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2005년 10월 31일자,『고신대신문』(제295호; 창간기념호)
너무나 현실적인 인문학의 위기
1997년 부산시 장전동 부산대학교 정문 앞에 있던 “나라 사랑” 이라고 하는 서점이 재정난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이 서점은 그 이름에서도 약간 느낄 수 있겠지만,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었다. 7,80년대 격동의 시절을 살던 대학생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 이 서점의 폐점은 시대상을 짐작케 하는 좋은 예이다. 지금의 부산대학교 앞 거리를 가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이제 그곳에서는 학문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거리 전체에 수많은 서점이 즐비했었다는 선배들의 증언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몇몇 서점이 남아 있고, 몇 년 전에는 Libro 라고 하는 대형서점이 생겼지만,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코드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며, 대형 일변도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콘텐츠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 대학의 상황만이 아니다. 대학의 기본교양과목이던 논리학, 철학, 역사 과목을 이제는 영어와 컴퓨터가 그 자리를 대신한지도 매우 오래 되었다.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기본적인 책을 읽기는 커녕 그 목록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대학의 도서관에는 ‘공무원학과’와 ‘토익학과’로 현저하게 구분되고 있는 우리네 대학의 현실은 이를 잘 반증해 준다. 이러한 현실은 학문의 장(場)인 대학을 취업전문학원으로 변질시켰다고 하는 단순한 지적을 넘어 우리 시대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인문학의 위기”(백원담 편역, 푸른숲 간)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의 위기는 충분히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인문학의 위기’라는 거창한 말보다 위에서 묘사한 현상들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데 더 쉽게 다가오는 것은 그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점이라 하겠다.
인문학의 위기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오고 있는 바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으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뭐~! 별일 있을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지.” 라는 말로 얼버무리기 쉬운 지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좀 더 현실적으로 “인문학의 위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지적하려 한다.
인문학의 위기에서 비롯된 현상은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주의 몸된 교회에서마저 드러나고 있다. 교회 안의 가벼움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만큼(?) 심각하다. 설교단에서는 깊이있는 말씀의 선포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교도신앙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한국교회에서 청교도 만큼의 신학적 깊이와 영성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다. 오히려 거룩한 강단은 얄팍하게 우리를 위로하는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자리를 무대로 바꾸는 일에 열심을 두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시대의 모습이다. 또한 교회 내의 프로그램들은 우리 내면의 깊은 죄를 지적하고 우리를 지배해야 할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적 방법보다는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인위적인 프로그램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벼움을 추구하는 우리네 현실이 그것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 공동의회는 이미 그 형식만 남아있고, 나아가 제직회가 사라지고 있으며, 제직회에서 심도있는 지적을 하는 직분자에 대해서는 “딴지 거는 사람”으로 찍히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인문교육을 상실한 결과이다. 오히려 그 딴지 거는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교회가 제대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이 깨닫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는 명제가 교회 안에서 적용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인문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자보다 영상에 익숙한 시대는 교회 안에서 너무나 잘 적용되어 버린다. 이미 왠만한 교회에서는 교인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빔 프로젝트로 설교본문과 설교의 인용본문을 보여주다 보니 교회에 성경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고, ‘말씀중심’을 강조하는 교회들에서도 이제는 말로만 말씀중심이지, 아무도 일주일 내내 성경을 읽지 않는다. 실용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비롯된 인문학의 위기와 동일하게 실용을 강조하는 교회상황은 “성경”이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리며, 교회를 든든케 하는 반석이 되기 보다는 교회의 인테리어보다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최근 고신대학교의 가장 큰 이슈인 신급제 폐지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미션스쿨과 기독교 대학의 차이가 뭔지 모르고, 고신대학교의 역사와 정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하나의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신중하게 토론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을 알지 못하는 총대들은 인문학을 상실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결정에 있어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쓰는 가벼운 이들인 것이다. 고신대학이 기독교대학이라는 것만 생각을 하더라도, 기독교대학이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를 생각만 하더라도 그러한 어이없는 결정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네 교회의 장래를 엿볼 수 있는 신학교에서의 상황도 교회의 현실 못지 않게 심각하다. 신학교 도서관은 신학생으로 북적여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3년과정을 모두 이수하는 동안 학교에서 내어주는 과제물을 제외하고 10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신학생들은 전통과 신학,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말씀사역자로 훈련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실상은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기획자가 되는 방법을 수련하는 일에 급급하고 있다. 딱딱한 (성경을 기초로 한) “조직신학” 책보다는 (경영학 교과서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새들백 이야기”와 같은 얄팍한 책이 신학교 교과서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하고 암울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학문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성의 상실”을 큰 문제로 지적하지만, 필자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성 상실을 넘어 하나님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사라지게 만들고, 그 인간의 사라짐과 동시에 하나님이 사라짐으로써 이 세상에 결국 물질만 남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소위 말하는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이다.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성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만들며, 교회 안에 고민을 사라지게 만들어 무분별한 신앙을 양산하고,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Text인 성경을 멀리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문자보다는 영상을 중요시하는 상황이 말이다.
인문학의 위기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인문학을 무시하면 안될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세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철학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을 안다면,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인문학을 통해 공격하고 있으므로 우리 역시 인문학으로 반응해야 할 것이다. 최고의 학문인 신학을 기초로.....그게 바로 기독교 대학인 고신대학교의 존재이유이며, 기독교세계관을 기초로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2005. 10. 29. 고신대 신문)
손재익 / 부산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고려신학대학원 1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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