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회심자료]손양원목사의 가정교육(5)/나두선

baromi 2006. 9. 25. 08:18

http://kidok.net/column/content.php3?board=board38&page=21&uid=95&keyfield=&key=&bunho=38

 

 
2. 손양원 목사의 신앙사상

1) 신앙사상 형성의 배경

(1) 성경에 의한 사고와 행위의 기준 정신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고와 삶의 지침서와 행동규범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성경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성경을 떠나서는 손 목사의 신앙사상과 교육사상을 이해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손 목사는 이 땅에서의 신앙과 삶의 모든 사고와 행위들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지적으로만 깨닫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알고 충신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효자가 부모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의 삶으로 옮기려고 했고 실제로 실행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리 중 신조편 제1조인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의 내용과 같이 성경을 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받아들였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손양원 목사에게는 성경이외의 다른 표준은 없으며 성경을 떠난 그 어떤 신앙과 도덕 행위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 행위로 수감생활 중 성경관을 묻는 일본 경관의 심문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얻는 길과....현세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체 인생의 도를 행하는 교리가 기록되어 있어서...성경은 나에게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이다. 나는 교리를 굳게 믿고 인생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라고 하였으며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전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성경에서 성경으로 전부를 삼고 성경으로 성경을 풀고 싶다. 성경에 묻고 성경에 대답하고 싶다. 서론도 성경이요 내용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 되고져 한다. 즉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마치고 싶다"라고 설파했다. 이는 그의 사고와 행위의 근거가 성경이며 성경에서 모든 것의 해답을 얻고 성경이 그의 삶의 전부이며 성경해석에서도 일홀이라도 자기 개인의 생각이 섞이지 않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본문이 되고 주석이 되고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을 자기 개인생각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상황에 따라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손양원 목사는 "성경은 나의 유일의 신조요 신앙의 목표이다"라고 하였다. 예수사랑의 실천자인 사랑의 사도, 위대한 전도자, 교육자, 교육실천가, 순교자로서의 손양원 목사의 성공적인 삶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고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성경에 관하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혼란도 었었다. 손양원 목사의 이러한 성경의 절대적 권위 사상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발로이며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손양원 목사가 1902년에 태어나서 아버지 손종일 장로의 기독교 가정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할 당시에 한국 교회에 일어난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은 손종일 장로와 손양원 목사에게 성경의 절대적 권위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1907년 한국교회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은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교회와 가정에서 성경공부의 열기가 치솟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점 일획도 인간이 가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실천할 때 중생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교육을 교회학교로부터 또한 아버지 손종일 장로로부터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다.
손종일 장로는 칠원교회에서 대부흥 운동의 열기로 성경공부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고조되어 질 때 교회학교 교장직을 맡아 17년간 성경공부와 신앙교육에 진력하였음을 주목해야 하며, 손양원 목사의 성경 중심사상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사상 형성은 1907년의 대부흥 운동과 당시 칠원교회에서 17년간 교회학교 교장직을 맡아 충성했던 아버지 손종일 장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 증거로서는 초창기 칠원교회 당회는 성경말씀을 위배한 계명 불순종의 행위 즉, 성수주일 불이행자와 이방인과 혼인한 자 그리고 음주자 흡연자 그외 성경의 계명을 어긴자를 권징하였으며 당회록은 당시 당회서기인 손종일 장로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칠원교회 80년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 의한 불굴의 신앙사상과 애국정신

신앙 유산
손양원 목사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한 기독교 박해도 한풀 꺾이고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뿌려지기 시작할 때 38세의 나이로 이웃집 형뻘되는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드렸다. 예수를 믿는 즉시 그는 상투를 잘라 내고 술 담배를 끊고 대대로 지켜오던 제사도 그만두고 문중 제사 시에 제사상을 엎어 버리고 집에 있던 제상 제기 등을 불태워 버렸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만을 지켜 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설사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내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라고 하면서 불같은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고 예수를 영접하자마자 경건한 신앙인이 되어 밤을 세워 성경을 탐독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영접하였고 새벽기도, 아침저녁, 가정예배,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 등은 가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규칙이 되었다. 손종일 장로는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가족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의 교훈 즉 십계명의 교훈, 우상 숭배 금지의 하나님 명령과 어떠한 힘과 압력에도 신앙의 지조를 지켜 나갈 것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원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그 한없는 사랑의 얘기와 강제로 이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해간 일본에 대한 야만적 행위의 일들을 설명하면서 애국 애족심을 심어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가정에서 아버지인 손종일 장로의 불같은 신앙교육과 살아있는 신앙을 보고 성장해서 그 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실천했다. 손양원 목사는 계명을 철저히 지켜 우상숭배인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일장기에 경의를 표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하였으며 나환자를 자기 가족 보다 더 사랑하고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실천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공산군에 목숨을 바치기까지 대항했고 일본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던 것이다.
손종일 장로는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다 목사가 되었고(손양원, 손의준, 손문준)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길 목사는 성남 산돌 교회에서 목회 하다가 지금은 필리핀에 가서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손문준 목사의 아들 손동아 목사는 현재 서울에서 목회하고 있고,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의 아들 박유신 전도사도 목회자의 길을 위하여 준비 중에 있으며, 그 외 생존해 있는 손 장로의 후손들도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손종일 장로는 가정에서도 오직 하나님 중심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면 그가 평생을 섬겼던 칠원교회에서도 죽도록 충성하여 신앙의 모범을 보였고 교회 성도들과 어린 청소년들에게 교회학교 교장직을 17년간이나 맡아 신앙교육을 시켜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토록 하였다.
[칠원교회 80년사」를 보면 교회 초창기부터 집사 영수 장로 당회 서기 회계 등으로 교회의 살림을 거의 도맡아 헌신하고 충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집사로 3년 3개월 영수로 약5년 장로로 26년 교회회계 직분으로 17년 장년주일학교 교장으로 17년 당회서기로 약 20년간이나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칠원교회 장로로 봉직하던 중 교회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전 재산 논 5마지기중 세 마지기를 바치기로 했고 부인 김은수 집사가 나머지 두마지기를 추가로 바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손 장로 가정은 철저한 신앙의 교육적 모범을 보였다. 손 장로가 최초의 당회원인 장로로서 당회 서기로서 회계로서 섬겼던 칠원교회의 당회록을 보면 칠원교회의 신앙의 표준과 신앙교육을 알 수 있다. "칠원교회는 교회직원을 선출할 때 음주와 흡연을 하지 않는 자로 하는 것이 직원자격의 한 조건이었고 칠원교회 당회록 제 25회 제 5항에 보면 음주한 교인을 권면한 기록이 있고 절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고 되어있다.
주일성수 문제는 칠원교회 초창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신앙생활의 신조였다.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책벌 결의한 당회록을 보면 1919년 2월 제2회 당회록에 "삼인이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책벌하였으되..."라고 기록되어 있고 제3회 당회록 제1항과 제26회 당회록 1.2.3.4항 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제5회 당회록 1항에 "장자를 외방(이방인)에 장가들임으로서 교회법대로 책벌하기로 회중이 동의 가결하다"와 1929년 12월에 모인 제41회 당회록 1항에 보면 "불신자와 결혼하므로 7월 24일에 두달동안을 모자와 같이 책벌하였다"로 되었는데 그 때 손 장로는 당회 서기로서 당회장과 함께 결의하고 직접 당회록에 기록했다. 이것은 손 장로의 바른 신앙심과 가정에서 뿐 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훌륭한 신앙교육의 아버지 역할과 교사의 역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 신앙교육은 가정과 교회와 학교 모두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칠원교회 초창기에 권징이 엄격히 실시되었다. 외적성장과 지식교육 기복 신앙에만 빠져있는 현대교회들은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겠다. "칠원교회는 성도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지체없이 돌아보고 구제했다...조선 나병자 구제를 위하여 1921년 8월 7일 3원을 헌금하였다"라고 「칠원교회 8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일 손양원 목사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극치를 보인 것은 칠원교회와 그리고 당회원이고 재정부 회계이며 장년주일학교 교장이신 아버지 손 장로의 신앙교육인 구제활동의 열성적인 사랑의 교육을 본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교회마다 신사가 있었으나 칠원교회는 없었다. 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흔들릴 때 칠원교회 당회는 분명한 답을 얻고 교회가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더 확실한 태도를 보이기 위하여 노회에 신사참배 반대를 헌의했다. 손양원 목사가 광주형무소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면서 만기는 가까워져도(1943.5.17) 신앙이 여일하니 형무소 소장이 만주에 있는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들 손 목사가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출옥하여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 가정을 일으켜 세우도록 권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손 장로는 "신앙을 떠난 생활은 죽은 생활이나 같으니 옥중에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손양원)는 출옥할 수 없다"라고 정반대의 서신을 손 목사에게 보내었다. 애양원에서 손 목사가 신사참배 문제로 일경들에게 잡혀갈 때 손 장로에게 절을 하면서 아버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니 형사들 앞이라 긴 말씀 안 하시고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을 기억하라 하시면서 엎드려 기도하셨다고 하는데그 내용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9:62)",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은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하신 말씀이다.
이같이 손양원 목사는 칠원교회와 아버지 손종일 장로로부터 철저한 신사참배 거부 교육을 받았기에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신사참배 거부로 불굴의 신앙을 지켰으며 그의 두 아들 동인 군과 동신 군 역시 할아버지 손 장로와 아버지 손 목사의 철저한 신앙훈련과 애국애족 정신이 온몸에 서리어 있었기 때문에 신사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었고 일장기 앞에 경의를 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퇴학처분을 받았는데 이유는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신사참배 및 일장기 배례의식 반대이었다. 또한 집회장소로 칠원교회를 빌려주었을 때 일본시장이 담배를 피우려 하자 엄격하게 막아 성전의 신성함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런 교육의 영향을 받은 손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부패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사실상으로 성전을 함부로 쓴 까닭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전을 성전으로 알지 않는다"라고 탄식하였다. 현대 교회가 성전의 신성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손종일 장로는 윗사람의 책임감과 솔선수범의 모범을 매우 중시하였다. 손종일 장로는 외출 하시면서도 손자인 동인 군과 동신 군에게도 "동신아 내 박집사 집에 갔다오마. 동신아 나 다녀왔다"하시면서 가정에서 윗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예절교육의 모범을 실제로 보였고 교회에서도 3·1독립운동 만세 사건 때도 모든 성도들의 앞장을 서서 애국애족의 모범을 보였으며 칠원교회 건축헌금을 할 때에도 제일먼저 있는 대로 모조리 바치는 헌금행위로 최선을 다 하였으며그 외 모든 봉사에 있어서도 앞장을 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윗사람의 책임감과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이는 손 장로의 시청각 교육의 영향을 받은 손 목사는 6·25동란이 일어나서 애양원 교회 지도자인 손 목사의 생명이 위태로움을 알고 피난 갈 것을 간청하는 애양원 교회 김 집사의 권유에 "한국교회의 하나가 애양원 교회요 한국민족의 하나가 애양원 식구들입니다. 교회 양떼들을 등한시하고 한국교회 한국민족을 중요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애양원 교회 목회자인 자신이 자기 생명 보존만을 위해 양떼를 버리고 피난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는데 아버지인 손 장로의 기독교 가정교육과 칠원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의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애국사상
손양원 목사가 손종일 장로로부터 불굴의 신앙사상과 동시에 애국사상을 전수하였다. 손종일 장로는 "한일 합병"을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분노하였다. 그는 "한일합병은 한민족의 본의 아닌 일본의 강탈이며 세계의 전 약소국은 차제에 총궐기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라고 외치면서 앞장서서 항일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20년 4월 3일 오후 3시에 칠원읍내 장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각에 손종일 장로 등 8명의 성도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시장 한복판으로 나가서 손 장로가 먼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자 모든 군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으며 이날 체포된 손종일 장로등 8명은 대구 복심원에서 6월 10일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양원은 아버지 손 장로가 감옥에 들어가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가정 일을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갔으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아버지 손 장로로부터 철저히 배워나갔다.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은 기독교적 양육의 전제는 어린이는 다른 존재가 아닌 기독교인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손양원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였다. 손양원 목사 자신이 비기독교인 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정적 분위기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부쉬넬은 가정생활을 통하여 부모는 자녀들에게 경건의 훈련인 성경과 기도를 가르치고 예배에 참여하는 훈련을 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책임은 지식. 신조. 사상을 전달하는 의무 이상이라고 하는데 부쉬넬은 그것을 "신앙의 방법"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사랑과 인내에서 형성되는 가정분위기 자체를 의미하며 그 분위기가 곧 교육적이라는 말이 된다.
손양원 목사는 부모의 철저한 신앙 멘토링과 가정의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기독교적 양육을 받아 성장하여 신앙의 큰 인물이 되었고 손양원 목사 또한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 멘토링을 자녀들에게 실행하였으며 철저한 기독교적 가정분위기를 조성하여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제 끝 부분으로 순교성지 애양원의 순교자 묘소의 비문을 살펴보면서 손양원 목사 가정의 신앙유산 정신과 애양원 교회의 신앙 그리고 본인 신앙을 재음미코저 한다.

약사 신앙 삼계

1. 가정 신앙: "내 자손에게는 무엇보다 신앙을 전장하겠다." 이것은 고 손군 형제의 조부이신 고 손종일 장로의 자손 교양의 수훈이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왜정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를 위하여 남관 (南冠) 육년(1940-1945) 독실한 신앙으로서 승리하였고 어머니 정양순씨는 육년 박해에 어린 자녀 오남매를 이끌고 공장 고아원 산 촌 벽지로 쫓기어 기한도 참고 능모도 달게 여기며 신앙을 지키었다.
2. 교회신앙: 돕는 자 까지 형벌을 받던 때이나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의 신앙 정신의 훈도를 받아 힘껏 돕고 정성껏 기도하여 위대한 순교자를 길러내는 고난과 영예에 참여하였다.
3. 본인 신앙: 이러한 신앙 안에서 자라난 고 손 군 형제는 신사불참배와 일본 제국주의 교육제도에 반항하므로 퇴학되자 당시 형제는 같이 일터로 나아가 몇 푼의 일삯으로 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어린 아우들을 도우며 국토의 빈한과 싸우던 중 해방이 되어 각각 취학하였던 바 동인은 스물네살 순천사범 육학년 동신은 열아홉살 순천 중학 사학년 재학중 1948년 10월 21일 소위 "기독학생 운동의 두령"이라는 죄명으로 여순 소요를 일으킨 그들과 함께 한 동창 학우에게 잡히어 무수히 타매를 당하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형제는 같이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온유하게 권하면서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살리려고 서로 죽음을 다투는 형제애의 지정도 헛되이 형제 함께 껴안고 총 맞아 순교하는 순 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스데반의 뒤를 따랐었다.
애양원 교회 엮음 김수규 씀

이와 같이 손 목사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그의 자손 교양의 수훈대로 자손들에게 신앙을 전장하여 손종일 장로의 가계뿐만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에 귀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고 계속하여 그 귀한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서 손양원 목사가 목회할 당시의 애양원 교회 신앙에 대하여 ‘신앙 삼계’제 2항에 "교회 신앙"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의 역할을 재음미 할 필요가 있다.
박봉랑은 "몰트만의 신학"『신학연구(14집)』에서 몰트만의‘희망의 신학’을 설명하는 가운데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교회의 역할을‘출애굽 교회’라고 하였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로서 '교회의 자리’를 논하면서 기독교가 사회적, 공적인 종교로 부터 사적, 개인적인 자리에 떨어졌다고 비판했다. 그러기에 경건한 개인주의가 지배적이되고, 낭만주의가 되고 사회의 참여에서 후퇴하여 현대 사회의 삶의 중심이 되는 책임과 의무를 버렸다고 지탄한다.
손양원 목사는 몰트만이 현대 교회의 역할을 ‘출애굽 교회’라고 강조한 것과 같이 신의(神意),역사성, 사회성, 인간주체성을 억압하고 질식, 왜곡 시키며 사회 실존과 관계도 영향도 없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고 항상‘삶’자체‘생존’그것을 향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부단히 출애굽 교회화 하였다.
출애굽의 결정적 특징은 자유 의식이다. 손양원 목사는 신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진리가 자유케 되고 정의가 자유케 되고 인간이 자유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지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의 교회가 오늘의 사회에서 정의와 진리를 구현하면서 이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하여는 교회가 먼저 진정한 의인이 되라고 강조했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 교회의 하나가 애양원 교회요 한국 민족의 하나가 애양원 식구들이다" 하면서 애양원 교회의 신의 뜻 실천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서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범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애양원 교회는 이러한 손양원 목사의 '출애굽 교회’사상의 교육을 위협과 모진 형벌을 무릅쓰고 잘 받아들여 실천함으로써 위대한 순교자를 길러내는 고난과 영예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오늘날도 애양원 교회는‘출애굽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이‘출애굽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한 애양원 교회의 정신을 흑암한 현 시대와 사회에 적용시켜 나가야 할 사명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3) 일본인 나카다(中田重冶) 목사에 의한 예수재림 대망사상

손양원 목사는 일본 유학 중에 일본 동경의 판교 성결교회의 나카다(中田重治) 목사의 설교로 인해 큰 은혜를 받고 귀국하여 경남 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제 1회 피의자 심문조서에서 "기독교 입교 상황과 신앙경력"에 대하여 심문하는 일본 형사에게 대답하기를 "20세 때 내지(日本)에 도항하여 동경 판교 성결교회에서 목사 나카다(中田重冶)씨의 설교를 듣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했읍니다"라고 하였고 그의 자필 이력서의 기록에는 "1924년 3월 23일에 재차 도일했다가 중생 하여 10월에 귀국했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는 손양원 목사가 나카다(中田重冶) 목사로부터 신앙사상에 있어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나카다(中田重冶)목사는 일본 성결교회 감독 겸 판교 성결교회 목사로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강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나카다(中田重冶)목사는 원래 미국 무디 성서 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미국 북감리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새로운 전도방식의 신념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성서학원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일본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도일했던 카우만(C.E Cowman)과 상의하여 함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조직하여 일본 각 지역 복음화를 위한 노방전도에 진력하였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기성교회가 성서적 복음과 거리가 멀고 세속화 되었다고 신랄히 비판하면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의 복음"인 "사중복음"의 진리로 죄로 오염된 신자들을 구하여 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들 집단의 집회의 분위기는 찬송과 춤 설교 기도 간증 등을 열광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 거부를 분명히 하였으며 나카다(中田重冶)목사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급속한 도래를 강조하였다. 특히 나카다(中田重冶)목사가 "성서에 기록된 대로의 복음"론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신앙의 잠을 자고 있는 신자들을 깨워 죄에서 구원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급속한 도래를 강조한 신앙사상은 손양원 목사로 하여금 그의 사상의 큰 줄기인 성경말씀 중심의 사상과 종말론적 신앙에 의한 순교사상 그리고 교육사상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손양원 목사의 성경 중심사상과 종말론적 신앙 사상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한가지는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이었다. 유동식은 그 의 저서 『한국 신학의 광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이라 불러본다. 일본의 침략야욕으로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등이 망국(亡國)을 전후하여 완전히 아노미 상태로 빠져있었을 때 교회는 근본주의적인 확고한 삶의 기준을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삶의 의욕을 잃은 민중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일어난 것이 교회의 근본주의적인 성령운동(대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활성화하고 대중에게 접근함으로써 한국 교회 성장의 한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은 길선주 목사였다. 그가 행한 새벽 기도회와 사경회(査經會)는 한국 부흥회의 기본 형태를 만들었다. 그는 묵시록을 일만독(一萬讀)했다고 한다. 그의 기본 사상은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設) 과 말세론(末世論) 위에선 근본주의 사상이었다. 율법주의 성서관 위에서서 말세를 풀고 회개를 촉구했다. 주님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기도 했으며... 새로이 전개된 천년왕국(千年王國)을 말함으로써 현실에 좌절된 민중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묵시(默示) 문학적(文學的) 신앙운동이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야의 한국은 일본의 압력과 탄압으로 어쩔줄 모르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때에 한국 교회는 일본에 저항하는 애국과 독립의 투쟁거점이 되는 동시에 신앙의 열의로 민족적인 이 비극을 이기려고 노력했다.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의 특징은 성경 연구와 회개운동과 통성기도였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신앙 공동체의 일체감을 가지게 되고 내세를 소망하면서 암울했던 역사적 현실을 이기려고 노력했다. "대 부흥운동의 성격은 내세강조(來世强調)로 현실 난관 극복이었다."이러한 시대에 손양원은 출생하여 성장했고 교육을 받았고 목회를 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성경 중심 사상과 종말론적 신앙 사상의 형성은 1907년의 대 부흥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손양원 목사는 오늘날 강단에서는 성경말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듯 싶다고 탄식했다. 특별히 손양원 목사의 종말론적 신앙 사상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고난 극복과 불의와의 싸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종말론적 신앙을 바로 이해 할 줄 알아야 한다. 손양원 목사의 종말론적 신앙 사상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되었고 약속된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손양원 목사의 '종말론적 신앙'은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앙'과 유사점이 많다. 몰트만이 말한 그의 '종말론적 신앙'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세계와 타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계로 인하여 고난을 받기 시작하여 이 세계와 모순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계와의 불 평화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하는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과 비판을 일삼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 어떤 특정된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음흉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로,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평화의 세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건설적인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종말론적 신앙 사상은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앙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의 세계 발전을 위하여 일생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에 끝까지 충실했고 이를 위한 철저한 봉사의 삶을 살다가 갔다.

(4) 주기철 목사에 의한 순교사상

손양원 목사는 일본유학을 위해 제 2차로 도일했다가 동경 판교 성결교회의 나카다(中田重冶) 목사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귀국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고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거기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게 되고 그의 생의 마지막을 거룩한 순교로 마감한 순교정신을 계승받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1925년에서 1931년까지 6년간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동시에 후진들의 교육을 위하여 경남 성경학교에 나와 강의하였는데 특별히 로마서 강의는 학생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고 소명감을 일깨워 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이때에 학생으로서 스승인 주기철 목사로부터 주의 종으로서의 자질과 소명감을 깊이 배우고 깨닫게 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고난을 함께 할 것을 각오하였으며 스승인 주 목사의 가르침의 이론과 삶의 현장에서의 실천을 지켜보고 주기철 목사의 가르침의 이론과 실천이 일치함을 보고 주 목사의 순교적 삶을 따라가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 목사로부터 경남 성경학교에서 학문뿐만이 아니라 주 목사의 삶과 정신을 배웠고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해서 스승 주기철 목사의 이론과 삶의 일치를 지켜보았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 안을 제출하여 노회원을 놀라게 하였으며 부산일보가 이를 대서 특필하여 일본 당국자를 놀라게 하였다,즉 손양원 목사는 경남 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로부터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정신의 이론을 배웠고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주 목사가 신사참배 문제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불굴의 신앙의 의지로 감금 투옥 등으로 싸워 나가는 것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순교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실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갑자기 순교자가 되어지는 법이 아니다 잘 준비해야 되는 법이다"를 깨닫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경남 성경학교에서 강의할 때에 "신사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 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일 것이다"등의 교훈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는 "나는 예수를 믿게 된 이후 벌써 25개년 동안이나 되었다. 나는 그 동안에 천태만상의 신앙으로 복잡하였다. 여러 가지의 각 신앙 방면에서 오는 신앙 관념에서 헤매기도 하고 나의 내적 실생활에 있어서 많은 의심과 고민 중에서 헤매었다. 그러다가 30세 되던 해부터 정통의 기독자가 된 것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 30세의 기점은 손양원 목사가 경남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로부터 신앙 이론을 배운 후(27세에 성경학교 졸업) 주기철 목사가 그 이론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감명 받아 기록한 그의 신앙고백으로 본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수감생활 중 부인 정양순씨에게 보낸 1944년 5월 8일자 옥중 서신에서 "나를 유독히 사랑하시던 주기(株基) 형님의 부음을 듣는 나로서 천지가 황혼하고 수족이 경련하나이다.."라고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애도했으며 손종일 아버지로부터 옥중에서 주기철 목사의 부음의 서신을 받고 "부모나 자녀가 별세했다는 소식보다도 더 슬퍼서 30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애곡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기철 목사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손양원 목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36회 총회 주최 고 최봉석, 고 주기철 목사 순교 추도예배 설교에서 "자기를 위해 사는 것 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읍니다.....우리도 최 목사님과 주 목사님의 피에 따라 순교의 정신을 가집시다...그리고 잘 준비합시다. 앞서간 순교자들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말만하지 말고 실천에 옮깁시다"라고 하면서 순교의 각오를 분명히 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교육이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교육이론과 그 이론의 실천 즉 말과 행동의 일치가 참다운 교육이요 교육목표의 달성임을 깨달아야 하며 손양원 목사는 말과 행동의 일치라는 원칙 하에서 신앙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빛 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5) 신학교육에 의한 순수복음적 신앙 정신

경남 성경학교와 평양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교육은 손양원 목사의 순수 복음적 신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그의 체형조서(피의자 심문조서)에 나타난 심문하는 일본 심문형사의 질문에 나타난 신학적 체계의 신앙론이 분명한 손양원 목사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신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신학 강의를 하듯이 신학적 이론인 성경관, 신관, 재림관, 구속론, 말세관, 세계관 등을 분명하고 심도있게 설명하여 심문관의 질문이 막히도록 하였다. 특히 손양원 목사가 청주 구금소에 구금되어 있을 때 그의 신앙 사상의 전향을 위하여 기독교 계통의 학교와 일본의 모 대학을 마쳤다는 예수 믿다가 타락한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을 시켜 손양원 목사를 설득시키코저 하였다. 그는 손양원 목사에게 질문하기를 "조선 교회의 수난기라고 볼 수 있는 때에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여기 피신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로마에 있다가 네로 황제 박해 때에 로마를 떠나려고 하던 것과 같지 않을까?"라고 하자 손양원 목사는 "이런 수난 시국에는 진리를 진리대로 전할 수 없는 고로 비 진리를 진리로 속여 전하여야 하는 시국이란 말이요! 그런즉 진리대로 못 전하여 양떼를 죽이는 독소와 같은 비 진리를 진리처럼 전하여 모든 양떼를 독살시킬 바에야 차라리 그 목자가 옥중에 앉아서 있으면 함구 불언의 설교가 될 줄 안다" 라고 하니 아무리 말해야 고칠 수 없는 줄 알고 "잘 믿고 계십시오 당신 딱하오"하고 말을 더 계속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를 한국인에게서 말살시켜 버리고저 일본적 기독교 수립의 계략을 획책하였다. 그 한 방법이 신사참배 강요였는데 이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노리는 격이니 소위 일본정신 주입과 기독교 정신 또는 민족주의 정신 말살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와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손양원 목사는 순수 복음정신에 입각한 바른 신앙관으로 이들 불의의 세력과 싸워나가면서 이들의 회유와 술책과 협박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신학적 이론으로 대응하여 싸워 승리한 것은 바른 신학교육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 혼자만이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은 받은 것은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육을 손양원 목사처럼 받았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신학교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친 자 까지도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말았으니 아무리 이론적으로 바르고 훌륭한 신학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라도 그 진리를 바로 깨달아 실천에 옮기는 자 만이 참 교육자요 교육에서의 승리자,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신사 참배는 XX목사는 물론 신학교 교수나 박사도 하는데 왜 당신만 유독히 반대하느냐?" 의 일본 고등계 주임의 질문에 손양원 목사는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듯한 일이요 그러나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요 신앙적 종교요 감정적 종교가 아니요 체험적 종교입니다. 그런고로 신학박사가 믿지 못하는 진리를 무식한 노인들도 믿을 수 있고.."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이상으로 손양원 목사의 신앙사상 형성의 배경을 교육적 원리에서 살펴볼 때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 교육 현장을 부쉬넬의 가정 단일론 에서부터 확대하여 가정 교회 학교를 교육의 장소로 발전시켰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으며 손양원 목사는 본인의 이러한 경험에 의하여 신앙교육의 현장을 가정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가정, 교회, 학교, 삶의 현장 등으로 확대하여 실시하였다.

2) 신앙 사상 구조

(1) 칼빈 교리와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영향

손양원 목사의 교육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초가 되는 신앙사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교육활동은 그의 신앙적 바탕 위에 이루어진 하나의 탑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 사상을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요, 둘째는 성경 중심 사상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의미한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은 그 출발이나 종결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기초로 한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생활이다...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 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다."
"기독교는 주 만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는 종교다. 바울같이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면 된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다"라고 설파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하나님 중심 신앙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손양원 목사에 있어서 성경은 모든 신앙의 기본적이고 첫째 되는 자료요 그 논리 구조의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이해가 손양원 목사의 신앙 방향을 결정한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의 바탕과 방향이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손양원 목사의 신앙사상을 성경중심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말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체형조서에서 성경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본 심문관에게 "모든 성경은 나의 유일의 신조요 신앙의 목표이다"라고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모든 사상이 정립되어 졌다. 이와 같은 손양원 목사의 신앙사상인 하나님 중심 사상과 성경 중심 사상은 칼빈의 하나님 절대주권성의 사상과 일치한다. 현재 애양원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광일 목사가 엮은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20쪽에 보면 손양원 목사는 "칼빈 교리와 예정설을 절대 진리로 인정했다"(이광일 엮음, 1997, p. 20) 라고 기록되어진 것으로 칼빈의 신학 사상인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사상에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쉬넬의 신학사상도 칼빈의 하나님 절대 주권성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즉 뉴잉글랜드 회중주의(New England Congregationalism)사상 이었으며(칼빈주의) 다른 또 하나는 1740년에서 1742년까지 사이에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소위 "대각성 운동"에서 일어난 부흥주의 신앙이었다. 부쉬넬은 이와 같은 종교적 열광주의 상황 속에서 출생하였고 교육을 받았고 목회를 하였고 신학을 세웠다. 대각성 운동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신앙경험이 전체를 망각했고 따라서 성인들의 의식적 회심만을 구원에 이르는 획일적인 길이라고 보는 일방주의는 결국 어린이들을 신의 약속으로부터 배제시켰고 소외시키는 비극을 범했다고 부쉬넬은 비판했다.
손양원 목사도 부쉬넬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그의 신앙 사상 형성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국 초대교회 당시 경건과 거룩을 중요시한 칼빈주의 신앙에 입각한 장로교회의 신앙 정신과 부쉬넬 시대 때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대각성 운동과 같은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 등의 두 가지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칼빈주의 신앙의 중심사상은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을 하며 삶의 전체의 걸음걸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경건과 거룩함의 삶을 말한다. 손양원 목사는 이러한 거룩함과 경건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에서의 부모로부터 또한 교회와 학교로부터 직접 간접적으로 교육을 받아 오면서 그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사상, 성경 중심 사상의 신앙으로 형성되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가 신앙사상 형성에 영향을 받은 다른 또 하나는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인데 그것은 부쉬넬 시대 때 대각성 운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부쉬넬이 대각성 운동의 열기가 한창인 때에 활동한 것과 같이 한국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1907년에의 손양원 목사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모든 것을 인지하고 기억하고 영향을 받을 나이었다.
한국에서의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은 원래 1903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원산에서 가졌던 사경회에 있었다. 이 사경회는 계속해서 있었고 이 집회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아오다가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계속된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열렸던 사경회 때 그 절정을 이루어 큰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전도 집회로 모였다. 한국교회는 이 대부흥 운동에서 세 가지 의미 깊은 발전을 경과했다. 하나는 한국교회는 경건주의적 신앙과 도덕적 정결의 교회로 구형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서 교회는 공동체적 민족 의식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는 선교사와 민족적 교회인들과의 구별을 통감한 선교사나 목사들의 관심이 일체감의 호소에 집중되어 요한복음이나 고린도서 같은 전거(典據)들이 항상 텍스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연합 정신의 배태와 그 구체화를 들 수 있다. 즉 평양에 신학교를 세워 1907년에 7인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1907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고 신학 졸업생을 안수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입각한 신조를 교리로 채택하여 경건과 거룩함의 신앙생활의 강령이 수립되었다. 손종일 장로를 비롯한 초창기 한국교회의 신도들의 경건함과 거룩함의 뜨거운 신앙정신과 애국 애족정신은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손종일 장로의 경건한 신앙정신과 애국 애족 정신은 손양원 목사에게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민경배 교수는 이 대부흥 운동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논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 형태를 구형한 대전환기로서의 위치에 서 있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그 신앙의 유형이 '소박한 신앙' '인격적인 경건의 신앙'이니 해서 그 특징을 개인의 영혼의 구원에 두었다고 세계 교회는 보아 왔다. 그러나 이 대부흥의 불길이 고린도전서 12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진행된 점이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례의 문제를 클라이맥스로 한 한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전거(典據) 노릇을 한 구절이다. 교회 안의 부조화와 교회간의 문제를 이렇게 기독론적인 교회관의 입장에서 밝힌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었다. 하나님과 개개 영혼의 인격적 관계의 개념에서 교회의 성례적 개념 교회의 공동체적 개념으로 변했을 때 하나님과 만날 장소는 신도들의 공동체이지 골방이 아니라는 교훈을 한국교회는 체험하고 있었다. 결여되었던 성례의 의미를 한국교회가 발견할 것이다. 불레어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여럿이 아니고 하나인 교회" "나뉘어 있을 때 당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아픔"을 온 교인들이 보고 체험했다 라고 쓰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도들의 공동체인데 성례적 개념의 공동체로서 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자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 공동체가 바로 구원받은 공동체라는 의미이다. 물론 그 대부흥 운동시에도 유아세례는 있었으며 손양원 목사의 동생 손의원과 손양원 목사의 자녀 손동인 손동신 손동현 손동희 등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도의 자녀는 지체없이 유아세례를 받아야 옳은 일이다"라고 칠원교회 8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 부흥운동에서의 교회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한 몸인 신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있는 어른이나 어린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 언약 안에 있으며 그 언약은 교육과의 변증관계를 가진다는 부쉬넬의 주장과 상통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부쉬넬 시대의 대각성 운동은 교육적으로 해악적 이라고 보았지만 한국의 대부흥 운동은 교육적으로 매우 유익하였다고 본다.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기독교 가정과 교회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는 성경공부와 새벽기도회 전도사업의 열기가 확산되었으니 기독교 교육적 측면에서는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손양원 목사의 교육사상 중 성경 중심사상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진환은 그의 저서『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의 부흥 운동의 양상이나 실태를 보면 첫째, 이들은 성경 중심의 사경 부흥회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선교 하다가 한국에 와서 사경회를 인도했던 선교사 화이트 양 (M. C. White) 이나 하디목사, 방위량 선교사나 그리고 이길함 목사 등 모두가 성경 중심 사경 부흥회를 하였으며 길선주 목사도 묵시록을 일만독(一萬讀) 했으니 그 당시 얼마나 성경을 중요시 했던가를 알 수 있다.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인 안용준은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을 펴내면서 "기도로 호흡을 삼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고 복음전도로 생활을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손양원 목사가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한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로부터 그리고 교회와 학교로부터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전도사업 등의 훈련을 철저히 받았으며 손양원 목사 자신도 대부흥 운동의 뜨거운 열기를 직접 보고 느끼며 깨달아 나아갔기 때문에 후일 그의 삶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기도중심, 전도중심의 삶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손양원 목사의 신앙사상과 교육사상은 칼빈주의 신앙정신에 입각한 한국교회 초기의 경건함과 거룩성의 신앙정신과 다음으로는 1907년의 대 부흥운동으로 인한 교회 갱신정신과 열성적 신앙정신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쉬넬은 당시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대각성 운동이 성인들의 의식적 회심만을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면서 어린이들을 신의 약속으로부터 배제시킨 것을 비판하며 "기독교적 양육"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1907년의 한국교회의 대 부흥운동의 영향은 손양원 목사로 하여금 회심과 양육의 두 가지 교육사상을 형성하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08년 일본주재 매소디스트 교회 감독 해리스(M. C. Harris)는 볼티모어에서 모인 매 4년마다 열리는 총회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이 운동(1907년의 대 부흥운동)의 결과는 매우 좋다. 교회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올라갔고 미리 주의 깊은 성서교육 때문에 광신적인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이 돈 일이란 한 번도 없었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다 정상적인 상태이다. 성직 소명을 느낀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고 한 장소에서 200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글읽기를 배우고 질문을 한다. 주정뱅이들, 도박꾼들, 도둑놈들, 간음한 자들, 살인자들, 스스로 의인 행세하는 유교신자들, 죽은 거나 다름없는 불교도들, 수 천명의 마귀 숭배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옛 것은 영원히 사라졌다.

1907년의 대 부흥운동에 대한 해리스 감독의 이러한 성격 규정은 손양원 목사의 교육사상이 회심과 양육의 두 가지 면을 주장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회심과 양육의 통로를 통하여 구원되어진다는 원리이다. 다수가 부쉬넬이 회심을 믿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필자는 옳지 않다고 본다. 부쉬넬 당시의 부흥 운동가들은 돌변적 회심이 중대한 체험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부쉬넬은 회심을 보다 더 과정적 체험으로 보았다. 이 과정적 체험이 바로 양육 또는 교화(cultivation)라는 것이다. 즉 양육을 통하여 서서히 회심에 이른다는 원리이다. 이것이 바로 부쉬넬의 "기독교적 양육"의 원리이다.
해리스 감독이 1907년의 대 부흥운동에서 증언한 내용 중 "주의 깊은 성서교육 때문에...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옛 것은 영원히 사라졌다"라고 한 것은 부쉬넬의 기독교적 양육원리의 회심인 "과정적 회심"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손양원 목사의 교육사상 즉 회심과 양육의 양면은 이러한 기저에 근거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손양원 목사는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배워 자라간다. 기도하며 성경 읽고 우리 신앙이 자라 우주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라고 말하였다.

(2) 성경관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주장한다. 손양원 목사는 수감 중 피의자 심문조서에서 성경에 대한 관념을 묻는 심문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경에는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이 있다. 구약성경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에 대한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 강림까지의 일체의식이 기재되어 있고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증명과 신앙에 의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또 현세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체 인생의 도를 행하는 교리와 또 내세에 있어서의 부활 교리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성경은 나의 유일의 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에 기록 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굳게 믿어 마지 않읍니다.

손양원 목사는 네 가지 형태의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첫째 만물이 성경이다(요한12:25), 둘째 기록된 성경이다(딤후3:16), 셋째 예수자신이 성경이다(요5:39), 넷째 신자의 행위가 성경이다(고후3:2-3)라고 했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그의 설교에 대하여 "서론도 성경이요 내용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 되게 하고저 한다. 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칼 바르트가 말한 계시된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성서로서의 하나님 말씀(쓰여진 성경), 그리고 선포된 하나님 말씀(설교)의 세 가지 형태의 성경관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가 마지막에 말한 "신자의 행위가 성경이다"라고 한 것은 교육 실천가로서의 성경관임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또한 그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를 강조한 점으로 보아 손양원 목사가 개혁주의 전통 신앙관에 입각한 성경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신 관

손양원 목사에 있어서 하나님 이해는 무한하고 증명할 수 없는 초월적 신비적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너무도 신비하고 오묘하여 인생이 가히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을 초월하신 신의 대지대능(大智大能)이시다"라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비성을 분명히 지적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손양원 목사는 정통적 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분으로서 그 계시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피의자 심문조서에서 "기독신자에 있어서 하나님 이해 여하"를 묻는 심문관에게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2. 하나님은 의이시다, 3. 하나님은 빛이시다, 4. 하나님은 영이시다, 5. 하나님은 만물 창조주이시다, 6. 하나님은 주재자이시다, 7. 하나님은 말세에 있어서 만민의 심판관이다"라고 답변했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는데 손양원 목사가 위에서 언급한 다섯 번째 "하나님은 만물 창조주이시다"는 일반계시로서 인간은 자연계를 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자연계를 보아서 하나님의 솜씨를 깨닫고 그것을 깨닫을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초자연적으로 특별히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다 라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위의 첫 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해설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함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만민을 위해서 구주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강림하시게 하며 십자가를 지어 만민을 구원하고저 하심을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현은 하나님 자신의 참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참사랑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특별계시를 통하여 주신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의 정의에서 "만물이 성경이고 기록된 성경이 있으며 예수 자신이 성경이다"라고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졌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자신을 계시하시는 특별계시인 것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네 번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며 지체나 몸을 가지심이 없으므로 모든 제약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성의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과 영교가 있을 수 없다.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의 해설에서 하나님의 속성이신 무소부재 무소불능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은 제약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요약하면 손양원 목사의 신관은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고 영원한 존재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인격(personality of God Himself)을 인간에게 계시해 줌으로써 그 계시가 인간의 경험(이성)안에서 연결되어져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양원 목사의 신관은 부쉬넬의 신관과 차이가 없다고 본다.

(4) 기독론 이해

손양원 목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1위 2성이다. 2성이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란 말이다...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지옥을 면하고 천국으로 올라가 무한한 생애를 누린다" 라고 하여 신적 그리스도이면서 하나님의 당신 자신의 계시로서 인간 예수를 즉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으로서의 인간 예수로 보았다. 또한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그 사랑은 구속적 의미를 가지며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다라는 것이며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과 구세주가 되심에 초점을 맞추며 신이면서 인간예수로서의 행위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 함은 만민의 죄를 위해서 구주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서 만민들 구원하도록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의미를 그리스도론에 맞추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경험의 길은 타인의 비애와 고통속에 참여하는 길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참여의 방법은 자기 "희생"으로 이해한다. 자기 자신의 삶도 그리스도의 삶처럼 희생의 삶을 살기를 원했고 그리고 실천했다.
그는 "차라리 내 몸이 저들(나환자들)과 같이 된다면 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일생을 같이 넘기려 하오니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사 어루만지심 같이 내가 참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들의 슬픔과 고난에의 참여의 각오와 희생정신의 일단을 보여 주었고 일생을 그렇게 살다가 그의 삶을 마감했다. 손양원 목사의 기독론은 신적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참여의 경험은 인간자신이 타인의 고난에 참여 해야한다는 양면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그의 교육사상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다.

(5) 구속론 이해

손양원 목사는 구속의 원리에 대하여 "사죄의 특권을 받은 자는 누구냐 하면 십자가의 보혈에서 죄 씻음을 받은 자이다. 즉 회개한 자이다. 십자가를 말 할 때에는 죄가 관계가 된다. 그러나 부활하면 죄 생각 없어지고 새 기력과 신세계의 소식을 가져오는 듯한 심령 기분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희생 고통 사랑이 없으면 어찌 부활이 있겠는가. 그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 그를 믿을 때 인간을 향한 그 사랑 희생 고통의 원리를 알 때 죄 씻음 받고 구속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손양원 목사는 구속에 대한 객관적 이해로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짐 즉 사죄의 특권을 받은 자는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 그는 대속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보았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의 구속에 대한 주관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속 사건은 인간 삶의 현장에서 삶이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는 사죄의 특권을 받은 자 즉 구속받은 자는 먼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 희생 고통의 원리를 알 때 죄 씻음 받고 참 구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속된 자는 "겸비하여지고 온유하여 진다"라고 하여 구속받은 자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구속론 이해를 신의 화해적 희생적 대속적 사랑이라는 객관적 의미와 또한 가정의 연장인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희생 고통의 원리를 알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험으로 그 구원이 사건이 되어 그가 말했듯이 구속된 자는 겸비하여지고 온유한 자가 되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주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손양원 목사의 구속론은 부쉬넬의 구속론과 별 차이가 없다.

(6) 인간 이해

부쉬넬은 인간이 물질적 존재만도 아니요 영적 존재만도 아닌 영과 육의 관계성 속에서 표출될 수 있는 제3의 존재로서 인간은 세상적인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동시에 타락한 물질적 존재라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인간관도 부쉬넬의 인간관과 맥을 같이 한다. 손양원 목사는 "어른들에게라도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아이들은 천진 그대로이니 모든 세정에서 멀리 떠난 인생의 본질 그대로이니..."라고 하면서 아이들의 순진한 마음 정직한 마음을 강조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순진함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인간이 가정이나 사회문화 등의 환경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타락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교육에 의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로 보는 비관적 인간관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어른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창조되어진 아이들에게서 배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는 존재로 인간을 보았으며 그래서 그 자신이 교육과 설교목회를 통하여 또한 실천적인 삶으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양육 즉 교화(cultivation)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부쉬넬이 인간을 물질적 존재만도 아니요 영적 존재만도 아닌 영과 육을 포괄하는 제 3의 존재라고 하였는데 손양원 목사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손양원 목사는 "기독자는 외부나 육체만 보지 않고 중생한 영적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세상적인 존재이면서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동시에 타락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중생한 기독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참 예수를 알지 못하면 어떤 때 어떤 환경에서 쓰러질 지 모르니 섰다고 자랑말고 예수를 아는 일에 일로 매진하자"고 했다. 손양원 목사는 인간의 의지가 죄악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한 무능한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것이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되며 그 예수를 앎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그 의지를 확고히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계획하시는 새로운 존재로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손양원 목사에 있어서 죄의 개념은 예수를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는 "인간은 무능하다. 마치 창문을 닫았을 때에는 먼지가 없는 것 같더니 창문을 여니 햇빛이 들어오며 방안에 먼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인간의 무능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부쉬넬의 죄의 개념은 "능력상실(incapacity to overcome)"을 의미하는데 손양원 목사가 위에서 말한 "인간은 무능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죄악의 구름이 가리웠으니 영적 소경이 되어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죄악의 구름"이나 "창문을 닫은 상태"의 표현은 예수를 알지 못한 육적인 인간상태를 말하며 이 육적인 인간상태가 그가 앞에서 말한 "가르침을 받음"의 표현인데 이것은 육적인 무능한 인간이 예수를 알아 가는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적 인간에로 변화되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손양원 목사는 회심을 경시하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중생치 않고는 아무리 해도 죄악의 자식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베드로 다윗도 바울도 회개에 철저했다는 것을 볼 때에 우리도 회개에 철저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속과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루터나 칼빈이 주장한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부쉬넬과 같이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요약 할 수 있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