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 Gisbertus Voetius를 중심으로 / 변종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 |
번호 : 13
글쓴이 : peter*^.^*ban |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5.06.08 13:51 |
칼빈의 목사의 필요성 (기독교 강요 하권 P 8-19) (주 : 칼빈의 글을 가감 없이 번역된 원문 그대로를 기록했습니다.) 1. 교회의 필요성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지에 가기 위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보조 수단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 전파가 활발히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마끼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시고,(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시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마끼셨다. 5: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이제 우리는 이 논제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도록 한다. 바울의 글에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라고 하셨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일순간에 그 백성들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나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 장성하기를 바라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동일한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게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 임명된 교사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신 18:15 참조) 그리고 그들에게 완전히 만족할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인 것이다. (말 2:7 참조) 하나님은 옛날에 천사들을 통해 이 보배를 마끼지 아니하시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들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심과 같이 지금도 사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을 하셔서 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 (말 2:8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들을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셨다.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들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친히 우뢰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을 할 것임으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비천한 사람이 교사로 부름을 받아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말씀의 사역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도 사람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음성을 들리게 한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전파되는 구원의 교리를 공손히 받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면적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메이게 하셨다. 옛날 선지자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시 105:4), 이런 명령이 율법에서 자주 반복이 된 것은 (시 27:8, 100:2; 105:4; 대상 16:11) 옛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 성직의 의미와 한도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성직의 효력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성직의 위엄을 대단히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죽을 인간들에게 옮기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목사나 교사들이 사람의 생각과 심정을 통하여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심정을 시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쌍방의 논쟁을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제시하므로 써 쉽게 해결할 수 있다. (1) 어떤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주축자로 전도에 성령을 결부시키시며 전도의 유익을 약속하신다. (2) 또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외면적인 보조 수단을 구별하시어서 신앙의 출발점과 그 전 과정을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말라기에 의하면 제 그리스도 엘리야의 임무는 사람들이 생각을 밝히며 (눅 1:17; 말 4:5-6)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수고한 열매를 얻도록 그들을 보내신다고 하셨다.(요 15:16) 베드로는 이 열매를 간단히 정의해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라고 하였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라고 했다. 사도들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2)라고 자랑을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는 의문의 일꾼이 아니며 말로 사람들의 귀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자기의 가르치심이 무익하지 않게 하노라 라고 한다.(고후 3:6) 또 자기의 전도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전 2:4), 또 갈라디아 사람들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여러 구절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 뿐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골 1:29) 그리스도. 이 모든 말을 하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티끌만큼도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 점을 그는 다른데서 간단히 설명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골 1:29) “우리 수고를 헛되이 할까 함일러니”(살전 3:5). 그리고 덧붙이기를 “베드로에게 역사 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 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8) 그리고 다른 구절들에서 사역자 자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마찬가지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고 하였다.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경고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자세로 나아 오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당연히 알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그 결과를 보고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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