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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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omi 2008. 1. 21. 14:27

초대교회사


사도시대의 마무리


사도시대(70-100)에 관련된 역사는 너무나 역사적 자료가 미미하기 때문에 교회사 중 가장 희미한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95-98) 신약성경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70)에 쓰여졌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적은 정보만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성경 외에 자료도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도시대가 마무리되면서 교회역사에 과도적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의 다음 세대가 시작되고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감독과 영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독립화 되어갔으며 초대 교회적 모습에서 점점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가리켜 후기 사도적 교회시대라 부르고 사도들이 떠난 상황에서 직면되는 여러 문제들을 맞이하게 된다.


사도들의 사역과 죽음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사역과 죽음에 대한 전설들이 있지만 성경적 성격과는 거리가 멀게 보인다. 사도들이 말년에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여러 가지 심각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50년 예루살렘 회의(conference) 때까지 적어도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고 여겨진다(행 8:1; 15:6).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44년 아그립바 왕에 의해 살해당했다(행 12;1-2). 베드로, 요한, 유다, 그리고 바울을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는 50년 이후에 거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초의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를 떠나 여행하며 사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훈에 따라 온 세상으로 나아갔다(마 28:19; 막 16:15); 2) 바울이 58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과 모임을 가졌다고 되어있는데 사도들이 이미 예루살렘을 떠난 후라고 여겨진다(행 21:17-8). 초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를 떠나 사역을 행하므로 영향을 끼쳤다(고전 1:12; 9:5; 벧전 1:1; 5:3; 계 1:9). 로마 카톨릭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 교회 감독이었는지는 문제가 되지만 로마에 들어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가 64년에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순교적 죽음을 예언하신 것을 관련시키기 때문일 것이다(요한 21:18-9). 68년 바울은 로마 밖에서 목베임을 당했다(딤후 4:6-8, 16-8). 요한은 말년에 아마 에베소에서 활동했을 것이고 자연사를 당한 유일한 분일 것이다. 나머지 사도들의 삶, 사역, 그리고 죽음은 알 수 없다.


교회의 발전

교회는 초창기에 상당한 성장을 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복음이 유대 내에 전파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행 2:41; 4:4; 6:7). 이러한 급성장은 이방국가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행 16:5). 바울은 이방인들과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그리고 아가야(Achaia)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 혼자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강력한 교회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베드로는 바울이 방문하지 않았던 지역, 즉 소아시아의 북서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서신을 쓸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일리쿰(Illyricum, 마게도니아 북서부지역)까지 먼곳 까지 복음을 전파했고 스페인까지 갈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롬 15:19, 24). 크레타 섬(Crete, 그리스 동남부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지만 말년에 디도를 그 곳에 보내면서 각 도시에 임명된 장로들에게 지침을 주었다(딛 1:5). 또 디도를 달마티아(Dalmatia, 딤후 4:10)로 보내기도 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로마에서 골로새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서(61-3년경) 복음이 “하늘 아래 온 피조물들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했다(골 1:23). 이와 같은 급성장은 1세기말에도 계속되었던 것이 확실한데 그 이유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에 열정이 이를 잘 반영한다. 사실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95) 아시아에만도 10교회 이상 알려진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먹구름이 서서히 지평선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울이 예언한 것처럼 마지막 성경은 변절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행 20:29; 딤후 4:1-3; 딤후 3:1-9; 4:3-4).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억압을 가하게 되었고(요3서 9-10), 1세기말에 이르러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들 중 두 교회만 영적으로 건강했을 뿐이다(계 2:3).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거짓 교사들과 부도덕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계 2:14-5; 20-24). 아시아 교회들의 조건들은 1세기말 모든 교회들의 전형적인 문제들을 반영했다. 요한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시작된 이단과 전투를 의미하는 듯하다. “적그리스도들”은 이미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전 등장했다(요1서 2:18; 4:3; 요2서 7). 그리스도의 주요한 적들은 수년 안에 도래했다.


유대주의와 로마정부와의 관계

기독교인들과 불신 유대인들간의 관계가 처음에는 친숙했지만(행 2:47), 불신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핍박을 가했다. 이러한 핍박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교회를 향한 편협과 적대감이 유대인들이 갖게 되었다.

로마정부와 교회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교회는 유대주의 분파로 처음에는 로마인들에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해 유대인들의 공격이 가해지고 독특한 교리들과 예전들이 알려지면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독교인들은 64년 로마 시를 불태울 때까지 로마인들에게 핍박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가장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네로의 핍박은 간헐적이고 지역적이었다. 도미티안(Domitian, 81-96) 때에 이르러 로마정부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전반적 핍박이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핍박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해와 와전된 소문으로 인해 편협성이 일어났고 로마정부의 적대감은 본질상 정치적이었다. 신성시화는 로마황제에게 향을 피우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거부하자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우상숭배이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충성과 애국심이 다른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그들을 반역죄로 다루었고 사형으로 다스렸다. 요한의 계시록은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 핍박에 당할 고통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완성

사도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할 때, 기독교인들 가운데 나타난 이적능력들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고전 13:8-10). 하지만 이와 동일한 것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이었다. 신양성경은 8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 요한의 저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50-70년에 쓰여졌다고 확실시된다. 요한의 책들은 1세기 말에 쓰여졌다(95-98). 신약성경은 기독교인들 무오류하게, 충족하게, 그리고 불멸의 안내서이다.(딤후 3:16-17; 벧전 1:23-5).

전 니케아 시대


배교의 어두운 과정이 접어든 후 로마 카톨릭교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될 것이다. 배교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도들의 시기에도 교회는 배교의 모습을 직면했다(행 20:29-30; 요3서 9-10). 사도들이 떠난 후 배교는 수없이 일어났다. 후기 사도적 교회 역사초기시대는 핍박으로 시작했다. 1세기말에 이르러 로마정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 정책을 정착시켰다. 핍박은 2-3세기에 걸쳐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발표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으로 끝났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놀라운 발전도 있었다. 후기 사도적 교회역사 초기시대를 가리켜 “전 니케아시대”(Ante-Nicene Age)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최초의 교회 종교회의였던 니케아 종교회의 전 시대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회의는 소아시아 니케아에 325년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되었다.


군주적 감독직 발생


처음으로 배교가 교회에 일어났던 형태는 조직화의 타락에서였다. 조직화 타락에서 일어난 처음 단계는 여러 세기동안 진보하면서 무오류 교황이라는 직책으로 변화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군주적 감독직’(monarchical episcopate)-군주적이란 의미는 ‘한 지배’(one-ruling)를 의미하고 감독직이란 ‘감독의 직책’-이라 부른다. 이런 군주적 감독직이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가능한 설명은 후기 사도적 시대에 시작했을 것으로 여긴다(행 20:29-30; 요3서 9-10). 교회 조직에 일어난 이런 변화는 2세기 첫 분기에 어디에선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 군주적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Ignatius, 10-117)는 소아시아 7교회들의 군주적 감독들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적 시대에 ‘장로들’(presbyters)과 ‘감독들’(bushops)은 서로 각 교회를 감독하는 남성들에 사용되었던 명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장로가 다른 장로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감독’이란 직책이 그에게 주어졌다. 2세기 초 이러한 변화가 모든 교회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고 군주적 감독의 권위는 지역적이었지만 160년에 이르러 군주적 감독직은 거의 우주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의 개념은 감독들이 사도들의 역할, 권위, 그리고 책임들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감독직 개념과 연관을 가지면서 위대한 능력과 신적 권능이 주어졌다. 어떤 역사가들은 강력한 감독직 발전은 이단이 발생하므로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요구된 권위를 집중하는데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지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신약성경적 표현을 볼 수 있다: “poimen pastor shepherd”(엡 4:11); “presbuteros presbyter, 장로와 나이 든 자”(행 11:30); “maturity and experience”(god 14:23; 20:17); “episkopos bishop overseer, supervisor”(빌 1:1; 행 20:28).

사도적 교회에 발전된 것과 비교하여 감독직책에 관련하여 성경은 세 가지로 결론 내린다. 먼저, “장로”(elder), “감독”(bishop), 그리고 “목회자”라는 세 용어는 모두 같은 직책을 교호적으로 사용했다(행 20:17l 28; 딛 1:5, 7; 벧전 4:11). 장로들이 목회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여러 공직자들이 교사들과 복음자들이 언급될 때 장로가 어떻게 생략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같은 직책에 다른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약성경 교회는 장로가 있는 것으로 언급할 때마다 장로는 “한 장로”나 “한 목회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은 지역교회가 항상 장로들의 다수들이 있다고 한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지역교회의 최고의 감독자로 격상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만일 지역교회에서 조차 그런 일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주적이나 전체적인 지도력을 한 사람이 갖을 수 있을까? 세 번째로 한 장로의 권위가 지역교회를 넘어 영향을 끼친다는 지침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떼들을 이끄는 사람들로서 성령이 그들에게 감독자로 세우셨던 것이다(행 20:28).


교회 핍박

2세기초에 이르러 교회는 시리아, 마게도니아,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로마 지역에 잘 설립되었지만 소아시아에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정부적 차원의 반대를 직면했다. 교회는 이미 네로(54-68)와 도미티안(81-96) 시대에 핍박을 겪었다. 그러한 핍박들은 고대사회에 교회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인들에게 악감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거나 경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악감은 무신론자라는 고소들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인 신들을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방종하다(licentiousness)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야에 몰래 예식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식인종(cannibalism)이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성찬에 대해 오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배타적인 사상에 대해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핍박이 2세기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소와 핍박에 대해 ‘변증자들’(apologists)-apologia라는 그리스어는 “변증”을 의미하는데-이 일어나 로마 지도자들 앞에 복음과 교회를 철학적으로 변호하려고 노력했다.


영지적 이단들


영지주의

교회 내에 오래 지속된 교리논쟁들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다. 신약성경의 뒷부분의 책들은 1세기말 전에 벌써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거짓된 개념들이 일기 시작했다고 가르친다. 요한서신들은 특별히 이런 맥락에서 오해된 개념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요1서 1:1-3; 2:18, 22; 4:2-3).

교회가 직면한 두 번째 교리적 위기는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영지주의의 기원과 성격은 신비에 싸여있다. 아마도 종교철학의 분야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지주의는 교회가 세상에 있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영지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용이치 않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유대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종합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 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진화되었다. 그래서 2세기 교회가 직면한 영지주의는 3세기의 것과는 자뭇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동방에서 일어났고 2-3세기 교회에 큰 도전을 주었던 것은 틀림없다. 영지주의는 135-160년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쳤다.

‘영지주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영지’(gnosis, 지식)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지만 영지주의가 변호하는 지식은 연구나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의미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pleroma’라 부르는 빛의 영적 세계에서 최고의 머리이다. 이 세상의 어떤 파편들이나 빛의 씨앗들이 어둠과 악의 보이는 세계로 떨어져서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갇힌 빛의 ‘광채’(sparks)는 사람 안에 거하고 빛의 영역으로 재통합되거나 회복되어야만 한다. 회복의 수단은 그리스도가 계시했던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지식’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단지 보이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거나 영적 참된 실체들과 교재를 하므로 가능하다.

영지주의자들은 보이는 육체적 세계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믿었다. 오직 ‘영’(spirit)만이 선하다. 물론 어떻게 세상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영지주의자들은 ‘영’이란 것을 사용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이시다면 전적으로 선하신데 어떻게 하여 그가 육체적 세상과 같은 악한 것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까(How could He have created . . .)?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높으신 하나님은 육체적 세상을 만드신 유일하신 분이셨다는 것을 단순히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육체적 세상간에 공간을 메우는데 ‘이온들’(aeons)이나 천사들의 많은 계급에 대한 견해를 도입한다. 이온들중 가장 높은 것은 물질(matter)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지만 사람과 육체적 세상보다 낮은 계급에 있는 물질은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하나님과 육체적 세상간에는 수많은 영적인 것(spirituality)이나 유형적인 것(corporality)의 이온들의 많은 계급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온들 중 하나가 ‘조물주’(demiurge), 즉 불완전하고 열등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영지주의자들을 역시 ‘조물주’를 유대인의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육체적 세상에 대한 영지주의적 견해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육체적인 것은 모두 악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올 수 없다고 결론 맺는다. 이러한 문제는 ‘가현설’(Docetism, 그리스어 ‘dokeo’는 ‘seem’의 뜻)으로 재분류되어갔는데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실제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허깨비(phantom)이거나 유령과 같은 것(ghost-like apparition)으로 영지주의는 말한다(눅 24:36-43). 이러한 설명은 요한의 저서들(요1서 1:1-3; 4:2-3; 2서 7)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설명을 강조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세례를 받을 때 인간 예수님으로 오셨고 인간 가운데 거하셨다고 믿었다(요1서 2:18, 22).

영지주의자들의 윤리는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아갔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학대를 받아야만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고행(ascetism)으로 육체를 학대한다. 다시 말하면, 육체에 필요한 육체적 안위조차도 자기 부정한다(딤전 4:1-5; 골 2:20-23).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와 영이 완전히 구분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각 실체들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으로 인해 육체의 방종(indulgence)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날카롭게 공격을 받았다(딤후 3:1-7; 벧후 2:1-2, 12-19; 요1서 3:4-10; 유 4, 8, 16; 계 2:14-15, 20-24).


말키오니즘

말키온(Marcion)은 소아시아 출신으로 139년 로마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했고 마침내 144년 출교를 당했다. 말키온의 영지주의는 전적으로 반 유대적이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사악하고 잔혹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계시했다. 바울은 복음을 신실하게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였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유대주의 사상에 젖혀있었다. 구약성경과 그 하나님은 전적으로 부인되었다. 고행적 삶은 따르는 자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말키온은 분파를 조성하고 성문서들의 정경화를 시도했다. 그가 말하는 정경은 바울의 10서신들과 누가복음이며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부친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모든 구절들을 삭제했다. 말키온의 추종자들은 5세기까지 살아남았다.


몬타니즘

몬타니즘(Montanism)은 영지주의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말키온 시대 이후에 나타났으며 소아시아 출신 몬타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교회 내에서 사라졌고 세속화가 점점 만연해갔다. 결과적으로 몬타누스는 156년에 일어나 자신이 성령의 도구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내신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주장했다(요 15:26). 과도한 예언을 주장하는 몬타누스는 세상의 임박한 종말, 성령의 시대의 종말을 예언하면서 하늘의 예루살렘이 프리기아(Phrygia)에 세워질 것이기 때문에 고행만이 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소아시아 감독들은 종교회의 개최하여 몬타니즘을 정죄했지만 교회 내에 만연했던 세속화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고 그 운동은 몬타누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년동안 계속되었다.


카톨릭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기본적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므로 구원받은 온 세상 사람들의 총체(aggregate)”를 의미한다(마 16:18; 행 2:47; 엡 1:22). 다른 하나는 “예배와 영적 사역의 목적을 위해 함께 지리적인 영역에 특별한 모임을 갖는 사람들”을 말한다(롬 16:16; 고전 1:2; 계 1:4, 11). 그래서 교회는 ‘우주적’이고 ‘지역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교회가 ‘카톨릭’이 될 수 있을까? 교회의 ‘단일성’(oneness)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몸이라는 요소는 공통적인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의 단일성이라할 때 본질상 ‘교리적(doctrinal)’이다. 우주적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각 성도는 우주적 교회의 한 일원이며 다른 일원들과 관계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우주적 교회의 구성인은 기독교인 각자들이지 지역 회중이 아니다(고전 12:27).

사람들은 2세기의 사람들처럼 이러한 개념들을 망각하기 쉽다. 먼저 사람들은 우주적 교회의 개념을 개인적 기독교인들보다 다양한 지역적 회중들로 구성하는 것처럼 가진다. 형제의식은 지역교회들(church-hood)의 연합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역 회중들에 대한 개념을 집합적인 활동(collective work)이라 여기기 쉽다. 이런 개념으로 나아가면, 교회의 일원들과 지역 회중들은 스스로 공통적 신앙과 관계를 가졌다기 보다 서로 조직적 연합체로 인식하게 된다. 기원적 단일성과 연합적 활동은 회중 내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서로의 협력을 전재한다. 2세기 군주적 감독들은 회중 내적 지도자들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회는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감독들의 권위를 전제하는 기독교인들의 유기적 단일체로 인해 ‘카톨릭’이 되었다. 영지주의적 그리고 몬타니스트적 위가로 인해 교회는 ‘카톨릭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단자들과 분파자들(schismatics)에 대해 교회는 참 교회와 신앙을 정의하고 스스로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역 교회들은 회중 내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것이다.


‘카톨릭’교회의 발전과 특성

1. ‘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계승’--참 교회가 사회적으로 그 정체성이 명시될 수도 있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지속적인 계열들이 역사 속에 더듬을 수도 있다. 참 교회가 항상 일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도 된다. 단순히 ‘종파’(sect)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성경을 축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가르치며(요 17:17) 교회에서 일어났다(눅 8:11). 교회가 진리라는 카톨릭 교회 개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면 진리는 교회가 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

2. 교회만이 성경의 해석하고, 성경의 보고며, 소유자이다--이러한 개념은 위의 개념에서 계속해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교회가 항상 참 교회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질 것이다. 그리하여 각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아야 하고 단순히 교회가 말하는 성경 말씀만을 순응해야만 한다.

3. 감독 권위의 확장-군주적 감독들, 즉 특별히 사도시대동안 설립된 사도적 교회들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들로 여겼다. 영지주의자들이 전해 받은 비밀적 구전들을 사도들로부터 받았다는 영지주의적 주장에 대해 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Irenaeus, c. 142-200)는 사도적 가르침은 사도적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들에 온전히 보존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감독들에게 맡겨졌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구전으로 감독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다. 또 사도들의 교리들과 권위들이 감독들에게 영속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감독들이 정의내리는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자들이고 분파자들이었다. 믿음을 정의내리는 감독들의 권위에 일치하지 않으면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로마교회의 발생

1. ‘사도적’교회--바울이 두 번이나 나타났기 때문에 로마가 다른 감독지역보다 우위에 있다. 베드로가 말년에 로마교회 감독으로 사역했다고 믿는다.

2. 제국의 수도--로마교회의 우위성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3. 동방교회들의 축소--에베소,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과 같은 동방교회들이 소아시아 유대인-로마 전쟁과 몬타니스트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동방교회들의 공백을 로마 교회가 메웠다. 200년에 이르러 로마는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되었다. 로마의 성장하는 권력은 부활절 논쟁에 잘 반영되었다. 그 논쟁은 너무나 격렬했기 때문에 종교회의들(synods)은 그 문제에 대해 로마와 팔레스타인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종교회의들은 로마예전을 따르기로 했고 소아시아 교회들이 따르기를 거부하자 로마의 감독 빅토르(Vinctor, 189-198)는 그들을 출교내렸다.


단일신론


기독교인들의 논쟁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그리고 사역과 관련된 논쟁만큼 오래 동안, 잔혹하게,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된 것은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기독론(Christology)으로 알려진 신학으로 발전해 갔다.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것으로 삼위일체론 안에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말한다. 다양한 기독론적 견해는 수세기 동안 채택되고 변호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그리고 사역에 대한 개념이다. 그래서 이런 주제들에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하고 그 확신 속에 거해야만 한다.


세 가지 기독론

1. 로고스 기독론--‘로고스’(logos)라는 헬라어는 말씀으로 번역되는데 하나님을 육체 모양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요한이 사용한 단어이다(요 1:1, 14; 요1서 1; 계 19:13). ‘로고스’ 기독론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이시라는 주장이다. 성부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에 그들은 성부에게 종속해 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지셨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육신하기 전, 동안, 그리고 후에 신성으로 존재하셨다. 터툴리안(Tertullian, c. 150-225)은 이 견해의 참피온이기 전에 190-195에 개종한 카탈지(Cathargian) 출신 법률가였다. 약 200년에 카톨릭 교회를 떠나 몬타니즘으로 수용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교회 학자였기에 ‘라틴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2.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 개념을 공격한 영지주의는 이 주제에 연구적 관심을 갖도록 자극시켰다. 공통적 신자들은 삼위일체와 다신론의 개념간의 구분을 쉽게 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대신 단일신론이나 유일신론(unitarianism)을 통해 이해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주장한다. 단인신론자들은 또 두 분파가 있는데 역동적 단일신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세례 시 그리스도나 성령, 아니면 다른 신적 권능이 그에게 임했다. 어떤 역동적 단일신론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부활시 신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3. 양식론적 단인신론-두 번째 단일신론자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가지 형태로 자신을 명시하셨다(manifestinated)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일시적 명시일 뿐이다. 3세기 초 로마에서 이런 사상을 가르쳤던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이며 같은 분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3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명시한 이름들에 불과하다. 성부는 구약성경의 율법수여자이고, 성자는 성육신 하신 자이고, 그리고 성령은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이다. 사벨리우스는 로마에서 출교를 받았지만 북 아프리카와 동방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많은 논쟁이 있은 후 서방교회는 로고스 기독론을 정통으로 인정했지만 동방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상이한 현상을 나타내었다. 기독론 논쟁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도록 황제 콘스탄틴을 부추겼다.


성직자들의 성장


종교적 헌신자들은 전문적이고 평범한 일원들간에 구분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기독계에서 성직자/평신도의 구별을 의미를 말한다. ‘성직자’(clergy)는 그리스어 kleros (“lot”)라는 말로서 한 직분을 갖기 위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제비를 뽑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지만 공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하다가 공직을 소유하는 자(office-holder)를 의미하게 되었다. 평신도(laity)는 그리스어 laos라는 말로서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성직자는 특별히 엘리트 계급을 일컫는 말로서 평신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 선출되고, 훈련받고, 후원받는 사람들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 이유는 두 부류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먼저 유대적이고 이교적 예전들의 경쟁 때문이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되면서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사제적 지위(castes)를 가졌다. 자신들의 위치를 격상시키기 위해 점점 카톨릭 교회의 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두 번째로는 위임적 종교(proxy religion)에 대한 욕망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부족함을 느끼는 자들이 인간적 도움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개인적 종교적 책임을 벗어나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평신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특별한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랬다. 세 번째로 전문적인 ‘교회 매니저’(church manager)와 어떤 권위적 표상을 원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의무들을 대신 처리하는 자들이 필요했다. 평신도를 위해 규율들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신앙을 정의하고 이단자들을 규명하는 사람이 요구되었다. 무엇을 행해야하는지 알리는 사람, 신앙을 변호하는 지도자가 요구되었다. 또 좋은 기강을 유지하고 조직체를 매니저하는 사람이 요구되었다. 네 번째로 인간적 자부심과 탐욕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취욕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조직체들은 계급제도를 갖고 있어 성취자들에게 주어진 특권, 영광, 그리고 인정한다. 교회 내부에서도 의롭거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인준을 받고자하는 세속적 욕망이 생겨난 것이다. 성취자들 보다 우위에 점유하려는 욕망은 평신도가 바라는 ‘위임적 종교’와 결합되어 성직자 평신도 구분을 만들었다. 더욱이 머지않아 성직은 탐욕적이고 특권적이 되고 말았다.


성직자 평신도의 개념

공직적 수임(official ordination)-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그 어떠한 공직적, 공적 진행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상기된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들(딤전 3; 딛 1)은 일원들의 감독자들인 복음전파자들에 의해 임명받았다(행 14:23; 20:28; 딛 1:5). 아마 그 형식은 아마도 공직을 임명하는데 가시적인 인준이었던 안수였을 것이다(딤전 5:22). 하지만 성직들은 보다 특권적이고 특수했기 때문에 공직적 임명들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복음전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감독들은 다른 회중 일원들의 감독들에 의해 지명되고 인준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회중들에 의해 재가되거나 선출되었다. 회중적 선출들이 형식적이 되어갔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감독들에 의해 수임받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의 두 가지 계층이 생겨났다. 주류 계층은 감독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deacons)이다. 감독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하다가 점점 한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자신들만이 이적적 은사들을 소유한 자들이고 예배를 주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했다. 이 지위에 해당하는 다른 계급은 장로들(presbyterians)이었다. 처음에는 장로들과 동일시되다가 종속적이고 조언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장로는 가끔 많은 교회들이 속해있는 한 도시의 한 교회를 돌보았지만 그 도시의 감독에게 늘 지도를 받았다. 세 번째 계급은 집사들로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조력했다. 공적 위치를 넘어서서 활동하기도 했다.

두 번째 계층은 비주류층으로 부집사(sub-deacons)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집사들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일들을 조력한다. 낭독자(readers)들은 성경을 공적으로 낭독하는 자들로서 교회 저서들에 대한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시종직(acolytes)은 공적으로 감독들을 돕는데 있다. 귀신 쫓는자들(exorcists)은 악령을 내쫓는 사역할 한다. 선창가들(precentors)은 예배시 음악적 부분을 책임진다. 관리인들(janitors)은 교회 건물들과 뜰들을 책임진다. 교리문답자들(catechists)과 해석자들(interpreters)은 교훈과 해석을 감당한다. 여집사들(deaconesses)은 여인들 가운데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돌본다.


교리의 변화


교회를 위한 조직화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후기 사도적 교회로 나아가는 가운데 교리와 예전에 있어 다른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이 신약성경의 권위적 형태를 인정하거나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문제에서도 그러한 거부감이 일어났다. 배교는 교회의 한 쪽면만이 아니었다. 교회의 조직적 구조의 변화들은 변절을 조장시켰다. 권위의 기반이 신약성경과 지역교회들의 감독들로부터 전통, 군주적 감독들, 성직자들, 그리고 종교회의들로 옮겨지면서 신약성경 자체는 다가오는 변절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직적 변화는 교리, 예배, 그리고 다른 예전의 변화를 위한 길을 터놓았다. 이러한 변화들은 신약성경과는 자뭇 다른 것들이었다.


예배의 변화

1. 예배일-사도시대에는 성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던 날은 주일의 첫날, 즉 주일이었다(행 20:7; 고전 16:1-2; 계 1:10).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는 때에도 지속되었다. 마침내 수요일 금요일이 금식을 위한 날로 구별되었다. 부활절기는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년중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2. 성찬(Lord's Supper)이라는 말은 성체(eucharist)로도 알려지는데 헬라어 eucharisteo는 ‘감사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기 사도적 교회에 예배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신비적 종교들,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의 예전에 영향을 받은 후 점차적으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한다(real presence of Christ)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빵과 잔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피니라”(마 26:26-29).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요소들-빵과 포도들-안에 임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사상이 완전히 여물어지기에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또 성례식인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상징으로 은혜를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상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죄용서와 같은 특별한 은혜가 전달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성찬 참여에 거부당하는 것은 성직자들의 무서운 무기로 등장했다. 또 희생이 잇는데 이것은 오랜 동안 발전되면서 성찬을 준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갱생을 의미하게 되었고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직자들의 특권과 능력을 증강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일이 중요하고 특별했기 때문에 ‘사제들’과 같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요구되었다.

3. 성자숭배(veneration of saints)-‘성자’라는 말은 ‘거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을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자들을 말한다(고전 1:2). 하지만 그 용어가 성도들의 삶을 위해 고결함을 간직했던 몇 명의 경거난 엘리트들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했다. 초기 박해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다. 성자들과 순교자들은 처음에 존경과 축하의 대상이 되었지만 갈수록 기도와 숭배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들의 유골까지도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성자숭배의 근거가 된 것이다.


세례와 죄용서

1. 세례의 문제는 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Formula-성 삼위일체의 이름들이 세례 시에 선포되어야 하느냐(마 28:19)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행 2:38)만 언급해야하느냐는 문제였다. 후기 사도시대 예전 시에 세 이름을 부르기로 되었다. 세례 문답자(catechumens)는 세례를 준비하는 자들로서 교훈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후보자들이 교훈을 잘 받을 때까지 세례 의식은 연기되었고 적당치 않는 일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다. 교훈의 시기는 대개 2-3년이 되었다. Subjects에서 유아세례는 185년 이레니우스가 희미하게 언급하기 전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유아세례는 성인들처럼 유아들이 세례를 통해 여러 유익들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주례자들(administrants)에 대한 것은 3세기 중엽 이단적 세례의 유용성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을 때 불거진 문제였다. 여기에서 세례를 주례하는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진 관례로 정착되었다. 비일원들은 세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죄용서(forgiveness of sins)는 먼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들 수 있는데 오래되고 일반적 논의였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의 수와 종류는 유동적이지만 믿음의 포기는 가장 불변의 죄가 되었다. 사면(absolution)은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록 예전들은 다르지만 참회(penance, ‘바꾼다’는 의미)와 사면(용서)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은 궁극적으로 성직자들에게 주어졌고 이러한 권한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교회와 국가


교회가 정치적 세력들을 경험하면서 발생한 갈등들을 겪게 된 것은 313년에 이르러 교회는 여러 면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부터 방황했다. 교회가 핍박의 증오대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의 기본 원리들은 이제 공식적 관용이 허용되면서 지켜야하는 규율이 되었다. 2-3세기 교회의 이야기는 최종적 승리와 종교적이고 정치적 세력에 대한 ‘마지막 갈등’(final struggles)의 이야기이다. 터툴리안의 유명한 문구가 기억난다: “기독교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the blood of Christian is the seed of the church).” 비록 이 문구가 정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의미로서 기독교인들의 땀, 눈물, 그리고 피에 의한 것이다(눅 8:11). 교회는 잔인한 억압을 직면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복음의 성격과 복음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성격은 불신자들의 적대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딤후 3:12).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평화를 즐기거나 추구하면 언뜻 보기에는 교회의 타협이라고 보여진다. 신약성경은 핍박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직면하는 법을 말해준다(마 5:10, 12). 문제는 교회가 핍박을 원하는 것이 아니가 그것이 요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장 적대적 환경 가운데서라도 번영한다는 것이 신적 본질의 분명한 증거이다. 더욱이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핍박만큼 불신앙을 제거하고, 신실한 자들을 고무시키고, 기독교인들을 연단시키는 것이 없다(야 1:2-4; 벧전 1:6-7; 4:12-13). 신약성경은 결코 핍박이 교회의 안녕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cf. 행 8:1-4; 계 2:8-10).

네로 핍박이 있기 전에 제국 내에 있는 본토인들에 대한 로마정책은 관습적 종교를 거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전향시키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제국 내에 새로운 종교들을 들여오는 것을 간과했다. 이러한 규율에 위배되지 않는 종교들을 ‘종교 허용’(religio licita)이라 불렀다. 유대주의는 여기에 속했다. 로마정부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구별을 교회가 존재했던 초기에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법적 보호를 즐기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만 아니라 교회를 파악하고 난 후 기독교인들을 신흥종교며 이색종교(different religion)를 추종하는 자들로 구분했다.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64년 로마 시에 일어난 방화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그 도시에 상당한 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게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웃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2) 옛 신들과 전통적 이교들을 부인했다. 로마제국인들이 다신 종교를 따르고 있지만 이교신들의 존재를 인정했고 다른 신앙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적 문제나 관습으로 여겼다. 기독교인들은 전혀 달랐다. 유일 종교였고, 유일한 참 종교였다. 흥미 있는 것은 이교신들을 부인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atheists)로 불렀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인들은 은둔적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삶의 모든 면에 잘 반영되었다: ①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나 국가 종교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반역자들로 보였다; ② 기독교인들은 공직을 가지며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다; ③ 기독교인들은 로마군들에 가입하지 않았다; ④ 기독교인들은 로마사회의 주변에 살면서 로마인들이 즐기는 유희들을 거부했다. 3)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로마정부는 핍박했다. 교회가 조직화된 후부터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공권력을 직면했다. 교회는 네로부터 콘스탄틴에 이르는 시기동안(64-313) 간혈적인 핍박으로 환난을 당했다. 잔인한 핍박들은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던 황제들도 있었다. 가장 잔인한 핍박을 일삼았던 황제들 중 한 사람은 데시우스(Desius, 249-51)였다. 248년 로마제국의 설립 1,000주년은 쇠퇴를 직면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옛 신들을 거부하는데서 비롯되었다는데서 원인을 찾았다. 그래서 데시우스는 교회에 대해 잔인한 핍박을 거행했다. 아마도 가장 처절한 핍박은 디오클레티안 시대(284-305)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건물들과 성경이 불에 탔고 교회 지도자들이 살해를 당했을 뿐 아니라 평범한 기독교인들도 사냥, 고문, 또는 죽임을 당했다. 4) 마침내 복음이 승리했다. 로마의 핍박이 교회를 없애지 못했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다. 디오클레티안의 폐위되고 죽은 후 신흥 로마 공직자, 콘스탄틴은 제국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포용하기로 했다.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전설에 의하면 한 꿈을 꾸었다: “이 상징을 통해 너는 정복할 것이다.” 이 상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의 첫 두 글자를 의미했다. 313년 콘스탄틴은 유명한 ‘밀라노 칙렬’(Edict of Milan)을 내리고 교회에 법적 자유를 베풀었다. 복음은 잔혹한 적들 가운데서 살아남아 승리를 신자들에게 안겨주었다.



니케아 시대


콘스탄틴이 초기 4세기 로마제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므로 교회는 제국적 편애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난폭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기본 교리들을 고수하고 승리했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교회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므로 기나긴 슬픈 좌절을 맞이해야만 했다. 교회와 국가의 종교적 자유와 분리에 대한 원리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다(cf. 마 22:21; 행 18:12-17). 정부는 종교적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국가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년동안 이교들은 교회와 공존하며 평화를 누리기가 불가능했기에 정부적 핍박을 가하여 교회를 근절하려고 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안 시대동안 마지막으로 불었던 핍박이 지나간 후에도 교회를 짓누를 수 없었다. 콘스탄틴은 교회를 법으로 규정하고 로마제국 내에 정치적 연합을 도모하는데 도구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은 법적으로 하나였고 종교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셈이다. 교회는 폐배한 이교들을 대신하여 국가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콘스탄틴의 계획이었다기보다 발전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밀라노 칙령’(313)은 기독교인들에게만 법적 관용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제국 내 다른 종교들에게도 동일한 권한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교회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치리 초기에 소수에 불과했지만 제국의 보호 속에 상당한 힘과 성장을 가져왔다. 밀라노 칙령이 있은지 얼마 후 콘스탄틴은 성직자들에게 공적 의미를 면제했으며 교회가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이교적 희생들을 금지했고 주일에 도시에서 일하는 것도 금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콘스탄틴은 교회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고 여겨지며 교회는 여기에 부합하여 이익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교회와 국가는 점점 의존하는 관계로 발전되어 갔다.


니케아 종교회의


콘스탄틴은 교회를 관리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교리적 논쟁들로 싸우게 있기 때문에 제국 내에 연합을 도모하려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가 직면한 문제들 중 하나는 ‘도나티스트’(Donatist) 논쟁이었다.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에 의해 수임 받은 것이 유용하느냐 라는 문제로 새로 임명된 감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므로 북부 아프리카 교회는 분열을 낳았다. 도나투스(Donatus)는 그를 대신하여 선택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이 북부 아프리카 성직자들에게 부여된 제국적 은사들을 공유하기를 거절하자 황제에게 청원했다. 콘스탄틴은 고올(Gaul)의 아를(Arles)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정당치 못한 성직자들에 의해 수임된 직분이라도 법적으로 인준되며, 이단적 세례라고 보기 어렵고, 부활절은 로마력에 따라야한다고 선언했다. 도나티스트들은 황제에게 다시 청원했으나 또 다시 콘스탄틴은 그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교회적 사건들에 규례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선례를 낳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논쟁은 320년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의 교리와 연관되어 일어났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격한 논쟁, 즉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피조물들 중 처음 난자이고 세상을 형성한 대리자이지만 그에게는 시작이 있었고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이 일치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도전했고 논쟁은 너무 날카로워서 콘스탄틴이 균형을 잃을 정도였다.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들 중 6명만이 서방교회 출신이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대부분은 아리우스 입장을 강력히 거절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입장을 반대했던 사람들 뒤에서 정치적 편법을 사용했다. 종교회의는 반 아리우스에 대한 신조를 채택했고 아리우스는 추방당했다. 또 종교회의는 부활절의 일자, 원리, 그리고 회복에 관한 규율들을 선포했다.

신약성경은 기독교인을 위해 충족한 신조였다(딤후 3:16-17).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도 믿음을 정의하는데 교회의 대표자들로 활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신약성경이 콘스탄틴 시대에 시작되었던 교회의 범종교회의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 합법성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 공회’(행 15장)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1) 예루살렘 공회의는 세속 지도자의 권위에 의해 개최되지 않았다. 2) 이것은 ‘범종교회의’가 아니었다. 참석한 사람들도 모든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예루살렘과 안디옥교회와 관련된 사람들만이 참석했다. 3) 문제를 직면한 교회의 일원들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내걸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해졌다(24절). 4)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회의에서 선포된 내용들은 성령에 의해 영감받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줄 때에만 권위있을 뿐이다(28절). 범회의(12-29절)는 사도적 회의에 이른 결정을 설명하고 나타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갈 2:1-10).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아니면 현대교회적 종교회의들이 내린 결정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전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리안주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또 다른 개념들은 계속하여 전 니케아와 니케아 시대에 교회의 신학적 전망을 주도했다. 다른 논쟁들이 그 이후에 정면에 나섰지만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부와의 관계는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관은 핵심이며 신앙에 있어 가장 독특한 표상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 가장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리스도 신성이었다. 그리스도 신성에 대한 진리는 영지주의적이고 단일신론적 이단들과 정면으로 싸워야만 했다. 서방교회는 ‘로고스 기독론’을 일찍이 취하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임을 역설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부와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교리였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일관성 있는 결론을 가지지 못했다. 다양한 기독론적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리우스 교리

아리우스(c. 250-336)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들 중 하나의 장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교리적 논쟁을 벌였는데 앞으로 2-300년 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이 되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최초이며 최고이라고 가르쳤다. 신적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처럼 무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고결성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두 번째 하나님(secondary God)으로 채택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하면서도 두 번째이시고 조금 열등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도 아니시고 전적으로 인간도 아니시지만 하나님과 인간간의 제 3의 인물이다. 성육신 때 그리스도는 인간 육체가 되어 인간적 영과 이성을 취했다. 알렉산더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성부와 본질상 하나이시고, 전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논쟁은 너무 격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안 종교회의는 아리우스를 정죄 했기에 그는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 도피처를 찾았다.

콘스탄틴노플에 제국도시를 건설한 콘스탄틴은 제국의 연합이 이러한 논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권면으로 평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325년 니케아에 최초의 범종교회의를 개최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질상 하나라는 것을 신조로 채택했다.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고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아리안 사상은 거절되었다. 콘스탄틴은 이 신조를 수용하지 않는 자들, 즉 아리우스를 비롯한 사람들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하지만 니케아 종교회의는 아리안주의 종말을 의미하지 못했다. 콘스탄틴은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타협적인 신조를 후원하면서 아리우스를 복귀시키고 도리어 아리안주의 반대 지도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추방시켰다.

콘스틴탄의 아들들이 제국을 통치하면서 제국은 나뉘게 되었고 신학적 논쟁에 더욱 얽히게 되었다. 서방의 황제는 ‘카톨릭인들’과 친숙했고 동방의 황제는 아리안들과 친숙했다. 그리하여 세속적 권력 편에서 신학적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아리안주의든, ‘니케아 신앙’이든 특정한 시기에 영향력을 끼치느냐라는 것은 누가 황제의 총애를 받느냐에 달려있었다. ‘니케아 신앙’은 마침내 니케아 신앙 옹호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황제에 등극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381년 데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틴노플 종교회의, 즉 2차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였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모두 한 신적 본질이라는 것을 재 확언했다.

아리안주의가 독일부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있었을 것이다. 5세기말 카톨릭 감독들은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Clovis)를 설득시켜 자신들의 보호자, 참피온으로 삼았다. 잔인한 술책을 이용하여 클로비스는 독일부족을 정복했다. 클로비스와 콘스탄틴노플의 비잔틴 황제인 저스티니안(Justinian)의 정복간에 독일인들은 자신의 아리안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아리안주의는 절멸하게 되었는데 성경적 진리 능력으로가 아니라 세상적 권력으로 이루어졌다.


교황제와 수도원 제도


교황권(papacy) 성장

로마제국의 ‘공적’ 종말은 독일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476년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의 폐위로 여긴다. 하지만 제국의 쇠퇴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의 붕괴는 ‘어두운 시대’(dark ages)라 알려진 불경기와 혼란의 기나 긴 세월이 서방세계에 이미 불을 당겼던 것이지만 로마교회는 제국의 운명과 함께 하지 않았다. 제국 붕괴가 있기 전에 약탈을 일삼는 야만족들은 교회를 정치적 문화적 난국에서도 여전히 안전하고 견고한 제도로 보았기에 로마교회의 관심에 복종했다. 사람들이 안내자와 안정된 세력으로 여겨지는 로마교회에 의존하면 할수록 교회는 쇠퇴해 가는 정치제도에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멸망은 로마감독의 우수성(primacy)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가도록 했다.

콘스탄틴의 아들들은 343년 사디카(Sadica)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안주의에 의해 발생한 논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실패한 종교회의였지만 폐위된 감독이 로마감독에게 자신의 경우를 청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결정했다는 것은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로마감독은 로마에서 결정이 날 때까지 교구권과 공직을 책임지고 재심할 수 있었다.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로마감독들로 활약했던 열정적인 몇 명의 변호자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이노센트 1세(Innocent I, 420-427)는 로마교회가 사도적 전통의 보관자였다고 주장했고, 로마감독이 우주적 사법권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레오 1세(Leo I, 440-461)은 베드로가 수제자였으며 그 우수성은 계승자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칼케돈(Chalcedon) 종교회의(451)는 콘스탄틴노플을 로마와 동일한 위치에 놓았다. 이러한 결정은 동방과 서방간의 분열의 조짐을 낳는데 촉매역할을 했지만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아직도 확실하게 증명되기에는 일렀다.

로마교회와 그 감독의 우수성 이론이 발전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요구되었다. 1) 성경은 아직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마 20:20-28; 23:8-12; 행 15:1-29; 갈 2:1-14). 2) 성경은 사도직의 영구성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사도들이 예상된 베드로의 우수성에 대한 후예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부활후 예수님께서 나타나 보이신 사람이 사도성을 계승한 자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행 1:21-2).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마지막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5:8). 그렇다면 바울이 사도로서 마지막 자격을 가진 인물임을 의미한다. 맛디아(Matthias)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출되었을 때 사도들이 제비를 뽑았지만 삽시간에 선출을 받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은 아니었다(행 1:21-26). 3) 만일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성을 소유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우수성을 계승받았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분명하게 그러한 계승자가 반드시 로마에 있는 교회 감독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감독들 중에 한 사람임을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과 다르든지, 성경에 덧붙여지든지간에 로마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의 보존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황제(papal system)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수도원제도 성장

수도원제도(monasticism)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세상을 등지며 금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수도원제도의 시작은 이집트의 안토니(b. 250)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는 어릴 때 재산을 모두 팔고, 황량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엄격한 자기부인적 삶을 살았다. 어떤 파초미우스(Pachomius)는 최초의 수도원들을 설립하므로 수도원제도를 발전시켰다. 수도원제도에 두 형태가 있는데: 1) 은둔자(hermitic)로서 다른 사람들과 등지며 살아가는 것이고; 2) 수도사(cenobitic)로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6세기 초반 베네딕(Benedictine) 수도회가 세워져서 공동적 예배, 노동, 그리고 연구를 강조하였다.

수도원적 삶이 개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7가지 이유가 있었다: 1) 로마인들의 핍박이 감소됨에 따라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세속적 삶을 여전히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로부터 육체적으로 분리하여 영적인 높은 수준에 이르기를 갈망했다; 2) 순교의 휴식기간은 수도원제도를 가장 높은 영적 수준에 이르도록 했다; 3)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도원제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4) 고대인들은 활동적인 봉사보다도 명상적 삶을 보다 높은 덕으로 삼았다; 5) 예배의 형식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수도원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을 갈구했다.

수도원제도는 성경적으로 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 수도승과 평범한 교회 일원들간 이중 구조를 창출한다. 왜 평범한 교회 일원이 수도승에게 잘못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 왜 옳을까?; 2) 덧붙여 수도원제도는 평범한 교회 일원들에게 표준이하의 성화를 고무시킨다; 3) 수도원제도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과 분리는 정죄 받아야할 일이다(요 17:14-16; 고전 5:9-11).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 들어가서(막 16:15) 그들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마 5:13-16; 9:10-13). 그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닫아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욱이 수도원제도의 금욕주의는 무가치하고 거룩하지도 않는 것으로 정죄 받는다(골 2:23; 딤전 4:1-5).


그리스도의 본성


신성과 인성

기독론의 한 쪽은 그리스도와 성부와 관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이신가? 이 질문은 교회 내에 여러 파당을 만들었고 그들로 인해 뜨거운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다양한 답변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던 아리우스와 같은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을 부인했다.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이 재확언되었다. 하지만 그 논쟁이 식어지고 아리안주의가 박멸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자연적으로 기독론 문제, 즉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게 했다.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신가?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고 그 결합은? 이러한 질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려하는 가운데 발생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 단일한 태도를 일찍 갖춘 서방교회는 그 만큼 우위를 지닐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충만한 사람이시지만 그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은 변호나 설명보다도 신앙의 고백적 차원이었다. 유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동방은 보다 철학적 사고를 일삼았고 그 결과는 만족치 못했다. 동방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를 갈망했다.

한 쪽을 강조하다보면, 그리스도의 본성의 다른 쪽을 등한히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면 인성이 자연스럽게 소홀해지게 된다. 또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다보면 그의 신성을 소홀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아리안 논쟁에 큰 핵심부분이었다.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소홀하였던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련된 논쟁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두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인격의 이중성(duality)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던 사람들은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이라고 부른다. ‘단성론자’란 헬라어 ‘하나’를 의미하는 mono와 ‘본성’을 의미하는 phusis의 합성어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논쟁들은 5-6세기에 걸쳐 뜨거웠고 몇 차의 범종교회의를 통해 이슈로 등장했다. 단성론자들은 지금도 중동지역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인성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본성에 둘러싼 논쟁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들을 간과해버린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간에 균형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어느 한 부분을 축소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인간과 동일하게 취급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퇴색될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부여한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그 분은 충만한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인성 없이 그의 신성은 사람에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사람이신 그 분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적합하게 나타내셨다(요 1:18; 14:9). 예수님은 인간 육체를 지니신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실 수 있으시다. 더욱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사람들을 성화시킨다(히 10:10).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예수님도 완전하신 분이라 할 수 없다(히 5:8-19; 2:10).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악마를 무기력하게 만드셨다(히 2;14). 대제사장과 죄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그는 형제들처럼 되셔야만 했다(히 2:17). 사람이시기에 그 분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으시다(히 2:18).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고부시킬 수 있으시다.


예배의 변화


전 니케아 시대(100-325)는 교리와 예배에 변화가 있었고 니케아 시대(325-600)에는 더 가속화되었다. 교회의 공적예배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부분은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5세기 동안 위대한 몇 명의 설교가들이 있었지만 대규모 도시 교회들에 제한적이었다. 지방의 교회들과 몇몇 도시들에서는 설교가 일반적이지 못했다. 설교 전이나 후에 있는 기도조차도 기도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중예배는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예배 중 가장 엄숙한 순서이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배제되었다. 성찬의 극적인 의식화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신비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 있어 동방과 서방은 이견, 즉 두 성분들 안에 임재하시는 시기에 대해 이견을 가졌다. 동방에서는 성상(iconostasis)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상들(신성한 형상이나 성화들)이 대치된 구획이 있었다. 동방교회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동안 회중들로부터 사제들이 있는 장소였다.


성일과 절기

가장 오래된 축제일들, 즉 부활절과 오순절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외 다른 절기들이 더해졌다. 부활절은 금식과 회개의 시간, 즉 40일간의 사순절 다음에 왔다. 4세기에 이르러 승천이 기억되기 시작했지만 주요한 축제로서 성탄절과 예수 공현날(epiphany-성탄절 후 12째 되는 날)이 더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를 축하하는 공현날을 지켰던 날은 부활절이었다. 공현날은 1월 6일에 지켜졌고 성탄절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일로 서방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동방과 서방은 강조점을 달리하는 절기를 지켰다. 동방은 공현날을 그리스도의 세례를 축하하는 날이라 했고 서방은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날이라고 했다. 성탄절의 기원과 관련된 관습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들이 난무했지만 그겋을 준수하는 것은 이교적 풍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Sol Invictus(태양의 비침을 기념하는 날)와 Satumalis는 12월 25일에 일어났는데 이런 풍습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교회에 접목되었던 것이다.


성자, 성물, 그리고 성상

순교자들과 그들의 유골들을 숭배하는 것은 점점 보편화가 되었다. 그들의 유품들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귀하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성물들이 안치된 장소로 순례하는 일은 경건을 위해 특별하게 다루어졌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교회 예배에서 추모되어졌고, 그들을 기도 속에서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추모가 자연스럽게 순교자들과 성자들에게 청원하는 기도로 변천되었던 것이다. 4세기말에 이르러 순교자들과 성자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중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도울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도시들의 수호자들이 되었고, 상업의 보호자들이 되었고, 병들의 치유자들이 되었다. 성자들과 순교자들은 옛 이교 남신과 여신들을 대치시켰을 뿐이었다.

가장 신성하게 숭배된 인물들 가운데 마리아, 예수님의 모친을 빼놓을 수 없다. 마리아를 공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그의 형상을 모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자연스럽게 주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어느 순교자들, 사도들보다 위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베푸는 그 어떤 축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방의 이교적 여성신을 축출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에 불과했다. 니케아와 전 니케아 시대 동안 그녀의 동정녀에 대한 교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녀가 예수님을 낳고난 후 남편 요셉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cf. 마 1:24-5; 눅 2:7; 고전 7:1-5; 막 3:31-32; 6:3; 요 2:12; 7:3-5; 행 1:14).


어거스틴 주의


어거스틴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사도시대이후 로마 카톨릭교회에 가장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그가 이룬 최대의 공적과 그 근거는 중세동안 로마 카톨릭신학을 형성하고 주도했던 교리제도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자신의 삶을 잘 반영한다. 그는 이교도 부친과 카톨릭 모친 사이에서 북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다른 종교는 앞으로 그의 사상과 실제적 행동간에 경험하게될 기나 긴 여정을 예상했다. 자신 안에 느꼈던 두 가지 본성, 즉 하나는 세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두 본성 중 낮은 것은 초기 삶을 지배했는데 만족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학문적 공부와 경력을 추구했던 그는 마침내 384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초기 삶 동안 여러 철학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북 아프리카로 되돌아온 후 어거스틴의 내적 갈등은 마침내 386년 개종의 열매를 맺게 했고 다음 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후에 반달족이 둘러싼 가운데 연로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될 히포의 감독이 되어 교권제도권으로 진입했다.

아마 어거스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하는 것들은 죄와 구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전 인류는 심지어 유아마저도 아담의 타락의 저주아래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죄를 지었으며 사악하고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다. 하나님은 임의로 사람들을 예정하시는데 구원하시는 수는 제한하셨다.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개념을 보면 개인들이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어떤 공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이런 은혜는 개인의 마음과 삶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믿음과 사랑에 스며든다(infuse).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런 개념들은 어거스틴의 삶에 철저히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해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을 얻었던 경험을 그는 갖고 있다.


펠라기우스

이런 어거스틴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린 자는 아일랜드나 영국의 수도승 펠라기우스(Pelagius)였다. 그는 400년 로마로, 410년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어거스틴과는 정반대로 그는 사람들 안에 있는 자유의지의 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슬로건은 “해야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어떤 원죄도 유전 받지 않았다. 아담은 단지 따르지 말아야할 나쁜 실례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사용 못할 수도 있다. 펠라기우스는 은혜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세례 시 죄들을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견해에 대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펠라기우스는 영향력 있고 능력 있는 후원자들을 지니지 못했기에 여러 종교회의, 황제, 그리고 교황들에 의해 정죄를 받았다. 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론 입장을 수용했다.


성경

1) 죄는 아담의 범죄, 죄성, 그리고 영적 중대성들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죄론과 구원론의 근거가 되었다. 죄는 사람들이 유전 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법을 범하므로 행하는 어떤 것이다(요1서 3:4). 유아들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으며(신 1:39; 사 7:16) 성경은 그들에 대해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 말씀한다(롬 9:11; 고전 14:20; 마 19:14). 사실 성경은 사람들 스스로가 짓는 죄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겔 18:20; 고후 5:10).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상징적으로 죄를 짓거나 그의 범죄와 죄성을 유전받은 것이 아니다. 아담의 죄는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을 죄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세상에 죄를 소개했다(롬 5:21-22; cf. 마 5:32).

2) 자유의지가 자신의 것이 아니거나 자유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경은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마 16:24; 요 7:17). 더욱이 아담은 자신의 처음 죄로 인해 자유의지를 상실했고 인류들에게도 했다고 여겨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부족하다는 교리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교리는 첫째 죄를 짓는 사람의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고; 둘째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왜냐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셋째 사람들이 범할 수밖에 없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임하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는 저항 당할 수도 있다(행 7:51).

4) 예정론.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목적과 대상들에 관하여 이미 예정되었다고 말하지만(롬 8:29-30; 엡 1:5, 11), 특별한 개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기독교인들이 되게하고 구원받도록 하며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예정론은 하나님을 사람들을 편애하는 것으로 만들며(행 10:34)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뜻과는 정반대를 의미한다(딤전 2:4; 벧후 3:9).

중세교회사


 

교황권 신장


로마주의

동방교회의 성장이 7세기초 모슬렘인들의 진격으로 인해 주춤해지면서 중세(600-1500)의 교회성장에 두드러지는 현상은 서방교회의 성장이었다. 먼저 학문과 열정을 가진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아일랜드 교회가 패트릭(Patrick, 389-461)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아일랜드 전역에 교회를 시작하고, 전파하고, 개척한 인물로 보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일랜드의 사도’(Apostle of Ireland)라 부른다. 교회는 아일랜드에 확고한 뿌리를 두었기에 영국의 교회가 로마제국의 몰락과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을 때에도 생존하고, 번영하고, 발전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영국 섬들-스코틀랜드와 영국-과 대륙-프랑크족과 독일왕국들-에 다시 한번 교회를 개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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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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