을 지향하고 있기에 개별성, 개체성, 특수성, 실존성은 그의 신학에서 결코 2차적인 관심의 영역이 아닌,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가 1951년 가을 버지니아 대학의 ‘제임스 리차드 강좌’에서 언급했던 논증, 즉 “ 파스칼에 대하여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고 또한 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부정입니다.”34)라는 선언은 존재유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틸리히의 사유의 경향을 잘 드러내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토착화’라는 언어도 새삼스러운 명제가 아니다. 문화의 특수성을 구성하고 있는 특수한 실존의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신학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별적 상황이 전제하지 않는 보편성은 그 내용을 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틸리히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의 틸리히의 신학방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 기독교 변증신학으로서 다소 성공적일지 몰라도 너무나 헬라철학화한 존재론(Ontology)에 기울어 치중하므로 성서의 인격주의적 신관과 신앙고백 및 교의 신조와는 항상 날카롭게 대립되고,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틸리히 신학은 기독교신학이라기 보다 종교 철학이요 범신론적 색조를 띤 이단적 기독교사상이다”35)는 비판을 받아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틸리히의 신학은 “철학과 신학, 문화와 종교, 동양종교와 기독교 신앙, 사회주의 이념과 예언자 사상, 심층심리학과 신학적 인간학 사이의 경계선상에 서서 기독교 진리를 이 시대에 해명하려고 노력한”36) 20세기의 ‘변증신학자’요 ‘문화신학자’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II.III.3 ‘신없이 신 앞에서’ - 본훼퍼의 ‘세속화(世俗化)신학


  본훼퍼(D. Bonhoeffer)는 비록 짧은(39세) 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과 신학은 전후 현대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본훼퍼의 삶은 크게 나누어 다음의 3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1906-1931년 까지의 신학 형성시대,  1932-39년의 신학 응용시대, 1940-45년까지의 신학적 단편시대가 그것이다.37) 그런데, 본 고(考)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의 ‘세속화’ 신학에 대한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는 마지막, 그의 생애의 후반기 이다. 그러나 그의 후기에 나타난 신학 사상들은 그의 생애 초기에서부터 생겨나는 일련의 신학적 물음과 답변의 연장선 속에 옳게 파악될 수 있다고 사료되기에38) 그의 초기 신학적 관심부터 언급해 보기로 한다. 종교 사회학자 마틴 마티 (Martin Marty)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이루어진  19세기의 연속체가 붕괴된 이후 여러해 동안 크리스챤 사상가들은 먼저 성서를 재발견하고 다음에 교회를 재발견하고 다음에 신도를 재발견했다고 종종 말을 하는데 만일 칼 바르트의 ‘로마서’ 출판이 이 과정의 첫 단계를 상징한다면 디이트리히 본훼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둘째 단계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9)라고 지적한다. 이같은 지적에서 보이듯이 본훼퍼는 그의 신학적 관심을 교회와 그것의 사회적 기능을 논하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어떠한 사회-철학적 단면이 접근할 수 없는 계시 사건이 내재해있음이 사실이다. 즉 교회의 개념은 신의 영역, 즉 계시에서만 파악되어지고 사회학자나 역사학자가 일반적인 관찰에 의해서 그 본질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교회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사회철학적 관심 속에서 함께 파악되어야 하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40) 이처럼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현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인 교회는 역사적, 사회적 단면을 내포하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계시는 초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형태를 가진 이 세계 안에 있는 실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훼퍼는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어떠한 초월의 개념이나 형이상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계시가 역사적인 형태로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교회와 그리고 역사 가운데에서 무한히 변화하는 교회학상의 정황사이의 관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의 심리학적인 요구 이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가 하나의 사회제도로서 경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41)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상의 초기 본훼퍼의 관심은 1933년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발표하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실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질문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의 역할에 대한 성숙한 기독교의 입장을 표방하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윤리학’으로 계속 연결되고 있다. 본훼퍼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의 윤리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42) 그에게 있어서 ‘현실’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현실이나 세상의 현실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현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다.43) 즉, 이 현실은 인간학적-실존적 신학의 ‘상황’이나 혹은 상황윤리의 상황이 아닌 모든 존재하는 것의밖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긍국적 실재로서 하나님의 현실을 말한다.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이 신적, 세상적 현실의 실현을 탐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세계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훼퍼는 전통적으로 루터 이래로 개신교 신학의 골간을 이루어 왔던 소위 ‘두왕국 (Two Kingdom)' 사상, 즉 ’현실‘을 이해함에 있어서 영적 왕국과 세속 왕국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영역을 설정하는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직 하나의 현실‘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세계의 모든 현실이 그리스도의 현실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이 독자적인 영역으로서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게 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가 받아들여 졌다는 사실과 계시의 현실성 가운데 세계의 현실성의 근거가 있다는 사실, 따라서 이 세계의 전체에 대하여 힘을 가지는 복음은 부정된다. 세계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화해된 영역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요구에 전적으로 종속되거나 자기 자신의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법에 대항하는 영역”44)이라고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소위 그의 ‘세속화신학’에 대한 명제도 이같은 ‘하나의 현실에로의 참여’라는 맥락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식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속의 영역에서는 무관한 것이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적 영역에만 관계되는 것이라면 이같은 이분법적 사유는 세속의 영역에 대한 합법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셈이 된다. 이같은 자율성은 이를테면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의 정치적 종교에 대하여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것을 저항하는 근거를 찾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을 줄 수 도 있다. 기독인은 적극적으로 이 세상의 ‘악마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손안에 그 세력을 돌려야 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는 그리스도와 악마에 의하여 분할 점유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든지 말든지 전체로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세상은 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현실을 불러 일으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자신이 악마에 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위의 현실을 파괴한다. 악하고 어두운 세계는 악마의 손에 넘겨져서는 안되고 바로 육신을 취하고 죽고, 부활함으로써 세상을 획득한 분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45) 본훼퍼가 그의 후기 저술 ‘옥중서간’에서 기독인을 가르켜 어떠한 성자도 종교적인 인간도 아닌 오직 단순한 ‘한 인간(Simply a Man)’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이같은 ‘하나의 현실’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적 경건의 특징인 ‘수도원 울타리 안’의 경건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이제 ‘세상 속에서’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는 단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때 기독인의 신앙행태는 어쩌면 다소 과격한 세상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본훼퍼에게 있어서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철학자의 하나님과 신학자의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라고 선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철학자의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려했던 틸리히와는 달리 그것에 대한 ‘비현실성’을 직시하려했던 본훼퍼의 시각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으면서도 그 인식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같은 본훼퍼의 ‘세속화신학’은 현대신학의 큰 흐름, 독일계통에는 ‘후기불트만주의 (Post-Bultmanian)’라고 불리우는 에벨링(Gerhardt Ebelling)과 푹스(Fuchs) 등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영미 신학에는 하비 콕스(Harvey Cox), 윌리엄 헤밀톤(William Hamilton), 반 뷰렌(Van Buren)등의 일련의 ‘세속화’ 신학적 흐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II.III.4 ‘제3 세계’ 및 서구의 토착화 신학


    실제로 본훼퍼의 신학이 새롭게 제기하는 ‘세속화’의 명제는 마르틴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신학이 지향하는 일련의 흐름속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교회중심의 특정한 직업, 즉 사제(司祭)만이 신적 부름의 성직(聖職)이라는 중세적 전통의 인식을 넘어서 ‘만인 대제사장’을 역설하면서 세속속의 일반적 직업 속에서도 신적 소명(vocatio)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로인해 파생되는 직업관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는 막스 베버의 가설로 이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훼퍼와 동시대인이면서 비슷한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은 루터가 주장하고 있는 세속화에 대한 명제는 보통 ‘세속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본래의 기독교 사상이나 통찰력, 그리고 경험을 인간 이성 자체의 것들로 바꾸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닌 ‘기독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기 위해 세상에서 성숙된 인간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로 남아있기 위한 이성의 한계를 느끼는 한에서 부과되는 자존에 대한 이해’라고 정의하고 있다.46)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막스 베버가 이야기 했던 ‘실제로 루터가 꿈 꾼 것은 단순히 수도원 담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세속을 수도원적 이상으로 바꾸려 했다’는 명제를 이해하게 된다.

   본훼퍼의 세속화신학은 하비콕스에게 이어지면서 기독인의 세상에 대한 책임이라는 국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것을 뱀에게 넘기지 않기 위하여 (On not leaving it to the Snake)라고 명명한 그의 저서에서 콕스는 ’인간의 원죄의 모습은 고대의 어거스틴을 거쳐 현대의 폴틸리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지적한 교만(Pride)으로부터 기인한다기보다 게으름, 혹 태만(Slothness)에서부터 유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7) 콕스는 ’교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도가 인간 이상의 것이 되려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타락 이전에 분명 이러한 상태의 모습이 인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태만은 인간이 그가 의도하려는 것을 유보한 채 그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 뱀의 꼬임을 받은 선악과 앞에서 아담과 이브가 보여 주었던 행동 양식‘이었다고 주장한다.48) 따라서 콕스는 기독인의 삶에 있어서 ’세상‘은 포기하거나, 무관심해야할 영역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의 장(場)이어야 하며 또한 동시에 ’사탄‘의 영역으로 포기될 영역이 아닌 적극적인 신적 임재의 현장, 더 나아가 기독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화(聖化)를 이루어 나가는 실천적 현장이 되고 있다. 이같은 도식은 전통적으로 ’상황(Context)'에 대한 ‘본문(Text)'의 우선성, 또한 귀납적 체험에 대한 선험적 깨달음의 수월성등에 익숙해 있는 전통 기독교적 패러다임에 극적인 전환(Shift)를 가져다 주는 바, ’상황‘과 ’본문‘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상황‘이 ’본문‘ 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배태하였다. 소위 ’제 3세계 신학‘의 자기 정체성 찾기, 상황과 맥락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신학등은 이같은 ’세속화신학‘의 일련의 흐름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남미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주로 이베리아반도의 국가들에 의해 침탈당한 그들의 전통적 문화와 언어 그리고 종교들의 회복이라는 보다 단순한 구도에서 이루어지는 반면49) 아시아의 지역적 정체성의 확립을 목표로 시작되었던 아시아신학은 그 지역의 광범위함과 종교, 문화의 다양성, 뿌리깊은 가난의 문제 등으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East Asian Council of Churches)가 1959년에 아시아지역의 특수상황 속에서 신학적 작업을 이루기를 노력하자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이래 1973년의 아시아 교회협의회 (Church Council of Asia)로 확대 발전되면서 주로 아시아 지역의 전통 종교와의 대화, 빈곤문제등에 대하여 기독교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1964년 EACC 대회가 태국의 방콕에서 열렸을 때 아시아 기독 학자들은 기독교와 아시아의 전통 종교와의 만남 (Christian Encounter with People of Other Religion) 문제를 논의하면서 “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와 비 기독교 교리 사이의 만남 보다 각각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더욱 중요하다”는 ‘교리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대화적 패러다임을 개척하기를 천명하고 있다.50) ‘기독인들의 관심은 사람들로 기독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조우하도록 돕는데 있다’는 구호는 ‘종교-교리’ 중심의 서구적 사유방식으로부터 ‘사람-만남’ 중심으로의 동양적 통찰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활동했던 주요 아시아 신학자 중 나일스 (D. T. Niles)는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서구식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직접 수입함으로 인해 수 많은 혼란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하였으며 데바난단 (Paul Devanandan)은 ‘아시아의 교회들은 서구의 교권주의적 질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묘사하는 힌두교와 불교의 표현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아시아적 표현 양식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51)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의 ‘아시아적 신학’의 태동 움직임은 70년대에 들어와 소위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과제로 발전되고 있다. 60년대의 토착화의 주제가 주로 서구 중심신학에 대한 아시아적 적응, 적용, 문화(文化)화 등의 모토를 제 1차적 과제로 삼고 있었다면 70년대 들어와 아시아 신학은 세속화, 기계화 그리고 인권등의 제 3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응전을 그 주요 과제로 삼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52)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로 70년대 후반,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다시금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주요 의제로 삼는 ’종교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바, 기존의 기독교 신학이 '기독론중심(Christocentric model)으로부터 ‘신중심적 모델(theocentric model)'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창하는 일련의 학자들, 힉 (J. Hick), 니터 (P. Knitter), 파니카 (R. Panikkar), 스미스 (W. C. Smith), 그리고 사마르타 (S. Samartha)등의 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배타주의를 넘어서서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죤 힉(J. Hick)은 칸트의 인식론의 근본 전제라 할 수 있는 ‘물자체 (Ding an sich)'와 ’표상(die vorstellung), 또는 ‘본질(the noumena)'과 ’현상(the phenomena)'의 이분법을 자신의 신 이해에 적용시키면서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은 공통적으로 ‘그 또는 그녀나 그것 자체내의) 실재자체 (the Real an sich)와 인간에 의해 경험되고 사고되는 실재 사이의 구별’을 시도한다고 주장한다.53)예를 들어서 기독교는 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자존적 존재와 창조자로서 인간과 관련된 존재를 구분하며, 힌두교는 궁극자 자체인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과 인격적 신성인 ‘이스바라(Isvara)'로 알려진 궁극자 ’사구나 브라만 (saguna Brahman)'을 구별하고, 대승불교는 영원한 우주적 불성 (佛性)인 ‘법신 (dharmakaya)'과 천상적 불타로서 ’보신 (sambhogakaya) 및 지상적 불타로 현현된 ‘화신 (nirmanakaya)'을 구별한다. 그러나 힉에 의하면 이같은 종교 체험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실재는 ’하나의 신적 본질(the one diveine nomenon)'일 뿐이다.54)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예수 경험’은 그것을 넘어서는 ‘신적 본질’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상이며 이같은 표상은 불교도에게 있어서 그들이 ‘화신’의 경험을 통해 우주적 불성과 연결되는 이치와 같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니터 (Paul F. Knitter)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No other Name?)'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다양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에 대한 응답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다원성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먼저 일반사와 교회사 속에서 시도해왔던 여러 유형들을 구별하여 정리하고 있다. 먼저 일반 역사 속에서의 태도를 트뤨치(Ernst Troeltsch)의 ’모든 종교는 서로 상대적이다(All are Relative)‘라는 상대주의적 원리, 그리고 토인비(Toynbee)의 ’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All are Essentially the Same)'라는 동일주의 원리, 그리고 융(Carl Jung)의 '종교는 공통의 심리적 기원을 함께 소유한다 ( Common Psychic Origin)'는 동일 심리기원의 원리등으로 분리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존재한다’는 보수적- 복음주의적 모델,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구원이 있다’는 정통 개신교적 모델, ‘많은 길이 있지만 오직 하나의 참된 규범이 있다’는 로마 카톨릭적 모델, 그리고 ‘중심을 향하는 많은 길’을 주장하는 ‘신중심적 모델’로 구분하면서 최근 기독교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교회적 신앙이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의 성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적으로, 우주적으로, 그리고 익명으로 다른 모든 종교에 함께 내재해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55)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자신의 출생, 즉 카톨릭 기독교 신앙과 힌두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양친 사이에서 태어난 배경을 업고 소위 ‘지평융합’적 종교적 대화를 주창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종교간의 대화들이 자신의 입장들을 고수한 채 소위 타 종교에 대한 ‘탐색’ 내지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상을 지적하면서 종교간의 대화는 각 종교의 특별한, 그리고 일반적인 교리적 주장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채 단단한 벽을 가지고 있는 방식의 대화를 넘어 상대방의 종교로 서로 ‘개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직면하면서 이를 통한 종교적 성숙을 모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종교간의 대화는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서로의 진지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서로의 인간적, 영적 성숙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56) 그는 ‘신앙(Faith)'과 ’믿음(Beliefs)'의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 신앙은 초월적 존재와 개인의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궁극경험으로써 이것은 단순하게 어떠한 특정한 언어로 묘사되기 어려운 개인의 특별한 종교 체험이다. 개인이 경험하는 궁극적 체험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시대별, 지역별 개인의 궁극체험은 언어로 묘사되어 일반화되는 과정을 겪는 바, 이것인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의 종교 전통이 어느 곳에 속해있는가에 따라 각각 그 성격이 규정된다. 기독교인이 ‘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 그는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에 매인 신(deus ex machina ad usum christianorum)을 믿는 것이 아닌 어느곳에나 존재하는 진리의 실체, 그리고 심지어 그의 경험의 틀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 어떤 실재를 믿는다”는 말이다57) 특정한 종교의 교리는 이같은 궁극적 경험에 대한 최소한의 언어적 표현양식이기에 이같은 양식을 통해 나타나는 소위 ‘믿음’체계는 개별 종교의 특성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 바, 이러한 초월적 궁극 존재는 모든 특별한 종교를 넘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지평융합’을 이룩할 수 있다.

  윌프레드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종교사(History of Religion)적 관점에서 그의 ‘세계신학’을 지향한다. 그는 신학의 미래가 모든 종교가 유사하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이 공동의 종교적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가설을 주장한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어왔으며 또한 영향을 주고 있고 또한 영향을 줄것인지에 대하여 주목한다. 인류의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인지하든 못하든, 또는 그것을 직시할 의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통일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슬람적 형태를 통해 수세기 동안 신은 이슬람 교도들의 삶에 함께 동참해 왔다. 또한 불교도들의 삶의 양식을 통해, 힌두교도들의 생활속에, 그리고 유대인들의 삶속에, 그리고 또한 기독교인들의 삶속에 또한 그렇게 동참해왔다. 그러한 신은 이제 또한 우리의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밖에는(Extra Ecclesiam)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기독교적 명제는 이제 더 이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샬롬(Shalom)'의 세계는 단지 유대적-기독교적(Judeo-Christian)' 틀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된다. 세계사속의 종교들은 이제 자신의 벽을 넘어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세계 신학’을 소유하여야 한다.58) 이같은 완성된 종교가 아닌  ‘되어져가는 종교(Religion in the Process)'에 대한 스미스의 사상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힘입은 바 있다. 화이트 헤드는 신의 양극적 본성 (Dipolarity)를 제시함으로써 고전적 유신론자들의 실체론적 한계를 극복하려하고 있다. 즉 신의 ’원초적 본성 (Primordial nature)'에 의하면 신은 그 어떤 다른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절대성을 갖지만, 신은 그의 ‘귀결적 본성(Consequent nature)'에 의해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하여 상대적인 현실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로인해 종래의 유신론의 ’단극적(Monopolar)' 견해가 낳는 신의 절대 타자성, 불변성, 자존성, 전능성, 무감정성을 넘어서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실제로 영향을 받는 신에 대한 이해를 소유하고 있다. 이같은 귀결적 본성으로서의 신의 현현이 각 시대와 각 지역에서 그들이 체험하는 고유한 형태의 신적, 종교적 형태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종교형태는 단극적인 것이 아닌 보다 넓은 원초적 본성의 신을 향하는 한에서 지금도 계속해서(In the Process) 제 3의 형태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III. 한국신학속의  토착화 신학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토착화 신학의 논의가 한국적 신학 풍토 속에서 독창적으로 발생한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 토착화 신학의 논의는 60년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의되는 주요한 신학적 주제임에 틀림 없지만 이같은 논의는 마땅히 세계 신학의 경향과 그 틀 속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하겠다. 한편, 이같은 신학의 연대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토착화 신학의 전개는 나름대로 독창적이며 특수한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야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 그리고 현대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들이 각 시대를 거쳐 한국인들의 심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또한 오늘날도 그같은 다원화 상황은 예외가 아니다. 신학이 일방적인 신이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계시에 대한 수동적 반응만이 존재하는 모노로그(Monologue)가 아닌 인간의 실존과 상황에 대한 역동성을 가지고 그러한 실존적 문제를 성서적-계시적 차원에서의 해답을 추구하는 일련 대화(Dialogue)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오늘의 신학 형성은 성서적 계시와 아울러 한국적 토양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통한 창의적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같은 신학의 특수성을 감안해 볼 때, 한국의 신학적 상황은 상기의 다원적 상황으로 인해 서구의 신학이 담을 수 없는 특정한 신학을 위한 풍토가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바, 한국의 토착화 신학의 전개는 그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주로 비기독교적 전통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전통과 또한 오늘의 이같은 다원종교 사회 속에서 기독교와 그 멧시지 그리고 그것이 수용되는 문화와의 관계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III.I 토착화 신학의 논의, 그 유형과 전개


   그간의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에 관한 주제는 50년대에 간간히 동양 사상과 기독교의 관계등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일련의 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착화에 대한 논의는 60년대에 들어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해방이후 서구 중심의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한국의 신학계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소위 신학에 있어서 주체적 인식과 수용을 모토로 내건 ‘토착화’신학은 이후 봇물처럼 한국 신학계를 휩쓸었다. 한창 토착화신학이 제기되었던 과거 30여년 동안 한국의 신학자치고 토착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같은 신학적 결과물들에 대하여 새롭게 정리, 수합, 분석,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하면서 그동안 이루어 졌던 이러한 신학에 대한 논의는 크게 나누어 다음의 5가지 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정대위-윤성범-한태동 등이 시도한 바 있는 비교종교학 내지는 문화인류학적 방법론, 2. 유동식-이장식 등이 시도한 바 있는 역사신학적, 선교론적 접근 방법,  3. 안병무-김용옥 등의 성서신학적 해석학적 국면으로부터의 시도, 그리고 4. 변선환-홍정수등의 종교신학적-다원주의적 대화론의 시도, 그리고  5. 이종성-전경연-한철하-박봉배 등의 문화 초월론적 변혁주의의 입장에서의 논의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의 제 시도들을 종교 전통을 포함하는 한국의 일반 문화와 기독교 복음의 상관성에 관한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살펴 본다면 1) 일반 문화의 비 기독교성을 지적하면서 이들이 복음의 빛 앞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배타적 변증론적 유형 2) 일반 문화를 포괄적으로 수용하되 이같은 수용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범주와 핵심 케리그마를 손상시키지 않는 면에서 문화를 해석, 포용해야 한다는 포괄적 성취론적 유형, 3) 타종교를 포함한 일반 문화를 더 이상 기독교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말고 병행론적, 대화추구를 통해 서로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적 대화론적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본 고에서는 이같은 유형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제시한 한국 토착화신학에 대한 5가지 유형의 면모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논의를 풀어 가기로 한다.


 III.I.1  비교종교학적- 문화인류학적 유형


   먼저, 토착화의 방법론을 한국의 문화, 종교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기독교의 복음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제 시도들을 본 유형속에서 만날 수 있다. 즉, 첫 번째 유형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주로 비교 종교학 내지는 문화인류학적 방법론 속에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은 논의의 전제는 ‘기독교의 핵심 멧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보편적 멧시지를 함유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전달, 수용되는 과정에서는 각기 민족과 국가, 종족의 문화적, 역사적 특성 속에서 그 보편적 멧시지가 수용, 발전 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즉 특수한 개별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총체적, 통전적 의미에서 한나라의 기독교 상황을 인식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이러한 입장은 윤성범에게서 그 형태를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토착화’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그러므로 토착화는 먼저는 소극적, 피동적인 것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릇 또는 ‘새 가죽부대’이며 복음의 씨를 받아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옥토에 비길만한 토양이며 신앙, 동시에 적극적, 능동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고유한-그렇다고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사고양식으로써 터 닦을 수 있는 학적인 공작이라고 볼 수 있다”59)고 한다. 이처럼 그는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릇’에 대한 이해- 감論, 2)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고유한 사고 방식으로써 터 닦을 수 있는 학적인 공작’- 솜씨論을 전개하고 있다. 즉, 개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제로서의 문화, 즉 그 토양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이 어떠한 계보의 존재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0) 기독교의 복음이 일종의 씨로서의 존재하면서 이것이 토양에 해당되는 한국의 문화적 양태속에 뿌려지는 것이기에 그 결과로서의 열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씨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선행하여 존재하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이것을 ‘감’ 혹은  ‘a priori'즉 문화로서의 선행성이라고 불렀으며 이같은 ’a priori'에만 복음은 담길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61)

   다음으로 그는 보다 과감한 한국적 신학을 창출하려는 시도를 ’솜씨論’에 모색하고 있다.여기에서 그는 ‘단군신화의 기독교적 해석’과 ‘誠의 신학’등으로 이에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를테면  ‘단군신화’는 그에게 있어서 단지 한국 사상의 범주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인 입장에서 단군신화를 검토해 봄으로써 그것의 본래적인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62) 그는 단군신화를 ‘진정한 종교로부터 유리된 설화의 잔존형태’라고 규정지으면서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즉 단군신화가 하나의 종교적 설화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잔존형식에 채울 수 있는 본질적이며 종교적 내용이 충당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63) 그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한국인의 ‘하나님’ 개념은 바로 기독교, 성서의 신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여 그는 단군신화의 형성을 기독교의 한 계파였던 네스토리안(景敎, 경교)와 연관시키면서 단군신화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핵심교리인  3위일체론의 잔해(Vestigium Trinitatis)라고 주장한다. 단군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환인, 환웅, 환검의 역할 관계는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의 3위 일체성을 통해 이해할 때 비로서 그 면모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그는 기독교와 단군 신화의 유사성을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남성적 3신의 등장, 웅녀의 인내심과 순종과 성서의 마리아의 순종의 파라다임적 일치,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동방기독교의 역할과 네스토리안들의 활동범위, ‘천부인(天符印)’과 기독교의 믿음, 사랑, 소망의 패러다임적 일치등을 꼽고 있다.64)

   이상에서의 윤성범의 사상의 골격을 정리해 보면 ‘1) 한국 신학이란 기독교 신학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기초 위에서 수립된다. 2) 한국 신학이란 복음과 문화의 상호 관계성에서 수립된다. 3) 한국 신학이란 토착화 과정을 거쳐 수립된다’ 로 요약할 수 있다.65)  이같은 그의 주장은 성서적 ‘계시’ 사건이 우리의 문화에 녹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계시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성서의 계시성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교종교학적, 문화인류학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III.I.2 역사신학적-선교론적 유형

    역사신학적, 선교론적 접근을 통해 본 한국 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신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며 동시에 ‘토착화’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사가 라토레트(Kenneth Scott Latorette)의 말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 사실상 순수한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문화 가운데 그 자체를 化體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화라면 무조건 죄악시하는 것은 왜곡된 창조신앙이며 이원론적 영지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보는 시각은 서구의 문화가 기독교에 공헌했다면 한국의 문화가 똑같이 한국의 기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나라와 백성의 문화생활 속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 민족의 모든 문화는 언제나 세속의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개진한다.

   먼저, 유동식은 토착화가 어떻게 선교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는지를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서 “토착화는 복음의 변질을 목적으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초월적인 진리가 어떻게 개별적인 현실 속에서 내재하여 그 생명력을 실현하느냐하는 방법론에 대한 명칭이다”66)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서 토착화의 작업은 마치 원저자의 저술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번역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原意의 본질적인 것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번역하려는 상대방의 언어 개념과 표현양식, 그리고 사고 방법등에 능통해야만 한다. 이같은 양면적 노력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번역작업으로서의 토착화는 ‘재래종교와의 손쉬운 혼합’ 이나 또는 ‘재래 문화와의 단순한 타협적인 혼돈’의 잘못에 빠질 수 있다.67) 이같은 혼돈의 위험성을 유동식은 상기한 윤성범의 신학적 경향에서 어느정도 감지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복음의 전래가 일방적으로 原意 에만 묶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토양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이, 마치 直譯만을 고집하는 나머지 그것을 읽을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무책임한 초보적 번역의 수준을 고집하는 잘못 또한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같이 그간의 ‘한국의 교회는 한국의 주체성을 망각한 채 ‘선교사적’ 서방의 것에 맹종하고 모방하는 역사를 꾸며왔다‘고 비판한다.68) 그는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그러한 발견을 토대로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가르치는 종교라는 전제 아래서 가장 주체적이어야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까지 주체성을 잃고 서양식의 기독교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철저한 반 기독교‘라고 주장한다.69)

   이를 위해 그는 3가지 토착화논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바, ’먼저 복음의 본질을 바로 구명하는 활동, 두 번째로 한국적 바탕의 파악, 세 번째로 이 한국의 터전에 어떻게 복음을 해석하고 뿌리를 내리도록함으로써 복음이 힘차게 자라나도록 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집약한다.70) 이같은 원칙에 근거하여 그는 소위 한국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배태된 ’풍류도‘와 ’그리스도교의 이념‘의 만남을 자신의 토착화신학의 주요 주제로 전개하고 있다. 그는 “오늘의 한국 문화 특히 우리 문화의 기초 이념은 서구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매개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만남에서 형성된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단순히 서구 그리스도교 사상의 연장이 아니라 한국 사상의 일부를 형성한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이라 하겠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그 진리가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 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시대적 상황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의 특수성을 띠게 된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풍류도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근세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양상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역사적 현실은 곧 풍류도와 그리스도교 이념과의 만남의 장이다.”71)라고 주장한다. 그가 파악하는 한국 문화의 정수로서의 풍류도는 원래 신선도의 사상을 나타내는 말인데 한국의 역사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본질적인 인간으로 돌아가도록 교화시키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곧 한국인의 심령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성이기도하다. 그는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분으로 믿어 왔다 (弘益人間). 요약하자면 ’풍류도의 본질은 하느님과 하나가되어 그의 뜻을 따라 뭇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데 있다. 이것이 한국인의 영성이요, 얼이다“72)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 현실은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그 맥을 공유할 수 있는 고유의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서구 문화가 그리스도교의 서구화에 있어서 나름대로 공헌했듯이 한국의 전통적 가치인 풍류도는 한국 기독교의 형성과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장식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역사는 토착화의 역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뿌리를 박아야 하였으며 역사를 무시하거나 초월할 수 없었으며, 또 역사란 것은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서는 있을 수 없었다’는 전제 아래 ‘토착화라는 것은 선교의 결과’라고 정리한다. 따라서 이같은 정의로서의 선교 혹은 전도는 ‘불변한 진리의 선포(Kerygma)’만이 아니고 또한 ‘친교(Koinonia)’와 ‘봉사(Diakonia)’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확대 연장 속에서 수평적, 상호 교류적 만남의 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은 역사의 틀(Form)인 동시에 또한 그것들은 역사의 제약도 된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독교의 선교(혹은 토착화운동)가 시대와 장소를 필요로한 동시에  또한 그것들의 제약도 받았다.”73)고 인식하고 있다.

   이처럼 이장식은 교회사적 통찰을 통해 소위 ‘토착화’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보통 기독교가 서양(구미)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서구적 형태의 문화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토착화가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서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의 기독교를 아시아에서 발전한 기독교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한다. 즉 시리아 정통교회나 혹은 폽틱교회는 그 지역의 동양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동서 교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교회의 공통된 신조, 즉 사도신조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서양 문화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상투적인 전제를 재고해야하는 당위성이 존재한다.74) 이장식은 한국에서의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가 늦어진 이유에 대하여  그것을 미국의 경건주의적 선교 정책에서 찾고 있다. 초기의 기독교 복음을 소개했던 많은 미국계통의 선교사들은 소위 ‘복음’이라는 명목아래 복음을 받을 이 땅의 문화와 관습과 제도의 재래의 좋은 유산을 평가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소유한 서구 문화를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자세를 갖는 배타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자연 그 결과 한국에서의 토착화 시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75)  이장식은 “한국교회가 토착교회의 구실을 바로 하게 되는 날에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의 생활과 문제들에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참여하며 과심하여 그 사회와 같이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어서 성서의 원리에 따라 이 민족의 진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것”76)이라고 희망한다. 그는 한국 교회가 한국 민족과 그 사회와 전역사의 현실과 운명을 같이 하는 한국 크리스천의 공동체임을 자각할 때, 한국 신학은 한국의 선교신학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III.I.3 성서신학적-해석학적 유형


   이들이 지향하는 입장은 한국 교회와 신학의 비서구화란 과제를 위하여 성서연구에로 관심을 돌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소재’로서의 성서는 같으나 어떤 관심에서 어떤 물음을 제기 하느냐에 따라 서구의 신학도 되고 한국의 신학도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자신들의 삶의 대답이 되기 위해서는 서구인의 물음이 아니라 한민족의 선자리, 즉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실존적인 성실한 물음 앞에 마주서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들은 성서의 멧시지가 분명 한 민족 (One nation)의 카테고리를 뛰어 넘는 범 역사성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민족의 해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각 민족과 국가의 역사와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즉 그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통해 성서를 읽고 또한 해석할 때 성서는 비로소 자신들에게 올바로 말하기 시작한다는 시각을 견지한다.77)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등이 바로 성서를 옳게 바라보는 해석학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부단히 본문(Text)과 상황(Context) 사이의 대화를 주장한다.

    안병무는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멧시지를 주의 깊게 분석하면 핵심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케리그마(Kerygma)와 그것의 토착화에의 노력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멧시지는 인간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相反性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또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의 접촉을 희구하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78) 따라서 성서, 특히 신약의 멧시지에는 이미 이같은 양면적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서를 읽는 독자는 무엇보다 성서가 전하고자하는 본질적인 케리그마를 끝까지 끌고 나가야 한다. 또한 동시에 접촉점을 위한 것은 그 시대의 청중의 말(사상)을 이용한 상대적인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나머지 그것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본래의 메시지와 서구 문화, 그리스도교와 서구문화를 분리시켜 인식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곧 서구인이 되는 것을 생각하는 잘못을 범해왔다.’ 따라서 ‘한국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 속에는 민족적인 반성과 자각이 내포되어 있으며 동시에 본래의 그리스도인이란 서구 세계에 의해 주장된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안병무는 전통적으로 비판없이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본질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성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나타낸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도 복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병무가 이해하는 복음은 무엇보다도 ‘주체개념이 아닌 상관개념’으로서의 복음이다.79)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바로 그것이 듣는 자의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남이 규정한 그러한 규정을 되풀이 하는 것이나 혹은 무시간적 보편을 담지하는 것이 아닌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복음의 두번째 본질은 그것의 역동적 창의성에 있다. 문화를 정의할 때 그것이 불변의 것이 아닌 새로운 요소(씨, 복음)를 받아들여  제 3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역동성이 있는 것이며 또한 이같은 문화에서의 가치관이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다원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복음의 역동적 창의성을 좀더 관심있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복음의 토착화를 단순히 씨와 토양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까닭은 문화는 불변의 것이라는 전제와 그 문화는 씨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되 씨의 문화에 대한 역할은 전혀 고려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신학이 한국의 문화창조의 과제를 수행해가야 한다는 자각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80)

    상기의 ‘상관개념’으로서의 복음을 통해 안병무가 발견하는 한국의 기독교, 그리고 성서의 올바른 실존론적 해석의 장(Locus)는 다름이 아닌 성서에 나타나는 ‘민중(Oklos)'의 발견이다. ’오클로스‘는 경제적, 정치적, 지적 중심으로부터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체제로부터도 버려진 철저하게 소외된 자이며, 따라서 성서에서 종교적 죄인과 사회적 소외인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안병무의 성서를 해석하는 관점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민중을 만나고 있다. 그는 ’민중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해야할 본문은 성서가 아니라, 마가의 유언비어 전승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이 ‘유언비어의 본문배후에서 신음 소리처럼 들려오는 것은 민중의 소리요, 이 민중의 소리가 바로 예수 사건의 전승모체‘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81) 이것은 성서도, 예수도, 교회도, 종교도 민중을 위해 있는 것이지 민중이 그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이 기독 교회는 정치 단체가 아니라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애의 집약이 민족애이며 그것의 구체화는 민중 속에 표현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발견이다. 이 민중이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을 의식화하며 그러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읽는 성서는 주로 사회, 경제적 개념을 동반하는 ‘민중’ 개념의 발견으로써 이를 통해 한민족과 한국인의 삶과 경험을 발견하는 토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III.I.4. 종교신학적-다원주의 대화론적 유형


    다원주의적 대화론의 유형은 세계와 한국의 종교적 다원사회를 직시하고, 서구의 신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화’라는 형식으로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도모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다원주의적 대화론의 유형에서 중요한 방법론으로 제기하고 있는 ‘대화’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 입장을 존중한다는 자세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자신이 성장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개혁과 제 3의 발전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대화이기에 기존의 종교신학에서 모델로 제시되었던 ‘그리스도중심의 포괄주의’ 와 ‘신중심의 보편주의’의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제 3의 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죤.캅, 폴.니터등이 주창하고 있는 ‘그리스도중심주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타종교와 타문화의 전통 속에 있는 종교성을 ‘익명의 그리스도’로 보면서 어느정도 그들 속에 잠재해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형태의 종교신학은 여전히 기독교를 중심으로하는 ‘제국주의적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패턴이라고 비판한다.82) 동시에 ‘신중심의 보편주의’의 한계에 대하여서도 종교의 우주는 신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식의 막연한 신중심주의를 벗어나, 보다 분명한 ‘구원의 비밀’을 담지하고 있는 아시아적 종교의 신앙 양태에 대한 새로운 발견, 즉 타 종교속에 존재하는 ‘전피조물의 해방’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83)

   먼저 한국의 다원주의 대화론적 종교신학을 주도하고 있는 변선환은 무엇보다도 한국개신교가 타종교와의 대화의 과제의 중요성을 실감할 만큼 ‘성숙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성토한다. 그는 이러한 경향성을 ‘프로테스탄트병(病)’이라고 명명하면서 아직 개신교의 현실이 ‘오직 기독교진리만이 참 진리라고 배타적으로 보고 있는 보수주의 목회자는 81.2%, 평신도는 약간 낮아져서 62.9%’라는 수치적 통계를 인용하고 있다.84) 그러면서 “우리 교회는 너무 오랜동안 십자가를 전통종교와 문화에 대한 아나테마(咀呪)와 정복의 상징으로만 十字軍 맨탈리티를 가지고 해석하여 온 문화적 고아 아니 문화 파괴자의 몫을 담당해왔다”고 성토한다.85) 이같이 오늘의 한국 신학의 풍토는 주로 서구신학의 제국주의적 신학풍토, 즉 타종교를 ‘악마’라고 보는 배타주의적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이를 앵무새처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볼 때 “타종교는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신학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이며, 신학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또한 이같이 주체와 객체의 뒤바뀜은 ‘타종교와 신학’이 아니라 ‘타종교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배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기독교인에게는 아시아의 타종교들이 이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가 이방적이다. 그러므로 ‘이방적인 복음이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아시아 종교와 문화와 합류되고 편입되는 참된 토착화’를 기대하여야 한다. 또한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는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종교인과 함께 이러한 이방성(소외)를 극복함으로써 세계를 인간화시키는 선교적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 다 함께 선교의 주체가 되고 상호 객체가 되는 열려진 대화의 길을 밝혀 나아가는 길”86) 속에 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이러한 타종교의 신학을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 신학은 대담하게 다음 세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과 교회중심주의와 그리스도론의 배타적 절대성의 주장이 바로 한국 교회가 포기하고 타파해야할 우상들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소위 ‘한국적신학’의 양 방향, 즉 ‘토착화신학’과 ‘민중신학’을 함께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토착화신학’은 민중의 한을 알지 못했으며 이와 반대로 ‘민중신학’은 인간의, 특히 아시아인들의 종교성을 경시하였다.87) 그러나 ‘종교신학’의 양상은 이같은 한계을 극복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변선환은 앞으로 전개되는 종교신학의 방향으로서 '첫째: 그리스도계시의 유일회적 배타성에 대한 서구신학자들의 전통적인 주장에서 벗어나서 비그리스도교적인 아시아의 구원론에 성실한 신학, 아시아  종교의 신학을 세울 것,88) 둘째; 서구의 기독교가 유대, 희랍, 로마, 게르만의 여러 요소에서 섭취하여 스스로를 풍요하게 한 종합체이듯이, 동양종교의 도전을 받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는 동양적 사유방법을 받아들이고 정화하여 스스로를 풍부케 하면서 동과 서의 철학과 신학의 새로운 종합체를 형성하며 문자 그대로 에큐메니칼한 세계신학을 형성시켜 나가야 할 것.89) 셋째;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가 타종교를 정복하려는 편견과 폐쇄성을 깨치고 교리와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실존적 존재론적 체험과 실천적 윤리의 차원에서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여야 할 것. 왜냐하면 위대한 승리는 어느 종교가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어느 종교가 초월자 체험, 즉 ‘궁극적 관심’을 잘 나타내고 있는가로 평가되기 때문임.90)'을 제시하고 있다. 


  III.I.4  문화초월적- 변혁주의적 유형


    문화초월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은 주로 ‘복음의 빛 앞에서 변화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전통문화’라는 관점이다. 특히 이들은 기독교 신앙은 한 문화현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종교로서, 신앙으로서, 다시 말하면 신적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구체적 현현으로서의 문화가 어떤 가치를 떠나서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즉, 문화의 가치 중립성을 부인한다. 모든 문화 구조는 이미 그 기저를 이루고 있는 지배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며, 특히 이같은 지배 사상은 종종,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다루는 종교의 영향을 떠나서 세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같이 인간 자체가 종교적인 중립성을 가지고 살 수 없는 이상, 그가 가지는 종교적 표현에서 이미 그 문화는 특수한 종교성을 규정짓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주지할 때 한국의 전통 사상에서 보여주는 소위 ‘비 기독교성’들에는 나름대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종교적 배경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의 전통 사상이나 한국의 전통 종교의 틀 속에서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도출하려는 소위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시도’를 지양하고 오히려 한국적 문화를 ‘기독교 진리’의 심판 아래 두어서 이것이 한국 문화의 전반을 뒤흔들어 놓아 그 결과, 새롭게 기독교화된 제 3의 문화 수립을 꾀하는 것이 오늘 한국 기독교가 당면한 과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전경연은 먼저 지금까지의 한국토착화신학의 논의에서 그 정열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역사적이고 세계적 종교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으므로 공중에 뜬 사고를 거듭하였다’고 비판한다.91) “신앙은 신앙으로 존속해야지 문화로 변질되어서는 곤란하다. 다시말하면 기독교는 문화와 분리될 수 없으되 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성서와 신앙고백에 의존하여 왔다.  따라서 민족 주체가 신학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재래의 신앙형태나 민족 특유의 전통등, 이 모든 소재들이 복음의 공격에 의하여 불살라지고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새 싹이 어떤 것이겠는가?가 중요하다”92)고 역설한다. 소위 ‘토착화신학’이 논의하는 복음과 문화의 상관성 문제가 자칫 ‘혼합주의 (Syncreticism)'의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김의환은 “1) 아무리 빛나는 문화적 전통과 사상적 유산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복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2) 우리의 문화와 사상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이며 때묻은 것이기 때문에(Because of) 복음은 더욱 필요하다. 3) 비록 우리의 문화와  사상이 복음으로 접촉이 이루어 졌다 할지라도 (Yet Still), 항상 복음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93) 복음의 토착화 작업은 결코 한국적 신학 수립이거나 복음의 비 서구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섯은 먼저 복음의 신앙적 소화를 통하여 우리 주체적인 인격이 그리고 객체적인 문화가 ’복음화‘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진정한 복음의 토착화는 문화의 주체성에 앞서 복음의 주체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한철하는 “아무리 무너진 전통적 가치 체계의 폐허 속에서 전통적 문화가치의 파편에 대한 상아탑적인 변증을 시도한다해서 이 민족사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만드는 종교이다... 문제는 과거보다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이 보는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는 한국에 있어서의 참된 그리스도 고백이 실현되며 모든 재래의 그릇된 표현을 시정할 수 있고, 그것으로 한국 사람의 구원이 되는 어떤 ‘성격형성’을 이루는 문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94) 역사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에 대하여 ‘서양문화’와 관련하여 ‘서양종교’를 운운하고 이제 한국에 나타난 기독교를 ‘한국문화’와 관련하여 ‘한국종교’ 운운하지만 실제로 기독교는 이같은 변형을 이루는 실체 이전의 실체, 즉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 자체는 결코 변함없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한철하에게는 기독교 복음의 통전성, 즉 서양과 동양이 다를 수 없는 기독교 본질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적 사상’과 ‘기독교’ 자체와의 구분을 시도한다.  기독교 자체에 대하여 각각 다른 종류의 사상들이 각각 다른 종류의 옷을 입히지만 그러한 사상의 철학적 모태들은 다시금 비평적 평가를 받아 오히려 모든 것이 이같은 ‘기독교자체’가 가지고 있는 멧시지에 의하여 그 의미와 위치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95)

  기독교와 복음의 관계를 철저하게 주체와 객체의 2분법적 도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기의 문화초월적 태도로부터 ‘변혁주의적 태도’는 다소 주,객의 관계에서 융통성을 보이는 듯 하다. 이같은 변혁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박봉배는 지금까지의 한국기독교토착화의 논의에 나타난 양상을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먼저, ‘배타주의(Exclusivism)'가 그것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계시를 떠나 존재하는 모든 문화, 종교 현상을 거절하는 극단적 바르트(K.Barth)주의적 경향성이라고 보았고 다음으로, '상대주의(Relativism)'를 꼽았는데, 이 상대주의는 기독교 이외의 여타 전통이나 종교에 관용적 자세를 유지함으로 ’모든 종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두 참된 그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분류한다. 이러한 태도는 타종교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면을 보이는 등의 긍정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화의 과정 속에서 불분명한 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자기 주체성이 사라지고 말 위협이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 부류는 자신을 포함하여 소위 ’변혁주의‘를 주창하는 이론인바, 이것은 자연적이거나 재래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그렇다고 복음과 토착 문화나 토착 종교 사이에 아무런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낙관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리차드 니이버(Richard Niebuhr)가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제시하고 있는 ’변혁주의(Transformationism)‘를 그 모델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96) 이같은 분류 방식에 의해 박봉배는 한국의 기독교는 1) 혼합주의가 저지르기 쉬운 무조건적인 타협과 그 속에서 상실되기 쉬운 기독교의 독특성(Uniqueness)을 보존하기 위해서 변혁주의가 요청된다. 토착화의 비유는 소위 ’땅에 뿌려진 씨앗‘ 비유에서보다 ’누룩‘의 비유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 혼합주의는 같은 점만을 골라내어 혼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양편의 차이점을 버리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선하다‘는 혼합주의의 전재를 동의할 수 없다. 이를테면 유교는 유교의 맥락 속에서 읽고 기독교는 기독교의 맥락 속에서 읽은 후에 두 개의 건설적인 종합을 시도해야한다.”97)고 변혁주의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의 토착화를 주장한다.   

   이종성은 먼저 ‘토착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것은 복음의 토착화라기 보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 즉 기독교 문화의 토착화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복음의 토착화는 있을 수 없는 사실임을 주장한다. 즉 “예수의 복음은 완전한 복음으로서 그 자체 본질의 변질이나 의의의 감량이 없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참다운 복음이라면 한국에 오거나 일본에 가거나 중공이 친 죽의 장막을 뜯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일한 복음이라야 한다. 즉 여기에는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적 요소가 있다”98)는 복음 자체의 본질적이요, 통일적인 요인을 강조한다. 이같은 보편성으로서의 ‘복음’이 소위 토착적 적용에 있어서 야기되는 ‘개별화’과정에 있어서 그 나아가야할 방향성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변질’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한에서, 즉 그 보편성에 모순되거나, 그것을 이탈해가지 않는 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같은 의미에서 이종성은 ‘복음의 토착화’는  ‘외국에서 온 복음을 우리 땅에 뿌리를 박게 한다는 사고 방식이 아니라, 3단계, 즉 예수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국적으로 채색된 것에서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3단계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99) 이종성에게 있어서 ‘복음의 토착화’가 아닌 ‘기독교 문화의 토착화’는 어쩌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즉 기독교를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복음에 대한 자발적인 표현을 해야한다는 점에서의 토착화는 ‘당연한 점’으로서 논란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단 이 때도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자는 말인지 예수 그리스의 복음(보편적)인 멧시지를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는 것인지를 주의깊게 나누어 생각할 필요에 대하여 지적한다.


IV. 토착화 신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


   지금까지 토착화 신학 논의에 대한 일련의 흐름들을 고찰해 보았다. 토착화신학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살펴보았고, 이같은 성서적 근거가 교회사의 제 과정속에서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대의 토착화 논의가 이루어지는 배경으로서 성장, 확산된 신학적 논의들을 세계 신학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토착화 신학의 논의에 대한 한국적 상황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특히 한국적 맥락속에서 이루어지는 토착화의 논의에 대한 제반 유형을 살펴봄을 통해 한국의 신학 속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토착화 신학의 흐름이 주도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한국 토착화 신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시도하고 또한 향후 토착화 신학의 과제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여 보기로 하자.


IV.I 한국토착화신학 논의에 대한 이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에 있어서 때때로 기독교가 ‘서구의 문화’ 형태와 함께 전달되었다. 이같은 과정에서 ‘복음’이 때로는 서구문화로 오인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 즉 서구인들의 가치관, 생활상, 그리고 세계관의 반영으로서의 서구문화가 꼭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담지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니 오히려 서구문화속에서 ‘복음’의 규범적 성격에 의해 심판받고, 또한 변화받아야할 ‘죄성’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에 선교 제 1세기를 지나는 한국의 기독교는 나름대로 ‘복음’과 ‘서구문화’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복음’의 진수, 즉 복음의 규범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또한 그동안 주로 부정적으로 인정되었던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가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는 늘 ‘악마성’을 지니고 있을 뿐인가? 그렇지 않음을 발견한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는 기독교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그것이 서구문화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 그 무엇을 발견하면서 소위 ‘토착화’의 논의는 한국 전통문화와 종교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의 빛을 조명하는 그 무엇을 발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1)비교종교학- 문화인류학적 유형). 이같은 시도는 복음이 뿌려진 토양으로서의 한국의 전통사회에 대한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토양에서 발견하는 기독교 복음의 규범적 가치와 어울리는 것들에 대한 발견 노력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부정적인 것에서부터 긍정적인 것 (마치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을 전후로 초대교회 교부들이 ‘애굽을 탈취하자! (Spoil the Egyptian!)’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과감히 이방적 요소에 들어있는 어떠한 ‘선한 것’을 나름의 기독교적 복음 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듯이 이같은 시도는 기독교의 지평을 넓게 하면서 과거 한국적 문화와 전통을 단절의 차원이 아닌 기독교 복음과의 연속성을 가능하게하는 새로운 해석의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같은 논의는 주로 한국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복음의 규범성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도, 즉 선교적 필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2)역사신학적-선교신학적 유형)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한편, 이같은 토양(전통문화와 종교)의 발견의 테마가 문화의 특수성, 지엽성의 ‘상황화’과정에 묻히면서 복음의 보편성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지 못한 채, 그 해석의 코드를 상대적 개체성에 묻으려는 종파주의적, 파편주의적 제 토착화의 경향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 ( (3)성서신학적-해석학적 유형)이 등장하면서 토착화신학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였다. ‘복음’을 주체개념으로서가 아닌 ‘상관개념’으로서 이해하는 성서신학적 유형에서는 ‘민중’의 컨텍스트를 통한 성서 읽기가 제시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과 종교 속에 묻혀있는 오클로스들이 바로 복음을 구성하는 주체들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상기한 토착화의 제 이론들이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의 불변의 우선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이를 통해 타문화(한국, 동양문화)를 해석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제는 더 이상 ‘복음’의 빛을 통한 ‘문화’의 해석이 아닌 ‘복음’과 ‘문화’의 상호 이해, 그리고 상호 대화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복음’은 늘 새로운 ‘문화’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롭게’ 그 의미를 구성해나갔다. 복음의 규범성이라는 것은 어떤 불변의 닫혀있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듯’ 또한 ‘새로운 높은 산이 나타나면 그것을 ’등정‘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이를 통해 복음은 새로운 내용을 덧 입고 또한 오늘의 내용을 넘어서는 또 다른 규범성을 형성한다. 물론 이것이 나아갈 방향을 모두 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이 규범성은 폐쇄적 자기 만족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궁극‘을 향한 인간들의 진지한 노력과 그 자세들에 대하여 열려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답해주신‘ 기독교의 복음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갇혀있을 수 없고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4)종교다원적-대화론적 유형)는 인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제 시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선을 긋고자 하는 노력이 대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의 규범성은 ‘토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면에서 보다는 ‘토양’을 적극적으로 변화, 갱신하는 힘으로서 존재한다 ( (5)문화초월적-변혁주의적 유형). 기독교의 복음이 개별 문화의 연약함을 밝히고 그것에 대한 조명으로서 ‘개혁’의 모티프를 제공하는 역동성 속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올바른 토착화가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들은 토착화의 제 3단계를 설정함으로써 소위 ‘토착화’된 문화속의 종교, 문화속의 기독교가 다시금 그의 ‘교만(Hybris)'한 위치에서 내려와 다시금 ’복음‘의 규범성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때 ’복음‘은 나름대로 변치않는 최선의 가치 체계를 보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복음의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다면 그것이 개별화되는 과정도 별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들이 보는 시각이었다.


IV.2. 한국 토착화 신학 논의에 대한 평가


   상기의 한국 토착화 신학에 대한 논의는 1960년대 ‘토착화(Indigenization) 개념’과, 70년대의 ‘상황화 개념(Contextualiztion)’, 그리고 70년 대 말 이후에는 ‘문화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개념으로의 성장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100)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1960년대의 ‘토착화’ 개념은 주로 서구 기독교의 시각에서 피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일방적 시각을 어떻게 극복하고 비기독교권의 제반 문화와 전통을 올바로 해석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 ‘복음’과 함께 한국에 소개 되었던 소위 ‘서구문화’가 기독교의 복음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되는 나머지 ‘복음화’가 곧 ‘서구화’의 길을 의미하는 듯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성하는 시도들이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서구화가 곧 복음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그대로 가진채 피선교지의 역사와 문화 전통등을 ‘정복 내지는 지배’의 대상으로 생각해 왔던 일련의 선교사(史)적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선교를 주로 ‘변용’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텍스트(복음)은 항상 고정되고 불변하는 상수이며 상황(문화)만 가변적인 것이어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만남에서 항상 텍스트가 우위성을 점하는 패턴이 그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문화가 수행하는 해석의 역동적 요인과 작용은 부차적인 것이며 2차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에 무엇보다 문제를 느낀 것은 이같은 ‘문화로서의 토양’이 없이 ‘복음’이라는 씨앗이 스스로 뿌려져 열매를 맺을 수 있었겠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60년대의 ‘토착화’는 그러한 과거의 시도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논의의 방향을 ‘텍스트(복음, 씨앗)’ 중심에서 ‘콘텍스트(상황, 문화, 토양)’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콘텍스트는 더 이상 변화의 대상만이 아니다. 복음(씨앗)이 문화(토양)을 조명할 뿐 아니라 문화(토양)의 해석학적 기능을 강조한다. 복음이해가 선교사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전환되며 토착 문화에 의한 복음의 새로운 이해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신학의 탈서구화와 기존신학의 자리인 서구사회와 문화를 비판하고 토착 교회의 고난과 억압당하고 있는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복음의 새로운 이해와 신학의 산출을 도모한다. ‘자국문화와 전통’에 숨어있는 긍정적, '익명의 그리스도인적(Anonymous Christ)' 요인에 새삼 는 눈 뜨는 과정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토착화’ 논의는 70년대에 들어와 복음(Text)이 전해지는 구체적 상황(Context)에 관심을 두면서 더욱 심화되어 나간다. 기존의 텍스트 우선 순위는 콘텍스트의 우선 순위로 뒤바뀌게 된다. 어떠한 절대적 가치도 사실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 그것이 전달될 때 이미 그것을 전하는 이들의 ‘상황’에 의하여 이미 그 내용이 ‘상황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용자의 상황성은 절대적 규범으로서의 가치(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며, 또한 그것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우선성’을 갖는다. 여기에 ‘상황’의 이해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에 있어서 ‘상황성의 우선’이라는 명제는 단지 긍정적인 면만을 담지할 수 없는 부정적 국면도 아울러 소유하고 있다.  즉, 상황의 비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급진적인 토착화 과정에서 기독교 멧시지 의 보편성을 일탈하는 소위 ‘혼합화(Syncreticism)'의 경향으로 나아가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보편성이 상황의 특수성으로 대체되면서 보편적 멧시지 자체가 상실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참다운 토착화가 지향하는 모델일 수 있는가? 절대적 상대주의로 빠져들어갈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고 복음의 규범성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등의 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아울러 과거 ’지배와 정복‘의 모델을 비판하고 나서는 ’토착화의 시도‘들이 또 다른 의미에서 제1세계 교회가 저지른 ’자국문화의 절대화‘라는 순환적 경험의 딜렘마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개별 ’문화‘의 긍정성과 함께 그 부정적 요인을 이야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

   이같은 반정립적 사고의 구조 속에서 70년대 후반기에 들어 가서는 토착화 논의의 제 3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문화토착화(Inculturation)'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문화토착화라는 개념은 주로 문화의 속성을 규명하는 노력과 함께 제기된 일련의 토착화 과정을 보다 면밀한 분석에 의해 이해하려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문화는 중립적일 수 없다‘는 모토와 ’모든 문화는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진다‘는 속성을 이해하면서 이제 기독교의 선교나 복음의 전파는 문화적 양상으로 나타나야하며 또한 이같은 문화적 양상을 드러냄에 있어서 기존의 소위 ’비(非)기독교문화‘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특정 종교의 정복, 강요의 자세를 벗어나 상호이해의 지평을 통한 제3의 융합문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문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복음은 어떠한 역학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해 나아가는가? 그리고 그러한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려 시도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한국토착화의 제반 논의들은 그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적응(Acommodation)'과 ’동화(Assimilation and Adaptation)‘의 국면을 강조하는 논리와 반대로 '변화(Transformation)’와 ‘갱신(Reformation)'을 강조하는 부류의 대립양상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같은 양상을 지양하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IV.III. 토착화 신학 논의를 위한 제언


  복음과 문화의 상관성과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한 제 3의 길에 대한 모색은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한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출발하고 있다. 즉 문화라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어떠한 결과물로서 그것은 자연의 상태를 넘어서 존재하는 모든 양태로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진다. 문화에 대한 정의를 이러한 각도에서 시도하고 있는 타일러(E.B Tylor)는 ‘문화는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그밖에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습득한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 전체(Complex whole)’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 슈라이트(J. Schreiter)는 문화를 ‘의미체계’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문화는 하나의 거대한 의사소통의 그물망으로서, 그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얽혀져 있는 길을 통하여 언어적 비언어적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101) 여기에서 문화란 ‘메시지의 전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한 종교의 체계를 전달하는 수단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를 기독교 선교에 적용할 때는 문화가 복음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은 문화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 볼 때 무엇보다도 문화는 고정적인 것인 아닌 유동적인 것이며, 또한 의미체계들의 상호 만남과 교합을 통한 역동성있는 체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다른 한편, 문화는 사회 구성원이 습득한 ‘복합적 의미체계’이기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소위 내용체계, 즉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따라서 문화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동시에 문화는 그같은 나름대로의 가치형태를 그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토착화에 대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 먼저, 기독교의 문화갱신과 창조는 복음과의 만남에서 수행되며 복음은 자기 안에 문화비판과 개혁의 단서와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서는 복음이 이미 해석자의 문화에 조건적으로 이해되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한 문화에서 제한적이면서 편향적인 해석은 필연적으로 용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같은 편향성이 어디까지나 복음의 보편성을 침해할 것인가?라는 염려를 미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가장 특수하고 가장 개별적인 시각에서 복음을 해석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복음의 보편성과 그 규범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때 비로서 복음과 타문화와의 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며 실제로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머무르던 예수의 복음의 멧시지가 여타 이방지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소위 ’헬레니즘‘ 그리고 더 나아가 여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긍국적으로 ’문화토착화의 이념‘을 실행할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이다.

   

V. 나가면서;  한국 기독교의 향후 전망과 과제

        

   한국에서 기독교가 짧은 선교기간에 양적으로 쉽게 착근한 직접적 원인과 개신교 초기 신앙 형태의 형성에 직접 영향을 끼친 요인 중 하나는 초기 한국 선교사에 의해 들여온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라고 교회사가 민경배는 지적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마디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부흥회적인 생태의 선교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말은 긍정적인 공헌을 말하는 데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는 데도 똑같이 불가피한 내력을 가지게 된다. 신학의 빈곤, 교회론의 약화,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 합리성의 결여, 그리고 이원적인 신앙의 전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적인 경건주의 신앙은 한국인 본래의 정신적 유형에 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개화기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는 복음 선교와 신교육을 통하여 부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인간 개체의 존엄성을 강조하여 한국민으로 하여금 각존적(覺存的)인 개체의 자아의식화 과정을 도왔다. 이것이 한국민의 의식구조에 끼친 가장 변혁이요 공헌임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는 선교의 과정에서 교회와 신앙고백 곧 전통을 전제로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서구에서 자라난 기독교가 동양에 전해질 때 서구 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이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전통은 이미 형성된 것이었으므로 이를 받는 쪽에서는 서구 문화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시대에 따라 그 신앙 고백을 새롭게 표현한다하더라도 이미 고백된 것을 토대로 그 계승이 이루어 지는 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단지 한 문화권의 경험과 삶의 내용을 넘어선다. 그러한 면에서 ‘복음’의 보편적 국면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 ‘갱신’의 모델과 함께, 한국 기독교는 또다른 모델, 즉 ‘적응’ ‘동화’의 토착화모델의 과제를 나름대로 수행하여왔다.  각기 민족의 전통적 문화는 인류가 갖고 있는 고귀한 문화적 유산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기독교는 세상의 빛이며 어떤 문화에 대하여서도 이방인이 아니다.(WCC 뉴델리대회 봉사부 보고서)’라는 세계교회연합회의 선언을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낀다. 한백문화재단에서 조사한 ‘한국문화의 토양’ 대한 조사 보고서에서 동양문명의 특성은 ‘유불도(儒彿道) 삼교(3敎)의 복합이며, 여기에는 동양문화의 한 긴한 특성인 ’조화론적 관념‘ 혹은 ’관용과 중용‘이 깊이 숨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같은 한국문화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 ’습합현상‘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이성과 감성의 조화 등, 조화론적(평화주의적) 문화지평을 향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에드윈 O. 라이샤워는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동아문화권 속에 있는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권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음에도 양 문화의 본질에 있어 상호간의 차이가 심하고 문화상의 특이성을 보지(保持)하는 그 원인을 원시문화 바탕의 전통과 언어 구조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한국 문화는 동양문화 최고의 원시적 기반을 형성한 심미적, 예술적인 샤마니즘문화 곧 동북아시아의 시베리아문화를 그 모태로 삼고, 현실적이고 주지적인 중국의 유교문화와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도의 불교문화를 종합한 세계문화의 용광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문화사적 위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 최고 고등 문화의 마지막 정류지로서 한국문화는 나름대로 큰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상기한 한국민족성의 종교 습합적 경향성과 이에 따르는 복음선교의 과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종교 습합성은 한국 민족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 특질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유대인, 희랍인, 애굽인들도 다 종교 혼합적이다'라고 지적하는 존 게이저는 이를 ‘종교혼합적 현상(Syncretistic milieu)’ 이라고 하였다.102)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특별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같은 종교 습합현상은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을 거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한국인의 심성에 기독교는 곧 ‘이방종교’가 아닌 그것을 품에 안고 끌어 안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자기확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의 배후에 이와 아울러 많은 기독교 계통의 이단적 사이비 신흥종교의 범람등의 부정적인 문제도 아울러 지적되어야 하겠다. 한국 기독교는 이상과 같은 한국의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에 대하여 창조적으로 응전하면서 세계 최고의 문화들의 핵심을 포촉, 소화, 흡수하여 승화시켜 새로운 참신한 제 3 문화로써 출현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실패할 때. 한국 문화는 각개 고등 세계문화의 생명력이 모두 탕진 고갈된 형태만을 받아들여 형식적이고 사대주의적이며 배타적인 타율문화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있음을 식자들은 우려한다. 문화 속의 기독교, 그것이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미리 어떠한 선험적 결정을 앞세워 자기 수호적 자세로 나아가는 닫혀진 체계로서의 자기 보지(保持)가 아닌, 특히 다문화와 다종교의 복합적 현실 속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지만, 그 너머에 복음의 신비한 역동성과 창조력이 숨쉬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소유하는 ‘에큐메니칼 시대’ 속에서, 또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이를 통해 몰트만(J. Moltmann)적 ‘전 피조물의 해방의 가능성’을 묻는 제 3의 합일을 모색하는 참다운 토착화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의 출현을 기대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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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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