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지나가면서....

baromi 2007. 6. 16. 09:44

박창진 목사님이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겠다고 공언한 하신지가 오래되었지만 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오해를 불식시키기는커녕 혼란만 가중되는 현실과 자신의 신학을 고수하기 위한 불필요한 노력을 볼 때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먼저 가정교회에 관한 글을 보기 위해 이 카페에 가입한 목사님의 신학이 가지는 위험성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기에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회자되고 있는 ‘제한속죄교리’와 ‘성도의 견인교리’가 교회의 정체성과  안위에 미치는 중대성을 두고 생각한 바와  아울러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지고 본 카페에 들어온 ‘가정교회 논의’의도 근본적으로 위의 잘못된 신학에 투영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에 비한다면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일전에 ‘가정교회’의 논의자체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코닷’에서 벌어지는 ‘가정교회 논의’야 말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저로서는 박창진 목사의 교리가 왠지 달라져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곧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일,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관한 근본적인 관심이었는데, 그 관심들은 '코닷'에서 벌어지는 기존 가정교회의 존치와 당위를 위한 중요한 개념적 근거들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례, 봉사, 섬기, 은사, 사랑의 교제, 기도....가 가지는 근본적인 토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둔 열매들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원시하는 풍조 속에서 저는 교제도 섬김도 은사... 다 공허한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가정교회’논의는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그 교회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혹자는 무슨 이슈마다 ‘부흥과 개혁’이 교회의 정체성 운운하며 전가의 보도처럼 그것을 끌어다 사용한다고 여기시는 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실례로 박창진 목사의 견해대로라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그가 즐겨 인용하는 사도요한의 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성자의 사역은 크게 왜곡되고,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실패로 이어짐이 확실해 보입니다. 나아가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제한’이 다르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교회에 대한 근본 정체가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완벽한 순종과 이에 기반한 성도의 순종외에 유한 책임을 동반한 순종이 올바른 순종일리 없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사역을 크게 제한하거나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것입니다. 성령이 드러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아주 솔직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요 17:9) 저희는 아버지의 것인데 아버지의 것은 내 것(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으로 내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지 ‘세상’을 통해 영광을 받는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어휘에서 ‘세상’은 하나님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정교회 논의배경에  다원주의와 세속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영광이 사라진 교제들... 코닷의 주장들과 거기에 올라오는 글들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우려가 그저 기우일지라도 경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일전에 유해무교수가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론을 비판하고 일부 수용한다고 했다면 왜 코닷의 주장과 거기에 올라온 여러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곽창대 조득정, 김종선 목사의 글이 자신의 ‘개혁교회론’에 비춰 전혀 하자가 없는 올바른 견해들인지 말입니다..... 저는 적어도 클라우니 교수가 현대교회를 두고 걱정한 부분의 반만큼이라도 고신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솔직해 진다면 교회에 큰 유익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을 가져보았습니다. 그저 좋은게 좋은거라 교회의 유익을 핑계로 효율성과 유용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박창진 목사가 주장하듯 가정교회가 “아주단순화 시킨 구역모임” 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삼위의 구속사역을 통한 성도의 교제가 아니면 그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감정이입, 헌신, 봉사, 섬기, 은사...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심점을 대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팔아먹는 것과 진배없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박창진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교회’논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주장앞에 올바른 교회가 그 교제를 이루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별하고 다시 박창진 목사님의 본 카페를 통해 주장한 몇가지 신학적 견해를 살펴보고자합니다. 앞서 많은 분들이 박창진 목사에게 일일이 반박하고 권면도 해보지만 별 도리가 없는 듯 보입니다. 만만치 않은 시간과 紙面을 통해 대응하자니 자매카페에 벌인 토론의 제판이 될까봐 무척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지 않아 無對應으로 기다리시는 많은 있이 있을 줄 압니다. 아마 이곳에서도 계속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싶은데...... 그럴 필요가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만 능력도 부족하고 생업에 매달린 저희로서 여전히 고민 중인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179번 글에서 박창진 목사님으로부터 “접근이 참 감상적이어서 지지받는데 아주 유익하리라고 여겨진다.”는 핀잔을 받았는데.... 사실 저는  ‘십일조 논의에 대한 소고’로 촉발된 이번 논의 177번 ‘지나가면서’와 181번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글이 다분히 전망되고 계획된 글이라 느끼고 있습니다. 위의 글들과 그가 쓴 댓글을 읽어 보면 그의 신학 전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얼마나 자신의 주장에 굳게 서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박창진
한 단계만 더 진전되면 좋겠습니다. 요 3:16의 세상이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 유대인들에 대하여 성경은 자기 백성, 자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 언약이 지향하는 바인 새 언약의 중보자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언약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함이기에 배교한 언약 백성입니다. 그들의 배교를 말할 때에 그 기준은 옛 언약이 아니라 예수님 곧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로서 새 언약입니다. 07.06.13 17:11

 

박창진
옛 언약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면서 새 언약의 관점에서 언약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새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언약의 중첩기의 독특성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코닷의 목회방 신학 배너에 글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세상으로서 설명하고도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임금인 마귀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피조세계를 가리킬 때 외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으로 인한 구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더 진전된 계시인 서신서 등에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계를 뜻합니다. 요한 사도가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할 때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차적으로. 07.06.13 17:15
 
박창진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사"를 "택한 자들을 사랑하사"로 읽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냥 그 문장 그대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인간과 인간 이외의 피조계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피조물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택한 자들만 상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기에-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입니다. 07.06.13 17:21
 

 

박창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전제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피조물의 회복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만물의 회복, 통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만 기초하여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07.06.13 17:22 (밑줄은 제가 표시한 것임)

 

성부, 성자, 성령(보혜사, 진리의 영 거룩한 영), 언약, 율법, 복음, 속죄, 순종, 십일조, 계명,.....참으로 많은 논점들이 나왔지만 그것을 논할 개혁신학을 상실한 마당에 계속해서 개인을 궁지로 몰아 부치는 결과만 가져 올 것이 뻔합니다.  도무지 토론의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언약과 언약백성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참 성도들이 자기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습니까?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였다가 그 후에 버림받아 멸망 할 수도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먼저 윤석준 강도사님이 ‘제한속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성경구절’을 옮겨 주셨고 아울러 다니엘님이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가 주는 교훈에 대해서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과 비유인지요.

 

“또 이와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동일하게 사도요한은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었습니까? 성경은 단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예정하신 까닭에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성부가 성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받는 자들의 유익과 주는 자의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박창진 목사는 절대적 견인을 부정하면 구원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에 ‘오직믿음으로가’남는다고 했는데 이어 한우리 목사가 말하기를 ...“님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의 개념에는 행위가 포함되었다는 뜻인가요? 최-박박멸님의 믿음에는 행위라는 개념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런가요? 그래서 행위가 있는 자만 견인된다는 것이 님의 주장이죠? 맞습니까?.....

 

그는 ‘오직믿음으로’의 순종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박창진목사의 191번 글과 댓글을 살펴보며 알 수 있는데, 의미 있는 댓글을 옮겨봅니다. 한우리 목사가 올린 193번 글에 대해서 과소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가 그 질문의 의미를 알까? 어디에서 나오는 확신일까? 정확한 성경해석?

 

침묵
제가 보기에 박창진님은 선행과 순종을 혼동해서 사용하시는듯 합니다. 사실 인간의 어떤 선행도 구원에는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구원이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린양의 피와 홍해바다의 세례를 통해 광야에 까지 왔지만 거기에서 엎드러진 사람들의 불순종은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07.06.14 12:56

박창진
선행 구원 교리에서 선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교부들은 그것에 대해 아주 분명했습니다. 선행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요. 다르게 말하면 순종이지요. 님이 선행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선행을 착한 행실 정도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이해를 따라서요. "믿음과 순종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07.06.14 16:58


물론 성경은 박창진목사님의 말처럼 성경은 아래 말씀처럼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의 순종, 곧 우리의 순종이 ‘사랑의 증거(구원의 증거)’로서 채택된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수단적 순종으로서 제시된 것입니까? 그가 얼마나 요한 서신서를 잘못이해하고 있는 가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에 의해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순종에 의해 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종이 부족하여 실패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책임이 엄하고 경직된 순종이라면 그것은 주께서 바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삼위께서 순종을 말씀하신 후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최-박박멸님께서 올리신 질문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립니다..."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까?"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습니까?"이 질문은 박창진님이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만약 제대로 잡혀 있다면 지금까지 해온 자신의주장이 잘못된 주장이었음을 깨닫게 되겠지요. 과연 위의 문장 중 어느 문장을 먼저 언급하시면서 이야기를 전개하실지 참 궁금합니다.

 

그가 삼위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사역을 믿지 않는데...... 선행과 순종과 책임을 주장하는 그에게 성령의 사역이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박창진 목사는 사도요한의 글을 계속해서 왜곡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여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1-2

 

참으로 우리 논쟁에 있어서  전형적인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을까?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이(사탄도 포함해서) 구원을 받는다는데...그렇다면 대언자는,  성삼위의 완전한 속죄사역은이 왜 필요할까?  사도요한의 말씀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를 가장 선명하게 구분 짓는 사람이 바로 사도요한이 아니었던가? 요한복음과 서신서를 관통해 흐르는 일관된 주장인데.... 

 

칼빈, 로이드죤즈, 벤자민 워필드.... 동일하게 이해하는 제한속죄의 근거를

 

“자녀들아”/ 본문의 호칭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그리스도의 택함 받은 자들 입니다.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또한 요한과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수신자), 이방인과 반대되는 유대인 요한자신이라면.... 더욱 속죄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은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출처 : 부흥과 개혁
글쓴이 : 광주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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