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서 고고학

[스크랩] 기혼샘, 히스기야터널, 실로암 못

baromi 2008. 4. 30. 07:44

실로암 연못의 기원 기혼샘     (출처- http://cafe.daum.net/missiontgt

 

구약시대엔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샘이 두 개가 있었은데 기혼샘이 그 중에 하나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강수량이 많이 않고 기온이 높은 지역으로서는 물이 그 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최초의 성이 바로 기혼샘 바로 옆에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기혼샘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다윗왕이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쳐들어와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도 바로 기혼샘으로부터 나 있는 수로를 이용해서 쳐들어 갔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을 부어 줄 때도 기혼샘에 가서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한지 2세기 반 만에 산헤립이 침곰해 왔는데 그 당시의 히스기야 왕이 기혼샘의 물줄기를 바꿔 놓는 대 역사를 이루어 놓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적인 의미가 깃든 곳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혼샘은 너무나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기혼샘을 찾아갈 수 있을 만한 안내판도 제대로 없고 그냥 물어서 가야 할 정도이며 막상 그 앞에 가도 과연 이곳이 솔로몬 왕이 기름을 부음 받은 곳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 이다. 하지만 기혼샘에 들어갈려면 돈을 내야 하고 여기서부터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이 되면 히스기야 터널의 끝은 실로암 연못이 된다.

 

예루살렘서 실로암 연못 추정 유적지 발굴

 

성서에 나오는 실롬암 못이 있던 자리로 믿어지고있는 예루살렘의 한 지역에서 집회장소와 수로가 발견됐다고 이스라엘 문화재청이23일 밝혔다. 고고학자들은 이번 발굴 결과 실로암 못이 2천 년 전 당시에 저수지보다는 침례의식용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단은 실로암 못을 축조한 시멘트 속에 들어있던 동전들을 토대로 못의 축조시기를 정확히 추정해냈으며 이 동전은 최고 기원전 1세기 중반까지 연대가 올라갔다. 현장에서는 넓은 계단과 꿀 색깔의 바위를 지나는 좁은 수로가 발굴됐다. 실로암 못은 예수가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못의 물로 씻게해 시력을 되찾게했다는 기적을 베푼 장소로 신약성서에 기록돼있다. 이 발굴장소는 1967년 중동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병합한 예루살렘 구시가지 근처에 있다. 실로암 못 유적은 19세기부터 고고학 탐사의 주요 대상이 돼왔다  (연합뉴스)

 

히스기야 터널          (출처- http://cafe.daum.net/comseminary )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대하 32:30) 역대하 32:30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이 지하수로를 히스기야 터널이라 부르고 있다.


다윗이 시온 산성(山城)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물도랑)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삼하5:7-8) 

 

기혼샘, 히스기야 터널 입구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역대하 32:30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의 침략에 대비해서 성밖에 있는 샘물의 줄기를 성안으로 끌어 들였다고 하는데 그 물줄기가 바로 히스기야 터널이다.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침략해 들어 올 것을 대비해서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보아 방패와 병기를 만들게 했고 예루살렘 성의 곳곳에 요새를 만드는 등 군사전략가로써 뛰어난 기질을 보였다. 산헤립이 침공해 올 경우 예루살렘 성문을 모두 닫아야 하는데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이 먹는 샘물이 바로 성밖에 있는 기혼샘 뿐이었다. 히스기야 왕은 기혼샘물로부터 터널을 뚫어 성안에 있는 실로암 까지 연결하기로 하고 암반을 파들어가는 대 공사를 시작한다. 약 2천5백명의 사람들이 암반 터널 공사에 참여했는데 기혼샘과 실로암 양쪽에서 서로 파 들어가는 형식의 공사를 해서 533m의 터널을 뚫는 엄청난 공사를 해냈다. 그런데도 약 15cm 정도의 오차가 없었다고 한다. S자 형태로 된 이터널은 길이가 540미터에 이른다. 이 공사는 양쪽 끝에서 부터 시작되어 중간 지점의 약1.2미터를 남겨놓고 양쪽이 만났다고 기록되어있다. 1880년에 발견된 비문은 여섯줄로 모두 2백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되어 있는데 이 비문에는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다."3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  고 기록하고있다. 이 기록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도 히스기야 터널에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고 있고 물에는 고기도 살고 있다. 터널 내부는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과 약 2m 정도의 높이로 파 들어가면서 중간 중간에 마주오던 사람과 비켜설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터널을 통과하는데 약 30분 정도 걸린다.

 

히스기야 터널    (http://cafe.daum.net/jesusvillagestory

 

히스기야 터널 기록 비문, 실로암 샘에서 발견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 

 

기혼샘 (히스기야 터널)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샘으로 예루살렘에 있어서 중요한 물의 원천으로 오늘날은 '처녀의 샘' 이라고 불린다. 기혼(Gihon)이라고 하는 히브리 명칭은 원래 이 샘이 한 자연동굴로부터 매일 2-5회 정도 분출되는 간헐천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할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여부스족들이 지하에 만들어둔 수구 즉 기혼샘물을 끌어오는 도랑을 통해 침투하여 성을 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5:8)

 

실로암 못      ( 카페명 : 2004학번(2부)순복음신학원)

 

이 못은 히스기야 왕이 지었는데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받는 물 저장소이다. 이 못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인데 예수께서 소경에게 눈을 바른 진흙을 씻으라고 한 장소이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7).  5세기에 못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 된 후 현재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실로안 샘     (출처- http://blog.paran.com/)

 

실로암 샘

 

 

히스기야 터널 발굴 역사   (출처- http://planet.daum.net/paul-310/ilog/6148047)


기원전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은 맹렬한 기세로 유다를 공격했다.이미 라기스를 함락,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다.이런 다급한 상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역대하 32장2~3절)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유다의 공병대가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다.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의 수원지인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뚫는 것으로 시작했다.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힘든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의 그을음과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 청동제 도끼로 바위를 쪼는 굴착작업은 예루살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앗시리아 군대의 진격속도와 겨루는 또다른 전쟁이었다.1838년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천5백년의 세월동안 퇴적된 바닥의 진흙층 때문에 그는 거의 기다시피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더욱이 그는 기혼샘 근처에서 수직으로 11m나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다윗의 부하인 요압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수구'(사무엘하 5장8절)로 해석하기도 했다.하지만 히스기야 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그해 여름 어느날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그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 나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6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벽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콘더(C.R.Conder)와 세이스(A.H.Sayce),독일의 구테(H.Guthe) 등 고고학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이 비문 해독에 매달렸다.탁본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메사 석비'와 비교해 볼 때 언제든지 현장에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고대 히브리어 비문이 예루살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모두 여섯 줄로 2백자가 기록된 실로암 비문은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 터널 개통 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3 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길이 5백25m인 지하 터널의 기울기는 0.06%,즉 양쪽의 고저 차이가 고작 32㎝였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백15m이다.그런데 왜 적이 쳐들어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당시 유다인들은 구불구불하게 5백25m나 되는 긴 터널을 팠을까.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그중에 가장 타당한 설명이 바로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도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은 정밀 조사 끝에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냈다.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팠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다.그래서 당연히 양쪽이 도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이사야의 예언(이사야 37장7절)대로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어떤 학자들은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만 성을 포위하던 당시 전술에 비추어볼 때 히스기야 터널 때문에 예루살렘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아무튼 성서고고학사에 있어서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의 발견은 성서학 고고학 비문학 앗시리아학 지질학 수리학 토목공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된 학제간 연구의 좋은 본보기로 기록된다.한편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어느날 밤 아무도 몰래 혼자 연장을 갖고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냈다.이 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물 속으로 사라졌다.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고,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을 압수했다.스위스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에서 탐사와 발굴활동을 하던 콘라드 시크(Conrad Schick)는 곧바로 이 비문의 모형을 완성했지만,비문 자체는 이스탄불의 제국박물관으로 운송됐다.지난 1996년 다윗에 의한 `예루살렘 정도 3천주년'을 맞아 실로암 비문의 이스라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기원전 701년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고대 히브리어 기록 중 가장 긴 문장인 실로암 비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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