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스크랩] 신율법주의를 질문한 분에 대한 이천우목사님의 답변 /펌

baromi 2008. 6. 27. 08:10

신율법주의에 대한 답글입니다.

 

안녕하세요 기쁨님

어제 주일은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복음의 진리와 더불어 잘 지내셨는지요.

님은 “ ‘신’자가 들어가는 사상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인지 궁금하고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역사적 배경도 알고 싶고요.” 라며, 신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계를 가지면서 이를 궁금해 하며 이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님은 신율법주의를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이 등장하기까지에 이것이 등장하게 된 다른 관련된 것과도 함께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율법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용어가 지금까지 있어왔습니다. 율법주의와 함께 칼빈주의자(진정한 의미에서의 칼빈주의자가 아닌 또 다른 칼빈주의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무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신율법주의가 그것입니다. 앞으로 또 어떤 용어가 등장할지 모르죠.

우리는 이렇게 불려지고 있는 각각의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 이해는 곧 님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16세기에 있게 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교회는 이전의 로마카톨릭교회에서 개혁교회의 등장을 가져왔습니다. 이 개혁교회는 존 칼빈(John Calvin)과 그와 함께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칼빈주의’라는 독특한 신학 사상을 형성하여 흘러오면서 로마카톨릭교회의 신학 사상과 대항하는 개혁교회가 지닌 신학 사상의 사조(思潮)가 되어 발전해 오게 됩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존 칼빈으로 이어지는 종교개혁과 함께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의 절정을 이룬 16세기로부터 개혁교회의 신학에 변화가 따르는 17세기에 이르러 칼빈주의자들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칼빈주의 신학에 변화가 따랐습니다. 이들에게서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학 사상에 ‘극단적’인 특성을 띠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율법과 관련하여서 정통성 있는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이 아닌 새로운 신학 사상을 말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루터의 신학 사상을 포함하는)칼빈주의자가 아닌 또 다른 칼빈주의자로 보게 되는데 무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신율법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 모두는 율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율법이 지닌 하나님의 본의와는 다르게 부정확하거나 몰이해에 의해서 갖게 된 신학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신앙관 정도로 돌리고 무시해 버립니다. 이들에게서 보는 율법주의는 율법의 규정, 곧 계명에 따라서 지키는 행위에서 구원 얻는 의를 보고 이 의를 자기 공로의 개념으로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하여 개혁교회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에서 이해하는 신학 사상을 가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 성향으로 ‘무율법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무율법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율법폐기론자’, ‘율법무용론자’로 불리우는 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이런 주장을 말하는 사람들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주석 할 때 지적한대로 종교개혁 당시 좌파 세력에게서 보게 되는데 재세례파, 또는 신령주의자들, 네오-아리안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후에 ‘극단적 칼빈주의자’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들이 율법의 폐기론을 이야기하며, 율법의 무용론을 말하면서 ‘무율법주의자’로 있은 것은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선행에 의한 의와 구원관을 가지고 율법주의 성향에 서 있는 보고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진데 따른 것입니다. 무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폐기로 말미암은 율법의 무용을 말하고 율법을 배격하면서 율법 외의 계시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직통 계시’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성령의 계시가 임하는 그때 그때마다 성령의 지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이것에 의한 부작용은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폐해가 심한 것입니다. 가령 가장 최근의 것에서 예를 든다면,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1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말기에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설을 말하는 시한부종말론자들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말해질 때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며 성령의 직통 계시를 말하는 자들이 꽤 있어서 한국교회를 혼란케 하는 어지럽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대한 또 다른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반율법주의’입니다. 반율법주의는 율법에 반대하는 사상에 서 있는 성향입니다. 반율법주의를 말하는 자들은 율법 자체의 폐기를 말하지는 않지만, 율법의 무의미를 말하며 율법주의에 반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은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의 구속 언약과 예정론에 의한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선택 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타락전 선택설’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이 타락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데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달아 알도록 해주는 일을 할 따름이며,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원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칭의의 은총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믿는 자들에게서는 더 이상 율법은 무의미하므로 필요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가진 칭의에 대한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칭의가 믿음을 갖기 전에 주어진다고 하는 믿음에 선행하는 칭의의 개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 이들이 이렇게 보는 것은 칭의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의 '영원한 칭의'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속과 부활의 의에서 얻은 '실제적 칭의'와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는 '구체적 칭의'로서 이 칭의가 적용되는 것은 믿음보다 선행하며 칭의의 결과로 믿음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 구원의 확신 교리로서의 두 가지 증거인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성화의 외적 증거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받는 수단이 되는 성경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영원토록 성도들을 죄로부터 보호하시며 구원받은 자들의 내적인 생명 속에 거룩함으로 역사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율법은 단지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할 뿐으로서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까닭에 죄가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므로 율법은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고 다만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는 인식을 가지는데서 거룩함이 증진된다는 반율법주의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총’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율법주의의 성향은 교회 회의에서 결의한 신앙고백서와 교리적 문서들을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반대하여 거부하는가 하면,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키며 무의미하게 여김으로써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에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편,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반율법주의에 대립하며 여기에 대항하는 또 다른 신학 사상이 있어왔습니다. 그것은 ‘신율법주의’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구교(舊敎)에 맞선 신교(新敎)라는 두 노선으로 형성되어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신교(개혁신교; 개혁교회)는 칼빈주의라는 신학 사상이 교회가 가져야 할 신학 사상으로 형성되어 오면서 세월을 거듭하면서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는데 그들 모두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신학 사상을 띤 칼빈주의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두 형태의 서로 대립된 신학 사상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앞서 다룬 ‘반율법주의’이며, 또 다른 하나가 이제 다룰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신율법주의’입니다.

‘신율법주의’는 17세기 말에 형성된 새로운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반율법주의에 대립하여 있으면서 대항하는 신학 사상입니다. 신율법주의의 핵심은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행위언약이 주어졌는데 아담이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행위언약에 실패함으로써 그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류도 함께 행위언약에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시대에 새로운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율법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모범을 좇아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를 믿음으로 용납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회개와 선행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며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에 이른다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신학 사상은 믿음, 회개, 선행이 의롭다 함을 얻는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는 교리를 새롭게 세운 것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세워진 개혁교회가 신학 사상의 중심으로 지녀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인한 단번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율법주의는 율법주의의 또 다른 변형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언약으로서의 율법에 묶어두고서 행위 구원, 행위 공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라고 하신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하의 우리네 교회의 모습은 이 신율법주의에 의한 신앙관에 깊이 매료되어 있고 또한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참된 교회가 아닌 거짓 교회로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증거되는 설교에서도,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신학에서도 늘상 듣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령,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고 축복, 상급,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을 나타내야 할 온갖 교회적인 일과 회개와 선행에 열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여 요구함으로써 기복주의 신앙, 상급주의 신앙, 은사주의 신앙이 설교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목회자와 교회의 성공학이 신학 교육의 최고의 가치와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야고보서를 들어 믿음과 행함을 하나의 두 면을 지닌 것으로 말하며 행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보이겠다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 산 믿음이 아니라는 모순을 말합니다. 사실 사도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라합을 예로 들어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행한 어떤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믿음을 다루어 가시는 것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라합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해 나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으로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안에 아브라함을, 그리고 라합을 두시고서 그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실행으로 그들을 움직여 나가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믿음과 행함을 왜곡시켜서 행함으로 마치 우리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식으로 몰아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열심을 갖고 잘 해 내어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자 라거나 온전한 사람이 되자는, 또는 축복을 받고, 상급을 받으며, 보상을 받자는, 행함에 의한 구원인 행위 구원, 행함에 의한 의인 행위 공로의 신앙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현대판 신율법주의로서 이것에 따라서 신앙하여 나가는 그들은 율법주의자였던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결실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율법주의에서도, 무율법주의에서도, 반율법주의에서도, 그리고 신율법주의에서도, 이 모두의 그 어디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며, 또한 무율법주의자도 아니며, 반율법주의자도 아니며, 신율법주의자도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이 주신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니, 이 권세는 사람의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요12-14).

그러한 님이시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기대를 하면서
주께 은혜를 구하며,
답글을 마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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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앙공동체에서 펌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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