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순서 (정리: 바로미)>
전통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황 등으로 언급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중생을 거듭남이라는 말로
말하기 때문에 거듭남 전에는 성화가 올 수 없으며 성화 전에는 영화가 올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특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과정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기도 합니다. 즉 -부르심(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
구원은 시간적으로 구분을 하나 성질적으로 구분도 합니다.
시간적으로 구분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즉 성경은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야 할 것으로
-장차 받게 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받은 구원의 단계들: 선택, 중생, 칭의, 양자됨 등이며..
-현재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 성화이고..
-미래에 받게될 구속: 몸의 부활로 성취될 영화라고
구분을 지을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성질적 구분은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이루신 것(선택과 대속 성취)
-우리에게 이루신 것(칭의와 수양)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과 (중생)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구분합니다.(성화)
신자의 의지와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이루시는 구원: 선택, 대속, 칭의, 중생, 양자, 부활
부분적으로 신자의 지정의와 몸의 활동을 통해 이루시는 구원: 성화
지금 카이로스님은 의의 구원의 순서적 이론으로만 구원을 논하기에
연속적 중생관이 마치 애매해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의 성질적 구분과 순서와 같이 연동해서 보셔야지만
연속적 중생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칭의의 순서에 대해서 전통 신학자들 사이에도 견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칭의를 신앙보다 먼저 놓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구속 적용의 순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만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카이로스님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칭의라는 명사가 일반적으로 신앙에 의한 칭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구원의 모든 서정보다 앞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야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칭의 즉 구원의 요소에서 말하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에
국한해서 하는 말임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근거가 되어서 또는 신앙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을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방편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신앙보다 앞섭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볼때)
중생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소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심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보아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없이는 저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믿음)과 회개는 하나로 묶어져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는 말이 회심입니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본다면..
선택, 부르심(소명), 중생, 신앙(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를
일반적 구원의 순서로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의사" 중 회심단계 요약 (요약자: 바로미)
글쓴이: 왕초보 번호 : 3891
조회수 : 65
2007.08.09 09:35
(1) 영적 수태: 초기 중생 --> 생명의 씨를 뿌리심(효과적 부르심-이는 짧은 순간에 이루어짐.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발생)
(수태되지 못한 영혼은 잠든 자, 눈먼 자, 갇힌 자, 죽은 자입니다. 죄인들은 수태 없이도 구원의 계획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저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더라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너무나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수태 없이는 복음으로 인한 어떤 깊은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합니다. 죄인들은 경고를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향락을 추구하는 것에 깊이 매료 됩니다. 수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에 오랜 세월 진지하게 생각지 않다가 수태 이후에야 마음이 열리게 되고 자신들의 직면한 영적 위험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수태는 지성, 감정, 의지 등 영혼의 모든 영역에 구석구석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살아나게 해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수태라고 부릅니다.)
(2)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동시사건 (수태-각성-죄의 확신을 한 사건으로 볼 수 있으나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은 독립적 범주로 넣는 것이 좋다)
(3) 회개와 믿음: 동시 사건(구도자들은 회심을 의식적으로 깨닫기 전, 수많은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세 번째는 거듭해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은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4) 칭의와 새출생: 동시사건(이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물론 전체 모든 과정이 새로운 출생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출생의 의식적인 단계를 의미합니다. 수태(초기중생-중생1)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되고 때가 되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의식적인 새 출생은 생명이 시작된 바로 그 시작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생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이 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새로운 본성을 받게 되고 상당한 정도의 확신을 하게 됩니다. 칭의란 하늘에서의 선언으로서 어떤 특별한 개인이 이제는 죄값을 치를 필요 없고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가 하늘에서 선포될 때, 회심한 사람은 이를 인식하게 되고(체험), 자신이 새로워졌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를 가지게 됩니다.(이 가시적 증표는 밑에 나중에 적겠습니다)
(5) 구원의 확신: 의식적 출생과 더불어 구원의 다섯 번째 단계인 구원의 확신 혹은 성령께서 인침의 단계는 보통 네 번째 단계인 칭의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조금 뒤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단계들:
세 번째 단계(회개와 믿음)는 오랜 기간에 거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 수태는 성령의 순간적 역사입니다. 네 번째 단계인 칭의와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새생명이 주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네 번째 단계 사이의 두 번째 세 번째 단계는 지속적일 수도 있습니다.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의 경험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지체가 되는 것은 언제나 죄인의 책임입니다.
<참된 회심의 일곱 가지 표지>
1. 참된 회개가 일어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며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만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매우 형식적으로 회개하거나 일부분의 죄에 대해서만 회개할 때 일어나는 죄에 대한 냉담하고 지적인 인정, 혹은 순간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만을 발견하게 된다면, 회심이 정말 일어난 것인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강렬한 감정입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깊이 근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용서 받음에 대한 큰 부담을 느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은 비극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성경이 말하는 회심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구도자가 죄사함과 새 생명 얻기를 진실하게 갈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슬퍼하며 엎드렸음을 보여주는 표지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모든 구도자들이 기독교 위인전기나 부흥역사에서 읽어볼 수 있는 상당한 깊이의 수치심과 영혼을 휘젓는 비탄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주님의 은혜로 마음이 녹아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핵심질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된 본성에 대해 비통함이나 수치심을 깊이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나의 소망을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주 예수의 구속적인 죽음에 고정시키면서 진정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 증거까지 찾아내야 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해졌던 표지가 있습니까? 주님과의 관계 및 세상과의 관계를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던 표지가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이런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까? 거룩의 진보를 이루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까? 위와 같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부족한 구도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며,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합니다.
두 번째 표지는 사도행전2장 42절에 발견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단단히 붙잡고 지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상하게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사모할 수 있게 되어 말씀의 권위와 통치에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은혜의 표지입니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어 하나님 말씀에 고정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회심의 확실한 표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이 복잡하고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심하게 될 때, 성경의 모든 페이지가 빛으로 빛나며 뚜렷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제 막 회심한 사람이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과 같은 난해한 책들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모든 성경에 대해 소경이었으나, 회심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회심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한때 밋밋하기만 했던 구절들이 이제는 살아 움직입니다. 만일 성경을 이해하는데 전혀 진보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참된 회심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새롭게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꼭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놀라운 권위를 새롭게 갖게 되었습니까? 참된 회심자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모든 논쟁에 경박하게 참여하기 보다 성경에 의해 도전받고, 성경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발견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민감성을 지속적으로 갖고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심자들은 갑자기 뜨거워졌다 단숨에 식어버리고 있습니까? 몇 주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어느 날 슬그머니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영적인 감정들을 마치 전기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신실한 믿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인상은 순식간에 온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회심하게 된 사람의 삶 가운데서 새로운 권위를 가지게 되는 확실한 증거는 바로 이 "지속성"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은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회심자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 친구들과 교제하기를 선호한다면 그가 참으로 회심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밀접한 유대감이 없고, 성도 간의 교제에 대한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면, 참된 회심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참된 회심자들은 자신과 불신 친구 사이의 벽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이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은혜가 마음 속에 있으면 이는 불가피합니다. 참된 회심자는 불신친구와 다르게 느낍니다. 이제는 다른 원칙과 욕구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친구였던 사람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친밀감이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신앙을 고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정 성경공부 방식은 사람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만들어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친밀감을 매우 중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의 전통적인 교제 형태는 참여자들이 환영하는 친밀감과 레크레이션을 제공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단순히 친구들이 소중하다는 이유 때문에 친구 그룹에서 나누어지는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역사하는 힘이 단지 자신의 감정적인 필요이며,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고백은 ~.
4. 기도할 수 있는 놀라운 새 능력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찬양과 영적 탄원을 하게 되고, 기도 응답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은혜의 분명한 표지는 기도의 실천입니다. 일단 이들이 참으로 회심하자 기도모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감동적이며 효과적인 기도에서 놀라움과 특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하늘에 계신 자신들의 대제사장이 모든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할 때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분명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실천은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자기 개인적인 기도의 경험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는 회심자라면 반드시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발견했는지 여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것들을 구하고 있는지 말할 거리가 잇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구하는 순전히 이기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제는 명철, 죄를 정복하는 능력, 그리고 다른 이들의 구원등과 같은 영적축복들을 구하게 되었습니까? 참된 회심자들은 자기 자신의 일들보다는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나 친척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시험들이 닥칠 때마다 크게 놀라고 낙담한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기도를 발견한 적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더 경륜이 쌓인 참된 회심자조차도 기도를 실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행2장에서 보여주듯,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는 뚜렷한 은혜의 표지가 됩니다.
5. 새로운 기쁨, 성격, 기질과 욕구와 더불어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됩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어 주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합니다.
6.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첫 느낌(확신)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7. 사탄의 공격이 이제 새로운 유혹, 의심,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칭의=구원에 대해>
글쓴이: 한우리 번호 : 3893
조회수 : 110
2007.08.09 10:26
카이로스님이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칭의=구원
애초에 칭의만 구원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로 주장하시어
지금까지의 토론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구원의 순서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그것은 중생과 회심의 용어정리부터 해야 올바른 토론이 된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칼빈을 포함해서 17세기 이전에 개혁신학자들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광의적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칼빈은 중생을 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으로 설명했고, 1561년의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고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는 중생을 거의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죤머레이, 루이스벌콥, 안토니 후크마 등등....)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세 가지 의미의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 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의 중생(요3:3-5, 요1:12-13, 요일5:1)-좁은 의미의 중생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의미하는 중생(약1:18, 벧전1:23)-넓은 의미의 중생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마19:28,KJV,ASV 참조)
저는 우리의 토론에서 중생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좁혀서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은 돌이킴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구별되어야 하며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국면들은 동시적이며 상호관계적인 것이 많기에 카이로스님이 주장하는 칭의만 구원이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 뿐이라는 주장은 구원론을 왜곡되게 이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피해야 할 표현으로 보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국면들은 한결같이 구원에 포함되는 것이지 칭의만이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미님과 한우리님께 질문입니다.(중생에 대해서)
글쓴이: 왕초보번호 : 3896
조회수 : 86
2007.08.09 20:54
(한우리님)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세 가지 의미의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 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의 중생(요3:3-5, 요1:12-13, 요일5:1)-좁은 의미의 중생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의미하는 중생(약1:18, 벧전1:23)-넓은 의미의 중생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마19:28,KJV,ASV 참조)
저는 우리의 토론에서 중생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좁혀서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은 돌이킴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구별되어야 하며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한우리님께서는 "세 가지 의미의 중생"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1.좁은 의미의 중생
2.넓은 의미의 중생
3.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
(첫번째 질문/ 한우리님께)
한우리님께서는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1에, 넓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2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 의미의 거듭남은 중생1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중생1이 시작되면 중생2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구요.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요? 아니면, 수정이 요구됩니까?
(두번째 질문/ 바로미님께)
저는 연속적 중생관을 순간적 중생관(개혁주의적 구원의 논리적 순서에서의 일반적인 중생 이해)과 구별하여, 칼빈이 "회심과 성화를 포함한 인간갱신의 전 과정"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의 연속적 중생관이라고 이해하였는데, 저의 이해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글 중에서-
그러나 중생이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하여 영혼의 중생은 물론,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갱신의 전 과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칼빈이 사용한 의미의 중생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중생과 구별하여 신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 때 중생은 이어지는 회심과 성화를 비롯한 인간 갱신의 전과정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남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p.178)
-홀리죠이님의 댓글(복사)-
중생1에서 중생2까지 중생1을 겪은 사람은 구원에 반드시 이르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중생1의 순간을 누구도 의식적으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회개도 않고 믿음도 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구원에 이른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생1에서 중생2까지의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은 순간적일 수도 있고, 연속적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연속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모델을 '연속적 중생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위에서 김남준 목사님은 어떤 학자들은 중생과 구별하여 "신생"을 "칼빈이 사용한 의미의 중생"이라고 한다고 하는데요. 이제까지 칼빈의 중생관이 연속적 중생관인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양무리의 연속적 중생관은 칼빈의 연속적 중생관과 다른 것인가요? 아니면, 동일하다고 보아야 하나요? 연속적 중생관에서 사용하는 중생의 개념은 "신생"과 동일한 개념으로만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중생이라는 용어를 신생과 동일하게도 사용하기도 하고, 더 좁게도 사용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인지요?
이번 토론을 통해서 "중생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중생과 관련된 용어를 통일할 필요성"을 느껴서 질문 드립니다.(다른 회원님들의 댓글도 환영합니다.)
답변
(한우리님)
왕초보님/ 예 맞습니다. 저의 견해를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바로미님)
위의 칼빈의 연속적 중생관이나 저희 카페의 중생관이나.. 피터마스터스의 연속적 중생관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의 중생의 개념은 좁은 개념으로 중생을 사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기존 순간적 중생관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서로 주장하는 중생이란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 뿐이지요. 어차피 내용은 틀리지 않고 범위지정과 약간의 요소들의 특징들만 틀리니까요.
저희는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합니다. 그렇다고 순간적 중생관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원님들은 아직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잘모르시고 또한 한국교회가 순간적 중생관으로 자라온 교회인 만큼 순간적 중생관을 염두에 두고 연속적 중생관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하나로님)
보다보니, 중생의 용어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하는군요. 헌데, 단순하게 <중생>이 무언가요? 이것이 요3:7 <be born again>이라면, 두번 태어난다는 것인데, 이것이 <again>이라는 것과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육신의 출생과 무관치 않음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헌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을 정의해보면, 그것이 쉽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순서를 살펴보면,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정자는 긴 경쟁의 여정을 통해 난자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결합되면서 다른 정자가 들어올 수 없도록 튼튼한 막을 형성하는데, 이것이 1단계인 <수정>입니다. 다시 이 수정란은 난자와 정자의 염색체가 합해져서 22쌍의 체부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어 수정되는 순간 남녀의 성이 결정되고, 수정된 난자는 2,4,8...식으로 세포분열을 하면서 자궁 쪽으로 이동하여 가장안전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는데, 이것이 2단계인 <착상>이라고 하고 "임신"이라고 합니다.
다시, 수정란은 자궁내막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여 <성장,발육>하는 3단계를 지나서 10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성장하여 최종적으로 세상 밖으로 4단계인 <출산>을 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수정-착상-성장-출산이 되네요. 헌데, 사람의 태어남을 수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출산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중생이라는 용어를 묵상하면서 상고해봅니다. ^^
--> 수정(1단계) -> 2단계(착상 / 임신) -> 3단계(성장, 발육) -> 4단계(출산)
(홀리죠이님)
역시 하나로님께서 멋지게 토론을 정리하시는군요. 수정(중생1)-착상(각성과 죄의 확신)-성장(회개와 믿음)-출산(중생2)라고 이미 피터 마스터스목사의 회심모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산과 더불어서 성화가 시작되는데, 그 출산(중생2)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칭의'와 '새출생'(신생)이 되는 셈입니다. 위에서 어느 분이 김남준 목사의 '신생'에 대한 언급을 하셨던데, 바로 중생2의 New Birth를 번역한 것인데, 김남준 목사는 '중생' 개념을 다른 개혁주의신학자들을 언급하면서도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하여서, 너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 평생토록 반복되는 성장의 과정쯤으로 오해하게 해 놓았습니다. 중생과 성화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데, 혼동시켜버린 셈입니다.^^
('중생'개념을 김남준 목사처럼 너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설정하는 사람들이 본 카페에서 반대하고 있는 스웨덴벍주의자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신학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스웨덴벍의 신학을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그렇게 넓은 개념으로 중생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 수정(중생1) -> 착상(각성과 죄의 확신) -> 성장(회개와 믿음) -> 출산(중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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