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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유다복음서비판

baromi 2006. 9. 10. 23:19
 

“유다 복음서”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6 4 22

권호덕 교수(백석대학교, 교의학)


2006년 4월 21 밤 12시 케이블 TV National Geographic(NGC)은 유다복음서가 발견되고 최종적으로 발간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재방영했다. 한 여성 전문가는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쓴 유다의 억울함을 벗겨주기 위해 자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유다복음서의 의의를 설명했다. 과연 이 복음서가 그토록 큰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만일 이 여성 전문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의 근간은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유다복음서를 읽어보면 너무나 어떤 특별한 관점으로 채색(彩色)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유다복음서의 내용을 받아드릴 수 없을까? 문제점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까?

대부분의 매스컴은 유다복음서가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을 “유다는 옛 그리스도의 배반자가 아니고 사실상 그의 가장 신실한 제자였다.”1)는 것이다. Augsburg 대학교의 신학교수인 Gregor Wurst는 National Geographic 전문잡지가 주관하는 설명회에서 “이제 텍스트는 제시하기를 유다는 그리스도의 소원을 알고 배반을 통해 그것을 이룬 유일한 사람이다”(ibid.)라고 말하며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다른 말로 유다는 예수의 배반자가 아니라 예수의 사명을 이루는데 결정적으로 도왔던 예수의 가장 신뢰를 받았던 제자라는 말이다. 이 필사본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 제자인 유다에게 자기를 로마인에게 넘겨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결국 유다가 배반을 통해 예수를 돕지 않았다면 구원 사역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유다를 부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논지는 사복음서의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 비록 요한복음이 예수께서가 유다에게 배반을 촉구하는 암시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2)

그러면 이 사건은 갑자기 가짜 문서가 나타나 기독교에 위협을 가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여기 관심의 대상이 된 필사본은 진짜인 것으로 판별되었다. 독일 뮌스터 대학교 Prof. Stephen Emmel 교수는 이 필사본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3)

유다복음서와 성경의 복음서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그리고 유다복음서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레니우스는 AD 2세기경에 가인과 가룟 유다를 숭배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유다복음서에서 영지주의자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 복음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유다복음서는 구약과 신약사이의 ‘약속과 성취’라는 구도(構圖)을 모른다.


성경이 여러 자연 종교나 고등종교의 가르침과 구별되는 점 중에 하나는 처음이 있고 마침이 있는 시간에 대한 관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항상 과거의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현재에 감사하는 삶을 가르칠 뿐 아니라 미래의 한 시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내지 각자의 죽음의 시점에 관심을 가지면 현재에 준비하는 삶을 살 것을 가르친다. 말하자면 성경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관심의 대상이며 영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시간의식을 촉구한다.

우리가 유다복음서를 읽으면서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시간적인 요소가 간과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시적(可視的)인 현상 세계와 불가시적인 형이상학적인 세계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은 구약의 예언 또는 약속 내용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예언 또는 약속의 성취’라는 도식으로 예수를 해석한다. 성경은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는 직선적인 역사관(歷史觀), 언약을 맺고, 지키며 그것을 이루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매우 뚜렷이 제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구약성경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원복음의 약속으로부터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계속 언약의 백성들에게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확신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언급하여 언약의 백성들의 눈길이 그 성취 지점으로 향하게 만든다.4)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온다.5) 여기에는 언약 당사자인 인격인 하나님과 인간, 언약의 조건과 상급 또는 형벌이 언급된다. 이런 내용은 이방의 신화나 설화, 종교 그리고 철학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성경의 독특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와는 달리 유다복음서에는 구약성경의 약속이나 예언이 성취했다는 내용을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영지주의가 구약성경을 부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약성경을 영지주의(靈知主義) 체계를 위해 우의적으로 해석한 연고이다. 이를테면 성전과 제사장, 제물 드리는 일 등 구약의 용어를 자기 나름대로 임의로 사용해서 자기들의 비밀을 열거한다. “너희가 제단에서 제물들을 받는 것을 본 그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너희들이다. .... 하나님이 한 제사장의 손으로부터 너희의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6) 즉 이들은 구약의 발언을 시간적인 차원에서 약속과 성취의 구도(構圖)로 이해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역사적 또는 시간적인 요소가 배제되는 것이다.

유다복음서가 구약의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지 않고, 현세를 불가시적인 차원과 연결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약성경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복음서’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유다복음서에는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적(歷史的)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시간적인 요소가 배제되는 경우 인간은 이원론에 더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영적인 세계에만 치중한 나머지 문화창달의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다.


2.  구원에 필요한 비밀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


영지주의(靈知主義)에서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지식’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달한 비밀지식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경우 구원을 받으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였으며, 우리가 무엇이 되었으며, 우리가 어디 있으며 혹은 우리가 어디서 타락에 이르게 되었으며, 우리가 어디로 서둘러 가고 있으며, 어디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으며, 출생이 무엇이며 중생이 무엇인지를”7)알아야 한다.8)

매우 흥미롭게도 유다복음서는 ‘예수의 정체를 인식하는 문제’를 다룬다. “어떻게 너희들이 나를 알겠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있는 이 세대의 어떤 사람들도 나를 알지 못 한다”9) 유다복음서는 유다가 그 비밀을 알았음을 “나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지 압니다. 당신은 바벨로의 불면의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이름을 언급할 자격조차 없습니다”10)와 같이 지적하나 구원의 수단이 지식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원에 필요한 지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열거함을 통해 유다서가 영지주의에서 비롯됨을 암시한다.

그러면 성경은 ‘인식’ 내지 ‘지식’을 구원문제와 연관하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에도 ‘안다’라는 동사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 ‘안다’라는 동사는 ‘나’와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믿음의 관계와 동의어로 사용된다.11) 그런데 영지주의의 경우 인식은 구원자와 우리 사이의 이런 인격적이고 생명의 관계를 배제한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인식은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지양하고 ‘비밀정보’를 얻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유다복음서는 예수를 이 비밀의 지식을 전달하는 자로 표현한다. 유다복음서는 예수가 유다에게 이 비밀을 말한 것으로 지적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떠나라 그러면 내가 네게 그 나라의 비밀들을 말해주겠다”12)여기에는 인간과 구원자 사이의 인격적 관계는 물론 하나님 형상으로서 예수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요소는 배제된다.

이런 면에서 유다복음서가 구원은 그리스도 전달한 비밀 지식을 통해 온다고 믿는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기록한 12개 거룩한 문서 가운데 하나라는 Guy Gugliotta와 Alan Cooper의 발언은 주목할만하다.13)



3. 유다는 열 두 제 자들 가운데 탁월한 지위강조


유다복음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완벽한 인간을 데려오라고 할 때 제자들은 자기들은 비록 그럴 힘이 있었지만 그들의 영들은 감히 그의 앞에 설 수 없었음을 지적하고 유다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유다의 탁월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영들은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었다".14) 또 유다가 세례 받은 자들의 할 일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탁월한 위치를 지적했다.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나를 옷 입힌 그 사람을 희생(犧牲)제물로 드릴 것이다”15)

우리는 신약성경에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어떤 제자를 다른 제자와 비교해서 그를 탁월하게 내 세우는 경우가 없다. 심지어 최 측근의 제자들인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그들을 높은 자리에 천거할 때도 ‘고난 받는 일’을 언급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을 받거나 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런 점에서 여기 유다를 다른 제자들에 비해 탁월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인위적인 시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유다를 부각시키는 시도가 가인과 가룟 유다를 숭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의도적인 그 무엇에 의한 것이라 말이다.



4. 신화적인 신관과 우주관


한 마디로 유다복음서는 매우 복잡한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창조자를 한 명으로 말하지 않는다. 또 이 복음서는 매우 복잡한 우주관 내지 천국관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신관과 우주관 이 두 가지는 함께 열거해야 둘 다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유다복음서는 여러 세대들을 말한다. 이 복음서는 우선 두 가지 세대를 말한다. 그 중에 하나는 이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저 세대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한 말을 보면, 이 세대 사람들은 예수를 보낸 자의 이름을 언급할 자격도 없다고 한다.16) 이런 발언은 물질세계와 영적인 세계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 특유의 이원론에 기인한다.

예수가 “바벨로의 불멸의 세계로부터 왔다”고 할 때(scene 1).17) 이것은 저 세대(世代)를 말한다. 예수께서 사적으로 유다에게 “위대하고 거룩한 다른 세대에게 갔었다”라고 할 때(scene 1, scene 2), 이것이 바로 저 세대이다. 이 다른 세대는 이 세대에 태어난 자들은 세대를 보지 못하며 그 별들 안에 있는 천사들의 주인도 저 세대를 다스리지 못하며,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도 저 세대와 연결할 수 없다(scene 2)고 한다. 또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거룩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곳, 해와 달도 그 곳을 다스릴 수 없고 낮도 그러한데, 천사들과 함께 살 영원한 세계이다(scene 3)라고 말하여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특징을 암시한다.

유다복음서는 천사들의 세대들이 보지 못한 ‘위대하고 끝없는 영역’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불가시적인 위대한 영(靈), 지금껏 어떤 찬사의 눈도 보지 못했고, 어떤 마음의 생각도 이해해 보지 못했으며,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보지 못한 ‘위대한 영(靈)’이 있음을 지적한다.18)

그 다음 유다복음서는 ‘한 위대한 천사’인 ‘밝게 빛나는 신적인 자존자(自存者)’ (Self- Generated)에 대해 말하는가 하면 이 천사 때문에 다른 구름으로부터 ‘네 천사들’이 생겨나서 이 천사의 수행원이 됨을 말한다(ibid., 16/49). 유다복음서는 이 ‘신적인 자존자 천사가’ 창조자임을 말한다. 그 창조자가 자기를 다스릴 ‘첫째 빛’과 자기를 봉사할 천사들을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myriads) 그리고 ‘계몽된 세대’(enlightened aeon)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 창조자는  자기를 다스릴 ‘둘째 빛’과 봉사할 수많은 천사 무리들(myriads) 창조했다고 한다(ibid., 16/49 scene 3).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창조자가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ibid.). 또 유다복음서에는 창조자가 여럿이 있음을 말한다. 으뜸 창조자가 아래 단계의 빛들을 만들면 그것은 다시 다른 것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Adamas도 그 창조자들 중에 하나이다. 그는 어떤 천사도 하나님이라 불리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 본적이 없는 첫 번째 빛나는 구름 안에 있었고 [이] 천사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을 [창조 했음을] 암시한다(ibid., 17/49). 그는 또 부패하지 않은 셋(Seth)의 세대와 열 두[...] 스물 넷 [....] 그리고 ‘그 영’의 뜻에 따라 72개의 빛들이 부패하지 않은 세대 가운데 나타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ibid., 17/49). 이 72개의 빛들은 ‘그 영’의 뜻에 따라 360개의 빛들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는데 각 세대가 5개의 빛들을 만든 셈이다.

유다서가 말하는 별들의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2개의 빛(천체)들의 12개의 세대들은 각기 아버지가 있으며, 각 세대마다 6 개의 하늘이 있어서 도합 72개의 세대를 위한 72개의 하늘이 있다. 그 각각을 위한 창공이 5개 있기 때문에 360개의 창공이 있게 된다. 그것들에게는 권위가 주어졌고 영광과 경배를 위한 수많은 천사들이 주어졌고 모든 세대와 하늘들과 창공들의 영광과 경배를 위한 처녀 영들이 주어졌다고 한다(ibid., 17/49 scene 3).

수많은 불멸의 것들이 그 아버지와 자존자(自存者)와 그의 72개의 세대들과 함께 있는 72개의 빛들에 의해 ‘부패’라는 ‘우주’라 불리어진다. 그 안에서 첫 인간이 자기의 부패하지 않는 능력과 더불어 나타났다고 한다. 이 복음서는 이 인간 세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 세대, 지식의 구름과 ‘엘’이라 불리어지는 천사가 존재하는 세대가 있음을 말하고 혼돈과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천사가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이 복음서는 한 천사 곧 불로 번쩍이는 얼굴을 지니며 피로 더러워진 모습을 한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이 '반란‘을 의미하는 Nebro 또는 Yaldabaoth라는 불리는 천사를 언급한다. 여기에는 또 구름에서 나온 다른 천사 Saklas를 언급한다.

Nebro는 Saklas처럼 보조할 수 있는 여섯 천사를 만들었고 이 보조 천사들은 하늘에 열 두 천사들을 창조하여 하늘 안에서 한 몫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ibid., 17/49).

유다복음서는 12명의 통치자와 12명의 천사 사이에 중요한 대화를 암시하고 지하 세계 특히 혼돈을 지배하는 5명의 천사를 언급했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인 셋(Seth)이고, 둘째는 Harmathoth, 셋째는 Galila, 넷째는 Yobel, 다섯째는 Adonaios이라고 한다(ibid., 17/49).


이런 내용은 여러 신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나 수많은 신들의 이름과 복잡한 천국 구조를 말하는 영지주의 문헌을 연상시킨다. 사실 유다복음서가 언급하는 신들의 이름은 영주주의 문서에 자주 나오는 것들이다.19)

성경은 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일을 절제한다. 설령 더러 묘사하더라도 천국의 윤곽을 언급하거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천국의 본질이나 핵심내용을 암시할 뿐이다. 이를테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보좌와 그 주위의 생물들과 천사 그리고 장로들에 대한 묘사는 천국의 구조를 암시할 뿐이다. 또 새예루살렘성을 여러 가지 보석들을 이용하여 묘사하는 것도 천국을 구성하는 성도들의 특성을 열거할 뿐이다. 천국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를 절제하는 이유는 이성(理性)의 한계로 인해 그것을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영지주의 문서나 유다복음서가 천국 내지 우주에 대해 과감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경우 그것은 결국 인위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5. 신(神)도 인간도 아닌 인간관


-유다복음서는 인간을 한 사람 속에 두 가지 인격이 있는 존재로 본다: 유다복음서는 사람이 화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신(神)이 화나게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어찌하여 이런 논의들로 너희들은 화를 내느냐? 너희 안에 계신 너희의 신(神)과 [.....]가 너희 영혼 [안에서] 너희를 화나게 하였다.”20) 즉 인간 안에 영혼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만일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몸과 영혼이라면 유다복음서가 말하는 인간은 신(神)과 인간이 함께 섞여진 괴물과 같은 존재이다.

유다복음서는 모든 인간은 각자 별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너희 각자는 자신의 별을 갖고 있다”21) 예수는 유다 속에 있는 이 별이 그를 타락시켰다고 말한다. “유다야, 너의 별이 너를 타락시켰다”22)

-유다복음서는 노예의지만을 지닌 인간을 말한다: 여기 묘사된 인간은 신(神)이나 별의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는, 말하자면 중립적인 위치에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주최가 아니다. 이런 인간은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신(神)이나 별의 노예가 된 의지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간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성경은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여 윤리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영지주의의 인간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인간을 복합적인 존재, 여러 가지 다른 종(種)들의 요소들이 혼합된 존재,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영과 물질,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등으로 구성된 복합 존재로 본다.23) 영지주의 문헌은 인간은 신적인 것과 반(反)신적인 것으로 혼합되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신적인 영혼이 땅의 몸속에 갇혀 있다고 표현한다.24)


그러면 이 복음서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까? 유다복음서는 인간은 천사인 Saklas가 그의 천사들과 의논하여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했음을 말한다. “그 형상과 모양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다”25) 여기에는 ‘누구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라는 말이 없다. 그들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곧 구름 속에서는 생명(조에)이라 일컫는 하와를 만들었다고 한다.26)

이와 유사한 내용은 영지주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영지주의는 ‘신(神)-인간’(God the M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는 하늘의 형상인 ‘큰 인간’(Man)이라 불리우는 초월적 존재이며, 그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man)을 창조했다고 한다.27)

-유다복음서는 결정론 내지 운명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테면 아담은 Saklas에 의해 자녀들과 오래 살 것을 말했다고 한다. 즉 인간이 오래 동안 생존하는 것은 신(神)의 뜻이라는 말이다(ibid., 17/49). 또 아담의 수명은 그의 통치자에게 받은 것만큼 된다고 한다(ibid., 18/49).

즉 이런 발언은 유다복음서가 결정론(決定論) 내지 숙명론(宿命論)으로 채색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기독교 정통교회는 인간의 수명이 처음부터 일정한 수명으로 살도록 정해지지 않고 인간이 가변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과 행동에 따라 영원히 살 수 있거나 일정한 기간을 살다가 죽을 수 있음을 말한다.

-유다복음서는 인간 속에 있는 영(靈)을, 창조된 본질로 보지 않는다. 즉 유다복음서는 인간의 영(靈)은 인간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고 부가적으로 대여되었음을 가르친다. 즉 하나님은 미가엘에게 사람들이 봉사하도록 그들의 영(靈)을 그들에게 대여물로 주라고 명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의하면, 영(靈)은 천사들의 세대 가운데 있는 육체 안에 살도록 했는데, 하나님은 아담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에게 지식을 주어 혼돈과 지하 세계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즉 지식으로 어두움의 세계를 이기게 했다는 말이다.

또 다음과 같은 예수의 발언은 영지주의자들의 특이한 인간관을 보여 준다: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나를 옷 입힌 그 사람을 희생(犧牲)제물로 드릴 것이다”(ibid., 18/49). 우리는 이런 발언 속에서 영지주의적인 인간관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육체가 영혼을 싸고 있는 감옥 내지 껍데기로 본다. 말하자면 육체의 의미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한다.

-유다복음서는 삼분설(三分說)을 가르친다: 즉 인간은 영, 혼, 몸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모든 세대의 영혼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들이 왕국의 때를 완성하고 영(靈)이 그들을 떠나면 몸은 죽을 것이고 그들의 혼은 생존할 것이고 취하여 감을 당할 것이다”(ibid., 15/49).28)


6. 대속(代贖)을 모르는 예수관


유다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다른 예수에 대한 묘사한다. 유다복음서의 예수는 “세상 저너머에 있는 비밀과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을 전하는 분으로 묘사한다.29)  우리는 유다복음서 예수가 유다에게 “그 나라의 신비”에 대해 설명해 준 것으로 말한 것을30)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지식이 구원의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대속(代贖)을 통한 구원의 원리를 모르는 이유는 이런 영지주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영지주의 문서는 하늘의 구원자가 인간들에게 인간의 참 기원과 목적에 대해 계시함을 통해 망각으로부터 일으킴을 받는다고 가르친다.31) 이런 발언은 복음서의 예수의 사역 가운데 계시자로서 그의 사역과 유사하지만 이들의 관심이 오직 저너머에 있는 천국과 마지막 날에 집중시킴을 통해 현세의 중요성과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삶을 경시하는 이원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웃었다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으나 여기에는  ‘웃는다’ 또는 ‘비웃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32) 그러면 예수께서 웃었다는 것이 잘못인가? 예수께서 ‘웃지 않았다’는 말은 마치 그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런 사실은 세상 죄를 짊어질 것을 내다보고 사역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짊어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매우 답답했음을 말씀하셨다33). 이런 마음의 상태는 결코 그로 하여금 웃도록 만들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다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는 이런 진지함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대속(代贖)의 내용도 없고 단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자(傳令者) 정도로 밖에 묘사되지 않는다.

요컨대, 유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오직 비밀을 전달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대한 내용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의 경우 예수를 오직 선지자 직분으로만 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유다복음서가 희생제사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이고 한 제사장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 복음서는 여기 이 제사장을 ‘오류의 성직자’이며 우주의 주님이며 “마지막 날에 그들이 모두 부끄러움에 처할 것이다”라고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는데,34) 예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말하자면 유다복음서의 예수는 대속(代贖)을 통한 구원을 모른다.



7. 이원론


영지주의는 선하다는 영적인 원리와 악하다는 물질적인 원리가 영원히 서로 관계를 가지지 않고 평행선을 그으며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말한다. 유다복음서는 두 가지 세대를 말하면서 이 두 세대가 서로 교통할 수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이런 이원론을 반영한다. 심지어 이 세대 사람은 거룩한 저 세대를 떠올릴 수도 없고 저 세대를 보지도 못하며,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저 세대와 연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35) 또 예수의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괴로워했다고 한다(ibid.). 만일 그렇다면 이 세대에서는 구원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허무 내지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빠지게 할 것이다.

이런 이원론은 인간의 구조에서도 반영된다. 유다복음서는 때가 완성되면 영혼은 부활하나 육체는 부활하지 않음을 말한다. “모든 인간 세대의 영혼들은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이 그 나라의  때가 완성되고 그 영은 그들을 떠날 때, 그들의 몸은 죽을 것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살아나게 되고, 그들은 들어 올려질 것이다”36) 이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의 구원 과정을 열거한 것이다.

유다복음서는 그때 남은 인간 세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런데 자료가 부분적으로 부식되어 완전한 이해를 못하게 한다. 여기에 ‘불결해진 세대’, ‘부패한 지혜’, ‘죽을 사람들을 창조한 그 손’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그들의 영혼들을 위에 있는 영원한 세계로 가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부식(腐蝕)된 부분은 물질인 몸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으로 추산된다.37)



8. 예수가 과연 유다에게 배반을 부추겨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을까?


유다복음서는 이 논지를 주장하여 유다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고자 시도한다. 즉 예수께서 구원 경륜을 이루기 위해 유다 같은 배신자가 필요했고 예수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유다로 하여금 이 일을 감동하도록 만들어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다가 배반한 것은 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시도는 참으로 나이브한 생각이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작정과 자유’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 된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셨을 때는 리모콘으로 로버트를 다루듯이 기계적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통해 이루신다. 애굽의 바로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 연고로 그렇게 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사실은 바로의 의식구조는 이미 범신론적 그리고 유물론적 나아가 이원론적으로 구축되어 자기중심적인 똬리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면 강퍅케 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은 어디서나 어떤 사람이 죽을죄를 범할 때 다른 사람의 강요로 그렇게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 사람 자신의 사고방식이 이미 다른 요인들에 의해 유물론적으로 되었거나 범신론적으로 되어 자기중심적인 의식구조를 구축한 결과로 그런 죄를 범함을 가르친다. 이 경우 책임은 그 사람에게 돌아간다. 유다의 경우 그렇게 봐야 한다.

그런데 유다복음서는 유다에게는 예수를 배반하려는 마음은 없는데 사랑하는 선생을 위해 고의로 배반했음을 암시한다. 이들은 유다의 사고방식 유물론(唯物論)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유다복음서의 그런 발언은 곧 유다가 억지로 배반했다는 발언은 결국 잘못된 인간관 곧 노예 의지처럼 일방적으로 강요를 당하는 인간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결론 


유다복음서가 과연 기독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와 유다 사이의 관계에서 유다를 유리하게 설명하는 과정에 드러나는 여러 문제점들이 그 자체 모순을 내포하고 심지어 억지 내용이 있으며 나아가 성경이 추구하는 내용과 너무나 거리가 멀고 황당하기 때문에 납득하기 힘들고 또 이 복음서가 영지주의적인 색안경으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중심으로 각색되어 외경처럼 인간의 관점으로 저술된 것이 즉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새로운 텍스트는 잠시 동안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나 정상적인 신자들의 삶에 대한 영향은 적을 것이다”라고 말한 시카고 카톨릭 신학자인 Donald Senior의 말은 타당하다고 본다.38)2세기 경 프랑스의 Lyon의 이레니우스와 Cyprus의 주교였던 Epiphanius 이 두 사람이 유다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예수의 배반자를 칭찬한 사실을 비판한 것은 단순히 어떤 진실을 덮어주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39)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유물론적, 범신론적, 그리고 이원론적인 이단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지닌 자들은 이단적인 문서를 대하는 경우 쉽게 동조(同調)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조물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법,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고(思考)하는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1) www.n24.e/boulevard/wissen-und-technik/artikel/2006/04/07, p.  1/2.

2) The Coptic Ps. Gospel of Judas(Iscariot) in www.tertullian.org/rpearse/manuscripts/ gospel_of_judas, p.21/49. Nova Scotia에 있는 Acadia Divinity College 교수인 Craig Evans가 이런 사실을 지적했다.

3) www.n24.e/boulevard/wissen-und-technik/artikel/2006/04/07, p. 1/2.

4) E. Böhl, Christologie des Alten Testament oder Auslegung der wichtigsten messianischen Weissagungen(Wien: Wlhelm Braumüller, 1882), 43ff.

5) 구약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거 적어도 260번 나온다.

6) The Gospel of Judas trans. by Rodolphe Kasser, Marvin Meyer, and Gregor Wurst, in collaboration with François Gaudard, Scene 2 in Art. 'Jesus offers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vision of the temple'

7) Alfred Adam,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Bd.1 Die Zeit der Alten Kirche(Gerd Mohn: Guetersloher Verlagshaus, 1985), 150f.

 8) Alastair H.B. Logan, Gnostic Truth and Christian Heresy. A Study in the History of Gnosticism (Peabody Mass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96), 167. Alastair H.B. Logan는 여기서 Valentinian의 문서인 Excerpta ex 쏘대애새 78.2를 인용한다.

9) The Gospel of Judas .... Scene 1. in Art. 'Jesus dialogues with his disciples: The prayer of thanksgiving or the eucharist'

10) The Gospel of Judas .... Scene 1. in Art. ‘The Disciple become angry’

11) Otto Weber, Grundlage der Dogmatik I(Neukircher Verlag, 1983); R. Bultmann, Art "γνωσις" in ThWB Bd. I, 697.

12) The Gospel of Judas .... Scene 1. ‘예수가 사적으로 유다에게 말하다’

13) Washington Post April 7 2006.

 

 

14) The Coptic Ps. Gospel of Judas(Iscariot) in www.tertullian.org/rpearse/manuscripts/gospel_of_judas, p. 14/49.

19) Alastair H.B. Logan, Gnostic Truth and Christan Heresy. A study in the History of Gnosticism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96), 74ff.

21) The Gospel of Judas .... Scene 2. in Art. ‘예수가 성전과 관련된 환상을 비유로 해석해 주다’

22) The Gospel of Judas .... Scene 3. in Art. ‘유다가 환상을 이야기하고 예수가 응답하다.’

23) Alastair H.B. Logan, Gnostic Truth and Christan Heresy, 167.

25) The Coptic Ps. Gospel of Judas(Iscariot), p. 17/49.

28) Alastair H.B. Logan, Gnostic Truth and Christan Heresy, 168. 영지주의는 이분설도 가르치고 삼분설도 가르친다고 한다.

 

31)  Alastair H.B. Logan, Gnostic Truth and Christan Heresy, 169f..; Ireneus I,21.4;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 구원이 지식에 근거함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지적한다: “완전한 구원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지식이라고 말해진다. 결핍과 고난이 무지(無知)로부터 일어난다; 지식을 통해 무지로부터 야기된 모든 본체가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식은 내적 인간의 구원이다”

 

33)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36) The Gospel of Judas .... Scene 2. in Art. ‘유다가 예수에게 저 세대와 인간의 세대에 관해 묻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윤영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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