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둘 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율법은 최후 바로 직전의 말씀이고, 복음은 최후의 말씀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복음은 죄인에게 그리고 그에게만 자유 하다고 말한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alienum opus(낯선, 비고유한 행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proprium opus(자신의, 고유한 행위)가 나타난다. 루터는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구별(discrimen legis et evangelii)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서문에서 복음에 대해서보다도 훨씬 더 많이 율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에 따라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본 다음에 율법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에 의하면 "복음은 다윗의 씨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신 성령을 통해서 만물을 주관하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신 그의 아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가 먼저 겸비하셨고 그 후에 성령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고 한다.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이 복음을 통하여 신앙이 주어지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온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니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루터는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율법이 얼마나 깊은 것을 요구하는 지를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율법의 행위까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신중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루터는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눈먼 자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신령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은 겉으로 이루어진 행위에 따라 판단하는 일반법과는 달리 속마음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마음속에서부터 행해지지 않은 행위를 위선과 거짓으로 징벌하며 가장 깊은 속마음에서부터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 율법은 즐거움과 사랑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자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5,18)". 그런데 이 율법이 육을 위한 것이라면 이 율법은 행위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를 내심으로부터 행하지 않고는 아무도 수행할 수 없다.
이처럼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신령한 율법을 타락한 우리가 본성대로 은총 없이 율법의 행위에 종사할 때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된다. 이 때에는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게 되며 율법은 다음처럼 죄를 더하게 하는 역할과 죄를 알게 하는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인간들에게 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율법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마지못해 행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또한 율법은 "원죄를 그의 모든 결과들과 함께 드러내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본성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바닥을 모를 정도로 깊이 부패했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복음의 덧붙임이 없이 율법만이 이 과제를 이행하는 곳, 거기에는 죽음과 지옥이 있고 사람들은 마치 성 바울이 "율법이 죄로 말미암아 (나를) 죽였도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사울과 유다처럼 절망해야만 한다.
그 반면에 은총은 율법을 우리에게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다. 율법에 대한 즐거움과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 주어진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율법에 맞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의 마음 가운데 율법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며, 따라서 두려움과 강제에 못 이겨 행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죄와 율법에서의 참 자유이다. 바울은 바로 이 자유에 대하여 기술한다.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율법의 강제 없이 선하게 사는 것만이 자유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다. 이것은 율법을 타파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 곧 (율법에 대한) 기쁨과 (율법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이러한 영적인 마음으로 애호 받고 성취될 신령한 것이며, 또한 그러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루터는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마음과 정신을 갖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처럼 언급한다: "타락한 우리 본성에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약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 본성이 다시 건강해지는 그 때에야 우리가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령을 임하게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앙으로 율법을 떠받든다. 곧 신앙으로 율법을 성취한다".
2. 웨슬리의 율법이해
웨슬리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존 웨슬리 총서, 표준설교집 상하권에 실린 54편의 설교 중에서 4편[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I), 율법의 기원과 본성, 산상설교 (V)]이 율법에 관한 설교라는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 율법에 관한 설교들을 중심으로 그의 율법관을 살펴보면, 우선 놀라운 것은 웨슬리도 마틴 루터와 비슷하게 율법과 복음을 서로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산상설교(V)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깊이 다룬다. 그는 거기에서 복음은 약속의 형식으로 표시된 율법의 명령이어서 율법과 복음 중에 어느 하나라도 폐기되어서는 안되며 이 양자 사이에는 서로 모순도 없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한다.
"복음의 수립을 위해 율법이 폐기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이 존립하기 위하여 율법이 폐기되어야 한다던가 율법이 존립하기 위하여 복음이 폐기되어야할 이유는 없고 이 둘은 잘 조화됩니다. 같은 어구가 이면에서 보면 율법이요, 다른 면에서 보면 복음이 됩니다. 실례로 '네 마음을 다하고 ...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계명으로 본다면 율법에 속하나, 약속으로 본다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이란 약속의 형식으로 표시된 율법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구원을 위한 말씀의 도구로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율법과 복음의 상호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율법은 복음의 선구가 되며 복음을 지향하는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복음은 율법을 더 잘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예컨대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온유 겸손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를 완전히 부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고 온유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로 약속하시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약속의 복음을 받아 이를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율법의 의를 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복음은 약속의 형식으로 표현된 율법이며 복음은 율법의 의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 루터보다도 더 바울의 사상에 가깝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율법을 세분화하여 제의법과 도덕법으로 구분한다. 제의법은 모세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된 제사와 예배에 관한 여러 가지 의식 절차에 관한 법이다. 이 법은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폐기되었다. 그 반면에 도덕법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고집스런 인간들을 일시적으로 제지하기 위하여 만든 의식과 제도에 관한 법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법"으로 폐기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 도덕법의 일부라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의 전모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 도덕법은 웨슬리에 의하여 거의 '율법'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형식은 명령이나 내용은 약속의 성격을 가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이며 모세에 의하여 전달된 십계명에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영원을 사시는 지존하시고 높으신 분에 대한 불멸의 그림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이며 "영원한 정신을 베껴놓은 것이고 거룩한 성품을 옮겨 적은 것"이며 "영원하신 아버지의 가장 귀한 소산이고 하나님의 근원적인 지혜의 발산이며 지존하신 분의 현격한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하늘의 원리로서 영원히 파기 할 수 없는 법칙"이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최고의 불변하는 이성(理性)이며 변할 수 없는 공정성(公正性)이며 과거와 현재에 창조된 모든 사물의 영원한 적합성"이다.
율법이라고 하는 도덕법의 기원은 모세를 거슬러 올라가고 창조를 거슬러 올라가 영원에서 시작한다. 이 도덕법은 "하늘의 원리"이며 "모든 진리의 완전한 모범"이며 "모든 선의 완전한 모범"으로서 첫 자녀인 천사들에게 주셨고 그와 꼭 같이 자유롭고 지각이 있는 인간에게 주셨다. 그런데 이 법은 사실상 돌 판이나 어떤 썩은 물체 위에 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마음에 새겨놓으신 것이다. 즉, 인간과 천사의 가장 깊은 영의 중심에 쓰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법, 곧 율법의 기원이다. 이 법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많이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악에 대한 관념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폐기 될 수 없는 법이며, 어느 시대, 어떤 장소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것인 만큼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속성은 거룩한 것이다. 사실상 율법은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인데 본질적으로 영원히 거룩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처럼 전개한다.
"그렇지가 않다면 율법이 근원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산이라고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과 꼭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죄와는 상관없이 순결한 것이고 어떤 악도 근접할 수 없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속성은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율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땅과 하늘에서 꼭같이 최고의 우주적인 율법"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적합성에도 일치하는 일이고 또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관계에도 맞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그리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불변의 법칙"인 "율법은 모든 사물에 관하여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율법의 세 번째 속성은 선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나온 근원으로부터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웠을 때에' 모세에게 기록된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그 율법을 주신 것은 홀로 하나님의 선하심 뿐"이다. 하나님의 선이 주셨고 또 모든 시대를 거쳐서 보존하여 주신 이 율법은 마치 샘물의 근원과 같이 선과 자비로 가득차 있어 꿀 송이보다도 더 달다. 웨슬리는 이 율법은 본성뿐만이 아니라 그 효력에 있어서도 선하다고 한다.
"그리고 율법은 본성에 있어서는 물론 그 효력에 있어서도 선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가 좋은 것과도 같습니다.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의 열매는 '의와 평화와 영원한 확신'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율법 그 자체가 의로서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평화로 영혼을 가득히 채워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증거하는 가운데 더욱 기뻐하게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이 율법은 세 가지 사용 내지는 기능을 갖고 있다.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은 세상의 죄를 확인하는 일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웨슬리가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을 성령의 한 기능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이 기능은 "사실상 성령의 독특한 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깨우치신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양쪽에 날선 것보다 더 예리한' 부분이 곧 율법이다. 웨슬리는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하여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이 율법은 속임수로 가득한 마음을 꿰뚫을 뿐 아니라 '영혼과 심령까지도 갈라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심령 골수' 까지도 가릅니다. 이렇게 되어 죄인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율법은 사방에 비치어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느낍니다. ...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섭니다.'"
죄를 확인하는 이 기능은 그에게 있어서 죄인을 죽이는 기능과 동일하다. 율법의 이 기능은 그가 의지하는 생명과 힘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가 사는 동안 그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죄인이 죽는 것은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로 죽은 것으로서 '모든 잘못과 죄 안에서 죽어' 모든 영적인 삶을 잃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죄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아나게 이끄는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 곧 엄격한 교사로서 이 일을 수행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힘으로 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이 엄격함의 근원이다. 죄인이 영혼의 쓰디쓴 고뇌 속에서 부르짖으며 마음의 깊은 곳에서 신음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영이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기능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이 중요한 진리가 '율법의 마지막'에 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다음처럼 강력하게 지적한다.
"이와 같이 위대하고 중요한 진리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신 수많은 사람들 곧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사람들에 의해서조차 별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오면 율법과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굳힙니다. '율법의 마지막':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즉, 의롭다하심을 이하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되십니다. 여기서만 율법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무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하고 다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지적한 후에 웨슬리는 이 마지막 기능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나서도 해야 할 더 큰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계속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자극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폭을 알면 더 알수록 그들은 더욱 더 서로 권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능을 통하여, 웨슬리에 의하면, 믿는 이는 하나님의 생명과 더 크게 교통할 수 있게 되는데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이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하는 율법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손한 말과 생각도 금한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과 필요성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처럼 부연 설명한다.
"이제 우리가 이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내가 아직도 얼마나 부족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더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주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주의 성령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셔서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주실 필요를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듯이, 율법을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과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늘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믿음이 없는 악한 마음' 때문에 곧장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둘은 우리를 서로에게로 보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는 율법에게로 우리를 보냅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아가게 만들며,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율법이 '금과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 하나 하나가 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성취하실 은혜의 약속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의 기능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관계가 도출된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율법으로 이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웨슬리의 견해는 정당하고 독특하며 율법에 대한 영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웨슬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기 위하여 두 가지 질문, 즉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설교,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에서 첫 번째 질문을 다루고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I)에서 두 번째 질문을 다룬다.
웨슬리에 따르면,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길은 설교자의 경우 우선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oracles)에서 율법을 지워버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던가, 아니면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젖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구실은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믿음에 따라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믿음 "이전에" 의가 없지만 믿음 "후에"도 의가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구실(colour)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세 번째 길은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잘 하지 않거나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거나 금식, 기도, 전도, 말씀 배우기에 대한 부작위(不作爲) 죄를 짓는다.
웨슬리는 이렇게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하면서 다음처럼 경고한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율법을 세우는 방법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도덕법을 따라 율법을 세운다.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전면적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그 모든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며, 애써 강조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유보 없이 선포함으로써 율법을 세운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믿음도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율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세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확신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과 적극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 웨슬리는 마침내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라고 권면한다.
"반(反) 율법주의 (Antinomianism)를 경계하라. 이것은 '신앙을 통한 율법'이나 '그것의 일부분을 헛되게 만든다.' 열광주의는 자연적으로 이것에 귀착되며 사실상 그 둘은 불가분리적이다. 반율법주의는 수다한 형태로서 당신에게 스며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아무리 경계하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원리상으로나 또는 실제상으로나 그것에 대한 어떤 경향성을 지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조심하라.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는 위대한 진리마저도,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의 모든 초점을 채택하시어 그것을 사랑의 법과 결합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반율법주의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이어서 웨슬리는 반율법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반율법주의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치욕거리로 여기는 사람은 그 치욕이 마침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를 경멸히 여기면 그를 보내신 자를 경멸히 여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보다도 최상급의 복음의 원수는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율법을 비판하고, 비방하고 그리고 한 두 가지 율법만이 아니라 크나 작으나 간에 율법 전체를 폐기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자리에 올라앉아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능력을 행하는 셈이 된다. 바로 사탄이 그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교훈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이요, 그의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주님을 높인다는 일은 마치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춘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입맞춤으로 주님을 파는 자들이며, 주님의 피를 내세워 그의 면류관을 벗기는 자들이며, 복음을 확장한다는 구실 아래 그리스도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반율법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웨슬리는 결론적으로 율법을 사랑하며 엄수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허수아비 같이 나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축복 받은 은혜의 도구를 결단코 가볍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마십시오. ... 율법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 만큼 주를 위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음 가는 것으로 여기고 그 율법이 여러분의 영광과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어기면 그것은 안될 것입니다. 모든 계명을 엄수함과 동시에 불법을 철저히 배격하시오. 하나님의 모든 명을 전심전력 순행하시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능력을 주시는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단코 자비와 진리의 법,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법 그리고 낮아짐과 온유와 순결의 법이 당신을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율법을 너의 목에 매고, 그것을 너의 마음 판에 새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려거든 율법을 굳게 잡고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율법의 모든 의가 여러분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찰' 때까지 율법이 여러분을 계속적으로 기대 속의 보혈로 인도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희망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하십시오. ... '자유의 법'을 깊이 살피며 '그 속에서 계속 행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mokpojsk?Redirect=Log&logNo=130008019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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