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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상급으로서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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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철 |
303 |
2004-07-02 |
멈추지 않는 이화영 목사님의 주장에 대하여 처음 답변한 사람으로서 "참된 상급으로서의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필요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제까지 있어왔던 이화영 목사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기독교 개혁 신보사와, 기고 제언 란을
보시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이화영 목사님은 본인 스스로 최종수정한 글을 올렸다고 하셨으니 그 말에 책임을 지고 더 이상의 글을 올리지
않기를
권합니다.
"참된 상급으로서의 구원"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하여
"구원이 전부이다" 라는 말은 성경 내용의 올바른 표현이다. "구원이 전부이다"라는
말을 듣고 어! 저 사람은 "상급이 없다"라고 말하네 라고 생각하며, 반론을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결여되었음을 보게
한다. 반론자의 주장을 보면,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까지가 "구원"이고, "상급"은 따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인데, 성경은
구원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나누어서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함을 얻었다" 라는 말은 ① 처음 아담과 하와가 죄 없는 상태에서 가졌던(엄밀한
의미에서는 더 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룩한 존재됨과 ② 그 하나님의 형상인 백성들이 누리는 것 즉, 다스리고
정복하는 "통치의 즐거움"을 함께(①과②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는 일은 성경의 내용이 아님
처음 하나님의 백성은 아담과 하와이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이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구원과 상급의 올바른 해석의 열쇠가 된다. 처음 계시된 내용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남자인
아담만을 말하지 않고 여자인 하와를 포함한 남녀를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속에는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적 삶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는 일과,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남자 하나로서는 할 수 없고,
남녀가 함께 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 가진 영원한 생명은 하와와 함께 할 때 의미가 있다.
아담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의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구원 역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인 남녀들이 함께 다스려 가는
세상을 말한다. 이 내용이 처음에 창세기 1:26-28의 내용으로 주어졌고, 그 후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운 약속 안에서 처음의
일을 진행하신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씨"와 "땅"과 "복"이다.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할 것과 세상을 다스릴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도 그렇다.
구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전체의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구원의 의미는 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구원은 홀로 누리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교회적 삶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홀로 영생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홀로 영생하여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원은 언약 공동체 안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며, 그 언약 공동체가 들어가는 약속의 땅과 그 곳에서 함께 누리는 모든 복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전부다"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의 내용인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모두를 성취하는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신비한
연합이며, 그들이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사람들에게는 사망만 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복된 존재적 상태를 잃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하여 잃게 된 것은
영원한 ① 생명만 잃은 것이 아니라, ②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까지도 잃은 것이다. 그 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구원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이 구약과 신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잃었던 것을 회복(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이상의 상태로)하심을 말하는데, 이때 성도들이 얻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다스림(흔히 "상급"이라고 말하는)"을 "하나의 의미"로 함께 말하는 것이지 "구원"과 "상급"을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따로 말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십원"짜리 동전의 가치를 증거 하는 것은 "숫자 10"과
"다보탑"이다. 우리는 이 둘이 함께 있는 것을 "10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말도 "영생"과 "다스림"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죄로 인하여 "생명(영생)"을 잃었다는 말은 단지 목숨이 유한하여졌다는 것에 한정된 의미이거나, "의"에서 "불의"로 내려간 존재적
가치의 상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다스리며 누리도록 되어 있던 모든 내용들까지도 전체적으로 상실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는 일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참된 상급이신 하나님(창
15:1)
성경의 증거를 따르면, 성도에게 있어서 "상급"은 "성 삼위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창15:1). 창세기 15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주체인 "후사(씨)"의 문제를 다루고 그 구원자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언약을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을 그의 의로 여기시고,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셔서 그 땅을 다스릴 것을 약속한다. 아브라함이 얻는 것은
"의"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약속의 땅)"을 얻는 것까지이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의와 그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존재로서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 의로운 존재에게 허락되는 모든 좋은 것들과 권세 전체를 담고 있는 "전부"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곧 죄요, 사망이듯이 그 곳에는 당연히 "상급" 또한 상실 된 상태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말은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 상급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은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상급의 절대적 가치와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거룩한 것들 중에서 으뜸의 의미가 아니라, 홀로 절대적 차원에서 거룩하다는 것을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구원이요, 의요, 생명이요,
영생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요, 거룩함이요, 그 구원 얻는 자들이 누릴 소위 상급이라는 것 전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전부이다"라는
말은 구원과 상급을 나누어 생각하여 주장하는 반론하는 자들의 말처럼 "상급이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참된 상급"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해"와 "방패"(시84:11)로 소개하시는데, 고대근동에서는 이 용어를 왕의 칭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정황과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고려하여 볼 때, 창세기 15:1의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왕" 되심을 강조하는 말로서 "상급"이란 용어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패"는 곧 "상급"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앞의 사건 즉,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직분과 사역과 관계되는데,
창세기 14:18의 내용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14:20에서는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라고 말한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얻은 것은 창세기 14장의 전쟁에 나오는 모든
나라의 왕들과 비교해서 지극히(절대적 가치에서)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이 종결 된 후에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브람의 행위에 따라 어떤 상급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의 온전한 믿음의 행위가 형성되지도 않은 시점에 하나님께서 위의 사건 (창 14장)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너에게 왕이요 상급
자체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따라 십분의 일을 드린
것도 그 싸움의 승리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했을 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맹세하노니 (그렇게 하면 나중에) "네 말이 내가 아브람을
치부케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안니하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을 부요케 하실
자는 "씨" 와 "땅"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안에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전에 가지고 누렸던 모든 상태(생명과 창조의 모든 것들을 다스림의 실상)가 바로 "상급"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것들이요, 하나님 자신 안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계시로서의 내용들이 아닌가? 이 사실 외에 더 이상 이와 같은 총체적이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뭉친다하여도 하나님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생명과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권한과 다스리라고 주신 온 세상을 잃었던 것을,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열
고을 다스릴 권세와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라 타락 전 아담은 열 고을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바다와 공중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와와 함께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 권세와 내용들을 동일하게 주셨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함께 처음에 부여받았던 모든 것을 잃었고,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 "상" 받을 만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게끔,
전적으로 타락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은 생명 곧 구원이요, 그 생명 안에는 처음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누렸던 권세와
모든 내용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부여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며, 성도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열심의 참됨은 열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들이 하는 충성의 능력과 내용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기에 충성의 정도에 따라
차별되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기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안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라는 상급이라고 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상급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원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따르는 보상적 상급신앙이야 말로 진정한 상급이 무엇인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 비유 (마태복음 20:1-16)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1은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 라고 말함으로 이 비유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란 본 비유에 계시된 특이한 포도원 주인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사회적 삶의 정황과 노동관 그리고 노동 시간 등을 본문의 증거와
연관하여 보면, 비유 속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지상의 일을 친근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한데, 그 내용과 원리는 전혀 지상 적이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새벽 6시에 품꾼을 얻으려고 직접 나간 주인은 당시 삶의 정황으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사건이며, 더구나 그
주인이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품꾼을 데려 왔다는 사실은 더욱 기가 막히게 한다. 그리고 그 주인은 품삯을 지불하는데, 한
데나리온씩을 준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한 노동자 가족의 이틀 품삯에 해당되는 풍족한 삯이다. 이렇게 풍족한 삯을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1시간
일한 자에게도 똑같이 지불하는데 ,그것도 나중 온 자를 먼저 준다. 이처럼 본 비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 지상의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무언가 잘못된 원리를 가진 주인의 특이한 인격과 활동(사역)으로 소개된다.
이 비유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내용을 전후 문맥과 연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9:30 의 내용인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비유의 끝인 마태복음 20:16에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는 말로 비유의 끝을 맺는다. 이 비유 속의 특이한 주인은 당시의 관념을 뒤엎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충격적으로 품꾼을
선택하고 충격적으로 그 삯으로 똑같은 한 데나리온씩 지불하며, 충격적으로 나중 온 자에게 먼저 준다. 이러한 충격적인 주인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주님께 선택된 자는 장차 올 메시아를
바라보며 힘들게 애쓴 세례 요한 때까지의 구약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큰 위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그 주인의
인격과 사역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비로소 그 실제성을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태복음 11:11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신약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그 이전의 구약의 성도들보다 시간적으로 짧은 시간에 실체이신 주님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은 세례 요한 보다
먼저다, 더 크다 고 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로서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먼저 된 자든 나중 된 자든 모두가 동일하게 이 특별한 주인으로부터 선택되었고 그들에게 약속된 삯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오늘날 너희 앞에 있는 주님 자신이심을 드러내는
비유인 것이다. 이제 이 비유를 하신 다음에 주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구속사역을 진행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그
약속된 구원의 삯을 가장 먼저 받는 자들은 나중 된 자들인 주님의 제자들인 것이다. 이처럼 주께서 이루신 구원으로서의 큰 삯(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한 시간과 충성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똑같이 약속되었고 베풀어진다는 내용이다.
누가복음 19:11-27과 마태복음 25:14-30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이 비유는 누가와 마태가 주님께 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그 합당한 가르침의 목적을 따라 증거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내용을 한층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은 사실상 마태복음 24:45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25:46에서
끝난다. 즉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비유(25:1-13)", "달란트 비유(25:14-30)",
"양과 염소 비유"(25:31-46)"로 그 내용은 하나의 통일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마태복음 24:45-25:46의 비유에 나타난 공통된
내용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말해준다. 그 공통된 내용을 보면, 마태복음 24:45-51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맞이하는 종말론적
상태"를, 25:1-13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종말론적 상태"를, 25:14-30은 "자기의 소유를 맡긴
주인(누가복음에서는 귀인)의 종말론적 판결"을, 25:31-46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임금의 판결"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19:11-27과 마태복음25:14-30의 비유의 내용은 "열심히 충성한 사람은 더욱
많이 상을 받지만, 게으른 사람은 받을 상도 빼앗길 것이다"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마태의 비유에 나타난 악한 종은 주인의 인격을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고 하며 자신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주인은 그 종의
논리를 증거로 사용하여 그 논리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즉, 그 종의 주장처럼 주인을 그렇게 알았다면, 마땅히 주인의 돈을 취리 하는
자들 즉, 당시의 은행에 맡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말한 대로의 주인이 돌아와서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려 하는 주인이 은행의 이자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종의 자기 변호는 틀렸다. 주인이 그런 사람이라면 종에게 자신의 돈을 맡기지 않고 은행에 맡겨서 뿌리지 않고 변리를
취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에 나타난 주인은 그 종이 말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종을
악하다라고 한다. 또한 "그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말한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비유에서도 악한 종에게 "네 말로 내가 판단한다"라고 하며, 그 악한 종이 귀인의 은을
은행에 두지 않은 행동을 지적하며 그 귀인의 인격이 그 악한 종의 주장과 다름을 알게 한다. 특히 주님은 그 당시 30년 전에 있었던 아주
인상적이고 특별한 사건인 아켈라오의 사건을 비유의 접촉점으로 삼고 제자들에게 증거 하신다. 누가복음의 최종 결론을 보면 그 악한 종은 자신에게
맡겨졌던 므나를 빼앗긴다. 물론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는 칭찬이 있었고,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또한 이미 열 므나를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한 므나를 더 받게 된다. 이처럼 제일 많이 받은 열 므나 가진 종에게 악한 종의 것을 준 것은 그 종의 행위가 악함을 더욱
철저하게 설명해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 사실과 함께 덧붙여지는 것이 있는데,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면 악하고 충성된 자들이 가려지며, 특별히 악한 자의 상태는 비유
속에 나타난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은 자들을 주인이 자신의 앞에서 죽이게 하는 판결을 통해, 비록 종의 신분에 있는 자라도 자신의 인격을
인정치 않는 자는 자신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열심히 충성한 사람은 더욱 많이 상을 받지만, 게으른 사람은 받을 상도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 전후에 나오는 나머지 세 비유의 결론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24:51에서는
그 악한 종을"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25:1-13의 비유에서도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한다. 네 번 째 비유인 25:31-46에 있는 비유에서는 아주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비유와 마태복음의 비유의 핵심은 종말론적 심판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생과 영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비유의 내용 속에 나온 착하고
충성된 종이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표현되는 "내가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니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며, 이 말들의 본질적인 의미는 "영생과 영벌" 또는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표현을 통해 종말론적 상태로서 구원과 심판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내용에 표현상 기록된
"고을을 차지하는 것"이나 "더 많은 것을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라는 말은 구원 받은 자의 복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11:35의 "더 좋은 부활"에 대하여
(어떤)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을 근거로 "더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은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며,
부활이 차등이 있듯이 부활 후의 "상급도" 똑 같지 않고 차등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 부활"이라는 의미는
부활에도 더 좋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더 좋은 부활" 과 "덜 좋은 부활"
같은 차등적 부활은 없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상태는 "영생과 영벌"로써의 부활뿐이다. 부활에 차등이 있음은 "구원과 심판" 즉,
"의인은 영생하기 위하여 악인은 영벌에 처하기 위하여"(마25:46) 모든 인생에게는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성도들에게 "상급"의 차등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날 성도들의 "부활"에도 "더 좋은 부활"이 있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는 그러한 차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면, 그것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히브리서 11:35의 내용 자체에서도 확인된다.
히브리서 11:35을 보면, "(어떤)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여기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다" 라는 말은 당시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사건이며, 어떤 여인들인가의 고민거리가 안 된다. 즉,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알 듯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대표적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선지자가 활동할 때에 일어난 부활의 사건이다.
엘리야 때에는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사건을 통하여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것과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바알신의 본고지인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나타내었음을 잘 아는 것이다(왕상17:20-24). 또 한 사건은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인데 이 때도 어렵게 얻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 아들이 부활한 사건이 있었다(왕하 4:32-37).
이 두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시 신이라 칭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우상이며, 여호와만이 참 된
신이심을 죽었던 생명을 소생케 하는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계시적 의미로 보여 주셨다. 이 사건은 당시 엘리야와 엘리사의 입에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거 하는 동시에 장차 성도들에게 있을 부활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 시점에 있어서도
수많은 핍박이 있었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따르지 안겠다고 말하면 악형(심한 고문)을 통한 죽음의 자리에서 놓아주겠다 하였으나, 당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여호와의 참된 율법을 신앙함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악형을 당하며 순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 좋은 부활" 이라는 말은 이러한 신실한 자들이 바라본 "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이 바라본 부활이
"더 좋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 라는 내용과 차등적 의미로서 비교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악형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킨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때 있었던 부활의 사건이다. 즉,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것을 분명히 알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을 악형의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고 지켰던 것이다. 즉 그들이 믿었던 "더 좋은
부활"은 엘리야나 엘리사 때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마지막 주의 날에 있을 "영원한 부활"로 확장하여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 믿음이 바로
히브리서 11:1에서 말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말을 검증해주는 선진들의 믿음이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바라본 "더 좋은 부활"이라는 믿음의 의미를 성도들의 부활에도 "더 좋은 부활"이 있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오히려 힘을 주어 끝까지 완고하게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better)"의 의미가 구원
얻은 자들 안에서의 차등적 개념이 아니라는 증거는 히브리서 11:4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좋은,
better)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되었다. 이 곳에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듯이 "더
좋은"의 의미는 구원받은 자들, 즉 의로운 자들 안에서 있는 차등의 구별이 아니라, 가인의 제사는 악하므로 가인과 그 제사는 열납 하지
않았으며, 아벨의 제사는 의롭기 때문에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 하신 것이다(창4:4-5). 즉, 가인의 제사도 의로운데 아벨의 제사는 더
의롭다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악하고 아벨의 제사는 의롭다는 "의와 악"의 구별이지, 하나님께서 받으신 의로운 제사 중 가인의
제사는 "덜 좋은 제사" 이고 아벨의 제사는 "더 좋은 제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마태복음 5:20에서도 이와 같은 용례가 확인된다.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도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의 개념으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주님 앞에 인정되는, 천국에 갈만한 의인데, 단지 "덜 나은 의"이니까, 너희들은 그들보다는 "더 나은 의"로 천국에 이르러라 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 부활"의 의미는 자체의 해석의 문제와 히브리서 11:4의 증거와 마태복음
5:20의 증거들을 통해서, "부활에도" 구원 얻은 성도들 안에 차등적으로 있는 "더 좋은 부활"과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해석과 주장이
옳지 못함을 충분히 증거 한다.
"부활 후의 상급이 똑같다면,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거짓이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상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위의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심각한 문제, 즉, 자신들의 신앙의 우월성을 당파를 지어 주장하며, 다른 파 보다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과 그 파가 우월하고 다른 사람은 못하다는
고린도 교회의 "더 좋은 신앙" 과 "덜 좋은 신앙"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옳지 않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이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꾼과
도구에 불과 하다는 말이다. 오직 모든 것의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우지 아니하는 것들은 거짓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위에 세운다는 것은 그 터 위에 바울의 사역이나 아볼로의 사역이나 그 외에
고린도 교회의 어느 누구의 믿음과 충성과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한 구속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모든 사역과 충성들이 금, 은, 보석 그리고 나무, 풀, 짚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그러한 개인의 모든
노력과 헌신과 애씀과 충성 등이 마지막 불로 심판하는 날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라면 상을 잃는 것이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상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 은, 보석은 구원 얻은 자가 지상에서 받은 복으로서 더 좋은 복의 의미가 아니며, 나무, 풀, 짚은 구원
얻은 개인에게 "덜 좋은 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앞 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인정될 것과 인정되지 못할 삶을
말한다. 만약 구원 얻은 자 안에서 "더 좋은 복" 과 "덜 좋은 복"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금과 은과 보석 자체 안에서 각각의 차이를
말하여야 된다. 그러나 금, 은, 보석은 타서 없어지지 않는 성질의 것 즉, 구원
얻는 삶을 의미하고 나무, 풀, 짚은 타서 없어질 성질의 것 즉, 구원받지 못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므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라는 터 위에, 그리고 그 터에 합당하게 세워져서 마지막 불로 판결하는
심판의 날에는 바울이 지금 전하는 말처럼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나 모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상을 얻는
자들의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불로 태웠을 때, 오직 나를 자라게 하시고 교회를 자라게 한 것에는 나 자신의 공로나 신앙의 우월함, 즉, 누구는
"더 좋은 복"을 받았고, 누구는 "덜 좋은 복"을 받았다 라고 내세우는 일이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와 희생이 구원의 상을 얻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우되, 나무와
풀과 짚으로 세우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더 좋은 부활"과 "덜 좋은 부활"의 근거로 제시하며, 구원은 구원이고
상급은 따로 자신들의 열심과 충성과 희생에 따른 공로의 여하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다.
"복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급은 구원받은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것이다. 성경은 복과 상급의 차등을
분명히 둔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복은 구원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은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받는 것이라고 "복"과 "상"을 나누어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5:3-12 의 내용을 통해서 주께서 친히 증거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 와 아직"이라는 성격 안에서 "복의 개념"과 "상의 개념" 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의 의미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천국이 (장차)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그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갈망하고 열망하는 자들은 (현재, 이미)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충족될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천국이 (장차)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속이어 너희를 대적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는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사람들이 너희 앞에 있던 선지자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3-12 에서 확인되듯이 복은 현재 지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 복이라는 내용이 장차 "천국" "위로" "땅을 상속" "충족"
"긍휼"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상이 많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11절과 12절은 현재(이미) 얻은 "복"의 내용은 곧 장차
"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해지는데, 이것은 "복"은 곧 "상"이다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본 논쟁에서 주목할 만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복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급은 구원받은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물리적이고 지상 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장래에도 있는 "총체적 내용"들로서 마태복음
5:3-12의 내용("천국" "위로" "땅을 상속" "충족" "긍휼" "하나님의 아들" "상")으로 보면
충분하다.
설마 "하나님이 복이시다 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복을 주셨고 아브라함만 못한 신앙생활을 한 롯 에게는 작은 복을 주신
것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두 사람의 복이 똑같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에 대하여
창세기 12:2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가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언약을 하셨다. 그리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복 자체가 된다)"이 되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주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니며, 아브라함 그 스스로가 복 자체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땅의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너는 복의 근원"이다 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분명 아브라함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언약" 즉, 구원 사역에 대한
언약과 관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라는 "임마누엘" 사상 말이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마1:2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그의 소유의 넉넉함 즉, 그의 생애에 주어진 생활의 안락함이나 부유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역사의 주체이신 "씨"곧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다. 갈라디아서 3:16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요한 복음 3:56에서도 주님은 아브라함이 기뻐한 이유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22:16의 말씀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22장 16절의 믿음이라는 상황까지 오는데 약
62년이 걸렸다는 시간적 의미와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반신반의하며 연약하게 지내온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충성심과 순종적 의지가 그 때 그 순간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약 62년의
세월 동안 아브라함을 신실하게 이끌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의지와 결단과 순종을 앞선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게
하셨던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원문을 보면 창세기 22:5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우리가)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라고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분명히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22:16에서 독자를 아끼지 않은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내용 또한 약속된 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내용을 "복"으로 주신 것이다. 또 창세기 22:17의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다"라는 내용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내용인데 이 내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사탄의 세력이 멸망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창세기 22:16,17에서는 아브라함의
결단과 의지와 순종을 말하는 듯 하나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의 내용에 대해 무지한 아브라함을 62년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이해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수준의 단계로 이끄신 하나님의 사역이 돋보이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차등 있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성도들인 이스라엘에게 동일한 언약으로 주어졌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아브라함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면 누구나 그 "복"을 누리는 것으로 동일하게 그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언약으로서의 복은 인생들의 수준에 따라 허락된 차등적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된 전적 은혜로서의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로서의 복의 개념은 주님 자신의 강력한 표현처럼 "이 돌을 들어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것에서 증거를 얻는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바 "복"의 내용이
분명하다면, 이삭과 야곱 그리고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복" "동일한 "복"을 받았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라는 말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곧 구원인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부여된 복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는데 그 것이 곧 언약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로 인한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베드로후서 2:5-9 은 아브라함의 복은 크고 롯의 복은 작다는 주장이 근거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롯에게 주신 복은 작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크다"는 내용은 성경에
전혀 없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평가된 것처럼, 롯 또한 베드로후서 2:5-9의 내용을 통해서 의로운 자로 평가받고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안락함 자체에 있지 않다. 롯 과 같이 소돔과 고모라 성안에서 의로운 심령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 복이 된다.
그의 심령이 고통받았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사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건을 잃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내용을 어떤 환경에서도 잃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복이며, 그가 바로 복된 사람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궁핍하나 풍부하나 거기에
요동하지 않고 두 상황 가운데서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졌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복에 대한
정의를 풍족함에 두는 것은 어리석다. 풍족함이라는 것은 중립적이어서 풍족함이 있는 가운데 경건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이 되지만, 풍족함은
자주 경건을 잃게 하는 작용을 하므로 경건을 잃게 되는 풍족함이 자신에게 있다면, 그 풍족함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가난과 궁핍과 병듦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그러한 환경이 자신을 누르고 오해와 공격을 받아도 욥처럼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그 어렵고 힘든
환경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건한 자인 것과, 복된 자임을 보장받는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립적 성격을 띤 환경의 다양함 자체만 보면서
복과 저주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롯의 환경을 노아의 환경과 바울의 환경과 함께 생각해 보라! 롯은 아브라함에 비하여 결코 작은 복을 받은
자가 아니다.
위의 본문은 롯의 경건과 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5절에서 확인되듯이 노아의 의와 경건을
말하며, 9절에서 롯과 노아가 차등 없이 경건한 자로 복된 자로 증거 되고 있다. 그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으니,
그것이 곧 진정한 "복"이요, "상"이 아닌가? 노아의 경건과 노아가 받은 복은 아브라함의 의와 경건과 설사 비교한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그러한 노아의 경건과 의로움이 롯의 경건과 의로움과 함께 차등 없이 동질적 의미로 본문 안에서 증거 되고 있다. 이 증거가 바로 성경의 증거요,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하나님의 결정을, 또 그 증거를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자신 스스로를 엄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은 돌아설 기회가 있지 않은가?
개인의 복됨과 교회의 복됨 역시 외적인 풍족함에 있지 않음을 시편 73편은 노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그릇된 복을 추구하고, 그러기에 경건한 자와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가 때로는 자신들의 믿음의 자리에서 미끄러질 뻔한 상황이 늘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악인이 복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심판의 내용과 증거요, 의인이 고통하고 궁핍한 현실이 그 의 복 있음과 구원을 보장하는 증거가 된다.
시 73 편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평안함을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높은 데서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하늘을 대적하고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부활 후의 상급이 같다면 므나비유(눅 19:11-27)도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본 비유는 비유의 내용과 목적으로 볼 때, "므나비유"가 아니라 "어떤 귀인의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비유에 앞서서 주님은 주께서 오신 이유와 표적과 기사로서 모든 사역을 하신 것은 누가복음 19:10의 말씀처럼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의 생각처럼 세상적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의 사역을 통해 이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당장 에라도 하나님 나라가 나타날 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 주님은 이제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제자들을 떠날 것이며,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즉,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심판과 구원의
권세로 오실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주님의 비유를 30년 전에 있었던 아켈라오스가 왕 임직을 받으려고 떠나는 상황과 또 그의 왕
됨을 원치 않던 자들의 행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왕이 되어 돌아와서는 자신의 왕 됨을 싫어하던 자들을 죽이는 일을 접촉점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뚜렷하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역사 속에 분명하게 있었기에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본 비유에서는 아켈라오스라 하지 않고 "어떤 귀인"이라고 표현함으로 이것은 비유이신 주님 자신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을
시사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귀인이 종들에게 준 "한 므나"의 화폐 가치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한 사람이 "백 일" 동안 벌어야 되는 액수이다.
이러한 많은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경우는 당대 정황으로 볼 때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당시 사회적
정황을 누가복음 17:7-9의 내용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당시에 사람들이 갖고 있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9절의 내용인데, 종들이 주인의 "명한 대로하였다 하여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는 내용이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서는 종들을 칭찬하고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 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종들에게 주었던 한 므나와 장사하여 남긴 열므나, 다섯 므나를 주인이 가져가지
않고 종들에게 그대로 갖게 하시며, 악하고 게으른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므나를 가진 종에게 준다. 여기서 한 므나가 당시 성인 노동자가 백
일 동안 벌어서 모을 돈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열므나와 다섯 므나를 가진 종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큰 돈을 자신의 종에게 맡긴다는 것은
당시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며, 이러한 주인의 인격은 지상의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천상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며, 이러한 왕은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 비유를 듣는 자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 결론을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았던 원수들에게 내리는 판결로 끝맺는다. 즉 "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은 주인의 인격을 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엄한 사람 즉 양심과 인격이 굳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아주 완악한 사람으로 여겼던 종에게 그가 비록 주인의 다른 종들과 함께
지내었지만, 즉 같은 공동체 안에 속하여 있었으나, 그 종이 귀인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 과 같은 그렇게 엄한(굳은)사람 이었기에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그 귀인이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며, 귀인의 인격을 자신이 말한 대로
생각했다면 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 은행에 두었다가 귀인에게 그 이자까지 돌아가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주인이 주인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이 그 귀인을 따라가서 훼방하여 왕이 되지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할 것을
기대하여 그러한 상황이 되면 한 므나를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인은 그 종에게
마태복음 25:14-30에 나오는 결론처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는 말 대신
자신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자를 끌어다가 죽이라 라는 말로 대치시키며, 그 악한 종이 가졌던 마음과 행위를 왕 됨을 원치 아니하고 귀인을
미워하던 원수들의 마음과 같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 종의 결말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며 결말을 맺고 있다.
착한 종들이 받은 열 므나 혹은 다섯 므나는 각각 열과 다섯이라는 공통된 숫자를 통하여 열 고을, 다섯
고을이라는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의 착함과 충성됨을 증거 하는 상징적 의미 전달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여 이미 열 므나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물음에 그 왕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빼앗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을 자세히 보라! 열므나 가진 종이나 다섯 므나 가진 종이나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이 있는 자이다 그런데 열
므나 가진 종에게 그것을 주고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다섯 므나 가진 자 또한 가진 자로서 그 한 므나를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다섯 므나 가진 자나 열 므나 가진 자나 차등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5:14-30의 동일한 비유
내용을 보면, 열 고을 다스릴 권세라는 표현과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라는 말이 차등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남긴 종들에게 똑같은 칭찬과 결론을 내린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그러므로 충성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으로 오실 때에 처음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다스리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님의 왕 되심을
원하고, 믿고, 그 분이 반드시 왕으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착하고 충성된 삶을 산다면, 비유의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처음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많은 것을 다스리도록 맡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19:11-27의 "어떤 귀인의 비유"는 비유 자체가 왕이신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말하며 그 분으로 말미암는 심판과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그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흔히 상급이라 하는 모든 내용들을 차등 없이 동일한 의미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 17:10에서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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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상급론」에 관한 再논의에 들어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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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혁 목사 |
245 |
2004-05-23 |
이 글은 이화영 목사님의 글에 대한 재반론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 생각과 달리 조금 길게 쓰여진 점에 -이
글을 보실 모든 독자분들께- 대해 송그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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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상급론」에 관한 再논의에 들어서며...》
일단락 난 줄 알았던 논의에 새로운 점화를 시도하신 것은 그만큼
이 사안 자체가 진리의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중대한 표지로 여기신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제 판단이 그르지 않다면, 저또한 이화영 목사님과 변이주
목사님의 심정에 전적인 동의를 표합니다. 합신에 재학중일때의 기억입니다.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모름지기 목사란 자신의 배움에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목사의 정직성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목사님의 진지한 토론 자세에 진심어린 경의를 보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두 분께서 제기하신 이 논의의 의도와 목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지만 진술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토론의 깊이와 내용을 더하고자 하는 마음과 나아가 성경에 대한 좀더 바른 이해가 무엇인지를 구도하는 마음으로 이화영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진술에 따라 반론을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급 차등론 & 상급 균등론?》
목사님은 이 논의에서 다른 주장을 〈상급 차등론〉과 〈상급 균등론〉으로 구분하시면서 자신은 〈상급 차등론〉을 지지한다고
하시면서 〈상급 균등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 구절의 모호함을 핑계로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진배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밝히는 것은 만약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 논의의 장에 들어올 자격도 없거니와 들어와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제기하신 〈천국 상급론〉의 두 가지 입장은 ‘천국이 있다 또는 없다’는 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임을 아셔야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소위 개혁주의의 밥물을 먹고 자란 사람이 ‘지옥이 없다’고 한다면 완전한(?) 자유주의자로 전향을 한 명목뿐인 개혁주의자든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이단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딴지를 건다고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의 대체적인 진술의 방식이 자기
주장의 열심에 도취된 나머지 다소 현실성이 결여된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상급 차등과 균등에 관한
논의는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되어지고 있는 주제들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천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여기신다면 더 이상 발전적인 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이슈를 꼭 〈상급
차등론〉과 그에 반하는 〈상급 균등론〉이라는 대립적인 구도로 설정해서 보아야 하겠는가 하는데 의문이 있습니다. -앞으로 자세하게
언급하겠습니다만-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두 주장이 전적으로 배치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급’이라는 낱말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를수도 상급이 같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칼빈 선생의 지적과 같이 ‘상급’을 포도원 품꾼에게
나누어준 달란트의 차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급은 각자에서 주시는 ‘은사’처럼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상급’을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구원’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목사님은 후자의 입장을 반박하시는 입장이신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앞으로
칼빈의 진술 방식-칼빈의 주석과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에 따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제 상황이 칼빈 주석이외에는 다른 것을
참고 하기 어려운 입장이므로 양해 바랍니다)
《"하나님 만이 상급이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목사님의 견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
제가 보기에 그동안 목사님 줄곧 제기하신 내용중에서도 이 부분이 목사님을 가장 분통스럽게 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목사님의 격앙된 어조만큼이나 다소 객관성을 잃은듯한 예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보셔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상급이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목사님의 주장처럼 ‘구원으로 상급을 다 받았으니 다른 상급을 받을 생각은 말고, 충성할 필요도
없다’(의역)고 말씀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김영규 목사님과 소위 개성연 인사들을 지적하셨는데, 그 분들이 정말 그런
주장을 하셨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한가 하면, 지난번에 말씀드린것같이 논쟁은 사실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총회 교직자 세미나에 참석하신 지인 목사님을 통해 김영규 목사님의 강의를 송부받아서 어제, 오늘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 논의와
관련된 김목사님의 언급이 네 부분중 마지막 대지에 있더군요.
그 부분에 관한 김목사의 언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에게 지극히 높고 유일한 마지막 상급으로서 은혜언약을 통해 신자의 구체적인 삶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최고선’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어쩌면 개혁주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입니다. 이미 칼빈과 츠빙글리가 말하였고 헤르만 바빙크가 말하고
박윤선 목사님도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김영규 목사님도 그 선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고 마지막 상급으로 알고 신앙하는
성도‘라면 오히려 주신 모든 상황에서 그 분의 섭리와 주권안에 내재된 은혜언약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삶의 조건과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그 분만을
섬기며, 신앙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최고의 선이요, 마지막 상급으로 여긴다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선에 안주할수 있으며, 또 하나님 아닌 다른
상급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하나님을 최고의 상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찌 은혜안에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주신 사역에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고로, 목사님의 제기는 말만 있고 삶이 없는 어떤 목회자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요, 염려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만이 상급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목사님의 염려의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상급 균등론〉근거 구절에 대한 재반론》
이제, 목사님이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목사님은 소위〈상급 균등론〉을
옹호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몇 성경구절을 소개하시면서 그 해석의 부당성을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이하의 포도원
품군 비유와 22:1이하의 천국비유(혼인잔치비유)가 그것인데요, 목사님의 진술을 굳이 재술하면, 두 성경이 구원의 균등성을 말하기는 하나,
상급의 균등성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구원과 상급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하려는 입장이신데요. 그렇다면 칼빈의 해석을 보겠습니다. 칼빈의 두
비유에 대한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전자의 내용을 한문장으로 요약한다면,‘하늘의 유업은 행위에 의한 공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의 영광은 균등하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00)’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또한 주님의 자유로우시면서도 공평한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두 번째 비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과
관련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 Ⅰ, p.564). 이 비유의 결론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로 끝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이 두 비유를 굳이 종합해 본다며,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의지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주권과 의지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지 않을뿐더러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간섭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본문을 가지고 굳이 구원과 상급이라는 대립각을 세워 ‘구원을 의미하기는 하는데, 상급에 관해서는
아니다’는 분석이 필요하겠느냐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유란 여러 가지 해석의 개연성이 늘 존재합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의 본의(本意)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성경 해석 태도를 가리켜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안하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할 것”(기독교 강요Ⅰ.13.22)
이러한 성경 해석 입장에서 본다면, 목사님께서 〈성경균등론〉자들의 근거 구절로 드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 비유는
목사님 개인의 추측과 그로인한 억측이 드러난 예입니다. 상급 차등의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로 일꾼들이 받은 달란트의 차이와 그들의 능력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은 마치 종들에게 있는 개인적인 관리 능력의 차이에 따라 주어진 것이므로 그 능력을 발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정당하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듯 싶으나 칼빈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달란트를 다르게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배분하시는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그 사람에게 있는 재능과 성품은 하나님의 자기 의향에 따른 것이기에 자기에게서 난 듯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29). 또한 주인께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이익(benefits)으로서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부하게 되거나 증진되지는 않지만 형제에게 유익이 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구원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같은 장). 그런데도 목사님은 종의 개인 능력과 달란트의 차이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개인 능력여하에 따라 보상이 다를수 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은 이 본문을 (칼빈이 지적하는바와 같이) 너무 경제적인 산술적 잣대로서 이 비유를 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또한
목사님은 달란트를 배로 남겨야 하는 것을 100%의 헌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진정 우리에게 100%의 효과를 낼만한 100% 헌신이란
있을까요? 주인의 관심은 자기 종들이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겼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주인이 배로 남긴 종들에게만 칭찬해 줄것이라면 과연 그
주인을 선하다 할수 있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종들이 달란트를 땅에 묻지 않고 잘 활용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남겨야 할 구원의 열매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고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열리듯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구원 받은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열매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열매가 맺어졌다해서 마치 자신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한것마냥 자랑을 일삼거나 댓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넌센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섯 달란트나 두달란트를 남긴 종이 스스로 뿌듯해 할 일이 아님에도 주인은 이들에게 자비롭고도 공평한
댓가를 치러줍니다. 바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는 명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가지고도 달란트를 남긴것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라면... 글쎄요.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은 아주 아주 큰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고,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조금 부족한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는 것이 될까요? 억지입니다. 이것은 비유의 본의를 벗어난 해석입니다.
《〈상급 차등론〉 근거 구절에 대한 성경적 반론》
계속 이어서, 목사님께서는 〈상급 균등론〉에 대한 논박이후, 주장하시려는 〈상급 차등론〉에 대한 근거로서 세가지 성경
본문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사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재반론의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1.
누가복음19:11이하에 나오는 「므나비유」
이 본문은 목사님께서 바로 앞서 〈상급 균등론〉 주장의 근거로 제기하신 마태복음
25:11-30의 달란트 비유와 매우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 있어서, 이 두가지 비유를 한쪽에서는
〈상급 균등론〉 근거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상급 차등론〉을 옹호하는 근거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할뿐입니다. 이런 저의 갸우뚱거림을
이해하듯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두 본문을 구분짓지 않고 병행적으로 놓고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p.225-231). 그럼에도 두 본문은 마태와 누가의 기술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이 두 본문이 설정하고 있는
동일한 의도와 목적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목사님은 이번에도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는 고을 통치권을 사후에 있을 상급의 차이로 이해하려
하십니다. 그리고 칼빈과 헨드릭슨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도 같은 견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제 사정상 헨드릭슨과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분들의 입장에 관해서는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칼빈을 예로 드신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누가복음 19:13 본문을 해석하는 첫 머리에 이 비유에서 ‘돈의 금액이나 종들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밝힌 후, 종들이 각기 다른 므나를
소지하게 된 것을 다양한 은사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히 에베소서 4:7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는 말씀을 해석할때도, 우리의 경제적 관념에 부합되지 않은 일로서 이 부분을 확대 혹은 가정 해석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30). 오히려 이 비유의 관심사는 주인의 요구와 기대가 깃든 므나를 땅속에 묻어두었던
사람들의 태만과 불성실함에 경종을 울림으로써 이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겠으나, 착한 종에게는 자신을 살피며,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지는 또
다른 은혜의 계기인 것입니다. 이 은혜는 달란트와 므나의 양과 상관없이 주인의 관심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에서 남겨진 므나의 차이를 개인의 역량의 관점에서 보고, 불성실한 종의 한 므나를 첫 번째 종이게 준 것을 내세에
있을 상급의 차이로 본다면 D.A.Carson의 말대로 풍유적 해석인 것입니다(D.A.Carson, Mattew. p.517). 그럼에도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내세의 상급에 층계가 있다’고 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이 해석은 적어도 칼빈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고 할수 있습니다.
2.고린도전서 3:11-15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상급 차등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본문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이 곳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과 달리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칼빈의 해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의 ‘다른 터’와 ‘이 터’는 대조 어법입니다. 후자가 그리스도라면, 전자는 그리스도께 반하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건축 구조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즉 교회가 세워질때, 가장 중요한 터(기초)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12절의 표현은 대조적 은유법으로서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라면 상부 구조또한 가치있는 것들(금,은,보석)로 장식해야
하는데, 어떤 이는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것(나무,풀,짚)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자의 재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가치있는 기초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지는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내용물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라는
기초위에서 자신의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찬 거짓된 가르침과 비진리의 도구들로 구조물을 세워나갑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역자들의 속임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두움의 역사가 현저한 형태로 침노할때, 믿는 자들에게 위협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역사는 잠깐입니다. 빛이 비췰때,
그 어둠속에 묻혀진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13절의 그 날(the day of the Lord)이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 날은
역사 속에 감추어진 모든 공력들이 불(하나님의 성령)의 판단(시험)을 통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그 날은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진 모든
진실이 평가를 받는 날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진리(가르침)와 같은 재료로서 세워진 공력이라면 상을 얻을 것이나, 나무,풀,짚같이 가치없는
재료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해(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내세후의 있을 성도간의 상급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차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며,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날에 이루어질 주의 약속과 평가를
기대하며 교회와 성도를 진리위에 세워나갈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절 참조)
이러한 해석의 흐름에서
본다면, 목사님께서 상급 차등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신 15절 하반절의 말씀, 이를테면 "불가운데서 얻는 구원" 혹은 "부끄러운 구원"(의역)도
과도한 비약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자세히 보시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공력에 따른 상"이란 내가 얼마만큼의 공력을 세우냐에 따라 지급되는
차별적 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 날에 남겨질 그 내용물을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터위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세운 사람이 받게 될
상이요, 구원인 것입니다. 물론 칼빈은 15절 ‘자기는 구원을 받되’라는 구절에서 그리스도라는 기초위에 서 있으나 불순물이 섞여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기초삼아 세워지기는 했지만 육신의 연약과 무지로 인해 완전한 말씀의 순수성으로부터 약간 벗어난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지금 바울이 바라보는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그러하며,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칼빈의 이 본문에서 이러한 사람의 예를 들고
있는 것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수 있다는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금은 흐트러짐이 있을지라도 그 날에 성취될
주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갈때, 불가운데서 구원을 얻을 성도에 대한 구체적인 격려이며, 안전한 확신을 주고자 하는 표현입니다(칼빈 주석,
고린도전서 pp.116-122).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영원한 세계에 있을 구원의 차이나 상급의 차별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 요한계시록 3:11-12
아시다시피, 애석하게도 칼빈의 주석에 요한계시록이 빠져있습니다. 고로
저의 설명을 장황하게 덧붙이느니 차라리 이 주제에 관한 좋은 글 한편을 소개해 올리는 것으로 제 생각을 대신코저 합니다. 제가 합신에 재학할
때, 신약학을 가르치시기고 하셨는데요, 홍창표 교수님의 「산상보훈 해설」중 〈하나님 나라의 상급 계념〉이라는 소논문에 요한계시록의 상급 개념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한 홍교수님의 입장을 따르기에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울러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정독하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특히, 「기독교 강요」Ⅲ.15-19)
《글을 마치며...》
오해없으시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이목사님의 〈상급 차등론〉에 대한 〈상급 균등론〉의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이 두가지 논제를 구별하여 본다면, 저는 두가지 모두를 받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상급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급 차등도 상급 균등도 다 진리일 수 있고, 또한 진리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급 차등론이든 상급 균등론이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방식과 그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능력에 걸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급 차등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위축될지 모를 인간의 의지적 측면에 대한 이 목사님의 배려와 관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상급 차등〉과 〈상급 균등〉이라는
언어적 뉘앙스에 매여서 더욱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고 잃을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예로, 이목사님께서는 구원의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상급을 제시하시는 이유를 가리켜 인간의 심리가 대가없는 일에 충성하는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대가없는 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요구하지도 바랄수도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입니다. 대가를 바란다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행함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우리의 행위에서 나는 그 어떠한 선한 것도 그 자체로 주의 은혜를 충족할 수 없으며,
구원받을 만한 정당한 요구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모든 역사 속에 끊임없이 그리고 주저함없이 설득하고 깨우치시며
고백케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내용이요,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고백해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행여나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나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의도는 진리의 저편에서 호시탐탐 회유와 속임을 거듭하는
우리안에 남겨져 있는 펠라기안이요, 알미니안이요, 카톨릭주의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Ⅲ18.4) 또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기독교
강요 Ⅲ.25.10). 그렇습니다. 성도는 현세와 내세의 상급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극히 크신 상급이신 하나님 때문에 그
상급의 가치를 알고 누리며 사는 자입니다.
김병혁 목사(드림)
Re:Re:「천국 상급론」에 관한 再논의에 들어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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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Goanghyen |
133 |
2004-06-08 03 |
'우리는 수많은 신학 중에서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진리와 거짓은
병존할 수 없고, 벨리알과 교회가 연합할 수 없고, 남자와 남자가 교합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두움과 함께 있을 수
없고, 물과 불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단순한 신앙은 여러 신학으로 혼잡케 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여러 신학 중에서 취사선택을 당하는 위치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를 증거하는
유일한 방식이요, 최상의 증거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상급" 용어, 문맥과 계시적 의미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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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철 |
196 |
2004-05-22 11:30:47 |
하나의 '단어'는 성경의 '문맥과 계시적 의미'를 따라
해석해야함
구약성경에서 '사카르( )'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BDB 참조). 그러므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사전적 분류와는 다르게, 성경 본문의 문맥을 따라 분류해 보았다(사전은 문맥과 계시적
의미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열되었음, 진하게 보이는 성경구절은 변이주 목사님이 제시한 성구들이다).
1. wages,
of servant (종들이 주인에게 받는 품삯, 품꾼의 삯) : 창 30:28,32,33 출2:9, 신15:18, 24:15, 슥8:10,
말3:5 2. reward, for work done, faithfulness (일한 것, 충성한 것 등에 대한 유형ㆍ무형의 사례 또는
보상) : 민18:31, 전4:9, 대하15:7 3. passage-money, fare (통행요금) 욘 1:3 4.
restitution (손해배상) : 출22:14 5.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은혜로 주시는 선물로서의 상급 : 시127:3,
창15:1, 창30:18 6. 장차 있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아래에서 '보응'과 대조되는 의미로서의 '상급' : 사40:10;
62:11; 전9:5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사카르( )' 라는 용어는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용어가 어떠한 의미로서 사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글의 전후 문맥을 따라서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턱대고 단어 자체가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라고 하며,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문맥을 무시한 채 논리를 펴는 일은 어떠한
글이든 그 글의 내용과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데는 커다란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히브리어의 단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계시의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신 것을 고려할 때 단어가 갖는 의미를 사전적 의미만으로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깨달을
가능성은 없다. 성경의 다양한 사건과 계시적 의미들을 말하는 가운데 '사카르( )'라는 용어가 문맥에 따라 사용되었음을
아는 일은 신학을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기초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과 성경 전체의 계시적 의미들을 생각하지 않고 낱말의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성경 본문의 내용을 똑같은 의미로 해석하며 자신의 생각을 펴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올바르다라고 할 수
없다. 위에서 대략적으로 분류한 것만
보더라도 '사카르( )'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한 것과 충성한 것에 대한 사례와
보상의 의미로 쓰일지라도-사전적 의미자체로 반론하여도-그것은 유형과 무형의 상급의 성질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요나서 1:3의
내용처럼 단순히 배를 타고 가기 위해 지불하는 선가(배삯)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상급의 차등 유무'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며,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역행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22:14의 내용을 보면 '사카르( )' 의
의미가 상대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 사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시편 127:3의 내용은 127편 전체의 내용을 볼 때, 하나님의 주권에서
오는 은혜로우신 선물의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른 차등적 상급의 의미는 전혀 발견 할 수 없다. 창세기 15:1의
내용도 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높은 왕 되심을 '방패' 와 '상급' 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전(前 창세기14장) 문맥을 따라 이어서 말하고 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해'와 '방패'(시84:11)로 소개하시는데, 고대근동에서는 이 용어를 왕의 칭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정황과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고려하여 볼 때, 창세기 15:1의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왕'
되심을 강조하는 말로서 '상급'이란 용어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패'는 곧 '상급'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앞의 사건 즉,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직분과 사역과 관계되는데, 창세기
14:18의 내용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14:20에서는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라고 말한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얻은 것은 창세기 14장의 전쟁에 나오는 모든 나라의
왕들과 비교해서 지극히(절대적 가치에서)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이 종결 된 후에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브람의 행위에 따라 어떤 상급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의 온전한 믿음의 행위가 형성되지도 않은 시점에 하나님께서 위의 사건 (창 14장)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너에게 왕이요 상급 자체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따라 십분의 일을 드린
것도 그 싸움의 승리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했을 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맹세하노니 (그렇게 하면 나중에) '네 말이 내가 아브람을
치부케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안니하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을 부요케 하실
자는 '씨' 와 '땅'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안에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약속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며 그 주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의 참된 자녀들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복을 누릴 것'이다. 계속 강조되는 말이지만
이것이 구원의 모든 내용이다. 구원은 영생의 의미만이 아닌, 영생한 자들이 다스리는 권세와 누리는 복 된 상태 의 모든 것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전부'이다라는 말은 구원 얻는 자의 모든 총체적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지극히 큰 상급이시다'는 말은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상급'이라는 용어가 갖는 참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의미로서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시는 것을 '추상적'이라고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어떤
내용물'을 '구체적'이라고 하는 논리는, 그 사람 스스로 자신 안에서 정의하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을 스스로 신앙하는 격이 되므로, 논리적으로 볼
때 그 사람 자신의 신앙은 결국 '추상적 신앙' 이 되고 만다. 또한 하나님을 추상적인 분으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니 그러한 인식과 주장의
결국이 얼마나 엄청난 것일지는 스스로 말씀 안에서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 안에서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다스려지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전에 가지고
누렸던 모든 상태(생명과 창조의 모든 것들을 다스림의 실상)가 바로 '상급'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것들이요, 하나님 자신 안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계시로서의 내용들이 아닌가? 이 사실 외에 더 이상
이와 같은 총체적이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뭉친다하여도 하나님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생명과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권한과
다스리라고 주신 온 세상을 잃었던 것을,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열 고을 다스릴 권세와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라
타락 전 아담은 열 고을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바다와 공중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와와 함께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 권세와 내용들을 동일하게 주셨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함께 처음에 부여받았던 모든 것을
잃었고,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 '상' 받을 만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게끔, 전적으로 타락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은
생명 곧 구원이요, 그 생명 안에는 처음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누렸던 권세와 모든 내용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부여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며, 성도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카르( )' '상급'의 사전적 용례와 의미들은 오히려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님 자신에 의해서 친히 계시적 완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이 점은 매우 중요한 계시적 사실이다).
'주인이나라 자신의 품꾼에게 주는 삯의 의미'가 신약에는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또 하나님 나라 비유의 그 비유 자체이신 주님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한 비유의 내용에서 구약적 용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주인이 종들에게 주는 삯으로서의 상급(사카르)이 그대로 비유로서 드러나면서
'주인과 종'의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서 '상급'의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카르(
)'의 의미가 전후 문맥을 통해서 그 본의가 결정되듯이,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나 그 밖의 내용에서도 그 용어는 문맥에 따라서 해석되어져야
마땅하다. 글을 이해함에 있어서 문맥을 따라 그 용어의 진정한 쓰임새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이 아닌가? 사람들은 일반적인 글을
읽을 때는 논리도 있고 문맥을 따라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성경을 볼 때는 그러한 기초지식이 사라지고 논리를
잃어버리며, 자신에게 정착된 신앙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단어 자체에만 유난히 집착하는 것을 본다.
또
주장하는바 근거구절로 제시한 이사야 40:10과 62:11은 둘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인 악한 자에게 따르는 하나님의 '보응'과 의인에 주어지는
'상'을 말하므로, 이 내용 역시 장차 성도들 사이에 행한 충성과 희생 봉사의 여하에 따른 차등적 상급 있음을 보장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전도서 9:5의 내용을 사전에서 찾아서 증거로 제시하였으니 그 주장이 성립 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전도서 9:5의 전후 문맥과 전도서 전체에서
말하는 계시적 내용과 함께 그 결론을 생각하며 읽어보도록 하자. 이해를 돕기 위해 전도서 8:16부터 보도록 하자.
전
8:16-9:5
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찌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찌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위의 전(前) 문맥과 9:5절 자체의 표현이 증거 하듯이, 전도서 9:5의 내용에 '상'이라는 용어는 나왔지만, 그
용어의 의미는 신앙 생활 잘한 사람은 '더 좋은 상'을 받고 덜 충성한 사람은 '덜 좋은, 그 보다 못한 상'을 받는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여기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과 '그 이름이 잊어버림바 됨이라'라는 말이 별개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동질의 의미로 '강조'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의 앞의 내용을 볼 때,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라는 말은 죽은 자의 무지 곧 그의 형벌(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 상 받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마태복음 7:23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는 말과 같은
결론이다.
과연 성도들의 신앙에
손상을 주는 자는 누구인가?
상급차등부정론- 유익을 주지 못하는 학문은 결국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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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주 |
199 |
2004-05-21 15:13:52 |
본 게시판에 오른 글, 이화영 목사님과 문종철 목사님, 김병혁 목사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글을 올립니다.
'사후상급의 차등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아직은
차등이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김영규
목사님이나김병혁 목사님 그리고 문종철 목사님 등 여러 분들의 의견에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1.
김영규 목사님의 사후상급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신 이화영 목사님은 이의를 제기하게 된 동기를 지난번에 있은 합신 교단 수련회 때 행한
특강(강의)에 두고 있습니다. '강의'와 '학술발표'와는 차이가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강의란 강사가 자신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성격이 짙으며, 수강자는 대체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그러나 학술발표는 발표자의 견해일 뿐 듣는 사람들이 그냥 수용하지 않습니다 김영규 목사님이 학술발표가 아닌 특강시간에
'개인적 견해'임을 전제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후상급에 차등이 없다'고 주장했다면 분명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강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되지 않았다면 별문제로 치겠지만, 일단 이의를 제기한 분이 있기 때문에 김영규 목사님은 차후에라도 '개인적 견해'임을 밝히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의사 표현을 자제하고 있을 뿐 김영규 목사님의 강의에 이의를 제기할 분들은 이화영 목사님이나 저 외에도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개혁신보 기사 내용(351호 1면)을 참고한다면 김영규 목사님의 '상급차등부정론'은 창15장 1절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구절도 성경의 한 근거로 삼은 것 같은데(그렇지 않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히려 이 말씀이야말로 상급의 차등을 뒷받침하는 성구라고 생각합니다.
'상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칼>은 창 15:1, 대상 15:7, 시 127:3, 사 40:10, 62:11 등 개역성경에
5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뜻은 (계약금의)지불, (구상적으로)봉급, 요금, 생계비, (함축적으로)매상, 이득, 임금
등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완벽성구대사전,아가페출판사). 다시 말해 '상급'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상성을 확보한,
즉 '구체적인 그 어떤것'이라는 뜻이 강조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3. '상급차등'과 같은 문제는 수학공식과 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마다 의견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유익이 큰 쪽에다 무게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상급차등부정론'의 영향으로 목회 열정의 감소 및 성도들의 신앙 열정에 손상을 입힌다면 이 얼마나 큰 낭패이겠습니까. 상급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올바른 상급관념은 참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절대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급차등부정론'을 강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적으로 주장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상급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상급차등부정론'에 비하면 그 피해는 아주 작고 또 적은 것입니다.
유익을 주지 못하는 학문은 결국 무익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