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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의 율법의 제3의 용도 ⒜ 명칭: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는 율법의 셋째 용도의 명칭을 언급하지 하지 않고 단순히 '셋째 용도'(tertius usus)로 표현한다. I.J. Hesselink에 의하면 칼빈은 usus in renatis(중생인의 용도)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멜란히톤과 통한다. 칼빈 연구전문가 John Ooms는 이 셋째 용도를 paedagogicus usus(교육적 용도)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중생인을 교육한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Ooms의 주장은 콜부뤼게 학파의 한 사람인 John Wichelhaus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빅켈하우스) 율법의 이런 용도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인간으로서 본연의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어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져 가게 함을 지적했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면 칼빈은 이들과는 달리 제 3용도를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칼빈의 경우 율법의 셋째 용도는 신자들을 위한 생명의 규칙의 역할을 한다. ⒝ 적용 대상 칼빈은 매우 명확하게 '율법의 제 3용도'(usus legis tertius)가 하나님의 영(靈)이 그 속에 거하시며 주관하시는 중생한 자들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고(렘 31:33; 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3,10-15에서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중생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신자들도, 비록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자들은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이런 신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해한 중생인의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생인 속에 죄악의 불길을 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연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여기 훈련을 받는다는 말은 중생인에 대한 율법의 어떤 역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도록 꾀며 자극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주시하면서 "성도들이 육욕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칼빈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런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한 마디로 그는 그것을 '죄'라고 단정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역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론적인 이 세상 죄 개념이 아니라, 어떤 힘이 있어서 인간에게 능력을 행사하는, 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인 죄 개념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이런 죄 개념을 간과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을 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인의 삶 가운데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여 이런 죄의 능력을 제압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힘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죄의 능력 칼빈은 인간이 중생함을 통해 "죄의 지배력은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신자들 안에 거함"을 지적한다. 다른 말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폐지되었지만, 다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중생한 인간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죄의 법'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율리아누스를 논박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법의 문제를 인정한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 안에 남아 있다". 그는 계속 인용하기를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했고 이 글에 나오는 암브로시우스의 발언을 참고하여 "죄의 법은 비록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한 죄책은 세례 때 사함을 받았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죄의 법을 불법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것은 육신이 성령에 대항해서 정욕을 발동하는(갈 ┌─────────┐ │ ■■■ ↗ │ 중생인도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히면 범죄하고 │ ■■■ →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의를 행하는 기로에 서있다. │ ■■■ ↘ │ │------------ │ │ ■ 죄의 법 │ │ ■ 중생인의 실존│ └─────────┘ 칼빈은 또 어거스틴의 롬 칼빈이 재세례파들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또 성령의 직통 계시를 통해 지도를 받기 때문에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을 때(Inst III,3,14[1]) 그들이 바로 중생인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법"에 대해 무지한 연고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칼빈은 이들을 비판할 때 인간의 상태를 중심으로 논쟁하기보다는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열거함을 통해 논쟁했다(ibid[9-19]). 필자의 견해로는 이 논쟁에서는 성령론을 중심으로 질문을 제기하는 것보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 내지 구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외부의 어떤 세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인데 육신의 정욕이 발동할 때는 사단의 지배체제하에 들어가고 성령의 지배아래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 그러면 이런 죄의 법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중생인에게 율법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칼빈이 중생인에게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어떻게 말하는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주장 곧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항해서 그 필요성을 매우 명쾌하게 열거한다.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 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하기 때문이다."(Inst III,19,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그 다음 질문은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 중생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중생인', '성령' 그리고 '율법'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을 지켜야할 인간과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오류 곧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칼빈은 이미 율법의 제 3용도를 말하면서 중생인이 율법을 지키려할 때 성령의 사역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즉 율법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것을 철저히 배우고 확고하게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법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Inst II,7,12[5]). 또 칼빈은 육의 짐 때문에 전진이 방해를 받을 때 율법은 채찍(flagrum)과 같은 부단한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함(ibid., [7-8])을 지적한다. 칼빈은 여기서 시 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루터파 교의신학자 W. Elert가 '칼빈의 경우 율법 그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루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라는 말은 칼빈을 잘 이해한 발언인 것이다. 위의 내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한 칼빈의 발언과 일치하는 것이다(Inst II,7,12). (Institutes<1536>, 36). 그 두 가지 유익이란 ⑴ 하나님의 뜻의 성격을 알게 되고 ⑵ 자주 묵상함을 통해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이로 인해 힘을 얻는다.) 칼빈은 이것을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자유', '양심',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곧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난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음을 지적한다(III,19,3). 그 다음에 칼빈은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구절에는 성령의 사역이 전제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또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감사의 삶을 배운다. 즉 율법은 감사의 삶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감사가 중생인이 성화되는데, 즉 목적지를 향해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Ooms의 지적은 평가할만하다. 그는 칼빈의 주석 딤후 ⒠ 율법의 제 3용도의 목표: 그러면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역사하여 어떤 목표에 도달하게 만들까? 우리는 이에 대해 칼빈에게서 비록 내용은 동일하지만 형식상 다양한 대답을 볼 수 있다. 그는 율법 전체의 목적이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 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II,8,51[1]), "의의 완전한 모범"(iustitiae examplar eminere. II,7,13[5])인 동시에 "완전성"(perfection. II,7,13[9])이라고 했다.(II,7,13). 그러면 이 '모범' 또는 '완전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형상'과 연관하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윤곽으로 그리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Ita enim suum ingenium Deus illic delineavit, ut siquis factis quicquid illic praecipitur repraesentet, imaginem Dei quodammodo sit in vita expressurus Inst. II,8,51[2])라고 말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나? 필자는 이것을 주제로 이미 논문을 쓴 바 있다(아직 출판되지 않음. 홍치모 교수 은퇴 기념논문집, 원고지 300매). 거기서 필자는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 '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 등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칼빈은 인간과 관계하여 하나님 형상을 실체론적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방금 언급한 이 논문과 연관하여 여기서 칼빈이 율법의 제 3용도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다. 칼빈의 경우 율법이 목표로 삼고 있는 하나님 형상은 기독론적, 인간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관점을 보아야 한다. Victor A. Shepherd가 이것을 잘 요약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par exellence(가장 탁원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율법의 순종이 이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닮아가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하나님의 형상)가 된다". 칼빈은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우리는 칼빈의 경우 실체론적 하나님 형상이 나타나려면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이 이루어져 됨을 볼 수 있다(필자의 기고논문). 칼빈의 경우 이 후자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로 명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칼빈은 첫 계명을 해석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II,8,16)라고 한 것이나 둘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굳게 붙어 있아야 한다"(II,8,18)라고 또는 "우리를 교회의 품안에 받아 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다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는 사랑과 정조를 요구하신다"(ibid.)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이루는데 본질적임을 지적한 것이다. 셋째 계명은 말할 것도 없고(ibid., II,8,22) 넷째 계명은 일 중에 하루인 안식일날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구체적으로 한번 경험하고 실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II,8,28).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히 하나님의 행적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ibid., II,8,28[9-10]) 칼빈은 십계명 중에 수평적인 차원에 대한 내용인 5-10계명은 II,8,35-50에서 열거했다. 그는 여기서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또는 심층적으로 열거했다. 그 다음 그는 율법의 요약을 말함으로써(II,8,51) 십계명을 정리했다. 여기서 칼빈은 실체론적인 하나님 형상(하나님의 순결)이 나타나려면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져야 함을 암시했다(ibid.). 동시에 그는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짐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쐐기와 같은 것이다. 펠라기안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필요가 없고 자연인의 상태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경우 이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노력으로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자동적으로 정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칼빈이 신 이런 발언은 칼빈의 경우 하나님 형상의 관계적 형상은 수직과 수평적인 관계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것을 II,8,53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요약했다. 필자는 이미 위에 언급한 "하나님 형상"에 대한 논문에서 칼빈의 주장이 미완성적임을 지적했다. 성경이 말하는 관계적인 형상론은 믿음, 사랑 소망 이 세가지 관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논문). 그렇다고 칼빈이 시간적인 차원을 제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십계명을 언급하면서도 저주와 복받음 또는 약속과 연관하여 시간적인 차원의 내용을 언급했다(특히 2계명과 4계명). 그러나 그는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과 연관하여 이 세 가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칼빈이 이 두 가지가 시간속에서 실현됨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약간 미완성적이기는 하나 그의 발언은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주는 영향을 설명하는 일에 손상을 끼치는 않는다. -Exkurs: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견해- 루터파 신학자들 중에 어떤 이는 칼빈이 율법과 복음을 혼동했다고 비판하는 데 그 말이 타당한가? 호이어(Paul M. Hoyer)에 의하면 칼빈은 율법이 기독인으로 하여금 경건한 삶에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주장(율법의 셋째 용도)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Hoyer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고발할 뿐, 기독인을 경건으로 인도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은 결코 우리 속에 선행을 야기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를 고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율법의 제 2용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루터란의 전형적인 비판이다. 우리는 이런 비판의 문제점이 그가 지닌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이기보다는 너무나 루터파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과연 칼빈은 이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가? 사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립을 정확하게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율법의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그런데 칼빈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이런 대립에 놓여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있음을 보았다.말하자면 루터파가 성경속에서 율법을 보는 관점과 칼빈이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시각으로 보았다. 또 베르카우워Berkouwer가 지적한 대로 루터가 율법의 계시성(죄를 고발함)에 치중한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정보성에 치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Hesselink의 "이렇게 율법을 하나님의 한 은혜로운 뜻의 계시로 보고 강조하는 것은 칼빈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보는 관점의 전제이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칼빈은 바울을 따라 율법이 '의로운 생활의 표준'(regulam iuste vivendi)이라고 못박은 다음(Inst II,9,4[2]),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 자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되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 희망을 전혀 주시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빗나간 사람에게는 저주를 더하심을 지적하면서(II,9,4[2]) 롬 3:21이하와 갈 3:10이하에 근거하여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기도 했다(II,9,4[4]). 그런데 그는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되 두부를 자르듯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 둘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보완관계로 또는 통일체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복음은 율법이 약속한 모든 것을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림자(umbris)에게 실체(corpus)를 부여했다는 것이다(II,9,4[6]).이 둘 사이의 보완관계는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서 잘 표현된다: "인간은 율법의 고발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쫓겨가고 복음을 통해 율법의 의무를 이루게 된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상태와 더불어 가장 명쾌하게 설명된다. 율법이 인간이 처한 상태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즉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임을 지적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처한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부쳐(Bucer)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한다. "율법이 새롭게 하는 영이 없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사망을 가져오고, 성령으로 구비된 자들에게는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 준다". 즉 이들은 모두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이 죄인에게 접근하면, 불순종을 야기시키는 반면에 율법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함을 말했던 것이다. 칼빈은 똑같은 문제를 매우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는 동일한 율법이 죄인에게 접근하면 위협하고 죽이는 직분을 수행하고(Inst II,7,7)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접근하면 부드럽게 대하며 구원으로 인도함을(II,7,12)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율법이 원래 선한 것이었는데 인간의 부패 때문에 죽이는 직분이 뜻밖의 일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율법의 이런 기능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과 더불어 수행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처한 '영적인 상태'에 따라 율법의 기능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불신자들에게 접근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의 상태 속에서 절망하고 낙담에 빠지게 만드는 반면에 신자들에게는 의를 사모하게 만드고 용기와 기쁨이 넘치게 만든다"라는 Jake의 해석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칼빈이 다음과 같이 인용한 어거스틴의 말과 암부로시우스의 말은 위의 내용을 정리해 준다: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격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 우리는 칼빈의 이런 발언을 아래의 도표로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육의 상태 또는 사망의 상태 속에서 살 때는 율법이 죽음으로 위협하지만 '원시상태'(하나님 형상의 상태)나 '영에 따라'의 상태 또는 '主안의 상태'에 있으면 친절하게 대한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은 이미 이런 도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 타락 구원 최후심판 ■■■■■ ■■■■■ 칭의 ▦▦▦▦▦ ■■■■■ ■하나님■ ■육신의■ ▦성령에▦ ■하나님■ ■ ■창조됨■ ■로의삶■ ▦화의삶▦ ■회복됨■ ■■■■■ ■■■■■ ▦▦▦▦▦ ■■■■■ (A) (B) (C) (D) 원시상태 사망의 상태 주안의 상태 완전회복의 상태 육의 상태 영에따라 상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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