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율례로 가르침을 받는 것

 

 

Teth :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였나이다(시119:65-72)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어리석고 경솔한데,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단 한 방울의 선한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도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점에서보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보다 유한한 인간에게 무언가를 구할 때 더욱 겸손하고 더욱 순박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도 못하고 입으로 나오는 것을 마구 내뱉으면서 경솔하게 그에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우리의 배움을 반복하여 잘 기도하는 법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대로 그의 뜻이 항상 앞서고 우리의 모든 욕망을 지배할 정도로 그를 기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구한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독하며 그의 존엄을 너무도 손상시킬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런 목적에 매우 유익한 경고를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을 그에게 구하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에 따라 그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그가 우리의 눈을 여셔야 하며 그래야 우리는 말씀 안에 담긴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기도로 나아가는 자세

 

(1) 하나님의 선대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사실 다윗은 율법과 그 교훈의 내용을 알고 그것에 지배를 받으며 자신의 모든 삶이 그것에 부합하게 되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지만 맨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베푸신 선대(善待)를 내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리러 나갈 때 이런 선대가 우리에게 확신을 주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은혜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통로가 없으며, 응답에 대한 더 좋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이전에 내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체험했다. 다시 말해, 그는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숱하게 그런 경험을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불신해서는 안되며, 그에게 구하는 것을 그가 들어주지 않으시리라고 의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가 내게 축복을 베푸실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고 하는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면, 즉 내가 기도할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이제 내가 ‘아, 이제 어떻게 되지?’라고 생각해야 하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의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배은망덕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끝까지 지속하시길 원하는 그의 자비와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만 선을 베푸시기 때문이며, 이 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처럼 선뜻 자선을 베풀다가도 갑자기 짜증내고 그만둔다든지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샘이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구절에 “주님, 당신은 당신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된 이유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또 느낄 것을 확신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은혜는 감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은혜를 항상 더하길 원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윗의 본을 따라 이미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은택을 기억해야 함을 배웁시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도의 입문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즉 하나님이 앞서 자신을 후덕하게 나타내셨다면, 우리는 앞으로 끝까지 그를 그런 분으로 경험하리라는 것입니다.

 

(2) 우리를 선대하심은 약속의 성취
이제 다윗은 명백히 “주의 말씀대로”라고 덧붙이는데 이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 것과 그 선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을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가 그의 말씀대로 그렇게 하셨다는 신뢰가 첨가돼야 합니다. 비록 고기가 좋긴 해도 소금이 없이는 맛이 없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선은 그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는 이 소금이 첨가되어 양념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 합당한 참된 맛을 내어 우리의 입맛을 돋우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설령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약속을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론 (내가 이미 밝혔듯이) 우리가 이미 순전히 그의 호의로 도움을 받았던 것에 근거하면서 그에게 나아가 무슨 간청을 드릴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가 언제나 동일한 것을 베푸시리라는 확신도 없고, 또 그가 확고하게 자신이 시작한 것을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이 없을 것입니다. 즉 그의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자 하며 너희에게 구주로 나타나고자 한다. 이제 너희는 나를 영원히 그런 분으로 느끼거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런 약속의 경험과 효과를 체험한 뒤 그의 은혜를 내가 말한 그런 용도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번득이는 순간의 감정으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 건가요? 이런 선대가 어쩌다 다윗에게만 이뤄진 것이며, 이제는 그가 계속하려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의 말씀대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루용인가요, 아니면 또는 한달용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가운데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는 영원한 ‘계약’ 내용이 있으며, 그는 배은망덕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은혜를 지속하시길 원하신다고 결론을 맺읍시다. 이런 이유에서 다윗이 덧붙이는 말은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주님, 당신은 나를 선대하셨나이다, 즉 당신의 말씀대로”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전에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의 은혜로 확고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간청을 드리며 그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그의 은혜는 그의 말씀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맛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은혜의 참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그 은혜를 적용하여 신앙의 참된 확실성을 하나님에게 두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3) 겸손한 제자의 자세로
다윗은 이런 서문을 쓴 뒤 이제, 그러므로 “주님, 판단력과 이해력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는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알 수 있도록 선한 판단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그 이유를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미 본 대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미 충분히 배웠기 때문에, 참된 지식과 판단력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께 더욱 조명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혜가 믿음 안에 말고는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으로 가르침 받은 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에 동의하는 바로 거기에 우리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완전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마치 무지하고 무식한 자처럼 가르침 받기를 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믿어야 한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믿음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분리된다거나 쪼개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특성에 포함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첫째로 믿음은 어디서 시작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하며, 그런 권위를 그에게 돌리며, 그가 주인이심을 용납하고,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움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그에게 순종할 준비와 각오를 갖추는 것입니다. 설령 그의 뜻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주의를 기울일 것이요, 그의 거룩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이의 없이 받을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첫째 부분입니다.

 

믿음의 둘째 부분은 제자들이 스승에게 행해야 하는 그런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나온 뒤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서 더욱 풍성한 교육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존엄을 알고 그것에 복종하고 굴복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한 뒤 “주님, 내가 당신의 말씀의 능력을 느꼈고 특히 그것을 바랐으므로, 이 은혜를 내게 주셔서 그것을 더욱 이해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유념해야 할, 매우 귀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먼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하고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인지 정도가 하나님 편에서 하시고자 하는 것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이런 겸손함이 우리 안에 없다면, 복음이나 모든 성경에서도 우리가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지하고 엉성하여, 우리의 정신이 이런 이치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참된 제자들이 그토록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설령 이처럼 정신이 죽은 자들을 발견한다 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이 자만한 광인(狂人)들입니다.

 

물론, 어떤 무명의 인간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참작 정도만 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지각과 이성을 빼앗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설령 태양이 그들 눈앞에 비쳐도 그들은 여전히 소경으로 남아 있어서 마치 암흑 중에 있는 것처럼 더듬거리며, 결국에는 길을 잃고 목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의 은총을 거둬간다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권위와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윗의 본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더 가르쳐 주시기를 바랄 수 있으며 이런 요구를 그에게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지혜의 제 1단계입니다. 즉 겸손하여 하나님이 말씀하는 모든 것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준비를 갖출 때, 그들은 실패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버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능력을 펼치셔서 그들을 붙들 것입니다. 이것이 첫 두 구절의 내용입니다.

 

2. 떡과 포도주보다 더 필요한 고난

 

이제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고침 받기 전에 복종했던 것보다 더 잘 복종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주님, 내가 이미 여러 다른 은택들을 선포했지만, 이 은택은 당신이 고난으로 나를 겸손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내세우는 것은 그로 하여금 끝까지 더욱더 그 은혜를 증가하고 배가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취지를 따라서 다윗이 견지하는 순서를 유념해야 합니다. 그는 “주님, 내가 그릇 행했음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핵심은 그가 하는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굴복시키기 어렵고 거칠다고 여기실 때, 그는 이 고집을 굴복시키기 위해 제재수단(regime)을 사용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후에 우리로 그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한때 그가 지나치게 고집을 부렸음과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깨닫고, 비록 그가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 내가 그릇 행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나를 벌하기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그가 이 말로 의미하는 바는, 내가 언급했듯이, 그가 이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거기에서 말미암는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혜를 더 얻어서 그것이 완전해질 때까지 확고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다윗이 결코 방탕한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잘못 행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심각하고 과도한 잘못들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며,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아 마땅할 정도의 엄청난 행위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저지른 간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의 수를 과시해 보이려 했을 때, 그에게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헛되고 어리석은 교만으로 가득했으며 이것이 그에게서 왕관을 앗아간 이유임을 몰랐습니다. 그는 이런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대신 말달리기 경주를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좇고 그것에 전적으로 전념한, 지속적으로 온순하고 관대한 인물이었습니다. 평생을 방탕하게 산 사람과, 특별한 악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대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께 경외를 보인 사람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하나님을 섬기다가 모종의 죄, 매우 커다란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일이 일어나듯이,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악을 매우 즐기면서 평생 하나님을 경멸하는 악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찾아오시기 전에는 그가 잘못 행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다윗에게 일어났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 그러므로 고난이 떡과 포도주보다도 더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압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달라고 잘도 구합니다. 물론 그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원리를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고집센 말을 타고 그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그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그의 거룩한 뜻에 따라 평온하고 순순하게 그분의 인도를 따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살찌우신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내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고난을 통해 굴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잘못 행하는 짐승 짓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본성은 불쌍하리만큼 너무도 반역적입니다. 우리의 성향(affections)은 끝을 모를 정도로 끔찍하게 어리석어서, 만일 하나님이 고삐를 느슨하게 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면, 우리는 그에 대해 분격하며, 또 너무도 제멋대로 되어서 모든 정의와 공평과 정직을 뒤집으려고 할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편안하고 크게 번창하게 되면 하나님과 충돌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 외에 다른 치유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유일한 치유책이며 이를 통해서 그는 우리를 복종케 하시고 가르치시며, 그렇지 않고 만일 그가 우리를 안식 가운데 내버려두시면, 우리의 본성이 그와 맞서지 않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교훈을 잘 명심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고통받는 재앙을 그토록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비참함과 역경을 이런 식으로 위로하지 않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가혹할 수 있으나 우리를 구원으로 돌려놓는 치료약임을 압니다. 구원의 길에서 떠나 방황하고 미친 짐승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회초리로 인해 우리가 그에게 복종할 정도로 굴복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고난에서 얻는 유익이 우리의 소관이기 때문에, 고난이 우리가 짊어지기에 그토록 힘들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실 결말을 기다리면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나아가, 하나님이 손을 들어 우리를 벌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고 방탕한 욕망을 꺾으시는데, 우리는 치유 불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며, 늘 하던 대로,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큰 잘못을 행하기나 한 것처럼, 투덜거려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오히려 다윗의 모범을 따라 벌을 받고 고난받는 것을 인내하십시오.

 

자, 미련하고 야만적인 짐승들은 그들을 복종시킬 줄 아는 근면한 사람이 있을 때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항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말이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능숙하게 길들일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말은 다뤄지고 이끌려지며 고삐에 의해 굴복합니다. 글쎄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굴복시키고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쓰시는데도 그 일을 처리하지 못하신다면 우리가 커다란 수치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다윗의 본을 따라서 하나님의 회초리 밑에서 유익을 얻는 데 힘씁시다. 우리가 그에게 고난을 받은 뒤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말입니다.

 

3. 최고의 권면 - 주의 율례로 가르침 받는 것

 

이제 동시에 이어지는 말씀은 “주는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우리가 본 동일한 요구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내가 이미 언급한 것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모든 기도 가운데서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기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기도의’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우리가 현세와 관련된 것 및 육신에 속한 것에 지나치게 탐닉해서 이 우리 영혼의 거울을 숙고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고 그 말씀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그토록 큰 이 복을 망각하지 맙시다. 즉 그의 율례로 가르침 받는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권면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요청 외에도 다윗은 처음 65절에서 주장한 동일한 이유를 사용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두 말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오며 그 의미 또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합니다. 그는 ‘앞에서’ “당신은 당신의 종을 후대했습니다”라고 말했고, 여기서는 “당신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그는 “당신의 말씀대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앞의 두 구절(65~66절)에서 우리가 본 것의 확인일 뿐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이 본성에 따라 그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선을 내세우면서 그의 율례로 가르침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4. 치열한 전투 가운데 드리는 기도

 

이제 다음 말씀이 첨가됩니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공격하고 나에 대해 거짓을 만들어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나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장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이 이 말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얻고, 그의 말씀으로 확인되며,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일이 필요함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필요합니까? 전투에 맞서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아, 내 하나님, 만일 내가 당신에게 가르침 받지 않는다면, 당신이 당신의 영으로 나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당신을 거스리는 의지만이 내게 있을 때, 나는 이것들과 싸우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내게는 또한 나를 억압하는 외부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나를 인도하고 당신 손으로 나를 다스리시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청원을 보다 용이하게 응답 받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벌받을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가식 없이 이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이려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주님, 내가 당신의 율법과 당신의 율례로 가르침 받게 해달라는 것을 의례적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이 복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인간의 지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악인들이 나를 공격하고 타락시키려 애를 쓰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어도, 나는 당신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에게 무슨 계략을 꾸몄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지 않았을 때, 바로 이것을 통해 그는 그가 얼마나 이 말씀을 사랑했는지 보기 좋게 입증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이유입니다. 먼저, 다윗이 여기서 교만한 자들에 대해 말할 때, 이 칭호가 성경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모든 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돌리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강퍅해져서 그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비열하고 야수적인 불경건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끔찍한 교만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불신이 인간에게 교만을 품게 하며, 그로 인해 인간은 (비록 쓸모 없는 인간일지라도) 본질상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있는 이런 자만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두꺼비처럼 자만으로 부풀기 때문에, 오직 유일한 신앙만이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어 우리를 빚을 수 있게 한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신앙 외에 이 악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나서,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는’ 죄악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른 판단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헛됨과 어리석음뿐임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하나님의 빛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때, 그때 그들은 그들이 오물과 쓰레기일 뿐임을 배우며, 스스로에게 불만족하고 자신의 파렴치를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은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다윗은 교만한 자들, 다시 말해, 악인들과 불신자들이 그를 향해 거짓을 꾸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인간들과 함께 잉태하고, 인간들이 태어날 때 세상에 나오며, 하나님께서 신앙의 방편으로 성령을 통해 고치시기까지, 나이와 더불어 자라고 성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을 보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악인들을 볼 때, 그리고 그들이 이처럼 방종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본성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1) 유혹에 쫓길 때 기도함
나아가, 다윗이 자신의 필요성을 하나님께 주장하면서 자신의 본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유혹에 쫓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되 손을 내밀어 도우시며 우리가 패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담대히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유혹에 쫓길 때,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뒤집을 수 있는 통로를 쉽게 찾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은 마치 먹이로 노출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며,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제시된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순서를 명심해야 합니다. 즉, 치열한 전투 가운데서 우리가 공격당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요, 우리를 건져달라고 구해야 할 때요, 그냥 놓아두면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고 갈 우리의 잘못을 고쳐달라고 구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악인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킴
다음으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전투에 맞서 싸우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을 바르게 입증하는 일입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타락시키려 할 때 우리가 확고하게 있다면, 우리의 신앙과 꿋꿋함은 잘 입증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아무도 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변명이 소용되리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타인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할 경우 하나님도 만족하실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는 바른 길에 있었고 하나님을 따라 살기를 바랐으나, 너무도 사악한 세상과 사람들이 숱한 악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변명을 내세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으로 만족하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온 세상이 신자들을 방해하려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며, 악인들이 거짓을 꾸미고 신자들로 하여금 바른 길에서 이탈하도록 방해물을 놓는다 해도 그들은 확고하고 꿋꿋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방식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게 하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소명을 좇아가야 합니다.

 

이 권면이 당시에 필요했다면, 오늘날은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이 모든 죄악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는데,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줄곧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는 수많은 사악한 조우들을 만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향해 거짓을 꾸몄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나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들과 하나님의 원수들이 꾸민 거짓은 결코 한 가지 종류가 아닙니다. 때로 그들은 우정의 색깔로 우리를 미혹하며, 때로는 많은 것들을 내세워 우리의 용기를 꺾으며, 때로는 흑백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을 뒤죽박죽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조심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마귀가 이처럼 다양하게 변모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빈약하고 보잘것없다면, 우리는 이내 지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섬김」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을 대적할 만큼 견고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5.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구함

 

다음으로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당신의 율법을 즐거워했습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과 그를 섬기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을 비교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멸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그들의 방탕하고 짐승 같은 생활임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토리와 보리로 가득한 여물통에서 사육되는 돼지처럼 살쪄 있기 때문입니다. 지방으로 휘감겨 있는 돼지를 보십시오. 그것은 너무 무거워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이미 진흙과 오물만을 구하는 육중한 짐승이지만, 사람들이 그를 살찌우면 훨씬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 사악한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영생을 생각하지 않고 온통 그들의 배를 채우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여물통에 코를 박고 있는 짐승처럼, 지방으로 휘감겨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이 그를 살찌게 하셨다 하더라도 그는 지방에 휘감겨 있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영적 축복을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학교에서 그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구절에서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우리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을 본다 하더라도, 이 일로 놀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사람들이 그들의 복을 어디에 두는지 주의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만 구하고 더 멀리 바라보지 못하는 소나 돼지 같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취하고 지나치게 세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시고 심지어 이 세상의 안락함과 편이함을 주신다 하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히려 이 모든 것이 하찮은 수단이요 부속물들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핵심 사항으로 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아버지요 구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렇게 인정하면서 그를 바라고, 또 그가 우리를 초대하는 영생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6.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으로 길들이시는 경우, 다윗이 여기에 덧붙이는 말씀으로 향하십시오. 즉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설령 하나님이 그의 손을 거두시고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는 대신 거칠게 다루신다 해도, 우리에게 풍족한 복을 보내는 대신 배고프고 목마르게 내버려두신다 해도,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는 대신 질병으로 억압하신다 해도, 그래서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수많은 고민과 고통으로 시달린다 해도, 다윗과 더불어 위로 받기 위해 언제나 목적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 당신의 율례를 배우기 위해서 겸손하게 되는 것이 내게 유익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규례를 더 잘 배우기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했다면, 이 세상의 헛된 것으로 가득한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가르침으로 유익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손으로 고침 받고 우리의 고삐가 바짝 당겨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이 권면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그가 마지막 구절에서 한 말을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물들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보다 멀리, 즉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이 보내시는 고난에서 유익을 얻을 때, 그는 동시에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전념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탐욕과 나쁜 마음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그가 다스리시고 우리 안에 사시는 것만을 구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목전에 부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나쁜 마음을 기꺼이 제거해 주시며, 우리로 구원의 바른 길에서 이탈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시며,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영생에 이르는 것만을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창조된 이유를 모른 채 마치 야수처럼 살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시며 구주이심을 알면서 피조물로서 그에게 굴복하고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하되, 그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끌어내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하늘에 준비된 영원한 복과 불멸의 유업에 참여시키실 때까지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은총을 우리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에게도 베푸시길….(*)

 

이 설교는 1553년 3월 5일에 행한 설교(CO, XXXII, 581)이다. 이 설교문에 붙여진 소제목과 괄호 및 주(註)는 원문에 없는 것이지만 독자의 편의를 위해 첨가하여 번역, 편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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