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 씨가 말하는 '예언'은? | |||||||||||||||||||||||||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 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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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광고면을 보면 ‘예언집회’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 용어 앞뒤로 ‘신년축복’ 또는 ‘예언의 종 000’ 등의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아예 강사 이름이 ‘0예언’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그 집회에만 참석하면 예언에 대해 확실한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하고 있다. 그러한 예언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서울과 지방 등 몇 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 집회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집회 참석한 신도들이 자신의 기도제목을 헌금봉투 겉에 기록을 한다. 물론 그 봉투 안에는 반드시 헌금(?)이 들어가야 한다. 액수를 정해 놓은 곳도 있었다. 그 봉투가 강대상 위로 올라간다. 강사가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는 강사와의 개인 면담을 위해 상담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강사는 방언기도라는 것을 한다. ‘쉬쉬쉬, 아싸라비아’ 등 유창하게 중얼거린다. 그런 후 봉투에 적혀 있는 신도들의 기도제목에 ‘답’을 내린다. 마치 직통계시라도 내려지는 듯이 말이다. 신도들은 연신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도 기도제목을 내보았다. 다소의 비용을 지출해야 했지만, 그 예언집회라는 것의 실체에 좀더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다.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여동생이 있다. 준재벌집 아들과 사귀고 있는데 여동생은 이제 헤어지려고 한다. 남자는 결혼하자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봉투가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필자의 봉투 순서가 되자 강사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무엇인가 중얼댔다. 그런 후 답이 내려졌다. “결혼하라고 하시네. 결혼해서 하나님을 위해 크게 일을 하라고 하셔···.” 그의 예언(?)이라는 것은 틀렸다. 필자에게는 여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없으니 결혼 문제도 당연히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 이름으로 행해지는 예언집회라는 곳에 참석했지만, 어찌되었는지 무속적 ‘푸닥거리’를 겪은 느낌이었다. 요즘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권면을 말을 해주고 있다. 잘 알려진 13장의 ‘사랑’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풀어줄 수 있는 키워드(Key word)인 셈이다. 14장에서는 방언과 예언에 대한 은사에 대해서 교통정리를 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예언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예언의 은사가 사용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고전 14:24-25). 첫째, 믿지 않는 자들과 무지한 자들(하나님에 대해서)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둘째, 자신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졌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엎드리어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방언보다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0장 마지막 절에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1)는 구절이 나온다. 예언이라는 성경적인 의미를 간과할 때 흔히 곡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만희 씨도 그의 책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도서출판 신천지, 2005)을 통해 계 10장을 해설했다. 그러나 그는 11절의 ‘예언’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만희 씨는 성경의 ‘예언’이라는 용어의 뜻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예언을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계시록의 사건은 영적인 것이므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깨닫기 힘들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예언대로 실상이 나타날 때 알아볼 수 있다. 결박된 네 천사가 들어 쓴 거짓 목자들과 본문의 년 월 일 시에 관해서는 사건의 현장을 직접 본 증인에게 증거받기 바란다. 그는 바로 계시록 모든 사건을 보고 천사에게 설명 들은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목자’이다”(이 씨의 책, p.199).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인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언’을 ‘알파 즉 처음과 시작’이라고 하면 그 ‘실상’은 오메가인 나중과 낟이 된다. ···본문의 상벌은 약속한 계시록의 말씀이 응할 때 성취된 실상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내리는 것이다”(이 씨의 책, p 486).
“계시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래 이룰 일을 이상으로 미리 보여주는 ‘환상계시’이며 다른 하나는 약속한 예언을 실물로 이루어서 보여주는 ‘실상계시’이다. 환상계시는 이룰 실상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필요한 청사진과 같다”(이 씨의 책, p.45). 이만희 씨는 요한계시록 1장 3절을 해설한다면서도 ‘환상계시’와 ‘실상계시’라는 자신만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언급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실상’이다. 예언이건 계시건 실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씨가 말하고 싶은 실상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계10장에 대한 이 씨의 해설을 통해서 살펴보자. “본장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 한 사람을 우리에게 알리는 내용이다. 그는 바로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와서 하늘에서 온 열린 책을 받아 먹고 통달한 자요 보혜사 성령의 위치에 있는 본장의 천사가 함께하는 예수님의 대언자이다. 계시록 성취 때에는 사도요한과 같은 입장으로 오는 한 목자가 계시록 전장 예언과 그 실상을 전하지 이미 죽고 없는 요한이 그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이 씨의 책, p.217). 이 씨가 말하는 실상이란 그 동안 감추어져왔던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참뜻이 바로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 참뜻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나라도 가감하지 말아야 할 계시록의 말씀(계 22:18-19)은 기록한 실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동안 어느 누구도 참뜻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성취 때가 되어 계시록의 예언이 홀연히 이루어졌으므로 필자는 그 실상을 직접 보고 성령에게 설명 들은 대로 낱낱이 증거하려 한다”(이 씨의 책 p.35). “본문의 천사는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이 분명하다. 이 천사가 보혜사 성령이면 그가 함께하는(요 14:17) 사도 요한과 같은 목자도 보혜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의 책, p. 210). 무슨 소리인가? 이 씨는 계 10장 1절을 해설한다면서 본문의 ‘힘센 다른 천사’를 보혜사 성령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로 그 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등의 본문을 인용했다. 구문해설을 위한 접근 방식은 칭찬할만하다.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말하도록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도 제발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해설해주길 기대해 본다.
위에 언급된 이 씨의 해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이 씨의 책, p.210). 이 씨는 힘센 천사가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도 보혜사가 된다고 언급한다. 이유는 그 천사와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가 엉뚱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요한계시록 어느 부분을 해설해도 그의 논리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이 ‘누구’임을 드러내는데 근본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심지어 ‘이만희=구원자’라는 해괴한 주장도 하고 있다. 지난 분석 때 다루었던 이 씨의 주장들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해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사람은 사도 요한격인 야곱(보혜사:이스라엘) 곧 승리자를 만나야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받게 되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이만희 씨의 책 <계시록의 진상 2>, p.52). “계시록 성취 때에는 사도 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에게 천국에 관한 설명을 듣고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이 씨의 책, p.117). 이만희 씨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이 ‘이단’에 속하는 줄 짐작하고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격언처럼 말이다. 계 10장을 해설한다면서 후반부에 자신의 속내를 그렇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씨는 자신에게 이단이라고 말하는 이를 오히려 ‘지식이 없는 자’라고 언급했다. 참 지식이 있는 자는 자신을 보혜사 성령, 또는 구원자로 믿고 따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기회가 되면 ‘예언집회’라는 곳에 다시 한 번 가보려고 한다. 요즘도 신문을 보면 그 광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니 집회 참석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헌금 봉투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자신이 보혜사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그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누가 보혜사인지 궁금합니다’라고 말이다. 예언집회 강사는 어떠한 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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