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중생논의자료]피터 마스터스목사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시정하면서

baromi 2013. 9. 21. 10:38

한 형제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그로부터 아래와 같은 글을 받고는 그 내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해명할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에 대해서 쓴다기 보다는, 대화 중에 나온 그 인물들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혹시라도 이런 분들이 계실까 싶은 마음에, 이런 얘기를 한 번 정도는 드려놓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그것이 중생과 회심에 대한 오해를 불러 오는 것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던 셈입니다. 저의 블러그에 들어오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일종의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손성은).

 

*     *      *

 

(그 형제의 글)

 

아 목사님 괜한 얘기를 했다가 마스터즈목사님까지 거론하게 되네요.
한편으로 궁금한 점도 저 또한 그 당시 많았습니다. 저는 그때 토론중에 왜 그 책의 내용만을

두고 이야기 하지 않고 마스터즈라는 분을 꼭 거론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
그 분이 어떤 사람이건 책내용에 대한 부분만 토론에 집중하지 그 사람의 어떠함으로 책의 내용을
토론할 가치도   깊이 읽을 가치까지도 무용하게 하는냐에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
그점이 저는 큰 실망꺼리였습니다
.

후에 그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
마스터즈목사의 타버나클 교회에 찾아가서 예배를 하고 그분을 직접 뵙고 대화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로이드존스목사님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마스터즈는 ‘그 웨일즈 사람!’ 하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차갑고 시니컬하다는 평가를 저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 방향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가 로이드존스에게 배웠음에도 멀어졌고, 배너오브트루스와 컨퍼런스 멤버가

아니라며 좀 다르다고 말하며 존머레이를 비판한 내용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에게 다시한번 그책을 잘읽어볼것을 말했습니다
.
목사님은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리더와 토론을 한 것을 안 상황이었습니다. 아 저의 답답한 심정을 어디다 호소할까요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지 리더는 목사이지 누가
잘못되었는지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

참 실망스러운 것은 읽지도 않고 단정을 내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지 첫인상만으로

...
그 책을 읽고 논의가 있기전에 리더는 그 책의 내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교제중에 한번 물어보기로 한것입니다. 물어보니 리더가 제대로 잘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말한 것을 죽 얘기 해주었겠죠. 그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그러니 리더가 모임중에 더 선입견을 가지고 잘못되었다고 얘기를 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스터즈 목사님의 설교를 그때 들었는데 성경본문 한줄 읽고 거기에 대한
해석하고 또 읽고 해석하고..... 저렇게 설교하면 참 설교자가 편하겠다라고 그 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좀 의아했습니다. 영혼의 의사에 전도설교에 대한
부분을 읽어보면 그렇게 설교를 할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목사님과 교제도 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고 예전에 그분의 설교사이트도

소개해주셨는데 그렇지 않겠다는 것을 염두해 두며 넘어갔습니다. 각자 듣는 취향이
다를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그리고 설교의 방법도...

나중에 목사님이 그책을 읽고 한번 전화가 와서 얘기를 나누는 중에 자신이 읽어보았는데

잘못된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토마스굿윈을 언급하시면서 자신이 영국에서 공부할 때
굿윈을 연구했는데 굿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 예 그렇군요. 하고 넘어갔습니다
.
다 대화의 초점이 심히 빗나감을 느꼈습니다
.

그럼에도 중생과 회심의 이해는 잘 아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읽지 않은 것으로 그부분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전 기억은 다 잊고 열심히 앞으로
생활을 잘 하자 다짐했습니다.

제마음속에 남는 이미지는 편협함이었습니다. 한 인물에 치중, 절대위치에 놓음
.
다른 것들은 마음 놓고 얘기하고 나누고 의견을 묻고 논의하는 일은 힘들겠다는 생각
,
(
내용이 개혁주의적임에도
..)
한국적 바른 개혁주의적 청교도를 추구하는 경우 가장 흔하게 들어나는 현상입니다
.
깊고 넓은 이해없이 단편적인 이해로 비판하기 일쑤입니다
.
자신들의 바름과 상황을 남을 비판함으로 만족하며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지표로 삼기가

쉽다는 생각입니다
.

그래도 그나마 바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디냐며 감사히 만족하며 넘어갔습니다
.
누구나 연약한 부분이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 더 좋은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을까하면서
.
손목사님 제가 누구의 잘잘못을 말하고자 그리고 그때 어려운 마음을 토로하고자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현실이라 말씀드립니다.
깊은 연구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은 그저 자신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성을 쌓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답변)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서, K목사님이나 그 리더가 가졌을 법한 오해 몇 가지를 제가 마스터스목사님을 위해서 해명해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런 잘못된 인상이나 정보들에 의해서 영혼의 의사의 주요논지가 왜곡된다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들의 거부하는 심정이 어쩌면 그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거부의 심리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깐 더욱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첫째, 피터 마스터스목사와 로이드 존스목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스터스목사님은 로이드 존스목사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젊은 시절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몇 중에 로이드 존스목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마스터스목사가 결혼할 때 그 주례를 로이드 존스목사가 서주었다면 그 관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경의 마음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목사의 저서들이 마스터스목사의 메트로폴리탄타버너클에서 운영하고 있는 서점(이 서점은 개혁주의, 청교도계통의 책자들만 팔고 있는 영국전체에서도 대표적인 서점입니다: http://www.tabernaclebookshop.org/)에서 추천도서로 팔리고 있습니다. 단지, 마스터스목사가 로이드 존스목사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신학적인 견지에서, 로이드 존스목사가 진정한 칼빈주의신학을 잇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세례론과 부흥에 관한 관점이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칼빈주의, 혹은 진정한 개혁주의노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자에게는 아주 귀중한 비판이 될 것입니다. 이런 낭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마스터스목사가 주장하는 바는 복음사역은 오히려 끊임없는 수고와 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요소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바는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자의 수고와 눈물과 봉사의 요소를 무시할 정도로 강조된다면 그것은 낭만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요소들은 로이드 존스목사의 전기를 통해서 보여지고, 그 전기를 쓴 이안 머레이는 마스터스목사를 칼빈주의계열의 hard liner라고 존스목사의 전기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자기와 로이즈 존스목사는 일종의 soft liners라는 것입니다.

 

잠시, soft line에 대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현대의 은사주의운동에 대한 태도로 쉽게 구분됩니다. 은사주의운동에 대해서 열려있는 태도가 칼빈주의의 soft lin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hard lin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soft line을 견지했던 로이드 존스목사의 웨스트민스터채플의 현재모습은 완전히 은사주의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참고: http://www.westminsterchapel.org.uk ). 이런 일이 있기도 훨씬 전에, 마스터스목사는 은사주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문을 열기 시작하면, 나중에 모두 점령당하고 만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견해가 옳다는 것이 바로 로이드 존스목사의 웨스트민스터채플이 여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물론, 마스터스목사와 더불어서, 칼빈주의 hard liner로 분류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 hard liner들은 신앙고백적입니다. 곧 역사적 신조들을 무척 중요하게 여깁니다. Soft line과 비교해서, 더 중요한 특징들이 있기는 하지만, 글이 이상하게 자꾸 길어지는 것 같아서 대강 이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첫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요약한다면, 피터 마스터스목사가 그 웨일즈사람이라고 했다는데, 저는 그렇게 경멸적인 말을 사용해서 로이즈 존스목사를 표현하는 마스터스목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비판하면서도 언제나 최대의 경의를 표명하면서 존스목사의 신학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바를 지적하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아마도 K목사님이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듭니다. 대부분의 한국분들이 이곳의 교회나 신학들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경우들을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신화들을 만들곤 합니다. 맹목적으로 따른다거나, 무조건 비판하거나 합니다. 그런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K목사님의 추구하는 바에 대해서 행간을 통해서 ‘Banner of Truth’사에서 발간하는 책들이 지향하는 방향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컨퍼런스멤버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웨스트민스터컨퍼런스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군요. 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K목사님의 평가는 어떤 소속이나 조직으로 갈래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볼 때, 상당히 위험하다고 보여집니다. 진리는 어떤 소속이나, 어떤 출판사나 어떤 컨퍼런스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외형적 조직들은 언제나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처음에는 개혁주의신학에 일관된 책들을 출판하던 IVP가 최근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문제성이 있는 책들도 출판하고 있습니다. ‘Banner of Truth’사에서 출판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은 조금 유보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그렇게 염려할 것이 없는 단계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변질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이고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Banner of Truth’사에서 지향하고 있는 바는 청교도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청교도신학이라는 것이 너무나 다양한 신학적 계통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청교도신학이라는 이름을 내어걸고 변질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 하나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한국교계에서는 Richard Baxter라는 청교도신학자를 아주 건전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가 목회자로서 아주 유익한 책들을 내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가령, The Reformed Pastor같은 책은 아주 귀한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을 보자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합성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저의 견해가 아니라, 바로 웨스트민스터컨퍼런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면 대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저는 해마다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Richard Baxter의 책이 청교도의 책이라는 것 때문에, 위험한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살펴보고 경계해가야 할 것입니다. ‘청교도신학이라는 이름을 내어걸고 언제나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바로 Banner of Truth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단정하는 것이 아니고 가능성을 예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변질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칼빈주의적 예견이랄 수 있지 않을까요?-제가 너무 hard line에 서 있는 것일까요?)

 

셋째, 이와 관계해서, 존 머레이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좀 언급하겠습니다. 존 머레이에 대해서도 마스터스목사는 로이드 존스목사에 대해서 가지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존 머레이의 로마서주석을 마스터스목사가 자주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한 서점에서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신학계 내에서도 존 머레이의 언약개념에 대해서는 설왕설래하는 정도입니다. 그 사람을 개혁주의신학자로서 존경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칼빈에 대해서,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마스터스목사가 존 머레이의 견해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그의 모든 신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생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의사] 책 안에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중생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의 차이를 듣고는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하는 것은, 존 머레이의 그 책, [구속: 그 성취와 적용](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라는 책을 직접 읽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스터스의 비판을 평가하는 것일 것입니다. K목사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가 번역한 [영혼의 의사] 그 책 안에 존 머레이의 책 페이지까지 소개해 놓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마음만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마스터스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싶습니다(저는 지금 형제님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을 그 순서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K목사님은, “(마스터스목사가) 성경본문 한줄 읽고 거기에 대한 해석하고 또 읽고 해석하고..... 저렇게 설교하면 참 설교자가 편하겠다라고 형제에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을 듣고 저도 참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어청취능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스터스목사의 설교는 성경중심적이지만, 주석적으로 설교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해 가면서 설교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그런 구절들의 해석이나 해설을 연결시켜주는 중간고리역할의 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그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본문중심이지만, 결코 주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어를 잘 듣지 못하는 분들은 자주 본문구절들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게 될지는 몰라도, 그런 인상으로 그의 설교를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특별히 이 기회에 하나 말씀드려놓고 싶은 것은, 그의 설교의 가장 첫 말이 거의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어디어디에서 무엇을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소위 설교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론이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미 설교는 예배중에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전에 있는 순서들 자체가 이미 서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바로 성경본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미 서론을 예배 순서 중에 준비해 두었고 회중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설교자는 다시 세상의 어떤 사건이나 예화들을 가지고 회중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서론을 늘어놓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중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설교학에서 서론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해 볼 필요가 충분하게 있는 셈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단편적인 어떤 인상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더욱이나 너무나 중요한 중생과 회심의 문제에 있어서 왜곡된 견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그 분이 공부하셨다는 토마스 굿윈에 대해서도 피터 마스터스목사와 관계해서 한 마디 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 분이 토마스 굿윈을 언급한 것은, 그가 이곳 영국에서 유학하는 중에 토마스 굿윈에 대해서 연구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토마스 굿윈을 마스터스목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곧 토마스 굿윈이 연속적 중생관을 가졌다고 마스터스목사가 주장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토마스 굿윈이 연속적 중생관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스터스목사가 비판하고 있는 순간적 중생관을 가졌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참으로 청교도신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영국의 어디에서 토마스 굿윈에 대해서 배웠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마스터스목사는 순간적 중생관의 원조를 존 머레이교수로 보고 있는데, 토마스 굿윈은 존 머레이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이니, 그렇다면, 토마스 굿윈이 순간적 중생관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질문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청교도들의 신학 자체가 순간적 중생관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K목사님의 청교도신학에 대한 이해가 무척 의아스러워 집니다.

 

이 점에 있어서, 20세기 중반부터 일어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신학적 흐름이 대략 어느 선에 서 있는 지를 가늠케 해 주고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번역하고 있는 조엘 비키교수의 [신앙의 확신]이라는 책자가 그 갈래를 잘 잡아주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만 생략해 두려고 합니다. 단지, 피터 마스터스의 중생관과 동일한 중생의 본질론을 제가 번역해서 형제에게 곧 보내드리게 될 스테판 차녹의 [중생의 본질]이란 책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에, 그 책을 읽으시면서, 과연 누가 옳은가를 판단해 보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형제가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은 저의 심금을 울립니다. 형제의 아픈 가슴을 저도 함께 느낍니다. 신학을 하지 않은 형제조차도 신학을 했다고 하는 그 K목사님의 문제점을 무언가 본능적으로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을 저는 소중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학적 지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갈망하고 사모할 때에 주어지는 것인 줄을 믿습니다.

 

그 마음을 끝까지 견지하시고, 주 안에서 자라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 그 지식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자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교제의 주인공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Ps.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내지 말까, 혹은 공개하지 말까 하다가, 피터 마스터스목사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인해서 그가 주장하는 중생론이 곡해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올려놓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평소에 가진 생각들을 나눌 분이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한 심정입니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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