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카페의 개설을 계기로 변승우 목사의 대표저서인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다시 한 번 정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큰믿음교회와 변목사를 변호하는 글들을 읽고 저는 감정적으로도 흥분한 상태에서 대응했습니다. 사실은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분석하며 저 스스로 마음을 많이 가라앉히고 냉정히 문제를 바라보며 변목사에 대해 이전에 보지 못하던 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변목사에 대해 분노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로이드 존스 및 여러 청교도들의 글을 왜곡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칼빈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칼빈주의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인용하는 그의 행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원저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인용)도 스스럼없이 행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습관적인 죄가 있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외치는 사람이 스스로는 거짓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지옥..>을 읽으며 느낀 것은 변목사는 적어도 스스로를 향해서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로이드 존스, 조나단 에드워즈, 리처드 백스터가 자기와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스테판 차녹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이 사실을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차녹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 본다면 당장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왜곡(잠시 뒤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단순히 설교 시간에 말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책으로 출판할 정도라면 한 탕 크게 하고 도망치려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스스로는 자기 이해가 정확하다고 정말로 확신하는 확신범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변목사의 목회 사역에 대한 진실한 태도만큼은 기꺼이 인정할 수 있기에 저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옥...> 및 <정말 구원 받은 사람도 정말 버림 받을 수 있다>에 나오는 변목사의 간증들을 종합해 보면 그가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견지에서 쓴 글들로 칼빈주의를 비판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자료를 자신이 이미 세워놓은 신학적인 가설들에 맞추어 굴절시켜 독해하는 습관이 청소년기부터 이미 굳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극단적’ 알미니안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이 입장을 증거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지옥...> p165 참조)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비판적 수용을 거쳐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은 거의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앞으로 제가 설명해 나가려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드린 것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저는 변승우 목사가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회복을 부르짖지만 그가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 하는 지점은 또 하나의 변종 기독교일뿐 우리 신앙 선배들이 믿고 있던 그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 하며, 그 증거를 <지옥...>을 인용하여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1. 변승우 목사는 칼빈주의에 대해 무지하다.
큰믿음교회 교인들은 변목사가 장로교 계열의 신대원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그를 칼빈주의에 정통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칼빈주의의 모든 것을 섭렵하고 그 모순점을 보았기 때문에 칼빈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신뢰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변목사가 칼빈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큰믿음교회 여러분들에게 단 한번도 제대로 설명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믿음교회 성도 여러분, 칼빈주의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비판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칼빈주의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가르쳐서 신자를 방종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 이 말 외에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변목사가 책에서 칼빈주의와 관련된 자신의 신앙 여정을 설명할 때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라고 하는 변죽만 울리는 질문 이외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는 흔적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근본적 고민’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내가 왜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도대체 내가 왜 믿었을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단순히 지적인 동의나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받는다고 이해한 사람들, 즉 ‘내가 믿음을 결단하여 고백하면 그 대가로 칭의가 주어진다’라고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는 다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이 공식이 주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방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화의 가르침은 상급을 받기 위한 옵션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최악의 경우 그들 중에는 실제로는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거룩함의 명령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지적 결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성화를 이루어 가며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도 결국 우리의 의지적 결단, 지속적인 순종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저 먼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변목사와 큰믿음교회입니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음과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분리시키다 못해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칭의 조차 취소된다고 (의미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큰믿음교회는 두 번째 부류의 입장에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이 비판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마치 진리의 선포처럼 들리는 이유는 오늘날의 교회 중 적지 않은 수가 복음을 이런 수준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칼빈주의와 동일시 해버린 것은 변승우 목사의 커다란 오류입니다.
2. 구원하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이 필요하다.
다시 칼빈주의자들의 근본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도대체 나는 왜 믿었을까?” “나는 어떻게 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심각하게 다가오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떤 상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변목사도 정확히 지적했듯이 믿음은 단순히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고백, 즉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살아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 6:1~5).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이렇게 심오한 고백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서 할 수 있었는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더구나 이런 믿음을 고백하던 순간의 우리가 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엡 2:1)’ 존재였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관여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그 중에서도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바로 중생 (거듭남)임을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뿌리 깊은 본성을 변화시켜 복음이 진리임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이시고 그와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 일이 성령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인 중생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5, 16).”
3. 중생에 대한 변승우 목사의 오류
변승우 목사도 <지옥...>에서 나름대로 중생을 강조합니다. 유일하게 두 챕터에 걸쳐 다루는 주제가 거듭남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 (1), (2)”야 말로 <지옥...> 전체에서도 가장 큰 오류를 담고 있으며 위에서 지적한 왜곡된 인용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변목사의 주장과 같은 내용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설명을 번갈아 인용하며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드리려 합니다. 중생을 설명하는 많은 저자들의 책이 있지만 특히 로이드 존스의 글을 인용하는 이유는 변승우 목사가 자신과 같은 구원론을 가진 사람으로 로이드 존스를 즐겨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중생의 정의
변승우 :
“기독지혜사에서 나온 성서대백과에 보면 “거듭남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요, 칭의는 사람을 의롭다 칭하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거듭남에 대해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거듭남은 칭의와 달리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를 실제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p139)
로이드 존스 :
“그래서 우리는 중생을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심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것이 중생의 본질입니다. 좀 더 확대된 정의를 원한다면 다음 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그 결과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실제 출생은 이 성향이 첫 번째로 발휘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해설 :
pp135~137에 걸쳐 변목사는 비교적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중생의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네 번째 항목 “거듭남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에 들어서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용한 구절은 중생을 설명한 구절과 그렇지 않은 구절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변목사는 성서백과사전이 정확하게 설명한 중생의 정의에 대해 엉뚱한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사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이 우리가 기여한 것 없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변목사가 말하는 ‘우리의 상태를 실제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중생한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과정, 즉 성화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중생을 생명의 원리(씨앗)가 심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중생을 잉태에 비유하고 회심 (회개와 믿음), 성화 등을 출생에 비유합니다. 즉 회심과 성화가 일어나는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에 이미 발생한 중생이 실제였음을 증거하여 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2) 중생의 방법
변승우 :
“여기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의 비결로 “믿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거듭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 거듭남의 비결로 지금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인간의 몫 즉 인간이 담당해야 할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원하는 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보다 직접적인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거듭납니다. 즉 우리가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p149)
로이드 존스 :
“네 번째 요점은 그러므로 중생은 분명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으로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원리,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십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육은 여기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 다시 말해, 이 말들은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입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발생시킬 수 없습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중생이 언제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여야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갓난아기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갓난아기는 진리를 받아들일 능력이나 이해력이 없고 이런 일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안은 명백히 거부합니다. 그 답은 물론 어린아이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중생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각이 없는 갓난아기에게도 성인에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시는 것인지 고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하나님이 태초에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새로이 창조하시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설 :
드디어 변목사와 로이드 존스는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변목사는 믿음이 중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로이드 존스는 중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일뿐 우리가 제공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잠시 뒤에 다룰 내용이지만 오히려 중생이 믿음의 원인입니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대해 변목사와 로이드 존스는 커다란 해석의 차이를 보입니다. 큰믿음교회 성도 여러분, 변목사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말고 스스로 한 번 고찰해 보십시오. 3장 3절에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라고 묻자 예수님은 “너는 구약성경을 읽고도 너희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로구나. 하지만 당연하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믿을 수가 없단다. 거듭나지 않은 자가 어찌 영생을 얻겠느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믿는 것’입니다.
3) 중생과 칭의의 관계
변승우 :
“죄책 때문에 인간에게는 칭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적 부패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p162)
“그런데 반갑게도 스테판 차녹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절대로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의는 원래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고려해볼 때, 어떤 사람의 의지 속에 죄를 범하겠다는 상습적인 고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윤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아도 죄를 범한 사람이 죄에서 돌이키고 이전의 성향으로 회귀해야 용서받기에 매우 적합하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만일 어떤 사람이 중생하기 이전에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의로웠다고 하는 셈이 된다.] (pp166-167, 생략은 본문에 있는 그대로을 옮긴 것임)
"그러므로 바울이 그곳(롬4장)에서 현재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십자가 보혈 공로에 매달린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며, 그것이 칭의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오 모순입니다....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성경처럼 절대시하고 그들의 주장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그러면 중생이 없는 칭의, 즉 내적 변화가 없는 칭의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p169, 생략은 필자가 함)
해설 :
“내적 변화가 없는 칭의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말 자체에는 저뿐만 아니라 로이드 존스, 스테판 차녹 모두 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혀 상반된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변목사가 ‘중생 없이 칭의 없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고 동시에 회개를 통해 중생을 이루어 내야만 칭의가 효력있다는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스테판 차녹이 말하는 ‘중생 없이 칭의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중생(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반복합니다. 별 다섯 개 치고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의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믿음 또는 회개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이 믿음의 원인이며 따라서 중생은 칭의의 원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고 저는 한동안 할 말을 일었습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저는 이제 변목사가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원래 현저히 떨어지든지, 아니면 자신의 교리적 편견에 사로잡혀 오랜 세월 사고가 굳어짐으로 인해 글을 객관적으로 읽는 능력이 퇴화되어 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부분이 바로 스테판 차녹의 인용 부분입니다. 차녹의 책을 제발 한 번만 읽어 주십시오. 청교도의 글이지만 참 쉽게 썼습니다. 그냥 줄줄 읽어나가면 다 이해 됩니다.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고려해 볼 때...” 이렇게 사람에게 내적인 의가 없는데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 편에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이것이 차녹이 설명하고자 하는 중생입니다-우리의 내적 본성을 초자연적인 역사로 변화시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 가능케 하셨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역사가 선행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의의 전가, 칭의도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차녹이 변목사와 같은 견해라고요? 변목사가 인용 중 생략한 부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바로 앞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짓밟으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만든 근원인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긍휼의 심정을 품으실 때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죄악으로부터 발을 돌이키도록 만드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생하기 이전에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의로웠다고 하는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안토니 후크마의 글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중생이라 함은 성령께서 그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한때는 영적으로 죽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중생이 정의되어진다면 중생은 돌이킴(믿음과 회개를 포함), 칭의,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모두를 앞서고 있음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험들은 영적 삶(생명-필자 주)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중생이 제일 먼저라는 일종의 순서를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중생이 우선된다라는 말도 시간상 혹은 연대순의 순서를 가리킨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아마도 이것을 설명하는 최상의 방법은 중생이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다른 국면들 즉 믿음, 회개, 성화 등등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순위 (causal priority)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4) 중생 교리의 결론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생은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물론 그 전에는 예정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자기 은혜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만드셨습니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참된 믿음을 고백합니다. 중생하지 않은 자들도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며 참된 중생의 표지, 참된 믿음의 표지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열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생한 성도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하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하고 경건한 두려움으로 바라본 나머지 마치 구원이 자기의 경건한 행위에 달려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거룩함을 사모합니다. (청교도들이 그 실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변목사와 큰믿음교회는 이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긴 글의 주제가 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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