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아더핑크 - 구원론 ( 펌 )

baromi 2008. 2. 16. 20:35

THE  DOCTRINE OF SALVATION


by
 ARTHUR W. PINK
 translated by Yun Jong Hoon

 1984
 Poong-man Publishing House
 Seoul, Korea


I.책머리에-1886년 영국에서 태어났고 얼마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당시 부흥의 본산이었던 무디성경학원에서 수학하고 목회를 하다가 순회성경교사로 부름을 받아 미국의 여러주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특히 미국과 호주를 많이 다녔고 1934년에는 모국인 영국에 돌아가 자신의 신앙을 책으로 썼다.  1952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더핑크는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신학이 득세할 때 그들의 신학의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선 말씀을 전했다.  당시 기독교를 타종교의 하나로 보고 성경을 천재적 문학의 일종으로 밖에 보지않던때에 그는 칼빈주의적 말씀에 굳게섰다.
1부. 중생
 서론-아담의 타락한 후예들이 구원에 이르는 길에는 큰 장애물이 놓여있는데 그것은 조책(죄의의식과 형벌에 속박당하는것)과 죄의 권세(죄의 힘과 현존)의 속박이다.  이로인해 인간은 모두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으리이까!'라고 그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받는 방법을 명확히 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죄책과형벌, 죄의세력과 현존에서 건짐을 받아야한다.  죄책과 형벌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서, 죄의 세력과 현존은 성령의 효과적 역사에 의해 가능해 진다.  중생한 자는 성화,영화로의 길을 가지만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철저히 읽고 연구하여 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해도 진리의 자그마한 통찰력 밖에 얻을 수 없다.  장님으로 태어나도 꽃을 가르치면 어느정도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열심히 탐구하면 진리에대한 자연적 지식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영이 죽은자와 같아서 자연으로서는 결코 영적인 일들에 대한 영적인 지식은 얻을 수 없다.  사람은 남은 잘 비판하지만 정장 중요한 자신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 그것을 회피하려하듯이 복음의 진정한 도전앞에서 자연인은 피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새로남이 없다.  복음은 감춰진 비밀이며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탐구도 헛것이지만 하나님은 죄로어두워진 인간의 오성에 천국의 빛을 전하기 위해 여러방법을 ㅇ사용하시길 기뻐하신다.  그래서 여러직분들을 은사로 주신 것이다.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를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열매를 맺게 되며 성령께서 마음에 적용시키셔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은 기적인 것이다.  중생은 내가 구원받지 못했을때의 나를 조금 고치는 것하고는 차원이 틀리다.  중생은 단순히 행동의 개혁만을 말하거나 마음을 바꾸거나 선한 삶을 살려는 으지가 아니고 완전히 위로부터 새로남인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이시다.  중생은 바람이 임의로 불 듯이 사람이 알지 못한다.  중생의 지점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로 지옥을 떠나는 것이다.
 중생의 필요성
  중생은 본성의 타락 때문에 필요한데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죄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영적생명의 상태 아니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속하게 된다.  이제 누구든지 이 둘의 한쪽에 속하게 되어있다.  타락으로 인간은 선한것과 멀어지게 되었고 선한 것을 꺼리며 아무런 참된 원칙과 목적도없으며 오직 죄에 물든 생활만 할 뿐이다.  그들은 구원을 얻으려 나오지 않는다.  타락으로 인해 선한 것을 행할 능력을 잃었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사람들의 도덕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어떤 사귐을 가지기 전에 사람속에서의 영적이 ㄴ변화가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타락으로 하나님을 알만한 모든 것이 부패해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개선을 찾지말고 전적으로 새로지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타락으로 인간은 뿌리에서부터 잘못된 것으로 가식 뿐이다.  그래서 많은 선행의 열매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열매의 영양분은 거듭난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중생의 필연적 오구와 여러문제들을 명확히 파악하면 당면하는 문제들의 어려움을을 다소 줄일수 있게 된다.  이런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는 우리를 위해 주로 세가지의 일을 행하셨다.
 제사장직-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케함
 예언자직-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갈길을 가르치고 인도함
 왕직-백성들앞에서 한 말을 이루고 하나님과 사귀며 교제할 수 있게 함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미혹을 당하며 스스로 속이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공로를 통해서 형벌뿐 아니라 권세와 부패에서도 구원을 받게 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상충(相沖) 때문에 중생이 필요한데 죄인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죄인 사이의 접촉점이없으며 첫아담으로인해 멸망했으니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죄를 사랑하는 사람의 성향을 버리고 회복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시작되어져야 하며 또한 정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중생이 필요하다.  중생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하는 거이다.  또한 영적인 일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예비하는 것은 합당한자가 되는 것인데 먼저 성령의 열심히 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이를 통해 정결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게 된다.  이 형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간으해 진다.  우리는 그의 공로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중생과 성화는 분리될 수 없고 중생한 자만이 성화의 길을 가게 된다.
 중생의 본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라고 하셨다.  중새은 하나님의 역사인데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중생을 설명할대 비유나 말씀들에 국한시켜야하며 그것들을 구체화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위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신생은 새로운 피조물이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새로운 육체의 어떤 기능을 새로이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시에 완전한 존재로 지어졌고 타락시 어떤 부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타락으로 영적으로 죽게되었는데 이것은 기능의 멸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의미한다.   거듭나지 못한자의 두려운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타락시에 죄의 원리를 따라 살았는데 중생을 통해 새로운 원리가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실체(영화된 몸?,어떤 다른 개체?)가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질적인 힘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죄악된 성품이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었고, 새로운 행동의 원리를 받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기능의 분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모든 힘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을 통해서 새로운 영적 원리가 생기고 새로운 성품이 생기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회복되게 된 것이다.  인격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다 다만 죄인은 하나님을 향한힘을 잃었고 중생한자는 하나님을 향한 힘을 얻은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여기서 영은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인 '영, 육, 혼'의 영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온 성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에서 육도 그냥 육체가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성품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영과 육은 거듭는 상태의 성품과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생된 신자에데서도 죄의 원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다만 새로운 원리에 의해서 신자의 기능을 지배하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죄와 싸우게 된 것이다.  무기력한 희생자가 싸운다는 것은 논리학에서 명사의 모순이다.  중생한 그리스도 전혀 무기력하지 않으며 그 마음에 죄를 능히 이길 힘을 부여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  그가 보는 대상도 새것이며, 그의 목적과 동기가 모두 새것으로 변화 되었다.  여기서 중생은 객관적인 변화가 아니라 주관적인 변화이다.  의인을 객관적 시각이라 한다면 중생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원리상 두가지 본성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 본성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난 행동의 원리이며 성품이지 존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성향과 성질과 경향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중생의 결과
  모든 사람은 진노의 자녀로 죄악의 상태에 있으므로 천국에 합당치 못하며 스르로 구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르심을 통해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받고 중생하게 된다.  이러한 중생의 결과는 바람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부는지(물론 자연적인 것은 알지라도)이해하지 못하듯이 내적 주관적 변화인 중생또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말씀과, 경험함으로 알 수 있다.
   지각과 오성의 조명
  우둔한자의 마음을 여시고 말씀을 우리속에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영적으로 두려운 상태에 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도 성한 것이 없으며 상처뿐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빛의 비추임을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가 구속자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로인해 그런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마음의 고양-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중생한 자라야 가능하다.  중생된 후에는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분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
   의지의 해방-본질상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한쪽으로만 자유롭다.  그래서 죄인은 의에 대해 자유하였고 의인의 죄에 대해서 해방된 것이다.  이런  해방된 자는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속에 오셔어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된다.
   행동의 교정-중생된자가 중생되지 못한자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변화를 받게 되며 그런자는 자신의 거룩함의 원리를 경건한 행동으로 드러내게 된다.  항상하나님의 교훈에 부합하기 위헤 노력하는 것이다.  중생되면 그 마음에 고뇌가 차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거하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내속에 죄를 여전히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은혜에 동시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로인해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하지 말며 습관적 죄를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은혜는 내안의 육을 제거하거나 정결케하는 것이아니다.  오히려 내 속의 부패를 괴로워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서 구출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자기만족을 버리고 그리스도안에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이것이 내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리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따라서 은혜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나를 떠나서 살게 되며 그리스도에 입각해서 사는 것이다.  이모든 필요한 것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은혜안에서 성장하는 것과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성장의 과저을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시기는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혼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고통을 격으며 내재하는 죄 까닭에 고통할 때가 가장 크게 성장하는 때이다.  이로인한 중생의 실체는 동일 하지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나 재능은 가가기 다른 것이다.  은혜와 영과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 같지도 않다.  둘은 불가분 연관된 것인데 은혜는 영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땅에서 하나님을 닮은 형상은 성도들이 이땅에서 어느정도 소유하게 된다.  이 형상의 완전함을 천국 속에서 그리스도을 만날 때 회복될 거이다. 
 중생의 본질적 요소
중생한자는 그의 일중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행동 목표이며 모든 행동마다 가치를 부여해주는 행동의 목적이 된다.  눈이 나쁘면 몸도 어두운 것처럼 사람의 의도가 나쁘면 죄의 결과만 있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자신만이 최우선의 관심사이거나 자신과 같은 인간만 기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기쁘게 한다. 중생의 본질은 전달, 혁신, 복종을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듭난자 안에서 죄의 세력을 제압하신다.  거듭난 자의 마음을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이제 죄를 미워하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는 경로와 방법들을 우리는 알수 없지만 성경말씀과 자연의 역사들이 말해준다.  사람의 견해, 동기, 성향, 추구성, 모두가 변화하는데 사람의 어떤 수단도 이런 변화를 이룰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모범인작가 말씀에 의해서 크게 바뀌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런 것을 신적인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의 말씀으로 신의 형식에 참여하는 자는 그의 형식으로 변화한다.  이것은 영화의 첫 경험으로 항상 변화하며 그의 은혜안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키우고 강해지기 위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이 중생의 마지막이 바로 영화이다.  사람은 이땅에 사는동안 영육의 갈들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 내적 경험은 사단과의 주도권논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깨어서 기도해야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게 된다.  중생한자에게 새성품이 죄에서 영혼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는 지속적이고 완전한 공급이 있어서 항상 그에게 나아가고 그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는 그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성장한다.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I회개
6.서론

세상에는 영적기만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회개를 구원받기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언제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하시기전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고후8: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핳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자들이 있다.  그중 예로 세대주의자는 회개는 유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17:30절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명하사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하신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유는 끝내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또 어떤자들은 단지 뉘우치는 것만으로 회개의 역사로 보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먼저 죄의 정의는는 회개의 계기가 되는 것으로 한정된다.  회개의 본질은 마음의 변화이다  슬픔을 수반한다 회개로인해 결심하게 된다.

7.회개의 필요성

죄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먼저 율법의 심판을 알지 못하면 죄도 알지 못하게 된다.  경건의 실행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되이 순종하는데 있다.  이것을 율법과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회개가 있고 구원이 있다.

 율법의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함
 율법의 바탕은: Because 그가 우리주 하나님이심
 율법의 의무의 척도와 정도는:하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의 함축적 의미와 그 요구의 첫째는 하나님께대한 참된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이론적 지식을 뛰어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를 기뻐하게될것(시37:4)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결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기애에 집착한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없다.  죄가 아무리 커도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없다.  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깨달으면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다고 주를 향한 강한 고백을 하게 된다.  이렇듯 참된 회개는  성령에 의해 자신이 그동안 마음속에서 죄의 악함과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의 위엄을 대항한 두려움을 깨닫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롸'고 하셨다.  이 회개는 죄로인해 애통하고 상한자를 치유하기 위해 주어진다.  부활하신 주님도, 오순절의 역사도,  오순절 배드로의 설교도, 바울의 회심도, 모든 것이 회개를 먼저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 복음에 회개의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회개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중 생활속에서 죄를 지으면 회개하지 않을자가 누가 있겠는가

8.회개의 본질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누가복음13장3절의 메시지에서 보듯이 각자가 온전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모순된 교훈으로 속거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먼저 잘못된 회개의 양상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두려워 떠는 것이 반드시 회개의 표징은 아니다.- 실제로 이방인도 떨었고 두려워 했으나 그 두려움이 떠나면 다시 이방신을 접했다.

 거의 설득된 상태는 회개가 아니다-사람의 설득력의 결교ㅘ이지 결코 성령의 중생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자는 다시 시궁창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생활에 더 만족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서 자신을 겸손히 낯추는 것이 반드시 회개의 표시는 아니다.-두려움과 거의 같은 것인데 이것은 공포그자체를 두고 한 말로 이런 공포는 벌의 두려움이지 결코 회개의 두려움이 아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회개의 표시를 삼을 수는 없다.-사람의 설득력이 감동을 주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나지 못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다.

 회개에 함당한 행위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예;가룟유다 )
이런 것들은 하나의 증거는 될 수 있어도 회개한 구원의 증표는 될 수 없다.  회개는 행동에 이르는 마음의 변화인 것이다.  우리는 전에는 복음에서 버려진 자들이었는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기전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먼저 주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제거하고 자신의 불충성, 율법을 경멸한 것 등을 회개하게 된다.  회개는 간단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고칠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다가올 진노에 대한 공포나 죄의 확신이상의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자는 이죄로인해 나에게 돌아올 하나님의 벌, 모든 수치를 감당하고 자신을 자백하고 하나님앞에 낮추어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영접하며 세례를 외적인 표지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복음적인 회개는 죄의 큰 악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할 주된 일, 즉 하나님께 드릴 모든 것의 실패를 다른일에 앞서 인식하는 것이다.
  참된 회계는 하나님의 죄인을 사하심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의 죄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버리지 않는자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을 입게 된다.  청교도 토마스 굳윈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알려진 것은 모두 버리고 의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행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주시는 자신의 기본원칙을 변화시키거나 낮추지 않으셨다.  회개는 소극적 측면, 꼭 죄를 버리고 우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렇때 하나님과의 화평이 주어진다.

9.회개의 의미

회개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추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욕되게 하던 모든 기질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 들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회개는 먼저 창조주로서, 통지자로서, 공급자로서, 보존자로서의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할 것을 전제로 한다.-중생으로 참된자를 알게 된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으로 부터 인정하고 그 법의 의로운 요구에 완전히 동의하는 일이 전제된다.-하나님은 법의 제정자 이시므로 하나님의 법은 절대 가감되거나 바꾸어지거나 수정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율법의 오구는 여전하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친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세우고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요약자 주:로이드 존스는 율벗의 완성을 무엇을 첨가 (더함)하거나, 어떤 멈춘 것을 다시 진행(진행이나 그 효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하여 졌다면 심판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사고와 자기애는 항상 율법을 폐기처분할 것을 요구한다.

   참된 회개는 솔직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악함을 인정할 것을 전제로 한다-  성령은 율법을 근거로 내가 어둠속에 있음을 알게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다.  무론 이것이 부인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는 벌이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 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죄를 혐오하며 그리스도만 갈망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세가지가 있다.
   절망의 회개(낙심)(에서, 바로, 아히도벨, 가룟유다)
   개혁의 회개(수리의 의지)(아합, 요나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회개(행1:18, 고후 7:10)

  다가올 진노의 낙심은 회개가 아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책망에 불과하며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증오하며 하나님앞에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심있는 종교인이 되지만(이런사람을 비난할 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회개를 결여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순종하심은 우리가 순종해야할 의무에대해 면죄부를 던져주는 것이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선한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율법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온전한 회개이어야 한다.  자신의 죄의 가지치기가 아니라 부패의 수정이아니라 전부를 잘라 버려야 한다.  이것은 마음의 전적 돌이킴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죄의 영속적 증오가(요약자 주:결국 이것과 순간적증오와의 차이는 없다 모두 순간의 연속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순간적인 것을 옹호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둘의 분명한 차이점을 찾고 자신이 돌아서는 것이 중요하다.바로 아래를 보면 알지만 이것은 사람에 의한 회개인지 성령에 의한 회개인지 자신을 살피는 시금석이 된다.) 필요하며 참된회개를 통해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  스펄젼은 눈 13:24의 설교에서 오직 하나님과 성령을 통하여 깨닫는 은혜를 받은 영혼만이 우리의 회개가 참된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10.회개의 열매

 회개의 열매는 단지 죄의 결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된다. -이렇저러한 죄가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며 죄의 근원인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반항 하였고, 그것의 결과는 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깊이 애통하게 된다.-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는 결국 자기압박에 불과하다(성령의 역사가 아니므로 자신의 노력이다).

 죄를 고백하게 된다.-죄를 조금이라도 숨기려는 자는 (요약자주: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숨기려는 의지는 우리의 기본적 욕구로써 끊임없이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의 죄악의 결과이므로 이것을 권장할 필요는 없다).그리스도 그만큼 덜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말해 주므로 이것이 있으면 우리가 언젠가는 구원받은자도 낙심의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죄를 고백해야 한다.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게 된다.-회개는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노정이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것들중의 어느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며 이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

 필요하고도 가능한 경우 배상이 동반된다.

 이 열매는 영속적이다.

 그러나 이땅의 생활에서 결코 완전한 회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설교에서 회개가 빠진 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런 회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II회개
6.서론

세상에는 영적기만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회개를 구원받기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언제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하시기전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고후8: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핳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자들이 있다.  그중 예로 세대주의자는 회개는 유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17:30절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명하사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하신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유는 끝내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또 어떤자들은 단지 뉘우치는 것만으로 회개의 역사로 보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먼저 죄의 정의는는 회개의 계기가 되는 것으로 한정된다.  회개의 본질은 마음의 변화이다  슬픔을 수반한다 회개로인해 결심하게 된다.

7.회개의 필요성

죄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먼저 율법의 심판을 알지 못하면 죄도 알지 못하게 된다.  경건의 실행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되이 순종하는데 있다.  이것을 율법과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회개가 있고 구원이 있다.

 율법의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함
 율법의 바탕은: Because 그가 우리주 하나님이심
 율법의 의무의 척도와 정도는:하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의 함축적 의미와 그 요구의 첫째는 하나님께대한 참된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이론적 지식을 뛰어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를 기뻐하게될것(시37:4)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결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기애에 집착한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없다.  죄가 아무리 커도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없다.  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깨달으면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다고 주를 향한 강한 고백을 하게 된다.  이렇듯 참된 회개는  성령에 의해 자신이 그동안 마음속에서 죄의 악함과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의 위엄을 대항한 두려움을 깨닫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롸'고 하셨다.  이 회개는 죄로인해 애통하고 상한자를 치유하기 위해 주어진다.  부활하신 주님도, 오순절의 역사도,  오순절 배드로의 설교도, 바울의 회심도, 모든 것이 회개를 먼저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 복음에 회개의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회개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중 생활속에서 죄를 지으면 회개하지 않을자가 누가 있겠는가

8.회개의 본질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누가복음13장3절의 메시지에서 보듯이 각자가 온전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모순된 교훈으로 속거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먼저 잘못된 회개의 양상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두려워 떠는 것이 반드시 회개의 표징은 아니다.- 실제로 이방인도 떨었고 두려워 했으나 그 두려움이 떠나면 다시 이방신을 접했다.

 거의 설득된 상태는 회개가 아니다-사람의 설득력의 결교ㅘ이지 결코 성령의 중생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자는 다시 시궁창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생활에 더 만족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서 자신을 겸손히 낯추는 것이 반드시 회개의 표시는 아니다.-두려움과 거의 같은 것인데 이것은 공포그자체를 두고 한 말로 이런 공포는 벌의 두려움이지 결코 회개의 두려움이 아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회개의 표시를 삼을 수는 없다.-사람의 설득력이 감동을 주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나지 못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다.

 회개에 함당한 행위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예;가룟유다 )
이런 것들은 하나의 증거는 될 수 있어도 회개한 구원의 증표는 될 수 없다.  회개는 행동에 이르는 마음의 변화인 것이다.  우리는 전에는 복음에서 버려진 자들이었는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기전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먼저 주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제거하고 자신의 불충성, 율법을 경멸한 것 등을 회개하게 된다.  회개는 간단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고칠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다가올 진노에 대한 공포나 죄의 확신이상의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자는 이죄로인해 나에게 돌아올 하나님의 벌, 모든 수치를 감당하고 자신을 자백하고 하나님앞에 낮추어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영접하며 세례를 외적인 표지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복음적인 회개는 죄의 큰 악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할 주된 일, 즉 하나님께 드릴 모든 것의 실패를 다른일에 앞서 인식하는 것이다.
  참된 회계는 하나님의 죄인을 사하심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의 죄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버리지 않는자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을 입게 된다.  청교도 토마스 굳윈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알려진 것은 모두 버리고 의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행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주시는 자신의 기본원칙을 변화시키거나 낮추지 않으셨다.  회개는 소극적 측면, 꼭 죄를 버리고 우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렇때 하나님과의 화평이 주어진다.

9.회개의 의미

회개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추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욕되게 하던 모든 기질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 들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회개는 먼저 창조주로서, 통지자로서, 공급자로서, 보존자로서의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할 것을 전제로 한다.-중생으로 참된자를 알게 된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으로 부터 인정하고 그 법의 의로운 요구에 완전히 동의하는 일이 전제된다.-하나님은 법의 제정자 이시므로 하나님의 법은 절대 가감되거나 바꾸어지거나 수정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율법의 오구는 여전하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친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세우고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요약자 주:로이드 존스는 율벗의 완성을 무엇을 첨가 (더함)하거나, 어떤 멈춘 것을 다시 진행(진행이나 그 효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하여 졌다면 심판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사고와 자기애는 항상 율법을 폐기처분할 것을 요구한다.

   참된 회개는 솔직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악함을 인정할 것을 전제로 한다-  성령은 율법을 근거로 내가 어둠속에 있음을 알게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다.  무론 이것이 부인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는 벌이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 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죄를 혐오하며 그리스도만 갈망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세가지가 있다.
   절망의 회개(낙심)(에서, 바로, 아히도벨, 가룟유다)
   개혁의 회개(수리의 의지)(아합, 요나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회개(행1:18, 고후 7:10)

  다가올 진노의 낙심은 회개가 아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책망에 불과하며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증오하며 하나님앞에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심있는 종교인이 되지만(이런사람을 비난할 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회개를 결여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순종하심은 우리가 순종해야할 의무에대해 면죄부를 던져주는 것이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선한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율법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온전한 회개이어야 한다.  자신의 죄의 가지치기가 아니라 부패의 수정이아니라 전부를 잘라 버려야 한다.  이것은 마음의 전적 돌이킴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죄의 영속적 증오가(요약자 주:결국 이것과 순간적증오와의 차이는 없다 모두 순간의 연속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순간적인 것을 옹호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둘의 분명한 차이점을 찾고 자신이 돌아서는 것이 중요하다.바로 아래를 보면 알지만 이것은 사람에 의한 회개인지 성령에 의한 회개인지 자신을 살피는 시금석이 된다.) 필요하며 참된회개를 통해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  스펄젼은 눈 13:24의 설교에서 오직 하나님과 성령을 통하여 깨닫는 은혜를 받은 영혼만이 우리의 회개가 참된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10.회개의 열매

 회개의 열매는 단지 죄의 결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된다. -이렇저러한 죄가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며 죄의 근원인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반항 하였고, 그것의 결과는 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깊이 애통하게 된다.-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는 결국 자기압박에 불과하다(성령의 역사가 아니므로 자신의 노력이다).

 죄를 고백하게 된다.-죄를 조금이라도 숨기려는 자는 (요약자주: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숨기려는 의지는 우리의 기본적 욕구로써 끊임없이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의 죄악의 결과이므로 이것을 권장할 필요는 없다).그리스도 그만큼 덜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말해 주므로 이것이 있으면 우리가 언젠가는 구원받은자도 낙심의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죄를 고백해야 한다.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게 된다.-회개는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노정이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것들중의 어느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며 이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

 필요하고도 가능한 경우 배상이 동반된다.

 이 열매는 영속적이다.

 그러나 이땅의 생활에서 결코 완전한 회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설교에서 회개가 빠진 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런 회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III.그리스도께 나아옴
11.서론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올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람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는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우리 마음에 베풀어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특정한 계층을 부르신다.  그 계층이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이다.  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부르신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다 지쳐 버렸고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자기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는 지금도 말씀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요약자:물론 그 것을 얻는 것 자체로는 간단하고 쉬운일이긴 하지만...)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전하여 지기 전까지는 전혀 불가능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가전에 먼저 나의 오성이 깨우쳐지고 마음이 변화하여 완고한 의지가 깨져야 한다.  이렇게 변화된 말씀은 전과는 다르게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아가는 자들을 언제나 거절치 않고 받아 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처음과 동일하게 항상 나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충만함(요1:16)이 있고, 힘이있고(사40:3), 지혜가 있고, 정결함이 있고, 치료가 있고, 위로가 있고, 용서와 구원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의 영원한 안전을 확신시켜 주신다.  그는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여 주신다.

12.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장애물들

 자연인은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갈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죄인의 결과(지옥)를 보아서 무서운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무능하게 된 것은 인간의 어떤 필수적인 기능이 결여된데 있지 않다.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육적 능력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영, 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제거되지 않았다.  이렇게 죄는 사람의 존재 그자체의 전부나 일부를 소멸시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아무도 신체적 결함으로 주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능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력한 것은 그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인간의 무능한 자리는 바로 부패한 마음이다.  그의 마음이 거짓말, 교만, 악행, 악한말들을 한다.

 인간이 무능력한 것은 그의 오성이 완전히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자연인이 무능한 것은 그의 성향이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돌이키시며 죄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자연인의 성정은 자기자리를 잃고 잏다.  손, 발, 머리등이 제멋대로인 것이다.

 자연인이 무력한 것은 그의 의지가 전적으로 고집스러운 까닭이다.  인간이 원할 때 구원을 주시지만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나아올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너희가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자는 그에게나아올 것이요 그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13.그리스도와의 지적(知的)인 만남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라는 사실은 사람들을 많이 오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도 그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령에 의해 깊이 각성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대항한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 만이 구원에 필요한 분이심을 알아 그리스도께 가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  그들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꼬 그리하면 그 보좌앞에 나아가리라)(욥23:3)며 부르짓는다. 사실 이같은 사람은 많지 않은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리는 적은 무리이기 때문이다.(요약자: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동기성에 중점을 두신 것이 사실이지만 많이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셨지 결코 많은 것을 싫어 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기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것"이 매우 간단한 일임을 알았다고 하며 그렇게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전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의심치 말고 믿으라고 한다. 한 번도 죄로인해 고민해 보지 않은 이들에게 말이다.  단지 복음(여기서 복음은 율법으로 인한 죄에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복음 자체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을 듣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을 보고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요6:44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어떤 의미 인가

  첫째: 이것은 신체의 물리적 행동이 아니다.-  물론 물리적 행동에도 자신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든 마음이지 성령의 요구는 아닌 것이다.  설교자가 회개를 요구하며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도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은 아니다.

  둘째: '나아온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인데 성령께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깨우쳐 주시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리스도께 나악가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나아가게되며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않는 사람이다.  그는 마음을 다해 사랑의 복종과 신뢰의 확신을 드리는 자이다. 주석가 메튜헨리는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은 자기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은혜가운데서 전 영혼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며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약자;외적인 행동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것이 아닌 이유는 다름아닌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리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나아올 수 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이끌다는 것도 외부적행동이 아니라 성령께서 행동할 수 있도록 주어주시는 능력이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성령의 은밀하고도 효과적인 역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사람은 상대를 안 후에 그를 사랑하거나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표현하든지 나아 온다고 표현하든지간에 그분에 대한 지식이 먼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듣지 못한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아무도 그리스도께 무지(無知)하고서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서부터 출발하여 마음으로 이른다.  우리는 성경속에서만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요약자;물론 신비의 경험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예수님도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셨다.(요약자;이 말씀은 부정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자신은 성경의 증거에 제한된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는 성경만이 예수님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지식만으로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말씀을 통한 살아있는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유대인의 지식은 어떤 주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지식은 되었지만 영혼을 변화시키는 지식은 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3:15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성령의 역사로 영혼에 부어져야 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들을 연구하고 이론적으로는 찬양할 수 있어도ㅗ 그 일들을 체험적으로나 생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부여된 영적이고도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요한일서 5:20에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자를 알게 하신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연적 일해력으로도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알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기에 앞서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엡4:23)한다.  영생은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이다(요17:3)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위에 빛을 비춰주시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시작된다.  목표와 대상없이 행돌할 수 없듯이 알고 믿는(사43:10)것이 그 순서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리니" 다시말하면 이 지식인 성령이 부여하신 영적 지식, 기적적인의 지식이어야 하는 것이다.(요약자: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지 나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을 극단 적으로 이른 말이다.  세상모든 사람들이 노력할 수 있지만 다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노력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는 사실을 독자가 알길...)

 이론적이고 관념적일 뿐인 지식에서 어떻게 영적이고 생동적인 지식을 알게 되는가?  그것은 지식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령은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신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마음을 정결케 하지는  못하고 그의 의지를 새롭게 하지도 못하며 그의 생애를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교육을 사람의 허망함만 부풀릴 뿐이다.  이러한 지적인 지식은 오히려 불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롬1:18)  이들은 이런 것으로 논쟁과 흠잡기를 일삼고 무식한 자들을 경멸 하는데 그들 조차도 그들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종종 본다.(요약자: 이자가 여기서 비난하는 자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범하므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증인과 그외 이단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희미한 거울이요 수건을 쓴 얼굴과 같지만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면 밝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이땅에서 완전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더욱더 힘써 그나라에서 완전해 질 것을 보며 성화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14.그리스도와의 정적(情的)인 만남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요6:37)  중생의 사건에서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을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에게 나아 올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인의 이해력은 하나님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 그런 기절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되게 하실 때 그의 지각을 새롭게 하실 뿐아니라 그의 마음을 급격하게 변화시키신다.  믿음으로 신령한 일을 볼 수 있게 될 때 그 마음은 그 일들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워진다.  이해력이 성령으로 새로워질때 부드러운 갈망으로 그리스도께 이끌리게 된다.  자연인으로 전통과 교육을 배움은 결코 우리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될 때" 참으로 놀라운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은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믿는다' 와 '사랑한다'룰 번갈아 사용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자기를 사랑하는자"(고전2:9)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느니라"(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약1:12,2:5 요일4:8, 요6:43  등에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내속에서 나를 이끄셨음을 알 수 잇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들을 이끌었고"(호11:4)  그의 이끄심은 죄인의 상태를 합리적으로 납득시켜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자비사한 초청과 귀중한 약속을을 신뢰하게 하시며 그를 사모하게 사시며(사63:15, 몬:12참조) 거룩함을 사랑하게 하신다.  자연인은 영적인 것들보다 물질들을 더 사랑하나 겔36:26에서 말씀한 새여을 주시므로 굳어진 마음이 제하여지고 부드러워져 다른 모든 것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나아가기전에 선행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진리 그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대체로 이렇다.

 

15.그리스도와의 의지적(意志的)인 만남

 신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세가지 중요한 기능의 영향아래 있다.  지각(understaing) 성향(affectins) 그리고 의지(will)이다.  이러한 성향들은 심히 악하여지고 부패하여졌다.  이 기능들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쪽으로 되어지며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와 죄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중생시에 이 부패한 성향들은 소생되어지고 정결하여 진다.  물론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천국에 들어가 후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향들 중 하나인 의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요한복음 5:40에서처럼 의지의 보다 즉각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지각이 깨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살아나기전까지는 의작 그리스도를 향해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일 수 없다.

 (의지가깨어나기까지의)그  과정은 이렇다.
  첫째:성령은 죄의 인식을 심어 주심으로 그리스도외에 속죄할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한다.
  둘째:성령은 그리스도를 쪼고자 하는 욕구를 창조하셔서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고 성결         을 사랑하게 하신다.
  셋째:의지를 주시어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
(요약자변:여기서 중생의 원리 중 의지를 성령께서 주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나에게는 의지가 없고 성령이 의지 자체를 주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해서 극단적 칼빈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예정론이 아니라 운명론이 아니다.  그의 글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더핑크가 앞에서도 예기했듯이 성향은 부패해진것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실제로 부패한 성향이나 중생한 성향이나 존재 자체로는 똑같다고 말한다.  다만 외곡되어지고 하나님과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을 강조하는 것을 수동적 인간으로 만들기 쉽다.  사람이 자기의 편리를  위해서 만드는 것을은 보면 모두 사람을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외적인데서 편의를 추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편의주의에 빠지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의 역사라고 할 때, 특별히 성령의 주권적 역사라고 할 때는 사람을향해서 깨어나라고 외치는 선포의 음성이지 결코 잠자라는 자장가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 바른길을 가지 못하고 있으니 바른길은 지금과 전혀다른 곳에 있으며 그것이 성경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언제나 성령이 임하시면 회개하게 되고 성경말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뒤따르게 된다.  부흥의 순간들이 그랬다고 로이드 죤스는 이야기한다.  교리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부흥이 먼저있고 그 부흥의 여파로 교리의 정립이 있었다고 그는 이야기 한다. 물론 여기서 겸손을 위하여  덧붙일 것은 교리를 너무 정교화한 나머지 사변으로 빠지고 지난 일들이 헛수고로 돌가간 듯 보이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령은 우리의 의지가 죄에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게 만드는 반면 선에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게 만드신다.  구원받은 사람이 죄에 머물면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선에 머물면 적극적인 사람이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일에 열심힌 친백성이되게 하신다.  여기서 논쟁상의 극단적모습이 보이기는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상 어쩔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무엇이 완전해서 처음부터 완전한 것을 알겠는가. 다만 이른 극단의 논리를 통해서 자기의 고집과 아집을 꺾고자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직분과 일치한다.  선지자서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제사장으로는 신뢰와 사랑을 받게 하시며 권능자로는 그의 다스림을 받고 복종하게 하시며 그의 명령을 삼가 지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편향적 의지를 돌이키시며 우리를 그에게 순복시키시며 부드러운 마음으로 인도하신다.  사람이 부패한 본성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는데 이때에는 우리에게 철저한 부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기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어떠한 일치점도 발견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거슬리게 된다.  그래서 은혜의 기적이 먼저 뒤따르며 내 속의 죄의 저항을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과 사모함을 새롭게 하는 일들을 포함한다.  그럴 때 우리의 의지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 나는 복종하리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네
간절한 사랑에 이끌려
정복자이신 당신을 소유
하게 됩니다.

  룻기서에서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룻의 의지가 이것을 잘 대변해 준다.  그녀는 자기의 神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기로 결심한다.  이렇듯 중생의 확실한 결과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율법을 존중하며 전심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을 섬기리라고 마음을 다하여 다짐한다.  이것이야 말로 은혜위의 은혜이다.

16.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증명하는일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께로 나온일'이 한 번도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거북스럽고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왔다'라고 속이지만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습관적인 행위만 장려할 뿐 그리스도와의 진실된 만남을 막는 것이라며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증명하는 일을 우리의 잘못된 습관에 비추어 부정적인 방법으로 전개 하고자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나름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교리적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지 않는다.  내용들이 사실이라고 동의하지만 그것에 자신을 내어놓는 일에 있어서는 실패하였다.

 의심이 없다는 것만 가지고 "그리스도께로" 구원을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분 좋을 때 부착하는 귀중품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마치 빵과 같아서 그에게서 배부름과 힘과 은혜를 받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격동을 성령이 우리의 사랑을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깨닫고 슬퍼한 후에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설교자가  성도에게서 단지 죄를 슬퍼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자기설교에 대한 자기도취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도가 전인격을 주님께 드리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죄에 대한 증오로 착각하고 있다.⇒죄와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심리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마음이 금방 어두워 지는데  지옥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두려움이 있다는 것으로 중생의 표지를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잔치에 참여한 것으로 기뻐한다.  중생의 표지는 바로 삶속에서 그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를 향한 사랑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평화를 참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참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이제 무거운 짐이 벗어졌다는 확신이 들 때 평화가 넘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죄로인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신념을 영적인 확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겸손해 졌으니 내가 진실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약 속의 말씀에 자기들의 신앙의 바탕을 두고 있으나 말씀을 문자 이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우리는 의문(문자)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 속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인격과 주되심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분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고 열심히 끝가지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여기서 존번연의 "come and welocome to Jesus christ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다음의 질문에 있다.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같이 죄의 무서운 짐에 눌러 울부짖는가?  살인의 독을 가진 독사에서 피하듯이 죄에서부터 달아나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하기에는 자기 자신의 의가 너무나 부족함을 깨닫고 울부짖는가?  자기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울면서 구하는가?  자기를 정죄하는 세상에서의 모든 죄보다는 그리스도의 단 한 방울의 보혈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보다 큰 가치와 공로를 발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범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가?  셋아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는 세상을 전부라도 버리는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서, 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서는 어떤 위험도 기꺼이 무릅쓰는가?  그리스도의 성도들을 귀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가?  이 모두가 자기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로 나온 사람인 것이다.

출처 : Tong - ssabro님의 Puritan/Baptist통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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