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지역교회론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원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자신이 혹시나 편벽에 사로잡혀 있는것은 아닌가? 설사 내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내자신에 계속해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전체적인 흐름이 다시 조망이 되어서, 아래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내용들은 크게 2가지로 압축이 가능해졌습니다.
견해1) 성령의 하나됨을 지킴으로 지역에 교회가 유동적크기로 나타남 (하나로견해)
☞ 교회는 단지 성도무리의 모임만으로 성립되며, 규모와 여견에 따라서 크기는 유동적이다. (예: 그집교회, 지역교회)
☞ 성령의 하나됨을 지킴으로 교회가 행정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나누어져 있어도 하나의 교회이며, 한몸이다.
☞ 지역이나 장소에 나타나는 교회는 성령의 하나됨의 결과이기 때문에 지역이 하나가 되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견해2) 고정된 한지역의 크기를 지킴으로 성령의 하나됨이 표현됨 (폴님견해)
☞ 교회는 한지역에 하나의 교회만 나타난다.
☞ 한지역에 믿는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지역론을 지키지 않으면 성령의 하나를 이룰수 없다. 그래서, 한지역론이 선결되어야 성령의 하나가 표현된다.
제가 보기로는 결국 위의 2가지의 견해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견해1에 대해서는 저의 견해이고, 홀리조이님과 빚진자님도 동의하시리라 믿고, 견해2에 대해서만 추가적인 생각을 정리합니다.
결론적으로는, 한지역 한교회론도 틀린 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폴님이 이렇게 열심히 외치고 있음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가 『부족』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해와 부족함>>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역의 결과로 그집교회가 시작되고, 성령의 하나됨이 잘 지켜지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가 점점 성장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가 성령의 하나됨이 지속적으로 지켜진다면 분열은 없을 것이며, 그지역의 최대한의 크기만큼 성장을 할것입니다. 여기서의 최대한이란 사람의 일상적인 생활권이라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의 명칭을 도시,성,읍,면등의 어떤 단위의 명칭이라도 상관은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의 교회는 지역의 하나를 주장함으로 하나가 된것이 아니며, 성령의 하나됨(엡4:3)으로 그지역에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것일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하나됨을 지킴으로 한지역에서는 하나된 성도의 무리가 나타나게 될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최상의 경우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집교회 이후로, 서로 분쟁,시기,다툼으로 분열이 되어 수십개의 견해차이로 갈라져서 반목하게 되는 경우가 최악의 경우가 될것입니다.
물론, 그 분열과 하나됨의 정도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중간의 경우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좀더 이해를 돕기위 해서 부연하면, 분열(-)과 하나됨(+)을 점수로 표현해보면 100점 만점에 100점부터 90, 80, , , 20 , 10 , 0 점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것입니다. 여기서 100점(하나됨99%,분열1%)이 최상의 경우 , 50점(하나됨50%,분열50%)은 중간경우 , 1점(하나됨1%,분열99%)은 최악의 경우로 가정을 해봅니다.
이제, 이것을 토대로 지역교회론에 대한 『이해』와 『부족』을 설명해보면, 폴님이 주장하시는 <<한지역 한교회론>>은 최상의 경우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틀린 주장만은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에 따른 여러 경우 가운데, 최상의 경우를 주장하고, 또 그것을 표준으로 삼고 함께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론에 대한 『이해』를 어느정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최상의 경우(99%)라는 것은 목표치이며,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외에 지나온 2천년의 교회사에서, 최상의 경우인 성령의 하나됨이 나타난 지역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아주 그럴듯해 보이고, 교회분열방지대책의 대안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것보다는 미래적인 목표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비젼 제시>라고 보아도 될 듯 싶습니다.
혹시, 오늘날 지방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등급에 도달한 최상의 경우(99%)라고 주장을 하실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증명이 되기 위해서는 서울에 사는 모든 믿는이들이 성령의 하나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서울에는 아직도 초대교회와 같이 모든 믿는이들이 성령의 하나됨으로 최상의 경우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결국, 지방교회 스스로도 아직 최상의 경우에 도달하지 못한, 단지 비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다른 교회에서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자신들도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비젼을 외치다 보니, 허점이 많고 공격당하기 쉽상입니다.
허나, 지방교회 입장에서는 부족하지만, 최상의 경우를 위해 노력하자고 외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라고 폴님은 <다수의> <같은 값이면>이라는 표현들을 써가면서 누누이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보통의 비젼제시는 사역적 입장이 강합니다. 바울사도도 사역자로서 외치고 있었고, 폴님의 외침도 사역적 성향이 강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하나됨으로 한몸을 이루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교회가 결정할 일입니다. 사역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상의 설명으로 볼때에 지방교회는 사역적,선교적 성향이 강할 것이라 보여집니다. 교회의 초기사역 때에는 교회가 성장하기 전이기 때문에 사역의 공급을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한지역 한교회론>>은 결과론적인 최상의 경우(99%)를 외치면서, 그것을 인정해야만이 하나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앞의 표현처럼, 성령의 하나됨으로 자연스럽게 그것이 어떤 지역이든지 이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나타날 <지역의 하나>를 오늘 지킴으로 성령이 하나가 된다는 우스운 주장이 되고 맙니다. 한마디로, 앞뒤가 바뀐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을 해보면, <미래에 나는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부자가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말이 틀린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이해』를 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언가 허전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능성 뿐이어서 그렇습니다. 듣기에는 달콤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속에서 각고의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미래에 부자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전한 것입니다.
그럼, 이 <현실속에서의 각고의 피나는 노력>이 무엇일까요? 미래에 한지역에 자연스럽게 하나됨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하나됨(엡4:3)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시, 그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고전2:2 ,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것입니다.
결국, 한지역 한교회론의 최상의 경우(99%)를 외치는 것도 엡4:3, 고전2:2이 전제할 뿐입니다. 그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장로행정체계입니다. 어떻게 달리 표현을 해보면, <한지역 한교회론>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지역이라는 표현을 빌린 <한행정 한교회론>이 더 본질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은 섞여 있어서 혼란을 주어 왔습니다.
한 지역에 믿는이들은 인정은 하면서도, 기존의 행정체계(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에 교회로 인정을 못한다고 하는 것이 지방교회의 입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논리 역시 전후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행정체계가 하나됨으로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습니다.
교회사 2천년사에 한지역에 분열이 없이 하나의 행정체계로 통합된 교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아니라면, 대부분의 교회는 없었어야 합니다.
결국, 이것도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성령의 하나됨으로 자연스럽게 행정체계가 통합이 되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의 차이를 한마디로 압축을 해보면,
견해1) 현실속의 원인을 성실히 이행함으로 결과가 얻어지는 것이다.
견해2) 결과의 입장을 원칙으로 삼음으로 원인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의 원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며, 결과는 한지역,한장소,한행정의 하나됨입니다.
이제, 나머지 부분들은 부차적인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오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의 차이가 부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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