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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문학의 위기, 신학의 위기, 목회의 위기

baromi 2006. 10. 21. 07:47
인문학의 위기, 신학의 위기, 목회의 위기
인문학적 소양 대신 돈 잘 버는 기술이 최고인 사회와 교회는 무너진다
입력 : 2006년 10월 10일 (화) 23:47:13 / 최종편집 : 2006년 10월 18일 (수) 01:48:43 [조회수 : 2175] 최종운 ( pinganma

인문학의 위기 : 대학은 취업 준비 학교로 전락한 지 오래

지금 우리사회와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했다고 위기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한마디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에 따라 인문학이 돈이 되지 않아서 철저히 외면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인문학인데 기초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자원 낭비를 부추기는 과학기술과 소모적인 사치 산업과 잔머리를 잘 굴리게 하는 서비스 분야만 가르치다 보니 사회는 점점 물질화되고 따라서 몰인정해지고 흉폭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과 선진국 진입의 국가적 기초가 인문학인데 이를 기초로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문학이 괄시를 받고 천시를 받고 있는 것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공계열 학과 이외의 인문학과 학생들은 졸업을 유보하고 취업 준비를 한다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답니다. 인문학도들은 졸업을 앞두고 현실과 괴리된 전공 탓에 취업 문제로 대부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고시 공부는 소수의 수재들만 신분 상승 수단으로 하지만 이외의 학생들은 호구지책으로 공무원 시험에 전력을 다 하고 있는 풍경이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학교의 모습입니다. 어떤 대학은 공무원 특성화 대학으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홍보하는 것을 보면 대학이 취업 현실과 연계되지 못한 인문계 학문을 계속 하기란 어려운 가 봅니다. 이제 대학은 진리와 지성과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호구지책과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연수원과 직업훈련원으로 격하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입니다. 학생들은 입시 전에 자신의 적성을 고려해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부합되는 대학의 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성보다는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장래가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전공하여 빈들빈들 놀면 부모로서 속이 터지기 때문에 이공계열 졸업해서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적성과는 상관없이 모조리 의과대학이나 한의대를 지원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신분 상승과 돈을 잘 벌기 때문입니다. 수능 성적 상위권의 대학 진학 분포도를 보면  돈 잘 버는 학과로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대학은  학문 연구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나갈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변질된 자본주의는 그러한 기능을. 바꿔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지식을 돈으로 교환하는 교환가치가 얼마나 크게 포장할 것인가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돈을 잘 버는 학과 위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산업 인력과 직업 전문 인력의 양성소로 전락한 것입니다. 과학·기술 교육이 대학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는 인문학을 밀어내고 대학의 중심으로 양적 팽창과 함께 정착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학은 어렵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골치가 아프다는 거지요. 생각을 하기가 싫고 철학적 사유는 현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인문학이 위기라면 그건 대학의 위기이고, 대학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가 주는 타락한 정신적 진흙탕에 온몸을 담구고 희희낙락한 돈의 맛을 탐닉하고 있어 돈이 되지 않은 헛소리는 개소리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몸부림치는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위기도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에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제도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기본적인 생존조건으로 세계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들조차도 그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없이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말도 합니다. 오늘날 지구촌 세계는 무조건적인 동물적 경쟁과 결과적인 효율성만을 강조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와 윤리의식이 실종되고 있으며 절차적인 정당성도 상실되었습니다. 오로지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생존경쟁만 있습니다.

 

신학의 위기 : 신학대도 돈 되는 학과만 개설

 

우리나라의 대학이 이렇게 실용주의적 학문과 돈이 되는 학문 위주로 되어간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어찌 할 방도가 없는 지구촌의 현상입니다. 인문학이 추락했다면 신학은 어떻습니까? 그 거대한 사탄적 자본주의가 맹열한 돈의 위력으로 인문학을 점령하고 있는데 신학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신학은 교회가 있게 한 모태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상을 보면 신학도 위기란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대형교회의 브랜드목사들에게 대부분의 원인이 있습니다. 타락한 시장경제의 원리로 복음을 전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복음을 추락하게 만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세련된 상품으로 팔아 보겠다는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복음을 포장하는 테크닉만 발달하게 한 신학적 결과이므로 신학의 위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단순히 교인 감소 등 외적 성장의 정체만이 문제가 아니고 신학의 전반적 정체성이 위기로 인해 목회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이지요. 신학자라 하더라도 교회 현장에서 신학적 사고와 실험은 없고 실용적 목회 마케팅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인지 부흥사인지 의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신학으로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대학은 과거의 신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마디로 돈이 되는 실용적인 학과를 개설하여 종합대학교로 전환한 대학들이 유행했습니다. 각 교단의 신학대학도 그러했고 무소속 신학대학도 '짬뽕' 대학교로 전환하여 신입생을 마구잡이로 선발하여 일반대학교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돈이 되지 않은 신학대학은 구석에 밀쳐놓은 채 학교 구색으로 존재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압니다. 현재 한국교회 목사를 보면 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물량위주의 교회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신학대학에서 잘못 가르쳤거나 아니면 목사 자기 마음대로 신학을 변질시킨 것 중에 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실용주의적인 과학은 가시적으로는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고는 있지만 비가시적인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잠재적인 피해와 손해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용주의적인 과학은 우리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더우기 신학조차도 실용적인 신학이 목회 성공이란 빌미로 성장신학, 번영신학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대부분 그 본래적 기능에서부터 벗어나서 세상을 구원하는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우리들만의 예수굿판축제로 복음을 즐기고 있는데 이는 건전한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분명히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의 의도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머슴(종)들이 자기 명예와 목회 성공을 위해서 돈 더 많이 벌기 위해서 기독교 시장거리에서 복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머슴들이 파는 싸구려의 복음이 진짜 복음인냥 오해하고 있습니다. 짝퉁 복음이 진짜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인들은 짝퉁 복음에 대한 매력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런 복음이라면 별것 아니구나 하면서 진짜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세상 가치관과 다를 바가 없는 식상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는 이미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집단 중 하나로 인식된 지 오래입니다. 그 흔한 상가 교회가 이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았거나 부도가 나서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식있는 교인들은 개척 교회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인 헌금 강요가 정도가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짐이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불신자들도 잘 압니다. 교회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도 추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런 교회의 위기는 곧 목회의 위기로 다가 옵니다. 이것은 사회적 공신력 추락으로 이어집니다. 목사가 살인, 사기, 간음과 같은 범죄로 매스컴을 타게 되고, 무인가 신학교에서 무자격 목사를 양산하게 되니 목사의 사회적 공신력은 점점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사회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되는 요인은 교회의 물량주의, 지나친 독선과 배타주의, 교파 분열, 교세확장, 지나친 헌금 강요, 품위를 상실한 성직자, 사회 구제와 봉사에 인색함 등입니다.

목회의 위기 : 실용적인 축복으로 연명하는 교회

 

우리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해 준 미국 교회는 쇠퇴하는 단계를 지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도 부흥하는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교회는 자본주의적 마케팅 기법과 경영학적 테크닉으로 사람들의 관심사를 집중시키고 스트레스 해소 욕구를 적절히 복음으로 포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보다 문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미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와 기복 신앙과 축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성장 콤플렉스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교회 성장을 위해서 목회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콤플렉스는 경제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이 성장 이면에 감추어진 부작용들이 이제야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 귀족 노조들의 파업, 공무원 사회의 부정부패 구조화, 각종 개발로 인한 부동산 투기의 일상화, 반공이데올로기의 기계적 세뇌화로 우민화된 계층의 양산화, 부익부 빈익빈의 급속화, 등등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까지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위기적인 국면은 성장해 오던 한국 교회의 성장률 둔화와 교회안의 여러 가지 잡음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목회의 위기는 신학과 목회 현장의 괴리에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목회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요구는 신학적인 요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샤마니즘적인 기복제화 수준의 실용적인 축복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신학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유물론적 물질주의, 성공출세주의, 업적주의, 명예, 감투지향주의, 촌지, 로비 뇌물, 황금만능주의, 사치, 과소비 풍조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목회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주도권은 지본의 규모에 있습니다. 즉 자본금이 많은 회사는 작은 규모의 자본금을 가진 회사를 흡수하는 현상이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등장은 주변의 작은 교회의 교인감소로 영향이 미칩니다. 마치 대형 쇼핑 마트 등장으로 주변의 작은 슈퍼와 소매점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장이 급속하게 된 대형 교회의 공통점은 물량주의와  편의 시설 극대화, 기복적인 마케팅을 잘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대형 교회는  무당 종교로서의 기능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고 복채를 많이 헌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당 종교의 특징은 역사 의식과 윤리 의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무당종교화되면 자연히 기독교도 역사 의식이 없어지고, 윤리 의식도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꿩 잡는 게 메”식의 결과주의적 무당 목회 철학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우수한 점은 종교의 오락성에 있습니다. 무당이 하는 굿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는 재미있는 날입니다. 지금과 같은 오락이 별로 없을 때는 굿판이 스트레스 해소의 재미를 주었습니다. 그런 굿판의 오락성이 지금은 부흥회가 그 재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한판의 굿판을 벌인 것만 보아도 굿판의 오락성은 무시할 수 없는 이방 종교의 타락된 죄성의 원초적 모습입니다. 목회를 성경과 개혁적인 모습으로 하지 않고 교인들을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 잠시 위안과 기쁨을 주는 공간 종교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와도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대양 육대주에 제각각 다른 생태적 환경과 경제, 사회, 문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각각 다른 문화를 미국의 주도 하에 단일 경제권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화하여 각민족의 생태적 환경을 파괴시킴은 물론 고유한 민족과 사회 구조를 분열시키고 모든 인문학적 가치관을 파괴시켜 오로지 돈이 최고의 기치로 받아들이도록 무역 전쟁을 하서라고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글로벌 무역 정책의 실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글로벌 경제로 인한 세계화로 우리 생활이 편리함과 문화의 수준은 나아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유대감은 상실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가 해체되고 교회와 목회에도 영향이 끼칠 것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총체적인 학문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사회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신학의 위기는 결국 목회의 위기로 우리앞에 섭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착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기능적으로 법과 제도를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회적 풍토를 보면 총체적 위기라고 할 만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종들은 작은 교회와 농촌 교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기능적, 신학적 지식을 소유한 박사학위 브랜드의 덕택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 호거호차(好居好車)하는 것은 교회의 위기이자 목회의 위기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 부흥과 개혁
글쓴이 : 기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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