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節邵先生이 曰 天聽이 寂無音하니 蒼蒼何處尋이고 非高亦非遠이라都只在人心이니라.
강절소선생 왈 천청 적무음 창창하처심 비고역비원 도지재인심
강절소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의 들으심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을 것인가.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다. 모두가 다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 * * *
강절소선생은 AD 1011-1077년 사람이다. 송나라의 유학자이니, 신유학을 집대성한 주희(AD 1130-1200)보다는 앞서서 생몰한 사람이다. 하지만, '천'의 소재를 '심'에서 찾고 있는 윗글은 신유학의 정신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는 글귀이다. 불교의 영향을 그 당시 전통유학에서 흡수해서 확장발전시킨 것이 신유학이다. 그 신유학자인 강절소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를 알아야 추적선생이 윗글을 그 책에서 인용했으리라고 추측이라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언제쯤이나 고려에 유입되었을까? 이런 유입시기나 유입과정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있다면 한반도의 정신사의 흐름을 연구하는 데 좋은 전거들이 될 것이다. 그런 연구가 현대의 한국사학계에서 과연 진행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아마도 순천자는 존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순천과 역천의 그 '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명심보감을 편집했다는 추적선생도 그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 답을 바로 추적 선생 당시 고려말기쯤에 소개되었을 강절소선생의 글에서 발견하게 된다. 물론 어느 책 어느 페이지인지는 알 수 없다.
* * * *
'천청'을 '하늘의 들으심'이라고 일반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무음'하다는 것은 그 하늘의 듣는 모습이나 양태를 말한다. 하늘이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 것일까? 문맥상 매끄럽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늘을 들음'이라고 번역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들으려고 해도, '적무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뒷귀절들이 쉽게 이해가 된다. '
창창하처심'이고 '비고역비원'이다.
푸르고 푸른데 어디서 찾을 것이며, 높지도 않고 멀지도 않고 다만 모두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 바로 그곳에서 하늘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모세가 신명기의 마지막부분에 적은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30:11-14)
그래서 바울사도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마음이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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