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까지의 비잔틴 시대에는 플라톤 사상의 영향력이 강하여, 은총과 자연은 불연속적으로 이해되었다. 하늘의 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었으며, 자연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토마스는 은총과 자연 사이의 불연속성을 감지하고 이를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였으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토마스의 은총과 자연을 통합하기 위한 시도는 그의 부분적인 타락관으로 말미암아 자연신학의 가능성과 자연의 자율성 개념을 양산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은총과 자연을 통합하고자 시도하였지만, 결국은 자연신학의 가능성의 길을 열어 주었고, 자율적인 자연 개념을 낳게 되었다.
칸트 시대에는 이런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또 다른 시도가 등장하였다. 칸트는 현상계와 본체계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려 하였으나, 결국엔 하층부의 현상계와 상층부의 본체계 사이에 불연속성만 더욱 커져 버렸다.
키에르케고르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이원론은 더욱 커져 버렸다. 토마스 때에는 하층부의 자연과 상층부의 은총으로 나뉘어 있던 것이 칸트 때에 이르러 하층부의 자연과 상층부의 자유개념으로 대체되었는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면 이러한 이원론이 하층부의 합리성과 상층부의 신앙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상층부와 하층부 간의 이원론이 심화되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쉐퍼는 키에르케고르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을 키에르케고를 기점으로 "절망선"이라고 표현한다.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구분되는 시점이 "절망선"이다. 그 이유는 키에르케고르르가 상층부와 하층부의 통합적 지식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엔 커다란 불연속성이 있으며, 단절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하층부의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면서 상층부의 비이성적 신앙으로의 도약을 시도한다. 모든 합리성은 비관론적으로 이해되는 반면 낙관론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상층부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상층부와 하층부의 통합적 지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였다.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는 불연속성만이 있으며, 단절되어 있으므로 이제 하층부에서 상층부로의 도약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신신학은 이런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것 같다. 소위 바르트를 위시한 신정통주의는 하층부와 상층부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도약"을 시도한다. 바르트적인 신정통주의가 일반은총을 배격하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쉐퍼에 의하면, 신신학의 하층부에는 합리적인 것이 있으며, 상층부에는 비합리적인 것이 있다. 하층부에 있는 합리적인 것은 정의된 언어와 관계되며, 상층부에 있는 비합리적 것은 내포적 언어와 관계한다. 쉐퍼는 신정통주의는 인류의 기억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강한 내포적 단어들, 즉 부활이니 십자가니 그리스도니 예수니 하는 등등의 말을 사용하여 "대화의 미궁"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과 이와 같은 단어의 내포를 따르는 사람들의 강한 반응 때문에 신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신신학이 세속적 실존주의와 현대의 세속적 신비주의에 비하여 유리한 점이라고 지적한다. 신신학, 소위 신정통주의에서는 하층부의 "합리적-정의된 단어"에서 상층부의 "비합리적-내포적 단어"로의 도약이 시도된다.
틸리히는 "하나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두번째 하나님은 전혀 정의되지 않은 말이다. 과학과 역사 분야에서 정의된 단어들은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의)분계선 이하에, 그리고 위에는 내포적 단어들만 둔다. 내포적 단어들의 가치는 그것이 정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아마도, 인식론을 비판하게 되는 현대의 경향도 이와 유사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층부에는 인식론적인 방식(주관-객관의 방식)이, 상층부에는 인격적인 방식(주관-주관의 방식)이 있다면 어떨까? 물론, 인식론적인 주관-객관의 방식을 비판하면서 인격적인 주관-주관의 방식을 지향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양자의 통합을 시도하려 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양자, 즉 주관-객관의 인식론적 방식과 주관-주관의 인격적인 방식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에 있다고 주장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자연의 통합적 시도는 자연신학과 자율적 자연 개념을 양산하였으며, 칸트의 본체계와 현상계의 올바른 관계설정을 위한 시도도 결국,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으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면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단절이 이루어지게 되고, 결국 비합리적인 상층부로의 도약을 시도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객관의 인식론적 방식과 주관-주관의 인격적인 방식의 양자의 통합적 지식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결국엔 하층부와 상층부의 단절로 나아갈런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것은, 인식론적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체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체계 비판? 어째서, 체계를 비판하게 될까? 체계 비판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특히 과학과 신학에 있어서 체계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신학의 체계는 인식론적 방식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과학과 신학의 차이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공통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왜 신학의 체계를 비판하게 되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실재성은 "체계에 갇힐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즉, 신학의 체계가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을 갇히게 만든다는 것이 신학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러나 정말 그럴까? 신학의 체계는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을 갇히게 하며, 하나님의 실재성을 상실한 학문인가?
여기에 잠시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우선, 과학의 체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쉐퍼에 의하면, 초기의 근대과학은 기독교적 사고로 말미암아 발전한다. 그것은 비잔틴 시대에는 플라톤적 영향으로 하늘의 것은 크게 주목되었으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약하였는데, 성경적인 자연에 대한 이해,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과학이 발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쉐퍼는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입장에 선 과학을 구분한다. "근대 초기의 자연과학"과 "현대적 근대 과학"을 구분하고 있다. 쉐퍼에 의하면, 초기의 근대과학자들은 "열린 체계에서의 인과율"을 인정하였다. 반면, 현대적 근대 과학에서는 "닫힌 체계에서의 인과율"을 믿고 있다. 양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열린 체계에서의 인과율과는 달리 닫힌 체계에서의 인과율은 "기계론적 인과율"이다. 즉, 우주를 기계론적 우주로 이해하면서 그 기계론적 우주에는 하나님의 개입의 여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쩌면, "전혀 고려될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펼쳐지는 인과율인 것이다. 쉐퍼는 "초기의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이성적인 하나님이 계시고,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여 우주의 형상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믿은 기독교와 견해를 같이 했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열린 체계의) 인과율 체계 속에서 활동하실 수 있었으며, 또 인간은 기계에 전적으로 갇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층부에 있어서 자율적인 상황이란 없었던 것이다"고 까지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기의 근대과학과 현대의 근대적 과학이 차이가 있다. 열린 체계의 인과율과 관계하는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입장에선 기계론적 인과율을 펼치는 과학이 차이가 있다. 즉, 체계에도 "열린 체계"가 있고, "닫힌 체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제 다시 신학의 체계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로 초점을 옮겨 보자. 체계를 비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을 체계에 갇히게 만든다"는 이유에서 체계를 비판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실재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체계를 지닌 신학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학의 체계가 과연 "닫힌 체계의 인과율적 방식"을 지향하는가? 계시에서 출발하고, 섭리를 고백함에도 그러한 신학의 체계를 닫힌 체계의 인과율적 방식을 지향한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신학이 닫힌 체계에서의 인과율적 방식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계론적 우주관"을 고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의 개입의 여지가 없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고수하는가? 자유주의 신학이라면 모르겠지만, 개혁신학은 오픈 시스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열린 체계에서의 인과율적 방식으로 학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적어도,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면, 우주를 "기계론적 우주"로 제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우주관은 쉐퍼가 지적한 현대적 근대과학, 즉 자연철학의 입장에 선 자연과학의 우주관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우주관"은 기계론적 우주관이 아니다. 열린 체계에서 하나님의 개입의 여지가 있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그런 우주, 그런 우주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개혁신학은 고착화된 신학 또는 화석화된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계시의존적인 동시에 오픈 시스템을 추구한다. 하나님은 "거기"에 실재하실 것이라고 여긴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계시의존적인 신학인 동시에 오픈 시스템이다. 하나님은 거기에 실재하시며, 거기에 계신다. 거기서 활동하실 것이다. 계시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이다. 불가해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한에 있어서 그 분을 알아갈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도약의 신학을 추구하는 자들은 개혁신학 마저도 체계적이며, 사변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신학을 열린 체계로서의 인과율적인 방식으로 인해 비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닫힌 체계로서의 인과율적인 방식으로 인해 비판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체계 자체에 대한 부정인가?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는 천양지차다. 양자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도리어, 도약의 신학은 합리성을 제거하고 비합리적인 상층부로 도약하는 가운데 그러한 경향성은 신비주의와도 잘 맞아 떨어질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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