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보훈 총서론
무릇 어떤 교훈을 검토할 적에는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방법은 산상설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유명한 산상설교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설문과 함께 기독교인의 생활. 사상. 견해에서 차지하는 이 설교의 위치에 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맨 처음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이유로 해서 우리는 산상설교를 검토해야만 하는가? 어떤 이유로 해서 나는 여러분의 관심과 주목을 산상설교와 그 가르침으로 이끌어야만 하는가? 설교자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메시지>를 주신 줄로 느껴보지 못한 이상 그 아무도 설교해서는 안 되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앙망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설교하고 해설하려는 사람의 임무인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산상보훈에 관하여 설교하게 된 주된 이유는 제가 성령의 타이르심과 강요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하였음을 근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구태여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만약 저 자신의 선택에 맡겨져 있었다면 저는 산상보훈에 관하여 설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강요감을 깨닫게 됨에 따라 산상설교를 택한 다른 또 하나 특별한 이유는 현하 교회생활의 특수상황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유감스럽게도 그것의 피상성이라고 해서 결코 가혹한 판단이 아닌 줄 압니다. 이 같은 판단은 비단 우리시대를 관찰한데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간 시대와 사건들에 비추어 교회생활을 고찰한데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읽어 보고, 성령운동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고, 모든 시대에 있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보다 기독교인의 생활에 더 유익한 것은 없을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배경에 비추어 현하 교회 상태를 고찰해 보는 사람은 누구나, 금방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날 교회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의 피상성이라는 달갑지 않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에 복음전도적 의미의 교회생활과 활동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전도적 의미로 본 교회생활 및 제 활동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피상성이라는 점에서만은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복음전도 활동을 과거의 교회들이 실현했던 위대한 복음전도 노력과 비교 대조하여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예를 들어 요란스러움과 우리의 선조들을 두렵게 하고 충격을 주었을 끔찍스러운 수단의 사용 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피상성은 교회 성결개념과 성화론에 대한 교회의 접근방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이것의 원인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한 가지 주요 원인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신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하시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또 극에서 극으로 치닫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의 고질적인 성벽마저 이와 짝을 지어 가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주요 원인은 역시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의 의도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에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 읽는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교범이요, 유일한 자료요, 유일한 권위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하여 참된 의미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자연(때로는 신비체험)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추론을 연역함으로써 창조주에 대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절대 권위라는 점에 있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동의하는 바이며, 장구한 교회사를 일관하여 전통적으로 지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관적 체험에만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영도 있지만 악한 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짜 체험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여기 성경 안에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 옳 바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그것만 가지고서는 충분치 못하다는 점을 먼저 동의함으로써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생활의 훈련에 있어서 무릇 온갖 유의 규칙과 규율에 세심히 유의해야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을 매일 읽는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면 아무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계획을 세우고 성경 읽는 것을 크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을 사용할 때에 그 날의 분량을 읽은 다음 생각도 묵상도 하지 않고 그저 다음으로 읽어 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될 줄로 압니다. 그렇게 읽으면 별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 자체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 관한 사도 베드로의 유명한 논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바울서신을 읽기는 읽지만 그것을 왜곡시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바울서신을 쉽게 읽을 수는 있으나 읽은 후의 지혜가 전보다 더 나아지기는커녕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읽되 그것을 왜곡시킴으로써 자신의 파멸을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는 성경 전반에 관하여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이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앞에 성경을 놓고 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몇 장을 읽어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책장들과는 전혀 다른 그릇된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잘못의 가장 통상적인 원인이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하나의 선입적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있음은 조금도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은 그 이론의 조정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방법에 대단히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단들도 이렇게 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단자는 결코 부정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일부러 잘못을 행하기 위하여 또 잘못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이미 알고 있는 가장 신실한 사람들 축에 끼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어찌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하나의 이론을 발전시켜 그것에 꽤 만족을 느끼고, 그리고나서는 이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게 되었으며,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그 이론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구의 반절만을 읽고, 또 다른 곳에서 어떤 성구의 반절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여러분의 이론은 곧 증명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식의 허위를 매우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이론과 선입관념과 자신의 애용관념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순간 어떤 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면은 과소평가하는 유혹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주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경우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그 영광스러운 자유와 함께 한 가지 측면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낱 도덕률의 집합쯤으로 변형시키고 맙니다. 복음이 그들에게는 온통 율법이 되므로 은혜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그 무엇이라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전히 율법주의가 되며 그 속에 은혜는 사실상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희생하고 은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약성경의 복음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 가지 고전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은혜를 크게 강조한 것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자주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와 기타 지역에서 일부 사람들이 도출해낸 억지 추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사람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은혜를 더하기 위해 악을 행하자. 그의 가르침은 악을 행하자는 결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훨씬 많았다고 말해왔지 않은가. 옳거니! 그러니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를 계속하자.”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지금도 그렇게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율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에게 심판이나 정죄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나 우리는 율법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인즉 율법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셨으며 율법을 사셨습니다. 산상 설교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의는 서기관(율법학자)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일점일획은 모두 성취되고 온전해져야 합니다. 이 점을 망각하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오류가 종종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은혜론에 대한 견해는 실제에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백백한 가르침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유의 안이한 것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으며,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교훈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사실상 그의 교훈을 전혀 무시해 버리며, 은혜 아래 있으므로 그의 교훈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위치에까지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집중하는 최선의 방법은 산상설교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상설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이제 내가 다음의 질문을 하면 여러분이 답을 종이에다 적는 것으로 생각해 봅시다.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상설교는 우리의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우리의 사고와 관점에서 그것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마태복음의 세 장에 걸쳐 그토록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비상한 설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여러분의 답이 매우 흥미있고 매우 놀라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용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는 여기 이 성경책 속에 이 산상설교가 들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설교는 우리의 성경읽기 계획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설교의 서론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물음에 접해봅시다. 산상설교는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이겠습니까? 산상설교의 목적은 사실상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의 당면 문제와의 관련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관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가 많이 있어 왔습니다. 한 때는 산상설교에 관한 ‘사회복음’(social gospel)적 견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본 설교뿐이라는 것이며 이 속에 이른바 사회복음의 기초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원칙이 그 속에 깔려 있으며 우리가 행해야 할 바 모든 것은 산상설교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구산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며 전쟁은 끝장이 나고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도 끝이 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사회복음주의 견해입니다마는 이것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복음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30년 전 사고방식의 잔재라고 말할 수 있는 몇몇 골동품들 가운데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양차 세계대전은 이 견해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신학상의 [바르트] 운동(Barthian movement)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점에서 비판적이겠으나, 이것만은 바르트 운동의 공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회복음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설교에 대한 사회복음주의의 잘못은 산상설교의 처음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항상 무시해 왔다는 점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들 말씀이야말로 사람은 그 누구도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스스로 산상보훈대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팔복을 속편하게 무시해 버리고서는 상세한 설명을 고찰하는 데로 성급하게 치달려,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견해는 이보다 좀 더 심각한 것으로써 산상설교를 모세 율법을 정교화 한 것이거나 그 해석쯤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신 율법을 그들이 잘못 풀이하고 있음을 아시고,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율법을 정교화 하고 해석하심으로써 율법에 보다 높은 영적 내용을 더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코 더 심각한 견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에 팔복을 무시하는 것이라면 이 견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팔복은 모세의 율법을 완전히 초월하는 영역으로 우리를 즉각 이끌어 갑니다. 산상설교가 어떤 점들에서는 율법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범위를 초월합니다.다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견해는 산상설교에 대한 이른바 ‘세대주의 견해’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 견해에 정통하고 계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세대주의 견해가 어떤 ‘성경을’ 통해 보급되어 왔습니다. (저는 이 어떤 이란 형용사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개 성경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 아무개의 성경’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급되고, 산상설교가 현대 기독교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세대주의 산상설교관을 가르치는 교훈들이 항간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천국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산상설교는 천국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을 세우실 수가 없었으므로 일종의 때늦은 방편으로써 십자가 위의 죽음이 오게 되고, 또 하나의 때늦은 방편으로써 교회와 교회 세대가 오게 되고, 이 상태가 역사의 어느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 주님이 천국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 다시 산상설교가 소개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본 산상설교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본 설교는 ‘천국 세대’를 위한 것이며, 예수께서 설교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천년 왕국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 설교는 왕국시대와 천국의 법이며 그 어간의 기독교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견해는 옳던가, 아니면 그른 견해입니다. 내가 이 견해에 따라 산상설교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교훈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이 견해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세대주의대로 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즉 산상설교는 원래 특별히 제자들에게 설교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가르쳐 가라사대.” 이것은 본 설교가 제자들에게 설교되었다는 것을 대 전제로 삼습니다.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예로 들어봅시다. 만일 산상설교가 지금의 기독교인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던가, 세상의 빛이라고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설교는 첫 제자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이후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의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본 설교의 은혜로운 약속도 따라서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춰 그들로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산상설교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면 이것은 모두 우리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주님은 그가 여기 세상에 계실 때 뿐 아니라, 그가 가신 후에도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할 것을 그들에게 설교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설교는 그 당시와 그 이후에 항상 이것을 실천하도록 작정된 사람들에게 설교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상설교에 있는 교훈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점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로 생각됩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의 목록을 만들고 이것과 서신들을 비교해서 읽어보십시오. 산상설교의 교훈이 거기에도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모든 서신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서신들의 가르침이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같다면 산상설교의 가르침 역시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력하고 중요한 논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가장 잘 표현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산상설교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바 ‘새 계명’에 대한 하나의 위대하고, 웅장하고, 완전한 정교화 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주의 새 계명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이 명령을 장중하게 정교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리고 주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견해는 잘못된 천국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천국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땅 위에 임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천국은 장차 올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동시에 이미 땅 위에 임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천국은 여러분들 속에 있습니다. 천국은 참된 모든 기독교인과 교회 안에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오늘 모든 참된 기독교인 속에서다스리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가 그분을 참으로 인정할 때 교회에서 다스리십니다. 천국은 임했습니다. 천국은 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아직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마음속에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 곳마다 천국은 임한 것이요, 따라서 그 분이 현재 온 세상을 모두 다스리고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는 없어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과 삶에서 이렇게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가 현대의 기독교인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말은 없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산상설교는 천국생활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첫 머리에 놓인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을 특히 유대인들을 위해 쓰고 있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뜻한 바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렇게 온통 천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무엇을 끝까지 강조하려고 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천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물질적 천국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그들에게 정치적 해방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속박과 법에서 그들을 구해 줄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관을 항상 외적 의미로, 기계적이며, 군사적이며, 물질적인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천국에 대한 참 가르침을 그의 복음서 첫 머리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본 설교의 목적은 천국을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원래 ‘너희 안에’ 있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전망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큰 군사력으로 이끄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심령이 가난하여 지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산상설교에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야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란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너희가 기독교인이니까 이렇게 살아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야할 방식이 이러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살도록 의도된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논증을 완결 짓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난제에 직면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음이 확실하다. 주님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것은 율법이 아닌가? 여기에 은혜가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산상설교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복음에서 기독교의 전체를 빼어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18장 끝에 기록된, 주인에게 빚을 진 청지기 비유에서 꼭 같은 것을 가르치신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가서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똑같이 빚진 부하 한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주인이 그의 용서를 철회하고, 그를 처벌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여기 대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 역시 꼭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용서했기 때문에만 용서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신중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만일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범법자요, 악한 죄인임을 보아 온 사람들은 천국에서 그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서 그를 대가 없이 용서해 주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실제로 보고 알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의 용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 존전에서 깨어져 있을진대 나는 남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에게 자기 죄를 용서 받았다고 속 편하게 상상하는 사람들은 영원세계에서 깨어날 때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용서를 받고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산상설교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제 산상보훈이 적용되는 대상을 고찰해 보고나서 이 문제를 자문해 보기로 합시다.
왜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본 설교대로 살려고 해야 하는가? 몇가지 대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산상설교를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고 은혜의 사도인 바울은 말했습니다.(딛2:14)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제가 산상설교를 지금 살 수 있도록 그가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내게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본 설교를 연구하는 둘째 이유는, 산상설교만큼 중생과 성령과 그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나를 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합니다. 팔복은 내가 철저히 무력함을 내게 보여줍니다. 중생이 아니면 나는 파멸인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자신을 여기에 비추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궁극적인 중생의 필요와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산상설교처럼 복음과 복음의 은혜로 이끌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설교를 듣고(그 안에 살며) 실천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주목하십시오. 여러 가지 성결에 관한 교훈의 그릇된 점은 그 교훈이 산상설교를 제쳐 놓고 성화를 체험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 방법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생활의 능력을 얻으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산상설교로 곧 바로 가십시오. 산상설교를 살며, 실천하며 몸을 내어 맡기십시오. 그럴 때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만일 여러분이 배부르기를(채워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신비한 축복(체험)을 찾지 마십시오. 이 축복을 얻으려고 여러 집회에 달려가지 마십시오. 그 대신 산상설교와 그 의미와 요구를 정면으로 대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을 살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것을 남기고 싶습니다. 전도의 최선의 수단은 이것이라고 암시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오늘의 세계는 참된 기독교인들을 찾고 있고,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외부 사람들을 끌어드리기 위해 전도단을 조직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교인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건물 속으로 밀려들 것입니다. 그들은 ‘그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날마다, 오늘의 공산주의의 참 비결은 그들이 그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젊은이들에게 강연을 할 때나 서적을 통해 공산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그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념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추종자들을 증가시키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한 가지 방법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무한히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길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제가 공산주의에서 돌아선 사람들을 만나 본 것은 제 특권이었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나 그들의 전향은 어떤 유식한 설교나,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이들 공산주의자가 어느 단순한 기독교인에게서 그들이 이미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결과였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어 본 것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인도 정부에서 한 때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카] 박사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천민 출신(out-caste)이었고 인도의 천민 계급의 지도자였습니다. 제가 설교하고 있던 때에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세계 불교 대회를 발기하러 [스리랑카]에 모인 27개국의 큰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가 그 회의에 참석한 이유는 불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인가를 발견하고자 소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회의에서 ‘저는 이 나라 백성들과 깊이 관련된 불교가 어느 정도의 다이내믹한 종교인가를 알아보려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민의 지도자가 불교로 향해서 그것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불교가 생명 있는 종교인가 발견하고 싶습니다. 불교가 우리 천민 대중에게 무엇인가 줄 것을 갖고 있는가?
그 속에 다이내믹한 것이 있는가? 불교가 백성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유능하고 유식한 사람의 비극은 그가 벌써 미국과 영국에서 기독교를 연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데 있습니다. 그가 지금 불교로 향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그 속에 다이내믹한 것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불교를 받아드리진 않았지만 불교가 그가 찾고 있던 세력(능력)인가 아닌가를 발견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부딪쳐 오는 도전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불교가 대답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고, 그의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셨고, 사람들 속에 내주하시며, 그들을 그 자신과 같은 생명을 살 수 있게 하실 그의 절대 능력을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오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으셨고, 성령을 보내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산상설교를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 설교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본 설교는 어느 모로나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산상설교를 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복음에 다이내믹한 것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읽어보면,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항상 산상설교를 신중히 여기고 본 설교에 자기들을 대면케 하였을 때에 일어났던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세상이 참 기독교인을 볼 때 세상은 정죄 받았다고만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끌려오고 매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 설교를 세심히 연구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연구해 봅시다. 산상설교는 요구 사항만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의 공급원(供給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우리가 산상설교의 산 모범이 되며 본 설교의 영광스런 실례가 되기까지 산상설교를 신중하고 정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리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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