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신교-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들이 어느 샌가 카톨릭의 부패된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적 문화를 만드는 분들의
올바르지 못한 신앙관으로 인해 급하게 개신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카톨릭에서 선호하는 "성화, 모형" 등.. 분명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금하는
하늘 위의 어떤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의 어떤 형상이든지 너를 위하여 만들지도 말고
그것에게 기도하지 말라 고 하신 제2계명의 원리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 교회의 간판이나 예배당 안쪽에 어느샌가 카톨릭에서나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초상화 그림... (실제 주님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화가가 자신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지요), 캐릭터 등등이 어느 샌가 교회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칼빈과 마틴루터가 생명을 걸고 카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한 개신교회 중
장로교회의 표준 교리인 소요리 문답은 아래와 같이 제2계명에 대해서 해설을 하며
카톨릭의 우상숭배를 지적하며, 동시에 카톨릭화 되어가는 개신교회의 현 모습을
지적합니다.
제5과
제2계명의 요구
제49문 제 이 계명이 무엇입니까? (대 107문)
답 제 이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출20:4-6
제50문 제 이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108문)
답 제 이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 가운데서 정하신 종교적 모든 예배와 규례를 받아1) 순종하며, 깨끗하고 온전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2)
1)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로마교회와 루터교회는 제2계명이 마치 제1계명의 부분인 양 취급한다. (현재 카톨릭에서 새롭게 번역한 새공동번역성경에는 십계명 중 제2계명을 삭제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제10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두 계명이 같은 죄, 곧 탐심을 반복하여 금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를 말해 줄 계명이 필요하다. 만약 제2계명을 분리된 계명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만 그의 뜻대로 예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어느 계명도 가지고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제2계명은 그가 명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임무에 관한 위대한 원리를 갖고 있다. 다음 과에서도 더 살펴보겠지만 인간이 창안한 것으로는 어쨌든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도표를 가지고 더 명백히 살펴보자.
이 도표에서 보듯이, 개혁주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이 입증할 수 있는 요소들만이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봉독, 성경 말씀의 전파(설교), 시편의 노래, 세례와 성찬의 올바른 집행, 기도 등이 참 예배의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의 단순함과 영적인 성질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교회나 루터교회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명령한 예배의 요소는 단지 한 부분으로 간주할 뿐이다. 성경에 명한 성례전은 두 가지 뿐인데 그들은 일곱 가지를 가지고 있다. 로마교회는 또한 성직자를 위한 특별한 의복, 십자가, 촛불, 상 등등을 위할(for) 소지를 두고 있다. 미래에는 이것들을 예전에 첨가시킬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직접 특별히 금한다고 말씀하신 그것을 행하는 것만 나쁘고, 직접 금하지 않는 것은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바알 상은, 성경이 바알 상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기 때문에 사용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리아 상을 사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많은 말씀 중에 마리아 상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의 답은 이렇다. “아니오,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배에 금해야 할 모든 가능한 것의 긴 목록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소.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성경이 너무 커서 아무도 전부 읽을 수 없을 거요. 하나님은 간단한 원리를 우리에게 주셨소. 이 원리에 의해 우리는 그가 명령하신 것으로 충분하고, 더구나 명령하지 않은 것은 금지되어 있소.”
많은 개신교인들, 즉 장로교, 개혁 교회라고 자처하는 자들까지도 실제로는 개혁주의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 교회로부터 이전에 배제된 많은 것들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교회가 목사를 위한 특별한 의복, 십자가, 촛불, 영감 되지 못한 찬송 등을 끌어 들이고 있다. 슬픈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인간들의 고안품들은 진정한 예배에 도움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참된 예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기 때문이다(요 4:24). 천지의 주재께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는다(행17:24,25). 사람은 커다란 성당이나 색 유리창을 볼 때, 웅장한 성가나 오르간 소리를 들을 때 실제로 감동한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와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런 것들에 의해 감동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사람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어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 자신들이 본래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사실을 잘 이해치 못할 때 그는 예배의 가치를 더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창안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찮은 자기의 사상을 찬송으로 만들어 예배를 멋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달았을 때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영감 된 시편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 없이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교회의 예배에 사용될 시와 노래를 사람에게 제공할 자격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에서 오늘날 아무도 이 신적인 영감을 가진 자가 없음을 안다(계22:18~19).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매우 그릇된 열등 의식을 갖고 있다. 예배의 단순함 때문에, 즉 타 교회의 공통적 특성인 삶의 본성을 끄는 어떤 매력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명에도 없는 그것들을 갖지 못했음을 대부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성경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교회가 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될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참된 예배자들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기를 원하는 방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더 놀랄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경건한 예배를 모두 준수하고, 순전하고 완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한 특권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 귀중한 것까지도 오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단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단지 외양적으로 예배의 모양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단지 예배의 의식적 모양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지 않으리라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 어느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예배의 의식적 모양은 부족하나 신실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을, 예배의 의식적 모양을 잘 갖추고도 열심이 적은 자들보다는 더 기뻐하실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열심과 참으로 순수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신실하기만 하면 이 순수한 예배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2계명은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를 지킬 때 얻는 큰 유익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제2계명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급을 주목하자, 즉 제2계명을 범할 때 가장 어려운을 겪는 것은 자녀들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은 것들을 끌어올 때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보다는 사람이 제정한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에 장애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제정하신 대로 이러한 두 경건한 예배와 의식들을 수납하고 거행하며,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놀랄 만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이럴 경우에 자녀들은 진리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그 자녀들은 사람의 상상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보여 주신 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순수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교회에서 자녀들은 특별하게 복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명령한 것만으로 구성된다는 이 단순한 원칙을 굳게 붙잡도록 하자. 따라서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것은 금지된 것이다.
제6과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
제51문 제 이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 109문)
답 제 이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형상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거나,1)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어떤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2)
제52문 제 이 계명을 지키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110문)
답 제 이 계명을 지키라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며,3)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며,4) 홀로 자기에게만 예배하는 것을 열망하시기 때문입니다.5)
1) [신 4:15-신 4:18]
(15)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16)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17)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18)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2) 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3) 시 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4) 시 45:11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5) [출 34:13-출 34:14]
(13)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14)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제 우리는 제2계명을 무시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살펴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긴 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에 제2계명이 범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한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 준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본체와 능력과 영광이 동일한 한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가르쳐 준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9)고 말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과 비교하겠느냐” (사40:18)고 반문한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10:14)고 말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개신교도들은 이런 악을 깨달을 때가 있었다. 그들은 로마교의 조상들(statue)을 보고 이것이 제2계명을 범하는 일임을 알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조상과 형상(image)를 만드는 일이, 비록 로마 교회가 이 조상들을 예배하려 하지 않고 다만 이것들을 사용해서 주님께 예배하도록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것은 큰 잘못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개신교도들이 로마교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여전히 조상, 곧 형상과 그림(모양)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명은 그러한 차이를 두지 않는다. 계명은 우리에게 어떤 상을 만드는 일을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만드는 일도 역시 금한다.
카톨릭에서는 예수의 모양을 만들거나 혹은 그림을 액자에 끼워서 방안에 걸어두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의 모양이나 그림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모양과 그림을 통해서 주님께 예배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요즘 장로교나 감리교나 여러 개신교회들이 이러한 제2계명을 어기는 카톨릭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제2계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어떤 모양이나 형상들을 만들거나 그것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고 이것은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금하고 있다.
카톨릭에서는 사람은 무엇인가 눈으로보고 육감적으로 의식이 되어야지만 반응을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형상이나 그림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육감적으로 인식을 하고 그리고 좀더 나아가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는 보조 수단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카톨릭의 신학이 잘못되었고 그들이 사단의 수단에 아주 깊이 넘어간 것임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그 어떤 것을 이미 사람의 마음에 심어주셨다. 즉 눈에 보이지 않고 의식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종교적 성향을 이미 마음속에 주셨다. 그러나 카톨릭은 자신들 스스로 허망하여져서 자신들이 섬기고 싶은데로 섬기고 싶어서 모양과 그림을 만들어서 자기 좋은대로 예배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제2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되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카톨릭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스스로 주장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전도를 할 때, 카톨릭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를 하는 것이 올바르다.
이러한 우상들과 예수님의 그림 사용을 옹호하기 위해 한 유명한 논지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주님을 상기시키는 데 유용하거나(어린이의 경우), 교육적 방법으로 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대하여 우리는 다음 사실들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1)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사실상 우리는 그의 육신의 모양에 관하여 어떤 정확한 형상도 가질 수 없다. 화가가 순전히 자기의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려 놓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림은 거짓되고… 망령되이 만든 것이다(렘51:18).
(2) 이러한 초상화를 만들 때 우리는 그의 신성을 떼어 낸 인성만을 생각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그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도 존경해야 한다(요 5:23).
(3) 우리가 그의 초상화를 만들 때는 역시 성경을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딤후3:15)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하다. 성경에 예수의 초상화를 첨가할 필요가 없다.
만약 주님을 믿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예수님의 형상과 그림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결국 성경만으로는 주님을 믿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성경 자체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말하고 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과 모양을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
(4)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고후3:18). 그리스도께서 친히 약속하셨듯이 보혜사가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으리라” (요16:14).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상을 만들 때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여 주는 것이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 형상과 모양이 없으신 하나님을 사람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감지하게 하고 그분의 존재를 깨닫고 의식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영광인데, 그리스도의 초상을 만들거나 그림들을 만드는 것은 성령의 영광을 침해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어떤 조상을 갖게 될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음을 매일의 경험이 가르친다” 고 요한 칼빈은 말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성례전을 주신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상을 갖고자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께서 그의 말씀에 신성하게 하신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세례와 성찬을 두고, 어떤 다른 형상을 받으려는 것은 매우 가치 없는 일로 생각된다”고 칼빈은 말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화상들을 옹호하는 주장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께선 자녀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한 이유인데 즉, 자녀들은 부모나 교사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무엇이나 참되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들에게 이러한 화상들이 나쁜 것임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들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그림이나 그림 사진의 사용은 최근 세대에 발생된 문제이다. 예수의 그림이 주일학교 교재를 통해 들어왔다. 점점 아이들은 그것들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그림들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났다. 이제 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 그림들을 예배 의식에 도입하게 되었다. 착색 유리창들이 도입이 되어 사람들은 그들이 예배하면서 낯익은 예수의 그림, 거짓된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연합 장로 교회에서 몇 해 전 성전 봉헌식에 사용한 서식을 살펴보자.
목사: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성령님의 감동을 소생키 위해
회중: 우리는 이 창문들을 봉헌합니다.
목사: 이 아름다운 창문을 교회에 선물한 호의와 친절의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교회와 회중의 이러한 정신을 겨루어 발휘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회중: 우리는 이 창문들을 봉헌합니다.
목사: 예배 중 회중의 면전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주는 유익한 감화를 위하여, 주중 평일에도 창문들이 주는 신중한 감화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교제의 선함을 위하여,
회중: 우리는 이 창문들을 봉헌합니다.
목사: 그리스도의 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이 그림들에 의해 영속적이고 매력적인 초대가 계속되도록, 이 그림들의 감화에 따라 우리가 진리를 찾아 알도록, 믿음과 소망과 사랑, 자비와 기쁨과 기도, 그리고 평화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회중: 우리는 이 창문들을 봉헌합니다.
식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그림이 매우 큰 악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제2계명을 범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될 때마다 제2계명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예배가 오늘날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신교 교회들을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
자, 이제 큰 장로교회 하나를 방문해 보자. 여기 “예배 센터” 라는 젊은이들의 방이 있다. 중앙에는 성경이 아닌 제단이 놓여 있다. 촛불이 켜져 있고, 제단 위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이 놓여 있다. 그들 조상들(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것들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손들은 이 그림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 예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서둘러 “성소”로 들어간다. 황홀경에 빠진 가난한 자처럼 우리는 오르간 연주를 듣는다. 의식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서서히 행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특별한 종교 의복을 걸치고 있다. 매우 경건하게 보인다. 그들은 금 십자가와 켜진 촛불 등을 가지고 간다. 그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을 때 조명등이 켜진다. 그리고 갑자기 목사가 등장한다. 그는 까운을 입고 목 둘레에 빨간 후드를 걸치고 있다. 그러나 설교할 시간은 거의 없다. 다른 동작들이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설교는 몇 마디의 좋은 충고와 더불어 간단한 일상 생활의 이야기뿐이다. 다음에는 거의 동일한 연출 분위기로 퇴장한다. 사람들은 상쾌한 마음으로 의기 양양하게 퇴장한다. 마치 좋은 영화를 보았거나 음악회에 참석했던 기분으로 그러나 아무도 이 의식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에서 제2계명이 범해졌음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이에 비하여, 교리문답은 얼마나 꾸밈 없고 순수한 예배를 말해 주고 있는가? 많은 개신 교회들이 로마교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질수록 이것은 더욱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는 이 높은 표준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완전한 예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님께 서원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셨음을 알자. 그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들임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의 자손들까지 풍성한 영적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뻐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제2계명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가르치지 않을 수록 장로교를 비롯 많은 개신교회들은 카톨릭의 우상화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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