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회심간증(13):존 뉴톤-노예상인에서 목사가 된

baromi 2006. 9. 22. 08:45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 존 뉴톤.

 

어메이징 그레이스만큼이나 그의 회심의 과정이 잘 알려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라도 그의 어메이지 그레이스가 복음송가수의 입에서 값싸게 불려지듯이 그의 회심도 싸구려 가게의 일회용품정도쯤으로나 취급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회심과정을 읽어가노라면 그가 참된 복음을 깨우치기까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번민과 회의와 의심을 느끼게 된다. 그저 단순히 노예상인에서 어느날 갑작스럽게 목사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그의 회심간증을 읽어가야 할 이유는, 바로 이 진지한 고뇌의 긴 터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회심하는 그 순간에 어떻게 어린 시절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말씀들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가 어떻게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서 또한 복음의 복음됨에 대해서 그 사경의 위기 속에서도 '추론'(reasonings)하고 있는지, 그의 지성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주목하기를 바란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조차도 그는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감정'으로 그 위기를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참된 회심의 증거이다.

 

머리를 거치지 않는 마음만의 울림은 공허한 회심에 이르는 첩경이다.

 

회심했다고 하나, 전인격을 사로잡지 못하는 허약한 복음에 매달려 여전히 허덕거린다.

 

거짓된 회심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대에,

 

뉴톤의 회심간증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뉴턴은  편짓글로 유명하다. '마음의 소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라는 서간집으로 출간되기도 한 그의 편짓글들을 직접 보려면,

 

http://www.puritansermons.com/newton/newt_b.htm

 

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주옥같은 그의 권면들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래의 글은, http://chi.gospelcom.net/pastwords/chl027.shtml 에 있는 자료인데, 존 뉴턴의

 

회심과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의 회심에 영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그에게 감화를 받은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폐지운동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한국사회에 이런 영향은 이런 회심을 통해서 가능해 짐을 시사한다.

 

물론, 윌리엄 윌버포스의 회심간증도 번역할 계획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길 기도하면서

 

 

사죄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주의 한 종.

 

은.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by John Newton

 

http://chi.gospelcom.net/pastwords/chl027.shtml

 

 

브리태니커사전에 나오는 존 뉴톤에 대한 간략한 소개:

 

JOHN NEWTON (1725-1807), one of the leaders of the Evangelical revival and friend of the poet William Cowper (Q.V.), was born in London on July 24, 1725. 복음주의부흥 지도자이며 시인 윌리엄 카우퍼의 친구인 존 뉴턴(1725-1807) 1725 724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He had little formal education and served from 1736 to 1742 on the ship in the Mediterranean trade of which his father was master.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선주였던 지중해무역선을 타고 1736년부터 1742년까지 일하였다. Early in 1744 he was impressed on board a man-of-war, the “Harwich,” where he was made midshipman. 1744년 초반에 “Harwich” 선상에서 용맹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서 선원후보생이 되었다. For an attempt to escape while his ship lay off Plymouth he was publicly flogged and degraded. 배가 플리머쓰에 좌초되었을 당시 도망가려 한 것 때문에 공개적으로 태장을 받고 강등되었다. After this experience he joined another vessel bound for Africa, where he took service under a slave dealer. 이런 일 이후에 그는 아프리카행 배를 타고는 노예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Then in 1747 he returned to the sea, and for a time became captain of a slave ship. 1747년에 배를 다시 타고는 얼마간 노예무역선의 선장이 되었다. Newton, known previously for his unbelief and blasphemy, underwent conversion during a storm at sea in 1748. 불신앙과 배역자였던 그가 1748년의 바다에서 만난 폭풍 속에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He finally gave up seafaring in 1755 and was appointed tide surveyor at Liverpool where he came to know George Whitefield and John Wesley. 1755년 마침내 그는 선원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리버풀에서 조류검사원으로 임명되어 일하던 중 죠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를 알게 된다.  He now began to study Greek and Hebrew and in 1758 applied to the archbishop of York for ordination.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고 1758년 요크의 주교목사에게 목사임명을 신청하였다. This was refused him, but having been offered the curacy of Olney, Buckinghamshire, in April 1764 he was ordained by the bishop of Lincoln. 거절되었지만 버킹검셔의 Olney의 부목사자리가 1764 4월에 나게 되었고 링컨교회의 주교에 의해서 성직수임을 받았다. In Oct. 1767 William Cowper settled in the parish. 1767 10월에 윌리엄 카우퍼가 그 교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The two men became close friends and they published together the Olney Hymnal (1779). 이 두 사람은 서로 절친하게 되어서 함께 온리찬송가를 발간하였다. Newton's contribution included, among many other hymns, the well-known "How Sweet the Name of Jesus Sounds" and "Glorious Things of Thee are Spoken." 이 찬송가집에 포함된 뉴톤의 찬송가사는 귀하신 주의 이름은”(찬송가81)시온성과 같은 교회”(찬송가245) 같은 곳이 포함되었다. The most important of his works was Cardiphonia, or the Utterance of the Heart (1781), a series of devotional letters. 그의 저작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Cardiphonia(마음의 소리)라는 일련의 서간문이다. It was through his letter writing that Newton made his greatest contribution to the Evangelical movement. 뉴톤이 복음주의운동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을 통해서였다. In 1779 he left Olney to become rector of St. Mary Woolnoth, London. 1799년 그는 온리를 떠나서 런던의 St.Mary Woolnoth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There he exercised an important ministry, influencing many, among them William Wilberforce, the future leader in the campaign for the abolition of slavery. 그곳에서 중요한 사역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들 중에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윌버포스는 노예제폐지의 지도자가 된다. Like Cowper, Newton held Calvinistic views, although his evangelical fervor allied him closely with the sentiments of Wesley and the Methodists. 카우퍼와 같이 뉴톤은 칼빈주의적 관점을 취하면서도 웨슬리와 메소디스트들과 밀접한 감정을 연대하면서 복음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He died in London on Dec. 21, 1807. 1807 12 21일 런던에서 사망. [From the Encyclopedia Britannica]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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