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주로 믿는 자들을 깨우치며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믿는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필요하다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함. (율법의)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본래의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19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렘 31 : 33; 히 10 : 16),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마치 주인의 마음에 들겠다는 성의와 준비가 있는 하인이 주인의 습관을 따르며 거기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 습관을 자세히 연구하며 관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날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더 순전하게 아는 일에 새롭게 전진해 나갈 필요가 없을 만큼 지혜가 많았던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또 우리는 배울 뿐 아니라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 : 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시 119 : 5). 이 구절들은 바울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13. 믿음이 깊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20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집어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게 하는 직분”(고후3:7)을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을 붙든다는 것은 분명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리 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 32 : 46-47). 그러나 만일 율법에 의의 완전한 모범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시 1 : 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의무와 일치하는 동시에 또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기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참으로 인생 전체가 경주다(참조, 고전 9 : 24-26). 경주로를 다 달릴 때에, 지금 멀리 바라보면서 뛰어가는 그 목표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이른바 율법의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단절을 뜻한다. 14-17) 14. 율법이 어느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철폐되었는가? 율법의 폐지된 면과 유효한 면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을 일깨워 주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즉 내가 말하는 도덕법이- 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21 율법이 신자들에게 지금은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 넣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철폐된 데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친다(참조, 롬 7 : 6). 주께서도 철폐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주께서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리라는 생각을 부정하셨는데(마 5 : 17), 만일 이 생각이 유대인 사이에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정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구실도 없이 우연히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리가 없으므로,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오류는 거의 모두가 진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께서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 : 17-18)고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강림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교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 3 : 16-17). 15.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의 의미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율법의 폐지를 말씀하지만, 그것은 율법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그 힘이 폐지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은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솔직하게 실시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저주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갈 3 : 10; 신 27 : 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 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 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속박에서 풀러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형벌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 : 13 ; 신 21 : 23).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갈 4 : 4-5)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갈 4 : 5).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율법에 끝없는 속박을 받아서 우리의 양심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짓눌려 있는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 곧 율법이 그 권위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존경과 복종으로 율법을 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 칼빈, 기독교강요, 2.7.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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