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비평본의 역사

baromi 2008. 1. 17. 18:15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비평본의 역사



김창선*



1. 들어가면서

우리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성서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이처럼 성서 읽기에 남다르다는 점이 우리 나라 교인들이 갖고 있는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무엇보다도 성서에 근거한다는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참으로 귀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우리의 장점을 잘 살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신약성서는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책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처음 성서기자들이 기록한 성서의 “원본”(aujtovgrafa = Urtext)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게도 하나도 없고, 다만 수많은 “필사본”(Handschriften)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1) 

신약성서 전부 혹은 그 일부를 담고 있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 사본들은 대략 5400개나 전해 내려온다. 이들은 파피루스(Papyrus)와 대문자사본(Majuskel = Unziale) 그리고 소문자사본(Minuskel)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현대어 번역 성서는 바로 이 수많은 필사본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는 가운데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되는 본문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 연구의 일차적인 작업은 바로 성서의 본문 연구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성서본문을 연구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은 원본에 가까운 성서본문을 구축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본문비평”(Textkritik)이라 부른다. 성서학의 모든 연구는 바로 본문비평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처럼 본문비평은 성서학 발전에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루고 있고, 본문비평학의 발전 여하에 성서학 발전 전체가 달려 있다고까지 감히 말할 수 있다.

서구 신학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본문비평학의 이와 같은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성서본문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 학문용으로 편집된 성서를 본격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했다.2) 몇몇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신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학문용으로 고안된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바로 네스틀레-알란트판(Nestle-Aland 27판, cf. Greek New Testament 4판)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소개적인 성격을 띤 본 글에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발전과정 전체를 개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과정은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말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독일 뮌스터 대학의 신약성서 본문 연구소에서 편찬하고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대비평본(Novi Testamenti editio critica maior)까지를 포함한다.3) 

아래의 내용은 주로 다음의 문헌을 참고로 하였다: K. Aland/B. Aland, Der Text des Neuen Testaments, Stuttgart 11982 (21989); K. Aland/Chr. Hannick/K. Junack, “Bibelhandschriften”, in: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6, 1980, pp. 114-131; B. M.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ts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 New York/London 1964; idem,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1994; F. G. Kenyon/W. W. Adams, Der Text der griechischen Bibel, Göttingen 1961; O. Paret, Die Bibel. Ihre Überlieferung in Druck und Schrift, Stuttgart 21950; H. Zimmermann, Neutestamentliche Methodenlehre, Darstellung der historisch-kritischen Methode, Stuttgart 1982, pp. 29-76.



2. 그리스어 신약성서 출판의 역사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발전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비평본을 위한 준비 단계이고, 둘째 단계는 이독의 수집 및 초기 비평 단계이고, 마지막 셋째 단계는 본격적인 비평본 시대이다.


2.1. 제 1 단계 - 비평본을 위한 준비 시대


최초로 성서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Gutenberg)의 라틴어 성서였다.4) (42줄로 이루어진 이 라틴어 성서는 1452-56년 사이 독일 마인츠(Mainz)에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신학자들은 주로 라틴어 번역으로 만족하였고,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그에 따라 그리스어 신약성서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16세기 초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제 1 단계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비교적 뒤늦게 생긴 몇몇 특정 사본에 의거한 가운데, 이에 제시된 본문을 전체적으로 볼 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단계를 가리킨다.


2.1.1.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7-1586) - 그리스어 신약성서본의 효시


인문주의자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사람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는 “노붐 인스트루멘툼 옴네”(Novum Instrumentum omne)로 불리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1516년 3월 1일 바젤(Basel)에서 펴냈다. 사실상의 “최초의 판본”(editio princeps)의 영예를 누리게 된 이 책은5)  (이른바 콤플루텐시스(Complutensis = Complutensische Polyglotte)로 불리는 신약성서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책이 1514년 1월 10일에 인쇄준비를 마쳤으나, 이 성서의 마지막 권이 1517년에 끝나고, 교황의 출판허락이 1520년에 가서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초본”(editio princeps)의 자리를 에라스무스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

그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레오 10세(Leo X)에게 바친 이 책의 서론은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를 읽을 것을 권면하는 부분(Paraclesis)이 나오고, 다음으로 효과적인 강독을 위한 지침(Methodus), 또한 이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된 것을 변호하는 말(Apologia)이 나온다. 이어서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은 두 개의 컬럼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리스어 본문이 한편에 나오고, 다른 편에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에라스무스가 직접 번역한 라틴어 역이 담겨 있다. 끝으로 결론부에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본문 각주가 나온다. 전체 1000쪽 이상이나 되는 이 책은 그 후 판을 거듭하며(1519; 1522; 1527; 1535년) 수정작업을 거친다.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이 책은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토대로 한 그리스어 사본은 12-13세기 때 나온, 가장 뒤늦게 이루어진 본문형태인 코이네 본문(=비잔틴 본문)을 따르는 세 가지 사본이었다는 데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라스무스본은 널리 보급돼 여러 곳에서 30여 판이나 되는 재판이 나올 정도였다.


2.1.2. 스데반/베차/엘제비어(Stephanus/Beza/Elzevier 형제) - 이른바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의 형성


에라스무스 이후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리스어 성서본이 있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인쇄업과 출판업으로 유명해진 로베르 에스띠엔(Robert Estienne, 1503-1559년)이 출판한 것이었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식으로 부르면, 이른바 “스데반”(Stephanus)이 된다. 따라서 그가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가리켜 보통 스데반본이라 부른다. 이 책은 그후 네 판에 걸쳐 인쇄된다(1546; 1549; 1550; 1551년). 그중 1500년에 두 권으로 나온 제 3판은 처음으로 본문비평장치를 갖추게 된다. 이 3판은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게된다. 특히 영국에서 스데반본은 1880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대명사로 통하게 될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스데반본의 본문(1546; 1549년)은 “콤플루텐시스”(Complutensis)본과 에라스무스본을 서로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흔히 비잔틴 본문이라고 부르는 본문의 뒤늦은 형태를 담고 있다. 제네바에서 출판된 스데반본 제 4판(1551년)이 향후 성서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유는, 언급했듯이 연속적으로 번호가 매겨진 절 나누기가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데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565년과 1604년에 걸쳐 칼빈의 친구이기도 하며 언어학자며 성서주석가인 보통 베차(Beza)로 불리는 테오도르 드 베즈(Théodor de Bèze, 1519-1605년)가 신약성서를 여러 판본에 걸쳐 출판하게 된다. 이것은 설명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롬의 불가타 말고도 자기가 직접 번역한 라틴어역도 담고 있었다. 베차는 다양한 종류의 본문자료를 활용했으나, 자기가 편찬한 성서본에 기록된 신약성서본문은 1551년에 나온 스데반본의 본문과 별 차이가 없다. 베차는 시리아어 및 아랍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활용한 최초의 학자로 간주된다. 베차가 죽은 뒤 1611년에 간행된 성서본을 포함하여, 모두 10 종류의 성서본이 출판될 정도로 베차본은 널리 사용되었다. 그가 제시한 성서본문은 이어서 나타나게 되는 엘제비어 형제의 성서본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던 엘제비어 형제(Bonaventura Elzevier, Abraham Elzevier)는 1624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작은 판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본문은 주로 베차의 1565년 판이었다. 엘제비어 형제의 제 2판이 1633년에 나오는데,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담았다: “독자는 이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본문(textum receptum)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뀌었거나 손상된 어떠한 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6)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 in quo nihil immutatum aut corruptum damus. )

이에 따라 이른바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이란 명칭이 자연스럽게 이 판본에 붙게 되었다. 엘제비어 형제의 성서본은 향후 특히 대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수용본문”으로 불리게 된 본문은 다름 아닌 스데반본과 베차본 또한 엘제비어 형제의 판본들도 공유한 본문이었다. 이들 모두가 공유한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이 그야말로 “유일한 참된 본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1611년이 나온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의 영역뿐만 아니라 향후 유럽 개신교의 성서번역들은 바로 이 본문을 근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임의로 수집된 몇 안 되는 비교적 늦은 시대에 만들어진 소문자 사본들(Minuskelhandschriften)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그 정확도에 있어서 문제가 적지 않았다.


2.2. 제 2 단계 - 이독의 수집 및 초기 비평 단계


단계의 특징은, 비록 수많은 이독(異讀)을 모으는데 많은 정성을 쏟았으나, 당시 나온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스데반본으로 대표되는 전단계의 “수용본문”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1. 여러언어병행성서(Polyglot Bible)


앞서 언급한 “수용본문”의 영향력은 대단하여, 16-17세기 동안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 당시에 성서본문과 관련된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서원문과 더불어 또한 그에 병행하는 다양한 번역들을 담은 “여러언어병행성서”(Polyglot Bible)이 여러 종류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어 구약성서본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본문에 각각 라틴어 번역을 달고, 그 옆에 당시 구할 수 있던 여러 번역들을(=시리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 심지어 페르시아어 번역) 나란히 배열하여 성서본문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때 나온 여러언어병행성서본으로 안트베르펜(Antwerpen)본(1569-1572), 파리(Paris)본(1629-1645), 런던(London)본(1655-1657)이 있다. 이 런던본은 월튼(Brian Walton, 1600-1661)이 편찬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수많은 이독을 최초로 조직화하는 공을 세웠다. 이 여러언어병행성서본이 제시하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은 1550년에 나온 스데반본의 본문을 약간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비평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각 면의 하단에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이 런던본의 제 6권 부록에 본문비평장치를 제시하였다는 사실이다.


2.2.2. 펠(Fell, 1625-1686)


당시 그리스도 교회(Christ Church)의 감독이며 나중에 옥스포드의 주교가 된 죤 펠(John Fell)은 1675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편집하였다. 이때 그는 1633년 엘제비어판을 다시금 인쇄한 본문에 무려 100개 이상의 사본들과 다른 옛 번역들에서 나온 이독들을 본문비평장치에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여러 사본들에 대해 언급하는 상당량의 본문비평장치가 출판된 성서본에 첨가되어, 일면 본문비평적인 과제를 간접적이나마 수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선 “수용본문”에 대한 신뢰는 계속되었고, 본문비평장치가 달린 성서본을 출판한 사람들은 주의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용본문”에 대한 본문비평적인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공격의 주도권은 우선적으로 영국 사람들이 쥐게 된다.


2.2.3. 밀/벤틀리/메이스(Mill/Bentley/Mace)


펠의 성서본이 출판될 즈음에 옥스퍼드의 퀸스 칼리쥐(Queen's College)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밀(John Stewart Mill, 1645-1707)은 신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적인 연구를 시작하여 그로부터 대략 30년이 후 1707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대한 기념할만한 업적을 남긴다. 밀의 이 그리스어 신약성서본은 앞부분에 본문비평학적으로 의미 있는 서문(Prolegomena)을 썼다. 여기에는 신약성서의 정경 및 본문의 전승을 다루었으며, 또한 32종류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인쇄본과 더불어 거의 100여 개의 사본들에 대하여 묘사되었다고 나온다. 동시에 교부들의 책에 나오는 성서 인용문들도 조사하였다. 한 마디로 밀은 당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이전의 “수용본문”을 대체할 수 있는 야심작으로 자신의 성서본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독자적인 그리스어 본문을 구축하지 않고, 1550년의 스데반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쇄하였다.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쥐(Trinity College)의 대표자며 뛰어난 고전어 실력을 갖춘 고대문헌학자인 벤틀리(Richard Bentley, 1662-1742년)는 1720년에 6쪽으로 된 “출판을 하기 위한 제안”(“Proposals for Printing”)을 간행한다. “수용본문”을 대체할 목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한 예로서 벤틀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제시한다. 여기에만 40곳 이상이 “수용본문”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른 시기의 그리스어 사본들과 제롬의 불가타 본문을 따르는 가운데, 신약성서 본문을 4세기 때의 모습 그대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뉴우베리(Newbury) 출신의 개신교 목사인 다니엘 메이스(Daniel Mace)가 1729년에 그리스어와 영어로 된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 in Greek and English. Containing the Original Text Corrected from the Authority of the Most Authentic Manuscripts: and a New Version Form'd agreeably to the Illustrations of the most Learned Commentators and Critics: with Notes and Various Readings, and a Copious Alphabetical Index.”)를 출판한다. 이 성서의 그리스어 본문은 메이스가 밀의 본문비평장치에서 더 나은 독법이라고 생각되어 취사선택한 것이다. 메이스의 이 성서본은 성서비평작업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무시되는 가운데 점차 잊혀져 갔다.


2.2.4.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 - 본문비평의 새로운 전기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빈넨덴(Winnenden) 출신의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은 신약성서 본문비평사의 한 전기를 이룬다. 당시 경건주의 신앙에 젖어 있던 벵엘은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신학생으로 있을 때, 밀(Mill)이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 가운데 나오는 삼만 개의 이독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일생을 성서본문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1725년 댕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벵엘은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준비 단계 작품으로 한 연구서(Prodromus Novi Testamenti recte cauteque ordinandi)를 발표한다. 여기에서 그는 건전한 비평원칙을 제시하였다. 증거본문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벵엘은 최초로 그 가치에 따라서 “그룹, 가족, 계보, 민족” 별로 구분하였다. 콘스탄티노플과 그 일대에서 생성된 사본들을 “아시아 그룹”으로 분류하고, 또한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과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를 중심으로 양분되는 “아프리카 그룹”으로 분류하였다.

벵엘은 후대의 본문비평학에 귀감이 되는 여러 규칙과 원칙들을 세웠다. 이독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한 규칙을 정했는데, 필사자는 더 어려운 본문구조를 더 간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불렀다: “보다 어려운 독법은 알기 쉬운 독법보다 더욱 가치 있다” (= “proclivi scriptioni praestat ardua").

1734년에 벵엘은 튀빙엔 본문비평장치가 없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판한다. 이때 전해 내려온 “수용본문”을 자기의 판단에 근거하여 교정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예외). 하지만 각각의 이독들에 대한 가치 평가를 책의 둘레 빈 공간에 여러 카테고리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a는 원래의 독법을 나타내며, b는 제시된 본문보다 나은 독법을 가리키며, g는 제시된 독법과 같은 수준의 독법을 나타내며, d는 제시된 본문보다 떨어지는 독법을 나타내며, 끝으로 e버릴 정도로 가치가 적은 독법을 나타낸다. 그밖에도 벵엘은 구두점 통일시키고자 하였으며, 본문의 단락구분을 시도하였다.7) 

본문비평과 관련된 여러 원칙을 벵엘은 신약성서를 한 권으로 간략히 주석한 그의 유명한 “그노몬 노비 테스타멘티”(Gnomon Novi Testamenti, Tübingen 1741) 파라그라프 VIII에서 요약하고 있다.

대략 400면에 달하는 방대한 본문비평장치를 담은 성서본은 1790년까지 6판이 출판된다.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벵엘은 자기의 성서본을 출판하고 나서 긍정적인 반응도 접했으나, 성서의 가치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성서본을 방어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자신을 향한 이러한 비난을 벵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는 것으로 믿었다. 이 성서본으로 인해 벵엘은 일약 유명해졌다. 그의 공적은,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는 데 있지 않고, 기존의 자료를 체계 있게 정리했다는 데 있다.


2.2.5. 베트슈타인(Wettstein, 1693-1754) - 사본 약어 표시제도의 창시


벵엘의 성서는 바젤 출신의 요한 야콥 베트슈타인(Johann Jakob Wettstein)으로부터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20세에 목사안수를 받은 베트슈타인은 신약성서 본문비평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관심이 오해를 사 1730년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 후 암스테르담의 한 세미나에서 교수로 부임 받으면서 다시금 본래의 관심에 매진하게 된다. 1751/52년에 그의 40여 년간의 노작인 그리스어 신약성서가 두 권으로 출판된다.

여기에 제시된 본문은 엘제비어의 본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나, 여백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독법을 표시하였다. 자신의 성서 제 2권 부록에 수많은 제안을 담았다(예컨대, 사본은 수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중요성에 따라 평가해야 옳다). 그의 본문비평장치는 최초로 대문자사본들을 라틴어 철자로 표시했으며, 소문자 사본들과 예배용 성서 본문들(Lektionare)은 아랍식 숫자로 표시하였다. 이 표시법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성서본문과 관련된 자료 말고도, 수많은 그리스 작가, 라틴 작가, 랍비들의 인용문까지도 수집해 놓았다. 그의 주장은 때때로 오류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서본은 본문비평본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00여 개의 사본들을 검토하여 이루어진 이 성서에서 베트슈타인이 기록한 설명은 오늘날의 본문비평연구에도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이 성서로 말미암아 벵엘의 성서가 빛을 잃게 될 정도였다.


2.3. 제 3 단계 - 본격적인 비평본 시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학문적인 본문비평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학문적인 본문비평이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본문비평적으로 다룰 때, 비평자의 주관적인 신앙의 차원이 배제된 상태에서, 다시 말하면 어떤 호교적인 목적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본문 구축시 사실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밝히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즉,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이루어지는 본문비평작업을 가리킨다. 독일인 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2.3.1. 그리스바하(Griesbach, 1745-1812) - 학문적인 본문비평의 시조


순수한 학문적 본문비평의 토대는 독일인 요한 야콥 그리스바하(Johann Jakob Griesbach)가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향후 계속되는 작업에 근거를 이루고 있다. 젬믈러(Semler)의 제자였던 그는 1773년에 할레(Halle)에서 교수직을 수행하다가 1775년부터 예나(Jena)로 옮겨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교수로 일했다. 사본들을 모으기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한 그는 그리스 교부와 다양한 번역본 가운데 나타나는 신약성서 인용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또한 신약성서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과정을 연구하였다. 벵엘과 젬믈러가 구분한 사본들의 구룹별 구분을 한층 발전시켰다. 사본들을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1. 알렉산드리아 그룹: 오리게네스를 알렉산드리아 그룹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보는 가운데, 대문자사본들인 C, L, K과 소문자사본 1, 13, 33, 69, 106, 118, 또한 Bohairic, Armenian, Ethiopic, Harclean, Syriac. 또한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퀴릴, 펠루시움의 이시도르 안에 나오는 인용문들이 여기에 속한다.

2. 서방 그룹: D, 라틴어 번역, 부분적으론 시리아어 번역, 아랍어 번역이 여기에 속한다.

3. 비잔틴 그룹: 그리스바하는 이 그룹을 다른 두 그룹의 조합으로 보는 가운데, A (복음서의 경우), 비교적 뒤늦은 대문자사본, 소문자사본 및 교부 인용문들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스바하는 독일인으로서 처음으로, 권위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온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의 여러 부분을 과감하게 따르지 않았다 (물론, 수용본문 전체를 자기가 이상적으로 여긴 본문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가 제시한 본문은 이후 나온 여러 그리스어 신약성서본의 토대가 되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1774년에 그리스바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공관복음서 대조(Synopsis)를 출판하여,8) 

Libri historici Novi Testamenti Graece. Pars Prior, sistens synopsin Evangeliorum Matthaei, Marci et Lucae. 그리스바하는 공관복음서 신옵시스를 1776년에 따로 출판한다: Synopsis Evangeliorum Matthaei, Marci et Lucae. 1797년의 제 2판에 요한복음의 수난사와 부활 이야기 본문이 첨가된다.

오늘날 의미의 역사비평적인 연구의 근거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9) 

물론 그가 세운 이른바 “그리스바하 가정”(Griesbach Hypothese)이 오늘날에는 설득력을 잃었다. 이 가정은,  마태, 누가, 마가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가운데, 마태와 누가는 마가를 대본으로 삼았다고 간주한다.

그가 본문비평과 관련하여 세운 여러 세부적인 규범은, 상당 부분 오늘날에도 그 타당성을 잃지 않았다.


2.3.2. 라하만(KarlLachmann,1793-1851)-“수용본문”(Textus receptus) 의 폐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따라서 한치의 오류도 없다고 믿는 가운데 이제까지 전해 내려온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의 권위를 완전히 넘어뜨린 최초의 사람은, 당시 베를린의 고대언어학 교수로 명성이 높은 칼 라하만(Karl Lachmann)이다. 고대의 고전 작품들의 본문에 대한 편집 경험이 풍부한 그는 비교적 뒤늦은 시대에 나온 본문들로 이루어진 “수용본문”에서 제시하는 본문을 버리고, 4세기말경 교회의 본문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기치 아래에 라하만은 다양한 이독들을 본문비평적으로 평가하여 완전히 새롭게 만든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이때, 그는 신약성서의 원문을 다시 회복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 라하만은 이것을 불가능하다고 간주했다 - 권위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온 성서본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입증할 수 있는 증거에서 만든 본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본문은 대략 4세기말경 동방교회에 널리 사용된 본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소문자사본들을 이용한 것 같지는 않고, 다양한 대문자사본들을 토대로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 제롬의 불가타(Vulgata), 또한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키프리안, 힐라리우스, 루시퍼에서 나온 인용문들을 참조하였다. 5년간의 작업을 마치고, 1831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베를린에서 출판하였다. 라하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수용본문”에 대해 갖고 있는 맹목적인 신앙을 공격하였다.

라하만이 제시한 성서본의 약점은, 그가 사용한 사본들의 토대가 빈약하다는 데 있다. 기껏해야 세 개의 사본 정도를 비교했을 뿐이었다. 그가 출판한 성서의 가치에 대해 호트(Hort)는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새 시대가 1831년에 시작되었다. 앞서 나온 인쇄본을 고려하지 않고 직접 옛 증거들을 사용하여 본문을 처음으로 구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독들을 구분할 때 제멋대로의 선택을 학문적인 방법으로 대체한 최초의 시도가 감행되었던 것이다.”10) 

B.F.W. Westcott/F.J.A. Hort,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II] Introduction [and] Appendix (1881) 13.


2.3.3. 티셴도르프(Lobegott Friedrich Konstantin Tischendorf) - 학문적 본문비평본의 모범


티셴도르프는 본문비평과 관련된 대단한 연구를 남긴 놀라운 학자였다. 성서의 본문비평과 연관된 글을 150여 가지나 남겼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사본들을 발견하는 업적도 남겼다. 젊었을 때, 그는 본문비평을 통해 성서의 원문을 찾아내는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신성한 임무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젊었을 때 약혼녀에게 보낸 글 가운데에서 “내가 대면한 신성한 임무는, 신약성서의 원형을 다시 찾기 위한 노력하는 것이야”하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다. 1843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그는 5세기 때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인 “코덱스 에프레미 쉬리 레스크립투스”(Codex Ephraemi Syri rescriptus = 시리아 교부 에프렘이 원래 기록되어 있던 신약성서 글씨를 닥아내고 그 위에 자기의 글을 다시 덮어쓴 코덱스를 뜻함11)) (이렇게 하여 다시 사용된 사본들(Codices rescripti)을 가리켜 팔림프세스테(Palimpseste)라고 부른다.)를 판독해내는 개가를 올렸다.12) (Codex Ephraemi Syri rescriptus sive fragmenta Novi Testamenti, Leipzig 1843. )

무엇보다 경이로운 사건은, 동방 여행 중에 시내사본(Codex Sinaiticus = א)을 시나이에 있는 카타린 수도원에서 발견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20여 개의 또 다른 대문자사본들도 발견했다. 그는 자기의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위해 신약성서 사본과 고대 번역 및 교부들의 인용문들을 망라한 당시 알려진 모든 자료를 제시했던 것이다. 대략 64개의 대문자사본들과 하나의 파피루스, 또한 여러 소문자사본들을 사용하였다. 이때 시내사본의 본문을 최고로 중시 여겨 자기의 성서본을 위한 규범으로 간주했다. 그처럼 중시했기 때문에 이 사본을 히브리어 알파벳 첫 자 “알레프”(א)를 붙였던 것이다.

티셴도르프가 정성을 들여서 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완벽히 편찬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여러 판을 거듭하여 인쇄되었다. 그 중 1869-1872년에 두 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제8판 “에디티오 옥타바 크리티카 마이오르”(editio octava critica maior)가 가장 중요하다. 13) 

제2권이 출판된 직후 티셴도르프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어서, Leipzig의 교수였던 C. R. Gregory(1846-1917년)가 제8판에 대한 값진 개론적 설명을 담은 제3권을 준비하여 모두 3권으로 1884, 1890, 1894년에 걸쳐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적용되는 신약성서 사본들을 나타내는 표시체계를 만든 것은 그레고리의 공헌이다.

본문비평장치에 엄청난 정보를 담은 이 8판에 그는 자기와 선배들이 발견한 온갖 종류의 이독들을 모아 놓았다. 거의 100년이 지난 1965년에 독일에서 이 판이 또다시 인쇄된 사실만 보더라도, 이 판이 지닌 본문비평학을 위한 학문적 중요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2.3.4. 웨스트콧(Westcott, 1825-1901)/ 호트(Hort, 1829-1892) - 영국 본문비평본의 역작


영국 케임브리지의 두 신학교수인 웨스트콧(Brooke Foss Westcott)와 호트(Fenton John Anthony Hort)는 1881년에 두 권으로 된 그리스어 신약성서  「그리스 원어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이들이 거의 28년 동안(1853-1881) 이 작업에 매달린 결과였다. 첫 권은 그리스어 본문을 담았고, 두 번째 권은 다양한 비평의 원칙에 대한 설명과 부록을 실었다.

티셴도르프가 시내사본을 최고로 여긴 것과 달리, 이들은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을 가장 훌륭한 사본으로 간주했다. 이 사본을 “중립적 본문”(neutraler Text)의 대표자로 여겼는데, 이것은 그들이 새롭게 가정한 본문형태였다. 그들은 이 “중립적 본문”을 세 가지 본문형태, 즉 알렉산드리아 본문, 비잔틴 본문, 또한 서방 본문 이외의 또 다른 본문형태로서 (특히, 시내사본과 똑같은 본문을 제시할 때) 원문에 가장 근접한 본문으로 보았다.14) 

알란트 부부의 견해에 따르면(K. Aland/B. Aland, Der Text des Neuen Testament, p. 24), “중립적 본문”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비잔틴 본문이 다른 본문형태보다 뒤늦게 생긴 것이라는 그들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 시리아어 본문(=비잔틴 본문, 코이네 본문)은 비교적 뒤늦은 시대의 본문형태에 퍼져 있던 여러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섞인 독법을 담고 있다. 2. 니케아 종교회의 전단계의 어떠한 교부들도 명백한 시리아어 독법을 인용하지 않는다. 3. 시리아어 독법들을 다른 경쟁상대의 독법들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것은, 원본에 가까울 것이라는 주장이 거의 힘을 잃는다.

웨스트콧과 호트는 사본들을 직접 조합하지 않고, 이미 인쇄된 본문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으며, 또한 이들의 성서본은 가장자리 여백에 경쟁이 될 수 있는 다른 이독들을 제시하였을 뿐 본문비평장치를 담지 않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시한 예리한 비평원칙과 방법은 오늘날까지 대체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영미 영역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성서본의 특징으로 알란트는, B와 א를 위주로 하였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체 칸타브리기엔시스 사본”(Codex Bezae Cantabrigiensis = Dea)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5)


2.3.5. 에버하르트 네스틀레/에르빈 네스틀레/쿠르트 알란트(Eberhard Nestle/Erwin Nestle/Kurt Aland) - 본문비평본의 대중화


에버하르트 네스틀레(1851-1913)는 독일의 비르텐베르크(Württenberg)지방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위치한 성서공회용으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1898년에 편찬하였다. 그가 제시한 본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선적으로 앞서 나온 두 가지 성서본, 즉 티셴도르프(Tischendorf)본(1869-1901)과 웨스트콧-호트(Westcott-Hort)본(1881)을 서로 비교하였다. 독법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또 다른 성서본을 사용하였는데, 처음에는 웨이마우스본(R. Fr. Weymouth, 1892년 제2판)을 사용하다가 1901년서부터는 베른하르트 바이스(Bernhard Weiß)본(1894-1900)과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 세 가지 독법 가운데 두 가지가 일치하는 독법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이 성서본은 이제 적은 수의 학자들만이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결국 거의 400년 전부터 사용되어온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을 교회와 학생들의 수업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 성서본의 영향력은 가히 압도적이어서, 당시 성서공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영국성서공회(Britisch and Foreign Bible Society)조차 근 20년간 사용해 왔던 웨스트콧-호트(Westcott-Hort)본 대신에 네스틀레본을 유포시킬 정도였다.

아버지 에버하르트 네스틀레의 뒤를 이은 아들 에르빈 네스틀레(Erwin Nestle)는 아버지가 편찬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또 다시 교정하여 1927년에 네스틀레 제 13판을 편찬하게 된다. 이것은 네스틀레본의 발전에 있어 한 전기를 뜻한다. 그리하여 1898년본의 “유치한 형태”를 떨쳐버리고 비로소 네스틀레본은 본격적인 본문비평장치를 갖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16) 

Erwin Nestle가 본문비평장치를 확대할 때, 주로 참고로 한 성서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베를린의 목사였던 헤르만 폰 소덴(Hermann von Soden, 1852-1914)이 편찬한 것이었다. 1902-1913년 사이에 4권으로 출판된 (제4권에 본문이 들어 있음) 경이로운 이 성서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Die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in ihrer ältesten erreichbaren Textgestalt dargestellt auf Grund ihrer Textgeschichte”. 여기에서 소덴은 3가지 본문그룹을 나누었다: K(= Koine)-Text, h(= Hesychianischer, ägyptischer)-Text, I(= Jerusalem)-Text. 이러한 3가지 최초의 본문형태가 원문에사 발전되었다고 본 그의 가정은 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전승사를 다룬 2203쪽에 이르는 상세한 Prolegomena는 오늘날까지 본문비평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문적으로 신뢰할만하게 편집되고 동시에 사용하기 간편하게 인쇄된 이 네스틀레 성서본은 경쟁이 될만한 다른 성서본들을 모두 제압하게 되어, 본문비평본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네스틀레본은 본문비평연구와 관련된 이제까지의 모든 성과를 종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티셴도르프가 시내 사본을 가장 중시여긴 반면, 웨스트콧-호트는 바티칸 사본을 으뜸으로 간주한 데 놓인 일방성에서 벗어나 조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모든 본문비평적인 인식을 담았던 것이다. 에르빈 네스틀레가 티셴도르프본에서 발견한 수많은 모순점들을 기록한 목록을 사본들과 교부들의 저서를 이용해 설명하는 작업을 위해 대략 1950년경부터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가 본문비평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알란트는 본문비평장치에 수록된 정보와 제시된 본문을 검증하는 작업을 맡는다. 그리하여 네스틀레본의 1952년에 나온 제 21판서부터 쿠르트 알란트의 이름이 언급되고, 이어서 제 22판서부터는 표지에 나타나게 된다. 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가리켜 이른바 “네스틀레-알란트”(Nestle-Aland)라고 부른다. 계속해서 검증작업을 거쳐 새롭게 수정된 네스틀레-알란트 제 26판이 1979년에 탄생한다.17) 

K. Aland/B. Aland는 자신들의 공저 Der Text des Neuen Testaments 제1판(1982)에서 이 성서본문을 가리켜 “규범본”(Standard-Text)이라 불렀으나, 제2판(1989)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이 부르지 않고 있다. B. Aland 교수가 필자와 나눈 대화(2000년 8월 30일) 가운데에서 “Standard-Tex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이로써 이 26판에 제시된 본문은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원본에 가장 근접한 본문을 제시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다. 세계의 여러 성서 공회는 바로 이 성서본문에 기초하여 신약성서 번역작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2.3.6. 신약성서 대비평본(Novi Testamenti editio critica maior) - 획기적인 새로운 시도


독일 뮌스터(Münster)에 위치한 신약성서 본문 연구소(Institut für neutestamentliche Textforschung)는 전적으로 새로운 본문비평본을 구상하여 현재 준비작업을 다 끝내고 실현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이 본문비평본에 거는 기대는 대단하다. “초기 천 년 동안 내려온 사본들을 통해 (원)본문을 확립하고 그것들의 역사를 재건하려는 학문적 연구에 필요한 모든 자료들을 제공”18) 

Novum Testamentum Graecum. Editio critica maior IV, Teil 1: Text, 1. Lieferung: Der Jakobusbrief, hrsg. vom Institut für neutestamentliche Textforschung, 1997, 11.

하고자 한다. 이미 첫 권으로 공동서신 가운데 야고보서가 1997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19) 

이에 대하여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오: 심상법, “「그리스어 신약 에디티오 크리티카 마이오」에 관한 고찰: 야고보서를 중심으로”, in: <성서원문연구> 제3호(1998/8), 123-148쪽.

현재 이 사업의 총지휘자로 있는 바바라 알란트(Barbara Aland)20) 

B. Aland는 작고한 Kurt Aland의 아내이다. 2000년 8월 29일에 대한성서공회에서 Novi Testamenti editio critica maior에 관한 논문발표회를 가졌다.

교수는 이 본문비평본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이 판본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즉 검증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담아야 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판본은 전체 개관이 가능해야 합니다.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알아볼 수 없다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 이 판본은 모든 본문비평적인 관심에 사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에 기초해서 작업해내야 하는 결과들을 사전에 규정지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들이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에 관한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분명합니다. 그 편집자들은 결국 하나의 비평 본문을 구성해야만 합니다.”21)


전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구성된 이 대비평본(Editio critica maior)은 각 면에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일 먼저 선도열(先導列, Leitzeile)이 나온다. 이것은 단어 하나하나 새롭게 구축하여 만든 성서본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도열 바로 밑에 해당 본문의 모든 이독들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이독 분포(Variantensprektrum)가 나오며, 그리고 칸을 달리하여 이독들 및 그 증인들이 인용되어 있는 상당량의 증거 비평장치(Bezeugungsapparat)로 구성되어 있다.

대비평본은 이제까지 위대한 본문비평의 선조들이 본문의 유형(Texttypen)을 구분하는 가운데, 비교적 뒤늦게 생겼으며 양적으로 볼 때 수많은 사본들이 속해 있는 이른바 “비잔틴 본문”(byzantinischer Text)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 것과 달리, 대다수 사본의 독법이 경우에 따라선 원문에 가까운 훌륭한 본문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의미에서 앞선 세대에서 시도해왔던 본문 유형을 구분하는 작업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22) 

앞서 언급한 학술 강연회에서 본문 유형을 구분하고자 애썼던 전시대의 시도에 관한 필자의 질문에 대해, 바바라 알란트 교수는 그와 같은 시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야심찬 이 본문비평본이 완성되기까지는 아직도 수십년의 장구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로써 새롭게 이루어진 신약성서의 본문은 그리스어 성서본문 연구에 신선한 자극을 줄 것이다. 우리 학계 역시 이 비평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3. 나가면서


우리는 본문비평본이 생성되어 온 전체 역사를 중요한 성서본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스데반본(1550년)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른바 “수용본문”(Textus receptus) 이래로, 거의 반세기에 해당하는 장구한 시간에 걸쳐 비교적 적은 수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비평본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학문적으로 신뢰할만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본문비평본의 발전사를 개관하면서, 당시 그 작업에 외로이 참여했던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서본문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본문비평본을 만드는 작업을 반대한 사람들이 옳았나 아니면 그 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이 옳았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고 생각된다. 본문비평을 하는 궁극의 목적은, 전해 내려온 성서본문을 부수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려는 데 있지 않고,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고 확신하는 성서 말씀에 담긴 그 본래의 뜻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데 놓여 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본문비평작업을 통하여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원문을 찾아 확립하는 작업을 가리켜 본문비평본의 모범을 제시한 티셴도르프(Tischendorf)는 “신성한 과업”(heilige Aufgabe),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귀한 본문비평작업을 통해 확립된 성서 말씀이 현대인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의 작업인 성서 해석(Interpretation) 혹은 주석(Exegese)의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성서는 철자의 조합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 뜻이 올바로 드러날 때 본래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찾아가는 첫 길이 바로 “본문비평”(Textkritik)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