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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생애와 신앙-1

baromi 2008. 6. 10. 08:39
*니버의 생애와 사상 
A. 니버의 생애 
라인홀드 니버는 1892년에 미국 미주리州에 있는 라이트市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독일계통이
고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Gustav Niebuhr)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한 것이다. 구스타
프는 독일에서 루터교회에 속해 있었고 미국에 이주한 후에도 루터교회의 경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니버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에 형성된 종교적 영향력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는 열살이 되었
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후 두 루터파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엠허스트(Elmhurst) 대학과 이든(Eden) 신학교를 마치고 예일(Yale)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가 아
직 이든에 있던 1913년에 그의 아버지 구스 타프 니버는 세상을 떠났다. 니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구스타프는 그의 가정을 세가지 원칙에 따라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깊은 종교적 바탕과 자유와 
평등의 가치 강조와 학문적 생활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라인홀드는 엠허스트대학에서는 교양교육과 고전어의 훈련을 받았다. 또 한 이든 신학교에서는 성서와
 조직신학에 관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예일대학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사회철학과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BD)를, 그 다음 해에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 
고, 목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받은 최고의 학위는 문학 석사였으나, 그 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으로부터 1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15년에 니버는 자동차산업이 번창하던 디트로이트시의 벧엘교회에서 그의 첫목회이며 유일한 목회였
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생활을 했는데, 이 기간이 니버에게 있어
서는 그의 일생중 가장 귀중한 체험을 했던 기간이었다. 1915년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던 해로써 파나
마 운하가 1914년 개통되었고, 제1차세계대전이 1915년 에 일어났으며, 미국의 생산력은 극도로 상승했다. 
이러한 때에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보고 느낀 것은 대량생산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계화하는 한 과정이었
다. 니버는 그곳에서 아메리칸 유토피아를(American Utopianism) 내세운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하는 동안에 20여명의 교인이 650명으로 성장되었으며, 이 교회는 그가 노
동운동을 지원하는 논쟁의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었고, 후에 그의 평화주의 지지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심
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그의 경건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팽창해가는 산업제도의 야만성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예일대학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포드자동차사와 대결을 시도하여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여타의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1926년 [크리스쳔 센츄리] (Christian Century)지에 여러번 게재하였다. 
또한 니버는 임금문제가 심각해져감을 발견하고 임금문제 위원회 회장직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니버는 격동하는 사회에 대하여 기독교사상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
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신앙을 재해석하기 위한 임무를 느꼈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기술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필요성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니버는 1923년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의 도움으로 세미나 참석차 구라파 여행을 하게 되었
으며, 이 여행에서 그는 전쟁이후 독일의 비참함과 영국의 노동복지정책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이상에 가장 근사한 정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미국장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니버 사상의 전기, 즉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니버는 13년간의 디트로이트의 목회를 고별하고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응용신학 교수
로 부임하였다. 니버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주로 기독교사회윤리를 강의하였는데 학문적인 분위기와 학
술 연구의 기회가 좋아서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강의와 강연들 그리고 신학적 저술들을 통
하여 윤리학자와 신학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리기에 이르렀다. 
아메리칸 유토피아니즘이 1920년말의 세계 대공황으로 쇠퇴하게 되자 니버는 종교사회주의자로 변신하
게 된다. 1931년 니버는 "사회주의 크리스쳔 동지회"(The Fellowship of Socialist Christians)에 가담하
여 투쟁적인 사회주의 정당과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선동운동에 직접 개입하였
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1930년에 소련을 다녀
왔고 그때 발견한 것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이었다. 
산업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데 대하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반면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해가면서 능률
을 강조해 가는데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그의 사상의 중기 즉 두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니버는 공산주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독일의 나찌전체주의, 소련의 전체주의로 초래될 미지의 미래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하여 니버는 사회주의 정당과 결별하였다. 
또한 니버는 그가 가졌던 초기의 평화주의도 버리고 말았다. 그는 미래에 예측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을 갖게 되었고, 국제 정치무대에서 미국이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
다고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을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하게 된 것이
다.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순수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
도 아닌 사회민주주의야말로 서양운명의 최종적 소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니버가 이러한 사상의 변화
를 일으키게 된 중요한 이유는 세계 대공황과 미국의 뉴딜정책의 성공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니버는 공
산주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정치무대에서의 미국의 책임의식을 고양시키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지적 대변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39년 니버는 에딘버러대학에서 기포드 강연을 부탁받았다. 그는 이때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
이해를 탈피하고 실존주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이라는데 인간
존재의 모호성이 있다. 그는 1952년에 초인적일 만큼의 사회참여와 저작활동으로 인하여 뇌일혈로 쓰러
져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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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살며 생각하며
글쓴이 : ow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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