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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omi 2007. 10. 11. 19:16
오리겐
번호 : 28 조회수 : 2 2007.10.0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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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초대 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세월이었으며 이단과의 논쟁 연속이었다. 박해시기에 신앙은 더욱 굳건해 졌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방 가운데 증거하고, 신약 교회가 확장 되어가는 시기 였다. 여기에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신학 사상이 체계를 이루며 종통 교리를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초기 신학 사상의 형성은 세 학파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을 중심으로 하는 라틴 신학, 다른 하나는 이레니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신학, 나머지 하나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중심으로 하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그것이다.

  이 보고서를 통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중심이 되는 오리겐을 그의 신학 배경과 생애 , 신학 사상, 저서 그리고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오리겐은 플라톤적 가설들을 많이 받아 들였음을 밝혀 둔다. 그의 스승 클레멘트와 다르다고 스스로 공언하지만 무의식중에 오리겐은 클레멘트 보다 플라톤주의에 대해 덜 비판적이었으며, 헬라 철학과 사상들에 정통하고 있었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들 간의 서로 다른 관점들을 섭렵하였고, 도덕적 문제나 섭리에 있어서는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헬라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과 교회의 전통에 어긋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1)고 선언 하였다.

  또한 성경이 분명히 밝히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주신 사색 능력을 가지고 추리하는 자유가 보장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2)

  오리겐은 항상 플라톤적 입장에 서 있었고, 스토아 철학자인 케레몬의 저서들 및 크루누투스의 저서들도 읽었는데 이들로부터 풍유적 해석방법을 끌어내어 성서 해석에 적용하였다. 

  오리겐은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자의 삶을 살아간 위대한 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는 이교도라는 오명이 씌어졌다. 그의 이념은 비성경적인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삶임에 틀림없었다.




Ⅱ. 본론


1. 생애


  오리게네스 아드만티우스(Origenes Admantius)가 원명이나 주로 오리겐으로 잘 알려진 그는 185년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릴때에 개종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의 아버지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으로 오리겐을 교육시켰다.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202-203)때 죄인으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므로 순교하였다.3)아버지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어 목숨을 버려서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킬 것을 권면할 정도로 순교의 열정에 불타 있었다. 어머니는 이러한 어린 오리겐이 자진해서 순교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옷을 감추고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므로 순교를 면하게 하였다.

  아버지로부터 그리스 문학을 배우고 소년시절부터 성경을 연구하며, 매일 성경을 암송하고 교회의 규칙을 지켰다. 클레멘트 밑에서 신학을 배우는 동안 18세의 어린 나이에 알렉산드리아의 세례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새신자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식견은 눈부실 만 하였다.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근본 요소는 금욕주의 신비주의였으나 그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금욕주의적 삶은 그의 명성을 더하게 하였다. 특히 복음의 실천적 삶을 강조한 오리겐은 두벌 옷이나 신을 가져서는 안 되며, 장래일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실제로 그는 여러 해 동안 맨발로 다녔고, 최소한의 수면과 음식만을 섭취하여 건강을 크게 해쳤다.

  이같이 금욕적이면서 청빈한 극도의 빈곤생활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의 엄격하고 철저한 삶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 있는데, 드는 마태복음 19장 12절4)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거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사건은 훗날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미트리우스로 부터 공격받게 되는 빌미가 된다.

  오리겐의 명성이 외부 세계로 알려지면서 211년 로마를 방문하고, 215년에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을 받아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큰 전쟁이 발발하자 216년경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오리겐은 안수 받지 못하여 정식으로 사제직을 받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기회가 주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미트리우스는 안수 받지 않은 것과 지나친 금욕주의 신앙으로 물의를 일으킨 오리겐에게 분개하여,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감독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데미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소환을 요구 했고, 마지못해 돌아온 오리겐은 오히려 명성이 더 해 갔으며, 황제의 모친 마매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호위병을 보낼 정도였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230년경 팔레스틴과 헬라를 방문하던 중 가이사랴에서 그 지방 감독들에 의해 장로 안수를 받는다. 이들은 오리겐의 명성 때문에 그를 자신들 곁에 두려했다. 이 소식을 들은 데미트리우스는 자신의 권리가 팔레스틴 지역의 감독들에게 침해당했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거세한 오리겐은 성직자의 대열에 낄 수 없다고 분개 하였다. 그는 두 번에 걸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축출해 버렸다.

  이후 오리겐은 가이사랴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세례지원자(catechumens)학교와 같은 신학교를 개설하고 후배 양성과 집필에 힘썼다. 이때가 그의 학문 활동의 전성기였으며, 250년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때 악형과 고문을 받으며 감옥에 갇혔다가, 254년 두로(Tyre)에서 석방된 지 얼마 안 되어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5)



2. 신학



1) 삼위일체론


  (1) 성부


  오리겐은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지성과 존재를 초월하시는 모든 실재의 원천과 목표시다. 출생하지 않으시며, 모든 물질에게서 자유로우시다. 오리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구분하려 하였다.

  

 두 하나님들이 계시다는 진술에 대해 우리의 형제들이 화를 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리를 신중하게 공식화 하여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둘이며 또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이 한 하나님이신가를 보여야 한다.6)


 오리겐에게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며, 빛이시고, 엄격히 하나님이시다. 자존하시며, 비출생(非出生)하신 분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시나, 두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2) 성자

  

    아들은 그냥 ‘하나님(θεος)’이시며, ‘그 하나님(ὁ θεος)’이 아니시다.7) 아들은 영원 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다. 본성으로 아들이시며 창조에 나타난 로고스(말씀)요 지혜시다.8)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그 하나님’과 그냥 ‘하나님’으로 구분하면서 ‘성자 종속’을 시사한다. 아들을 관사 없는 ‘하나님’으로 호칭하면서 ‘비슷한 실체’로 생각하여, 사실상 ‘동일 실체’를 부인 하였다.

  하지만 아들을 피조물로 보았는가에 대하여는 부정하였으며,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아들이 있기 전에는 아버지 일수 없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공통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며, 바울은 성자를 영원한 빛의 ‘광채’라고 한다. 그러므로 빛이 광채가 없을 수 없듯이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진리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지혜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생명이 존재 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그러나 우리는 ‘그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οΰκ ἔστιν ὅτε οὐκ ἤν)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 이런  단어들은 일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사용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하는(transcending all time)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9)

  (3) 성령


  성령은 역동적인 실재시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활동한다. 즉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서 은혜를 받을 가치 있는 자들에게 해당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부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성자, 성령의 성부에 대한 열등성을 말한다. 오리겐은 그의 저서 “제 1원리에 관하여”에서 성령께서 성부보다 더 열등하시다고 말한다. 당시 이러한 ‘종속설(Subordinationism)’은 니케아 이전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다.10)

  성령께서는 로고스로 말미암아(through) 지은바 되었다고 보았는데, 이것 역시 그의 자유로운 사변에서 터툴리안처럼 성령을 아들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성으로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하시는 것 외에 특별히 자신의 피조물들 안에서 하시는 사역이 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성으로 이성을 부여하시는 자들에 대해 하시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 그것은 존재하는 자들에게 안녕을 베푸시는 사역이다. 또한 성령께서 받을 가치 있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또 다른 은혜가 있다. 그것은 비록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자들의 공로에 따라 성부께서 효력을 일으키시는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되는 은혜이다.11)


  이처럼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은 성부는 존재의 영역, 성자는 이성의 영역, 성령은 성도의 영혼 가운데 활동한다. 이중 성령의 역사는 가장 작은 영역에서의 역사이면서, 가장 중요한 역사이다. 즉 삼위는 동일 실체적인 하나가 아니라 등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2) 이러한 오리겐의 성부, 성자, 성령의 등급에 따른 종속적 관계는 후대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동방 정교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으며, 이것을 아리우스(Arious)는 ‘종속론’, ‘삼신론’으로 발전 시켰고, 오리겐의 제자 나지안 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위격의 구분으로 발전시켰다.



2) 창조론


  오리겐의 사색적 이론 체계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장면이라고 생각하였다. 첫 장면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희랍어 동사는 “창조하다(to create)”인 반면에, 두 번째 장면에서는 “형성하다(to form) 혹은 형태를 주다(to shape)"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13) 여기서 최초의 창조는 순수한 영적인 것이고, 이것은 육체를 갖지 않은 영혼들이었다. 이 영적인 존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들이다.

  모든 영적 실재들은 자유한 행동자로서 창조되었는데 이 자유의 결과로 죄를 짓게 되었다. 이후 모든 영적 실재는 그들의 타락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고, 그들이 거할 곳도 정해 졌다. 이때 높은 영성에 도달한 존재들은 신적 존재, 천사, 인격화된 성신 등으로 나타나고, 이들을 위해 천국을 만드셨다. 가장 타락한 사탄과 악마들은 어둡고 저급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다. 이러한 두 계급 중간에 육체를 입은 인간을 만드셨는데, 이 세상을 창조하여 이들을 훈련시키신다. 인간의 영 혹은 영혼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정화되어 천사의 위치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선재한 영혼들의 타락을 설명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생각을 빌려온다.

  오리겐의 이러한 사색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자기 앞에 닥치는 모든 고난들은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세계는 인간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이레네우스의 사상과 악은 선이 결여된 상태이며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서 세상의 무질서가 야기되었다는 플라톤의 전통을 이용하였다.14)



3) 기독론


  모든 영들이 타락했으나 한 영혼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 영혼이 신적인 로고스(Logos)와 연합하게 되었다. 이 연합이 유일의 성육신 한 구세주를 구성하였다.15) 인간의 영혼은 죄로 인하여 사탄의 지배에 들어가 포로로 잡혀 있으므로 이러한 사탄의 세력을 부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사탄에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대속물로 내어 주었다. 이때 고난 받은 것은 타락에 참여 하지 않은 순수한 영이었고 로고스가 아니었다.

  이 같은 두 성질 즉 신성과 인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두 성질은 서로에게 대하여 그대로 미치게 된다. 이러한 “속성 교류16)”는 후일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주된 이론이 되었다.



4) 종말론


  오리겐은 눈에 보이는 물질계는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물질계에 속한 생명은 짧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범죄한 인간은 영혼을 정화시킬 ‘불’에 연단된 뒤 원상 복귀된다.17) 이때 사탄 역시 인간과 같은 영적 존재이므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탄 까지도 구원하시고 일체 피조세계이 모든 존재는 순수한 정신으로 존재하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여기서 ‘만유 회복’, ‘보편 구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렇게 회복된 영적 존재들은 이전과 같은 자유를 누리므로 다시 타락할 것이며 새로운 물질계가 창조되고 다시 구원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순환이 영원히 계속 될 수도 있다.


5) 예전관


  오리겐은 세례를 통하여 사죄를 얻는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기적이 구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세례의 행위는 정결케 됨의 상징적 표시였다. 실질적인 은혜는 세례행위가 아니고, 세례시 수반되는 기도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보았다. 세례는 사죄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예전이다. 그리고 세례 후에 범한 죄는 회개를 통하여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점은 오리겐의 복음주의적인 사고를 발견하는 예가 된다.



3. 성서 해석


  그노시스파와 논쟁을 거치는 동안 희랍 철학의 개념으로 기독교 진리를 해석해 오던 오랜 과정이 완료된다. 마르시온과 같은 문자 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성경의 상징적 해석(allegory)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찍이 필로가 이러한 해석 방법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데, 오리겐에 있어서 성경의 통일성 있는 해석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서 해석 방법을 적용함에 있어 그는, 성서는 모두 삼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로, 성서는 물질적 혹은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 성서는 정신적 혹은 도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셋째로, 영적 혹은 사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성서의 진정한 의미의 내용이다.

  항상 문자적 의미 뒤에 숨겨진 영적 의미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문자적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문자적 의미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레위기의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인간적인 법률, 즉 로마법, 아테네법, 스파르타법등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틀림없이 절대자이며 지혜이신 하나님이 주신 법이다.

  앞서 언급한 데로 오리겐은 그리스도를 성경해석의 중심이자 열쇠로 보았는데 구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 혹은 그의 몸의 반영 내지 예표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비유적 성서 해석 방법이 필요하였다.



4. 저서


  오리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20여 년 동안 교육과 집필 활동을 하면서 이룩해 놓은 성경 연구 분야는 가히 경이적이다. 그의 열정 적인 연구 결과 요한복음, 마태복음, 아가서, 시편, 에스겔서, 이사야서 등에 대한 주석을 집필 했으며,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무려 60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였다.

  오리겐은 당시 유대회당의 여러 대표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양측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교회는 70인경(Septuagint, LXX) 번역판을 사용하였고, 헬라 회당은 문자적인 번역판들인 심파쿠스(Symmachus), 테오도시온의 책들(Theodosian), 또는 아퀼라(Aquila)가 140년경 광신적이라 할 정도의 문자적 번역본을 사용하였다.18) 이뿐이니라 기독교에서는 성경 구절을 그 목적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약간씩 수정을 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논쟁 중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구약 원문이 기독교에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에 따라 󰡔헥사플라󰡕(Hexapla)가 집필 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구약 번역판들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공관서였다. 즉 6개의 단(column)을 가진 대조판이라 하겠다. 단(column)속에 히브리 원문과 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19), 그리고 네 개의 헬라어 번역판을 배치했다.

  오리겐은 70인경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70인경에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확고한 권위를 세울 목적으로 집필하였음을 배제할 수 없다.

  오리겐의 주된 활동 분야 중에 하나는 이단에 대하여 정통 교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그노시스파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던 중 부분적, 개별적 반박의 어려움을 느끼고 기독교 전반에 걸친 교리를 체계적으로 세워 문제가 되는 그들의 중심 교리를20) 물리치고자 했다. 이렇게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이고 광범위 하게 해석하기 위해 󰡔제 1원리들에 관하여󰡕(On Frist Principle)를 저술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오리겐 초기의 작품으로 4권으로 구성 되어있다. 제1권은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은 물질적 세계와 인간과 인간의 영혼, 제3권은 자유의지와 악마와의 투쟁 그리고 선의 궁극적 승리, 제4권은 성경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21)

  4세기 말 아퀴레이아의 루피누스(Rufinus of Aquileia)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는데, 번역도중 문제가 되는 진술에 대해 오리겐의 다른 저술에 근거하여 수정을 가했다. 이후 제롬(Jerome)에 의해 다시 원문 그대로 출판되어 원래 의도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제 1원리들에 관하여󰡕는 “최초의 조직 신학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오리겐에게는 친구이자, 부유한 후원자인 암브로즈(Ambrose)가 함께 했다. 암브로즈는 오리겐의 저술 활동을 돕기 위해 7명의 속기사를 두고 그 비용을 자비로 지불하였던 사람이다. 이처럼 각별한 사이인 오리겐은 암브로즈에게 󰡔순교에의 권면󰡕(Exhortation to Martyrdom)이라는 설교문을 바쳤고 󰡔기도에관하여󰡕(On Prayer)를 헌정하였다.

  이중 󰡔기도에 관하여󰡕는 231년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서, 기도한다고해서 어떤 사건의 발생 및 그 결과에 아무런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론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246년부터 248년 사이에 쓰여진 󰡔셀수스를 반박하여󰡕(Contra Celsum)는 암브로즈의 설득으로 셀수스의 󰡔진리의 말씀󰡕(Words of Truth, 170-180)중 주요부분을 하나씩 인용하여 각각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그 결과 후대 독자들은 에피큐리안이었던 셀수스의 의견과 오리겐의 의견 양쪽 모두 들을 수 있어 초기 기독교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외에도 󰡔스콜리아󰡕(Scholia), 󰡔설교집󰡕(Homilies)과 논문, 소작들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Ⅲ. 결론


  오리겐의 일생은 마르시온, 발렌티니안, 양태론자들, 양자론자들, 가현설자들, 각종 천년왕국론자들, 영지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이단을 반박하고 정통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자유의지, 하나님의 선하심, 구약의 가치성, 구약과 신약의 일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 로고스의 인격과 사역 등을 체계적으로 진술하였다. 그의 깊은 정신적 사고의 규모는 가히 경탄 할 만하며, 이것 때문에 많은 숭배자들을 소유한 것이 사실이다.

  오리겐의 신학 체계는 니케아 이전 교회의 위대한 학문적 성취였으며, 후에 동방교회 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오리겐은 헬라 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신자라기보다는 플라톤주의 자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그의 금욕적, 지성적 삶은 이단을 제지하고, 장차 일어날 범교회적 대 연합의 토대가 되었으며, 아울러 수도원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399년(혹은 40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한 공의회와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엄격한 정통파에 의해 정죄 당한다. 물론 영혼의 선재,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 성자, 성령의 성부 종속설, 만유 회복 등의 주장은 지나친 사색에서 비롯된 비 성경적인 진술이다. 그러나 3세기의 뛰어난 신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이들 중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그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 모두를 위한 예리한 돌’22)이라고 하였다. 그의 깊은 신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위격의 구분이 가능했으며 후대가 하나님을 더 깊고 넓게 알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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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환, 󰡔기독교회사󰡕, (서울: 총신대하교출판부, 1999).


김해연, 󰡔서양교회사󰡕, (서울: 성지출판사, 1999).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4).


서철원, 󰡔기독론󰡕,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2006)


유스트 L.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은성출판사, 1993).


윌리스턴 워커, 󰡔세계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헨리 체드윅, 󰡔초대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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