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언약 신학의 관점에서 본 웨슬리안 성결론 논문에 대한 팩트 체크와 평가

baromi 2021. 12. 25. 02:11

언약 신학의 관점에서 본 웨슬리안 성결론 논문에 대한 팩트 체크와 평가 

작성자: 윤영상 목사(인천갈보리장로교회 담임목회자) 

 

 

 

장기영교수님의 웨슬레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라인의 한 부류와 유사한 점을 찾으려는 노력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장교수님께서는 개혁주의 내에 “예정과 언약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두 부류가 존재한다고 언급하셨습니다. 문제는 언급하신 개혁신학 안의 두 분류 가 실제 존재하는 부류인지 먼저 팩트 체크를 하는 것이 옳다 여겨집니다. 

 

 

 

팩트1: 

장교수님께서 “예정과 언약의 관계”에 대해 개혁주의 내에는 

   (1) 예정과 언약의 관계를 서로 보완적이라고 보는 관점과

   (2) 언약이 예정에 종속된다고 보는 관점 

이렇게 두 관점이 있다고 분류하고는, (1) 예정과 언약의 관계를 서로 보완적으로 보는 관점으로서 우병훈 교수의 예정과 언약의 차이점에 대한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신 우병훈 교수의 문장들은 “예정과 언약”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글이지, 예정과 언약을 서로 보완하는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용하신 우병훈 교수의 글의 구조는 아래처럼 예정과 언약 의 각 특징들을 나열하며 차이점을 언급한 것입니다. 

 

 

인용된 우병훈 교수의 원글 

예정은 일방적인 데 반해 언약은 쌍방적이다. 예정은 우리와 무관하게 우리 밖에서 ... 일어난 일인 데 반해, 언약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유지된다. 예정은 영원 전에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언약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과 더불어 진행된다. 예정에서 하나님은 단독적으로 일 하시지만, 언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과 순종을 기다리신다. 예정은 절대 파기될 수 없지 만, 언약은 인간의순종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요소가 있다. 예정에서 하나님은 인간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시지만, 언약에서 하나님은 신자와 그 자녀들을 함께 공동체적으로 부르신다. 예정은 단 한번의 결정이지만, 언약은 구원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정에서는 우리 자신의 독특성이 고려되지 않지만, 언약에서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다함 께 고려되는 것 같다. 예정은 폭이 좁고 한정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언약의 틀은 범위가 넓고 택자(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가 아니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위에 인용된 우병훈 교수의 글을 분석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정  언약 
예정은 일방적  언약은 쌍방적 
예정은 우리와 무관하게 우리 밖에서 일어난 일  언약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유지 
예정은 영원 전에 이미 결정된 일  언약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과 더불어 진행 
예정에서 하나님은 단독적인 일  언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과 순종을 기다림 
예정은 절대 파기될 수 없음  언약은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요소 
예정에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심  언약에서 하나님은 신자와 그 자녀들을 함께 공동체적으로 부르심 
예정은 단 한번의 결정  언약은 구원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남 
예정에서는 우리 자신의 독특성이 고려되지 않음  언약에서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다함께 고려됨 
예정은 폭이 좁고 한정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언약의 틀은 범위가 넓고 택자(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가 아니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인용하신 우병훈 교수의 글은 예정과 언약의 특징들을 서로 비교한 것이지, 예정 이 부족하여 언약으로 보완을 한다는 취지의 글이 전혀 아님을 분석 도표를 통해 확인됩니다. 언급하신 예정을 보완하는 것이 언약이라는 이해를 가진 개혁주의 안에서의 신학자들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청교도신학자들)의 신학이 서로 틀리다는 오해를 갖고 있는 부류의 학자들입니다. 

 

대표적으로 페리 밀러가 장교수께서 언급하신 (1)의 부류입니다. 페리 밀러는 {언약 신학은 예정신학의 지나친 초월성에 대한 역반응으로 생겨났으며, 후자에서 결핍된 내재성을 보완하는 신학이었다}는 것이며, {후자에서 결핍된 내재성을 보완하는 신학}이었다고 말합니다. 

페리 밀러는 조엘비키가 그의 책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초반에서 언급한 인물로서 청교도를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는 인물 중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청교도들이 칼빈의 예정신학의 지나친 초월성 때문에 언약신학을 발전시킨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페리 밀러는 청교도 신학은 칼빈의 신학을 변질시킨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링크: http://blog.daum.net/healer/15736122 ) 

 

즉 개혁주의 안에서 예정의 지나친 초월성 때문에 반발로 언약신학으로 보완했다는 이 견해 자체는 청교도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생겨난 견해이지, 실제로 그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정신학이 지나쳐서 보완책으로 언약신학을 만들 었다는 견해를 말하는 학자들의 공통점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오해를 하는 분들입니다.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지요. 즉 개혁주의 안에서 예정과 언약의 상관관계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바른믿음의 서철원, 고경태, 정이철 목사 라인이 취하고 있는 신학적 견해가 바로 이러한 오해된 견해들을 취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장교수께서 언급하셨듯이 “전반적으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중예정에 초점을 둔 개혁주의 신학을 극복하거 나 보완하기보다, 예정론의 하부구조로서 유기와 선택의 근거를 마련하고 예정의 방 식을 설명하는 특징을 보인다.” 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오해로 인해 생겨난 견해라고 평가되고 있기에, 그러한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팩트2 

장교수님께서 이미 언급하셨지만, 웨슬리의 언약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언약신학을 전수 받았지만 단지 수동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전수받은 내용을 사려깊게 검토해 수정하고 교정했다는 스탠리로우즈의 평가가 옳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웨슬리의 수정은... 인간 타락후 행위언약이 다시 등장할 수 없도록 못박아, 예정론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을 아르미니우스주의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글에 개혁주의의 이중전가 중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웨슬레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적절하게 가르치면, 사람이 성경적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으로 나아가기보다, "내가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순종이 내 것이 되었으니 내가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추론해 율법무용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함을 지적한다. 

   웨슬리가 이런 위험성을 가졌다고 여긴 부적절한 전가 교리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을 믿는 신앙이 신자의 죄를 씻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행위언약의 엄격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역시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어야 한다는 방식의 설명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신앙으로는 은혜언약만 충족시킬 뿐 행위언약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모두가 전가되어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중전가 교리이다

   웨슬리는 이런 전가 교리에서는 "실제로 율법을 악명 높게 깨뜨리며 살아가는 죄인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죄가 없는 순종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것이 죄인으로 "거룩함 없이도 흡족한 상태가 되게 해 ...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율법 위반자'로 살다 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했다. 

또한 전가 교리를 그런 방식으로 제시한 결과는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믿음이 성결을 낳는" 결과보다는 오히려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는 그릇된 신념을 낳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위에 언급하신 웨슬리의 이중전가 교리에 대한 우려는 이미 웨스트민신터신앙고백이 작성되던 당시 청교도들 사이에서 일부 청교도 신학자들이 우려를 했던 부분이고 논란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이부분에 대해서는 웨민신조 작성 당시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논란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로 인한 우려들 때문에 더 크게 잘못된 길로 벗어난 무리들이 개혁주의 안에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바로 패더럴 비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검토는 웨슬레의 오류를 더 잘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잘못 이해하면 빠지는 양극단은, 

(1) 웨슬레가 우려한 반율법주의입니다. 

이쪽으로 빠진 자들을 하이퍼칼비니즘이라 합니다. 김홍만 교수가 전에 세미나에서 웨슬레가 당시 칼빈주의자들과 논쟁을 했다고 했었는데, 그 칼빈주의자들이 하이퍼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언급을 한적 있습니다. 아마도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 직접적 영향은 아니어도, 간접적으로 왜곡된 견해를 품게 하는데 있어서 한몫 거들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2) 신율법주의입니다.
패더럴 비젼과 새관점주의자들(전가교리 자체를 부인하는 특징)입니다.
신율법주의자의 경우 성도들의 성화에 대해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 부류들입니다. 아마도 
웨슬레 역시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신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도들의 거룩에 큰 관심을 갖는 부유들이 쉽게 잘 빠지는 오류가 바로 신율법주의로 공통점이 성도들의 성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거부한다는데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 받은 성도는 감사함으로 거룩을 위해 율법의 3용도를 힘써 지켜내려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자발적으로 사랑하셨듯이, 그러한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아버지를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습니다. 

그런데 패더럴 비젼과 새관점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거룩에 힘썼던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본받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본은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연관이 있것입니다. 

 

결론:
장교수님께서는 웨슬레의 개혁주의의 언약신학을 수정해서 받아들이는 과정을 언급하셨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웨슬리의 이러한 과정이 장교수님의 언급처럼 아르미니우스주의적으로 전향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웨슬레의 전향은 개혁주의 안에서 페더럴 비전과 새관점이 그대로 웨슬레와 같은 길을 답습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웨슬레신학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