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슨은 2장의 제목을 '복음주의적 전제'(Evangelical Assumptions)라고 하면서, '복음주의를 설명하기를, '칼빈주의보다 좀 더 폭넓은 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흐름'이며, "큰 규모든지 지방의 소규모든지 연합전도 사역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그가 지금 비판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칼빈주의'라고 알려져 있는 흐름인 것이다.
그는 이 '칼빈주의'를 뒤에 이 사상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따라 밟아 내려가겠다고 하면서, 잠정적으로나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특별한 신학체계라면서 칼빈이 일으킨 종교개혁의 사상을 좇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사상에 대한 은근한 반발이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반발이 정당한 것인지는 그의 역사적 평가부분에서 다시 평가해 가기로 하자.
그의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 '복음주의'의 이해에 기초한 다섯가지 기본개념들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칼빈주의의 개혁사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복음주의'적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복음주의'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실은, '복음적'이라는 단어는 종교개혁당시에 로마천주교회 사람들이 루터 등의 종교개혁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주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복음의 회복'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곧, '복음적', 혹은 '복음주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사상과 진배 다름이 없는 용어이다(D.W.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London: Routledge, 1989, p.1.). 그런데, 1930년대에 New-Evangelicalism을 시작한 H.Ockenga같은 사람에 의해서 'New-Evangelical'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그 당시 자유주의신학을 토양으로 해서 생겨난 칼바르트의 New-Orthodox신학이 풍기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해서, 자신들의 "New -Evangelical'이란 호칭에서 New자를 빼버리고 사용하기 시작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수많은 '복음주의'(Evangelicalism)은 종교개혁사상을 이어받는 '복음주의'가 아니고, 그 종교개혁사상에 뭔가 반감을 가지고 있는 'New Evangelicalism'의 다른 이름이요, 위장된 이름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사상,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복음주의사상을, 위협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암약하고 있는 사상들이 자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복음주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괴이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그 괴이함을 그 몇가지 기본용어로 살펴보겠다. 먼저, '구원'이라는 용어, 그리고, '믿음', '용서', '영생',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들을 도슨이 '신복음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 시도를 소개하고 비평하고자 한다. 먼저, '구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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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시작이 완벽하다 해도 그 시작을 구원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작한 모든 사람을 '구원받았다'고 여길 수 있는가. 이에 댛나 성경의 대답은 놀랍다.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는 '구원하다'는 동사를 세 가지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로 사용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받고 있고, 또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강조는 미래에 있는 것이다"(p.40).
그의 욧점은, 바로 '구원은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하나의 과정'(p.40)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따라서 구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 죄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가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서 그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본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더러운 곳에서부터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p.41).
옳은 말이다. 이런 말은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라고 과거시제로만 사용하는 우리의 습관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말을 회심과 동의어로 사용함으로써 회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이제 해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끝냈다는 생각을 갖게 하며, 또 자신들은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다 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전진하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p.42).
그의 비판이 얼마나 허수아비를 치고 있는 지를 볼 수 있기 바란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선행에 대해서, 주님과의 교제에 대해서는 전혀 노력하지 않고, 그저 빈둥빈둥, 승강기 안에서 화투나 고도리를 치고 있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뒤로 물러서고 있는 자들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헬라어시제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니, 헬라어시제가 관계된 질문을 하고 싶다.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교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2:6)고 한다. 여기의 '앉히셨다'는 것의 시제는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분명히 문법상으로는 '과거'(헬라어문법용어로는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다. 이미 완료된 일이다. 그것이 바울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는 일'이 과거의 일인가? 그렇게 본다면, 시간이 뒤섞여 버린,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 속에 있게 되는 셈이다. 그것은 분명히 '미래에 있을 일'이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가? 바울사도의 헬라어문법실력이 형편 없어서 였을까?
아니다. 바울사도의 헬라어문법실력이 형편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무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미래에 있을 일을 과거형으로 표현함으로 인하여, 그 미래의 일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일어나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받게 된 구원이 참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구원은 미래에까지 확실하게 또한 보장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보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분명히 나올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자.
단지, '구원'이란 용어를 살펴보고 있으니, 이 용어에 집중하자. 성경에서는 분명히,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와 관계해서 표현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얻게 된 구원도 있고, 현재 누리고 있는 구원도 있고, 미래에 얻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구원도 있다. 그게 왜 이상한가? 이미 받게 된 구원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았다고 해야 하는가? 그렇게 구원이 조그만 것인가? 초라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때, 혹은 구원을 하실 때에, 그렇게 초라하게 구원하실까?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이 미래에는 잃어버려질 수 있다면, 그 구원을 과거에 '얻었다'함은 무슨 의미이고, 그렇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도슨의 착각은,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으로 구원을 나누면서, 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슨 두부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나눠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있다. 과거와 현재를 그렇게 자를 수 있는 것일까? 현재와 미래를 그렇게 뚝 잘라버릴 수 있는 것일까?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구분될 뿐이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도, 구분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미래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보장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 보장이란, 승강기를 타는 식의 그런 보장이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보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이 보장을 '보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과거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과거의 구원은 바로 미래에 받게 될 구원, 미래에 주어지는 그 기업의 축복에 참여할 보증으로서의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기차티켓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성령'을 승강기단추라고 오해하지 말라.
성령을 과거의 성령, 현재의 성령, 미래의 성령으로 분리시키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런 사람들은, 바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 번 받은 구원이 그렇게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과 분리시키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증으로서의 성령(엡1:13)을 그렇게 난도질해서 분리시키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찌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는 자로서, 그런 자들을 향하여 공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이 모독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주의 성령의 이름을 위하여서라도 어찌 글을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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