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
2007/10/02, 조회 : 36, 추천 : 0 |
필자의 글 다수가 그렇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칼럼이기보다 건전한 비평문을 소개하는 셈이다. 물론 독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번역/요약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글이 매우 길어져 목차가 필요해졌지만 관심 있는 독자들은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알파 기독론 비평은 이 글로 일단 끝내고..앞으로 기회가 되면 알파에 대한 좀 더 깊은 차원의 분석을 하게 된다. 이번 글 역시 '알파 토크'를 심층분석한 더스티 피터슨의 글을 대폭 활용했다. 피터슨과 필자는 상호 협약 관계이다. [책 제목은 영어 원서를 가리킴.]
목차 성육신 예수님의 수침례와 성령님과의 관계 크리스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아들이심 경악할 사실 몇 가지 성경이 말하는 크리스토의 신성 야웨이심 알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나?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분 속에 계신 하나님 성부님과 구별되시는가? '삶에 관한 물음들' 성경 인용 주님의 신성 이슈에 관한 알파의 흐릿함 결정적인 흐리멍덩함 성삼위라는 의미 검블의 영웅들 '탐구적 이슈들', 그 제7장 알파의 크리스토 신관 요약
성육신
계시록 19:11~15은 크리스토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명시해 준다. 저 유명한 요한복음 1:1도 태초에 말씀(로고스 즉 성자님)이 "지음 받았다"고 하지 않고 이미 계셨다고 했고, 1:3도 오히려 만물이 그분 즉 말씀에 의해 지음받았다고 했다.
주님이 자신을 창조할 순 없으므로 논리적으로 피조물이실 수 없다. 그리고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이셨고 아울러 만물의 창조주이셨으며 따라서 성육신 하시기 전, 참 신격(위)이셨음을 확신시켜준다. 그런데 이것을 알파 참석자들이 알게 될까?
알파토크에서 주 예수님은 결코 '말씀'(the Word)으로 불리지 않는다. '환생되다'(reincarnated)란 낱말은 어디선가 한순간 쓰였지만 예수님에 관해 '성육신'이란 말도,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도, 요한복음 1장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위의 세 구절도 인용되지 않는다. 이런 생략은 주님이 인간으로 나시기 전 과연 본래 선재하셨는지 의문시하게끔 만든다. 이 중추적인 이슈에 관해 우리는 알파 출판물에 명확히 해주는 부분이 빠져버린 것을 발견한다.
HTB는 다음을 언급한다. "예수 크리스토의 탄생". "예수님이 나셨을 때". "그분의 탄생 장소". "예수님의 탄생 수 백 년 전"..
그런데 여기에 '육신을 입고'(in the flesh) 또는 '인간으로'(as a man)란 간단한 낱말들을 붙이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토크8'에서 검블은 주님의 탄생을 네 번 '참조'하지만 단 한 번도 탄생 전 선재하셨다곤 설명하지 않는다. 과잉 '알파 자료' 속에서 우리는 단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어구가 딱 한번 발견되는데 그나마도..
(a) '말씀'이 예수님의 본성/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b) 최소한 신격/위를 시사하는 듯 보일 수도 있는 대문자 'Word'가 아닌 소문자 'word'를 썼다. (c) 해당 성구를 인용하지 않고 단지 윌리엄 템플 인용문에서 나타난다. (템플은 구세주 님에 관해 어떻게 가르치든 거의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교회들을 추천하던 인물이다.) (d) 적절한 성구 또는 '말씀'의 참 의미를 해설해 주는 어떤 참조 성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이 인용문의 컨텍스트는 대다수 비신자들에겐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님이 아버지의 지시를 육화해 냈다거나 아버지의 아이디어를 육화해 입혔다는 정도가 돼 버린다.
[하나 덧붙이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또는 'God's Word')이 알파토크에 14회 나타나며 일부는 성경을 올바로 적용하지만, 예수님의 신격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매우 불행한 일이다! 주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the Word)이시듯, 성경은 책으로 된 그분의 말씀(Word)의 계시다. '기록된 말씀'과 '성육된 말씀'의 이런 심오한 관계가 깨버린 가운데 알파 참가자들은 성경의 견해를 수준 이하로 심각하게 폄하하여 보기가 쉬울 성 싶다. 기록된 말씀이 예수님처럼 완전하고 성경이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음을 그들이 이해한다면 그들은 말씀을 더욱 존중할 텐데 말이다.]
예수님의 수침례와 성령님과의 관계
예수님은 (성육신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1:18~20). 어릴 적 부터 지혜가 가득하고..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뤀 2:40,52). 알파의 입장은 어떨까?
검블은 예수님과 주변 사람들을 현저히 구분하는 듯 싶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채우심 받았다"고 말하면서 마리아/침례(세례)요한/엘리사벹/자카리아 등을 열거하곤 정작 예수님에 대해선 아무 말을 않는다. 그의 책 '삶에 관한 물음들'(122,123쪽 참조). 알파 매뉴얼도 시메온까지 곁들이면서도 예수님 자신에 대해선 함구한다.
그런데 과연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기 전 구약시대에 해당하는 이떄, 이 사람들이 성령의 '채우심'을 받았을까? 구약인들을 보면, 대언자/장로/사제/판관(사사)/왕 등이 혹 성령의 기름부음, 감동은 받았어도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없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만약 오순절 강림 전에 성령의 '채우심'을 받았다면, 신약이 구약인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신약인들은 더 나은 언약을 누리고 있다고 말해 준다. 복음서는 분명히 오순절 강림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마저도 성령이 내리신 적이 없다고 명시한다. 왜냐하면 오순절 전까지는 사실상 모두 구약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검블은 이 점을 놓치고 있으며 그만큼 신구약인들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얘기다. 아울러 위에 나열한 탄생 당시 주변인들만큼도 예수님께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었다는 냄새를 은근히 풍기고 있다.
검블은 "침례요한은 성령님과 예수님 사이를 연계시킨 첫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검블의 '연계시켰다'는 말은 "연계시켜 말한 사람"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검블은 착각 또는 오도(?)하고 있다. 예수님과 성령님을 연계시켜 말한 사람들은 구약 대언자들도 있었고(예: 이 61:1~3) 복음서에서도 침례요한 이전에 이미 시메온과 안나 등이 그런 연계를 지었다(뤀 2:25~38). 대천사(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잉태예보를 할 때도 분명히 연계지었다(뤀 1:35). 요한의 아버지 자카리아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연계를 지었다(뤀 1:67~79). 검블은 뭔가 모르게 '연계'(link)란 말로써 다른 뜻을 시사하려는 듯 하다.
검블은 "침례요한은 그분(즉 성령님)과 예수님을 연계시킨다"라고 쓰면서 다시 '연계'란 말을 사용한다. 사뭇 애매모호한 말이다. 마치 주 예수님과 성령님 사이를 연계시켜 준 장본인이 요한이기라도 한 양. 요한에게 그런 신적인 권능이 있었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검블이 믿음이 아닌 물세례로 성령침례와 구원도 받는 것처럼 가르치는 카톨릭적 사상을 설파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혹스러워진다. 또..일부 프리메이슨들이 요한을 고대 '메이슨'의 한 명 또는 프리메이슨리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왔다는 점도 떠올려진다. 물론 성경적으로 가당치 않은 헛소리들이다!]
실제로, 검블은 에수님이 침례의 결과로 성령침례를 받은 것처럼 묘사한다(삶에 관한 물음들, 123,124쪽 참조). 그러나 침례 당시 예수님이 온전한 성령강림을 받으신 것은 이 때에 맞춘 하나님의 경륜(=타임테이블)에 따른 역사이지, 요한의 물침례 '권능' 때문이 아닌 것이다. 검블은 또한 요한에게 물침례 받은 사실만 주로 강조하면서 수침한 바로 '그날'(today)로 말씀이 사람들의 귀에 응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물침례 후에 겪으신 40일간의 광야 금식기도와 마귀 유혹을 물리치신 승리가 매우 중대한 사건임을 간과하려는 소치 같다.
크리스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크리스토는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분)의 그리스어이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된 메시아임을 명언한다(요복 1:41~45, 4:25,26, 다 9:25~26). 성경은 주님을 '예수 크리스토'라고 189번 표기했다. 하지만 알파는 이 점에서도 모호한 입장.
물론 니키 검블은 '예수 크리스토'란 말을 상당 회수 사용한다. 그러나 '메시아', '크리스토'의 말뜻을 풀지 않는다. 또 거기 비해 '예수'라는 말만 총571회 사용한다. '크리스토 예수'란 말은 예수님이 단지 자기 속에 '크리스토'(여기선 다소 일반적 개념으로 뉴에이지에서도 사용함)가 역사하는 사람이 아님을 명시해준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말이 알파 토크에선 기껏 8회 밖에 안 나온다.
심각한 사실은, 검블이 우리가 곧 '크리스토'라고 가르친다는 점. "사실 교회가 크리스토 입니다"(토크14). 카톨릭적, 뉴에이지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예수님의 본질을 약화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사람의 본질을 더 증대시키는 말이다. 남편이 아내의 몸을 소유하듯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 속하므로 우리가 그분의 몸이지, 우리가 그분 자신은 아니다! 따라서 '크리스토' 또는 '메시아'는 예수님께만 속한 타이틀이다.
검블은 또 "몸이 머리를 완성하듯 교회가 크리스토를 완성합니다"라고 엄청난 비성경적인 발언을 해댄다('30일'. 52쪽). 예수 크리스토는 이미 스스로 완전하시니 '완성될' 필요가 없으신데도.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몸을 갖고 계신다. 그분이 머리되심은 곧 우리의 주 되심을 의미한다. 또한 크리스토의 몸은 눈과 귀, 즉 머리 부분까지 함께 완전하다(코A 12:12~21). 우리가 크리스토를 '완성'한다면 우리가 신적 존재라는 말이 돼버린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본래 무익한 종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그분의 유일하신 아드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무리다.
아들이심
예수님은 아울러 하나님의 유일한 아드님이시다(요복 3:16, 6:66, 18:1, 요서A 4:9 ). 과연 알파도 성경대로 주님의 하나님 아들이심(Sonship)을 믿는가?
검블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다"(claimed)든지 제자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말한다(토크2,3,4 참조). 페트로와 같은 고백을 감히 하지 않는다(요복6:66). [검블 자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고 고백하고 입증하는 대신, 천사나 C.S. 루이스의 말을 대신 빌린다.] 검블은 그의 토크에서 결코 예수님을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고 칭하지 않는다! 비신자나 독자들은 '독생하신'(begotten)이란 말을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 검블은 그러나 이 말을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검블은 크리스토 예수를 '하나님의 고유한(unique)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흔히 일반인들 듣기에 사람 각자가 고유하니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같은 유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셈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아들이심(Sonship)은 우리처럼 입양(adoption)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시하지도 않은 채.
검블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한 유일하신 아들'(the one and only son of God)이라고 부른 적은 수 회 있다. 그러나 '한 유일한-'은 '고유한'의 완곡어법이기도 하다.
검블의 다음 말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나는 빌리 브레이라는 인물을 사랑합니다..스물아홉살 때 크리스토께 왔죠..그는 이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됐습니다..그는 말합니다. '나는 젊은 왕자입니다.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the son)이기 때문이죠. 나는 한 임금님의 (그) 아들(the Son)입니다! 그것이 그분이 즐기는 표현법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순 없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토크9)
위 문장에서 한 아들(a son)이 아닌 '그 아들'(the son)이라는 표현은 자칫 예수님과 동격시 하는 결과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니키 검블은 그 어떤 토크에서도 동정녀 탄생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성경은..100% 인간들의 작업입니다..예수님이 완전히 인간이신 것처럼."이라고 말해 버린다('삶에 관한 물음들 171쪽').
이같은 말들은 성경이 익숙지 않은 알파 참석자들에게 주님은 하나님의 입양된 '한 아들'(a son)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결과가 돼버린다. 사실 예수님은 진짜 육신의 아버지도 아닌 요셒에게마저 '입양아'가 아닌 인간 계보로서의 친아들인 셈이었다. 즉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도 요셒의 서자나 양자로 불리진 않았다는 말이다. 하물며..예수님이 하나님의 '양자'일 수 있는가? 검블은 필맆이 예수님을 '요셒의 아들'로 부른 사실을 퍽 강조하면서 아무런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토크12).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기를 선호했고, 그밖에도 최근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요셒의 아들 예슈아'는 한 둘이 아니다. 신약기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밖에 경악할 사실들
* 검블은 '탐구적 이슈들'의 한 장에서 성삼위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 검블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claim)한 데 대한 "..증거가 과연 무엇일까요?"라고 묻고 "그 첫 부분으로서 그분의 삶을 봐야 한다"고 덧붙이고 나서는 실제로 해당되는 삶의 면모를 다루지 않고 흐릿하게 처리해버린다. * 코커가 지적한 대로, 검블의 '삶에 관한 물음들' 전권에 성탄에 관한 해설이 없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가르침을 피하기 위해설까? 따라서 알파의 비신자 참가자들에겐 예수님의 잉태가 여느 인간과 다름없다고 느껴질 수 있다.
니키 검블은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누가 예수냐?" 라고 한다('30일' 41쪽). 같은 책에서 그는 예수 크리스토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분이 뉘신지를 아는 것은 치명적 중요성을 갖는다. 특히 예수 크리스토의 신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크리스토의 신성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지만(요복17:3), 그분은 성삼위이시다. 세 신격은 서로 특성을 지니시지만 따로 분리할 수 없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므로 많은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파생된 신성을 지닐 뿐이라고 주장하려 든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억측을 잠재운다(롬14:10b,12, 행4:24, 콜2:9, 행17:59, 히1:3, 요서A 4:19, 필포2:6 등).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아담에게서 태어나 원죄로 물들어 있으셔야 했다. 그렇다면 그분은 죄성을 타고 태어나 결국 그분의 십자가도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 없으셨다. 오직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만약 완전한 죄값을 치르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런 시도는 하나님 앞에 가증거리일 뿐이다(갈라티아서 참조). 주님의 하나님되심은 그 어떤 '대안' 교리의 가능성도 물리친다.
여호와이심
'야웨'는 참되신 하나님의 특별하고 고유한 이름이다(출6:2~3, 시83:13,18). 비할 데 없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이 너무도 거룩히 여겨 감히 부르지 못하고 '주님'(아도나이), '이름'(하 쉠)으로 대체한다.
창18~19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 역시 야웨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을 뜻하며 이사야 12:2에서 "하나님은 나의 구원(예슈아)..주 야웨는 나의 구원"이라고 했으니 진정 예수님은 야웨 하나님이시다!
'야웨'란 뜻은 '나는 있다'(I AM) 즉 자존자를 뜻한다(출3:14). "나는 늘 있다"(I have always existed)란 뜻이니,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속성이다. 이 속성이 예수 크리스토에게도 해당한다(요복8:58). 즉 예수님은 야웨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알파코스는 이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가? 니키 검블은 비록 '신적인 이름'을 의식하지만('삶에 관한 물음들' 189쪽) 실제로 '야웨' 또는 '여호와'란 이름을 알파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진술 한 가지는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이다'고 하고 다니시지 않았다"는 것(토크2 참조). 그러나 "내가 있다"(I Am)란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이며 예수님도 그 말씀을 하셨다(요복18:4~8).
알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나?
알파코스 지도자들은 니키의 책 '탐구적 이슈들'(Searching Issues) 제7장과 토크2,3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게 한다고, 그래서 알파가 전적으로 이 문제에 건전하다고들 확신한다. 하지만, 그러나 다른 알파 발행물은 둘째치고라도 '탐구적 이슈들'의 나머지 6장에 문제가 많다.
알파토크도 토크2,3 말고 나머지 12에도 많은 오류가 있을 여지가 있다. 우선 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바 크리스토의 신성을 명증하는 21개의 성구가 단 하나도 알파토크나 '삶의 물음들'에 나타나지 않는다. 토크2,3이나 탐구적 이슈들의 적절한 부분에마저도 없다.
알파의 어떤 발행물에도 "예수 크리스토(또는 크리스토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거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란 문장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랄 만 하다. 알파에 필수적으로 들어있을 만 한데도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가?
알파토크엔 '신격'(deity)이란 말은 안 나오지만, '신적'(divine)이란 말은 나온다. 그나마도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검블의 책을 보면, 주님의 '신성'(divinity)을 언급하고 있다. '삶의 물음'들에서 예수님을 '신적 형상'(the divine figure)라고 불렀다. 또 책 뒤의 '연구지침'(Study Guide)에서 "그분(예수)이 신적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239쪽) 고 묻는다. 문제는 '신적'이라는 말과 유일한 참 하나님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뉴에이지마저도 예수 크리스토의 신적임(divinity)을 믿지만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신성에 관하여 알파가 딱 하나 참조한 성구는 요한복음 1:1. 불행히도 검블은 이 치명적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즉각 약화시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친교 관계의 한 분(a person)이었고 말씀은 영원히 신적(divine)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고(was God)"라는 완전하고 선한 문구를 왜 "신적이셨다(was divine)"로 바꾸는가?!
니키 검블은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fully God)이셨음을 이해한다"는 남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토크3 참조). 물론 듣기에 좋지만, 검블은 이내 '완전히 하나님'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이..온전히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유추해서 설명해 보죠. 크리스토퍼 렌 경은 성 파울 대성당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는 단 한 개의 돌도 쌓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쌓았습니다. 그는 일꾼들을 시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 작업을 지시했죠." (토크 5).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전히 '지시'하셨거나 온전히 영감을 주셨다는 의미에서만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된다. 검블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쓰면서 재확인한다. "성경은..단지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이시듯 100% 하나님께 영감되었습니다."('삶의 물음들' 71쪽). 성 파울 대성당 비유를 통해서도 대성당이 결코 렌 자신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이 이 유추에서 나오지 않는다.
검블은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한다. "이 분(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거나 미치광이 또는 더 나쁜 분일 수도 있다.."(토크2). 그러나 온갖 증거가 후자일 가능성을 배제하므로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전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 표면상 그럴 듯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안주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로부터 어떤 하나님되심(Godhood)가 귀결되냐를 청중/독자에게 확실히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예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분의 '신적임'(divinity)아 좀 덜떨어진, 파생된 속성이냐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것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볼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정확한 '정형'(type) 또는 정의는 극히 중대하다! 뉴에이저들은 예수 크리스토를 '한 신'(a God)으로 믿으며 하나님이 그분 속에 살아계시다고 믿는다. 검블이 인용한 루이스 자신의 용어에 따르면, 뉴에이지적 개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서 적이 차지한 이 땅에 내리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대신에 말이다.
그분 '속'(in)에 계신 하나님
우리가 신자가 될 때 성령님이 우리 영 속에 내주하신다(요복14:17, 요서A 3:24).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각 신자 속(in)에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말하는 대신 예수님 "속에"(in) 하나님이 계신다고만 한다면 크리스토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경을 파괴하는 말일 수도 있다. 니키 검블의 다음 표현이 우리를 우려시키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서-as a man 대신] 한 개인(a person) 속(in)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우리가 그 분을 볼 때..예수님 안(in)에 계십니다." "예수 크리스토 개인 속(in)에 계시된 하나님", "하나님은..땅에, 그분의 아들 개인 속(in)에 오셨습니다." "예수 크리스토 속(in)의 하나님의 계시..".
이런 문구사용엔 어떤 설명이 곁들여지만 좋겠건만, 검블은 이런 말들을 '삶에 관한 물음들'의 한 장에서만 6회나 쓰면서 아무런 명확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장을 닫는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파울은 "'하나님은..크리스토 안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그 아드님 개인 속에 계셨습니다."
성경은 말한다. "누구든지 크리스토 [안에] 있으면 그는 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토 [안에] 계시어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코B 5:18,19). 앞의 [안에]는 하나님이 크리스토 안에 계시다는 말을 하려고가 아니라 심플하게 우리가 크리스토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 화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말씀은 그밖에도 잦다(롬3:24, 9:1, 코B 1:2, 15:22, 엪2:13, 필포 2:1).
그러나 검블은 이 구절을 어떻게 사용하나?
"파울은..말합니다. '하나님이 크리스토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파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크리스토 안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검블은 그의 책 '탐구적 이슈들'(20쪽)에서도 이 구절을 오용한다. 그런 용도의 컨텍스트는 고난 이슈에 관한 것으로, 그것이 주는 틀림없는 인상은 하나님이 주님이 재판받을 동안 하나님이 그분 속에 계셨기에 고난에 관해 아신다는 말이 된다는 것. 예수님이 '신적'이라고 불린다면, 알파 참가자들은 그분의 신성이 단지 부분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시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실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성삼위가 계시며 격이 다를 뿐 서로 분리되실 수 없다(요복10:38, 15:26 등). 분리될 수 있다고 하면 다신론으로 그치게 된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되신다는 의미에서만 '한 분'이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한 분이시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검블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대신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너무 자주 구분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즉 성부란 말을 쓰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왜 성탄절?'이란 얇은 책자의 4~6쪽에서 검블은 예수님의 신성을 지지하면서 주로 CS 루이스의 글을 한 묶음 인용한 다음, 7쪽에서는 모든 것을 뒤집어 예수님이 마치 하나님으로 분리되신 분인 양, 9쪽부터 22쪽(끝면)까지도 계속 그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30일'이란 책자에서 나란히 이웃한 두 쪽을 살펴보자. '아버지'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여기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음 문구에서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인상을 독자들은 받는가?
"예수님..예수님..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대로 우리의 참 자아들로서 자유롭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자유롭게 하신다..예수님은 말씀하신다..예수님은 하나님께 의하여 계시됐다. 예수님은..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이다..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준다..예수님..예수님.."
이같은 검블의 표현은 특히 이상스럽다. 왜냐하면 검블이 여기서 인용하는 성구들의 문맥상 거듭거듭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지지하고 있고 또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만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관한 물음들'
검블은 그의 모든 자료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서로 애써 구분하고 있음이 여실히 나타난다. '삶에 관한 물음들'에서만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란 식의 표현이 너무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같은 구분 내지 분리는 때로는 같은 페이지에 2~3회 나타난다. 그냥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면 간단하고 안전한데도 애써 피하는 모습이 비디오 토크에서는 더하다.
"하나님과 예수 크리스토의 관계 속에서의 삶"(21쪽). "나는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그분은 날 사랑하셨고..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51쪽).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그를 고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하나님..하나님의 영..하나님..이같은 방법(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역, 성령님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성취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64쪽).
성경 인용
이상은 검블 개인의 책자를 통해 살펴봤지만, 성경에 대한 검블의 접근은 더욱 많은 것을 노출시킨다. 마치 검블의 성경 번역판이 충분히 문제스럽지 않은 양 본문이 그렇지도 않은데도 더욱 더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킨다.
"우리가 방금 본 성구 하나는..에페소서 2:18입니다. '우리가 한 성령으로..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습니다."(토크9)
여기서 검블은 우리가 성부님께 나아간다고는 말하나 예수님과는 하나님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그는 성구를 나름대로 바꾸고 있으나 실수가 아니다. 같은 토크 안에서 반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습니다." 그는 여기서 삶에 관한 물음들(85,132쪽)에서 (별도의 두 장에서) 한 것을 똑같이 거듭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루카복음 11:13에서 검블은 "그대들의 하늘 '아버지'"를 "그대들의 하나님"으로 교체하며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는 효과를 얻고 있다. 검블은 요한복음서 14:6에서도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대체한다. 요한 17:3도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클시ㅡ토를 아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시사한다(토크3).
그러므로 알파 참석자들의 간증에서 예수님이 언급되는 희귀한 경우에도, 예수님과 하나님이 흔히 분리된 채 증언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주님의 신성 이슈에 관한 알파의 흐릿함
전체 700쪽 이상 되는 알파의 네 책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증언한 곳은 단2~3군데 뿐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시사한 듯한 순간도 있지만, 모든 경우 한 가지 또는 다른, 또는 여러가지 애매모호함이 깔려있다. 예를 들어본다.
*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진술들은 줄기차게 계속, 불필요하게 여러 절과 문장으로 흐트러져 있어 늘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이다.
* 검블은 때로는 마치 준비된 양, 예수 크리스토의 신성을 믿었던 타인들(예: 대체로, 제자들 또는 초기교회)의 말을 빌리지만, 그런 사람들의 말이 옳았음을 자신도 믿는다는 말을 으레 회피한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란 말 대신 "그분은 초기교회가 하나님으로 예배한 그분입니다"라고 에둘러 말한다.
*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문장들은 불필요하게 둘둘 말려 꼬여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란 말 대신 "나는 그분이,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이셨던 한 사람이었음을 의식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매우 해괴스런 문장을 발견한다(토크2 참조). 또는 이런 식이다: "예수님은 여러 번 직접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의 존재로서 간주하셨음을 보여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알파의 요상스런(?) '안개'성 내지 '꽈배기'성 신관은 예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결정적/단언적으로 진술하는 데 여지없이 실패하고 있다. 그 대신 의심스럽게 흐리는 쪽을 의도적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검블은 말에 능한 법정 변호사 출신이므로 이 근본적/핵심적 이슈와 교리에 관해 흐리멍덩한 진술을 할 핑계거리가 있을 수 없다.
검블은 말한다.
"초기 교인들은..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특별한 무엇이 있음을 보게 됐습니다."
이런 말은 혹시 신자에겐 검블이 건전하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비신자들에게는 이 문구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주진 않는다.
먼저 초기교인들의 그런 생각이 옳았다는 심증이 가야 한다. 둘째로, 초기교인들은 신자가 되고나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게 된" 게 아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음을 믿고 인식해야 했다. 셋째로, 위 문장은 예수님의 '무엇'(something)이 하나님이었다는 얘기지,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하고 있지 않다. 넷째로, 전체적인 인상은..단지 언어적 제한 탓에 이 '무엇'을 하나님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되고 만다.
결정적인 흐리멍덩함
"예수님은 주장하셨습니다(claimed)..자신이 정말 그의 정체성이 하나님이신 한 사람이었다고(토크2)."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하신 예수님의 주장".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또다른 간접적인 주장을..(하셨습니다)."
표준어법상, 존 웨즐리의 '아이덴티티'를 가졌다면, 그가 웨즐리의 여권 등 신분증을 훔쳤든지 아니면 자신이 곧 존 웨즐리일 수 있다. 그러나 검블식 의미로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 개인이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초기신자)은 그분(예수님) 곧 그 정체성이 하나님이신 한 사람, 그러나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으신 그분을 보러 왔습니다."('탐구적 이슈들' 100쪽).
"예수님은 자신을, 정체성이 하나님이신 한 사람으로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검블은 여기서 심리학적 차원으로 들어가, 의식과 잠재의식을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성삼위라는 의미
많은 사람들은 니키 검블의 책 '탐구적 이슈들' 중 '삼위일체는 비성경적이고 믿을 수 없고 비합리적인가?'란 제목을 보고 검블을 순수한 성삼위일체론자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검블의 성삼위 개념에 문제가 있다. 성경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말하면서(갈 3:20, 마19:17 등) 동시에 하나님 신격의 복수성(예: 엘로힘은 복수)을 말한다(창 1:26, 11:7의 '우리' 참조). 사람이 한 명이면서 영/혼/육 3차원임과도 마찬가지.
검블은 성삼위를 말하면서도 아버지/아들/성령 세 위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엿봤듯, 그는 '아버지'를 늘 '하나님'으로 대체하여 말한다.
"[하나님]에 관하여, 예수님에 관하여 성령님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주요 방법.."(토크5).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일, 그리고 성령님의 증언". 위에서 검블이 아버지/성부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를 '하나님'으로 대체한 것을 눈여겨 보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우리의 구주로서의 예수 크리스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아버지이시기도 하다(이사야 9:6. 참조: 요복 14:23). 검블의 교회 이름이 성삼위브롬튼 성당이건만 검블은 '성삼위'란 말을 좀처럼 쓰지 않으며, 쓰더라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구분하려는 기색이 뚜렷하다.
검블의 영웅들
니키 검블은 예수님의 신성을 심각하게 평가절하 내지 폄훼한 명사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폴 틸리히, 위르겐 몰트만, 한스 큉, 맬컴 머거리지, 펜튼 존 앤터니 홀트 등. 검블은 레오 톨스토이, 아이잭 뉴튼, 에리히 프롬, 존 러스킨, 함마슐트 등, 크리스토의 신성을 전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크리스천'으로 부르고 인용하길 즐긴다.
'탐구적 이슈들'의 제7장
이상에도 불구하고 검블이 '탐구적 이슈들' 제7장을 모두 성삼위에 대해 썼기에 검블이 성삼위론자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이 제기될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보기로 하자.
1. 넘치는 혼동
* 이 7장에서 검블은 기대와는 달리 성삼위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고 믿도록 부추긴다. 성삼위는 인간으로선 상상하기가 어렵겠지만(이 경우 상상은 불허)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다고 생각된다.
검블은 성삼위에 관해 매우 부적절하고 매우 상호배타적인 유추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 영/혼/육 3차원으로 된, 인간 실존이라는 가장 괜찮은 유추는 빼버린다. 그는 "하나님을 상자곽 안에 넣을 순 없다"고 해명한다(105쪽). 그리고 우리는 단지 "성삼위의 희미한 개념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09쪽).
검블의 그런 혼동스런 유추 한 가지는 성삼위를 사람들 세 명이 차지하고 있는 '집'에다, 성부님을 그 집의 '건축가', 성자님을 '구입자', 성령님을 '입주자'로 각각 비유했다(106쪽). 그래서 알파 참가자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구입'한 셈이 됐고,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한에만 단지 (부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 해석해 버리더라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치명적이게도, 검블은 왜 성삼위일체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진리인지를 설명할 수도 없고, 기꺼이 원하지도 않는다(105쪽 참조). 검블이 독자들에게 진리대로 말해줬다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성과, 행위로선 얻을 수 없는 구원 등을 훨씬 더 잘 이해할 것이며, 최소한 예수 크리스토가 하나님이심을 더 잘 받아들일 것이다.
2. 신성의 격하
앞서도 상세히 논했지만 검블은 응당 크리스토의 신성을 입증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반대 결과를 낳거나 흐리멍덩하거나 초기교회 교인들이 그것을 믿고 있었음을 자신들이 발견했다거나(100,101쪽)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로서(as)가 아니라 크리스토 속에(in) 계셨다고만 주장한다. 또 성부/아버지와 성자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늘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만 애써 구분한다.
102,103쪽 두 페이지에서 검블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8번 구분한다. 장 끝부분에서는 에페소서 3:19로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 소중한 구절을 크리스토와 하나님을 구분하는 데 써 버린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에서 3회, 그것도 마지막 문단에서 2회 그렇게 한다. 그러니 참석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3. 거짓 정의
검블은 본 장에서 '성삼위일체'(Trinity)란 말을 '하나님이심'(Godhead)보다 훨씬 덜 쓰면서 근본적으로 의미를 바꿔 버린다. 'tri-unity'에서 비롯된 '삼위일체'란 말은 본래 세 신격이 하나의 본질을 이룬다는 의미인데, 검블에겐 세 신격이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본 장은 성삼위가 단순히 세 초자연적 존재가 가까이 연계돼 있고 서로 도와 일하되 그중 한 분만 참 하나님인 것처럼 시사된다. 검블은 "한 하나님 안에 세 신격"이라는 말 대신 "한 분 하나님...과 세 신격들"(104쪽) 또는 "세 신격들, 그리고 한 하나님"이라는 문구를 쓴다.
검블은 성삼위일체에 대한 일치된 조직적 교리가 나중에서야 생겨났다고 강조한다(103쪽). 그러나 사도 파울이 성삼위에 관한 일치하고 조직적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순 없다. 성삼위는 히브리어 성경만으로도 쉽게 시사된다. 검블은 성삼위의 다른 신격-성부님/성령님-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심각한 미스프레즌테이션을 저지른다.
알파의 크리스토 신관 요약
과연 알파의 크리스토 신관을 요약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스티 피터슨은 이하와 같이 분석한다.
"검블은 예수님의 신성이 마치 단지 부분적이고 파생적인 양 조직적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검블의 성삼위에 관한 가르침은 아리우스적(Arian)이다. 물론 검블 자신이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긴 했다('탐구적 이슈들' 103쪽). 그러나..
(1) 최종 분석에서, 검블의 자료들이 압도적으로 아리우스적으로 비친다면 검블 자신이 아리우스에 관해 말한 것은 불합리하다. 사실 아리우스에 관한 3쪽 분량의 언급에서 검블은 성삼위를 친아리우스적으로 유추하고 있다.
(2) 아리우스에 관한 검블의 말들을 정확하게 점검해 보면, 독자는 검블이, 아리우스주의가 이단임을 결코 명확하게 진술하지 않음을 주목하게 된다. 검블은 "아리우스가 이단설 탓에 출교됐다"고 언질은 하지만, 아리우스를 이단적으로 본 초기교회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지 않는다. 또 이단적이라고 평가된 것이 아리우스의 예수관인지 또는 아리우스의 다른 견해가 그의 출교 원인이었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
(3) 검블은 아리우스가 한 말을 바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아리우스)가 상상한 셋(3 신격)은 전적으로 다른 존재들이고 같은 본질이나 요소를 전혀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우스주의를 과장한 것이다. 검블은 또 아리우스와 반대되는 사벨리우스주의(양태론)의 잘못을 공격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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