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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느 칼빈주의자의 칼빈비판

baromi 2007. 4. 10. 07:46

어느 칼빈주의자의 칼빈비판

 

저는 칼빈주의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신앙인"이라고도 합니다. "개혁주의"도 하나의 "주의"라면 거부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그런 용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신학이야말로 개혁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으니, 이런 이름으로 좋고 저런 이름으로도 좋습니다. 칼빈주의자는, 칼빈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강합니다. 칼빈의 신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 주권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의 중심은 옳되, 그의 모든 성경해석과 주석들이 옳은 것으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그의 해석의 오류들이 지적되고있다. 이렇게 지적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칼빈주의자들의 칼빈은, 결코 우상이 아니고, 단지, 참조틀일 뿐임이 분명합니다.

 

 칼빈의 해석 중 잘못 하나를 지적해 놓으려고 합니다. 칼빈을 비판하더라도, 엄연히 칼빈주의자임을 밝혀둡니다. 칼빈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는 난장이의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칼빈이 오히려 칭찬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칼빈의 믿음의 본질에 관한 이해를 살펴보는 중에, 칼빈이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판할 것이라면 마땅히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 마땅히 성경적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칼빈은 중세신학에서 애용되고 있던, unformed faith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We must refute that worthless distinction between formed and unformed faith which is tossed about the schools. For they imagine that people who are touched by no fear of God, no sense of piety, nevertheless believe whatever it is necessary to know for salvation….They presumptuously dignify that persuasion, devoid of the fear of God, with the name “faith” even though all Scripture cries out against it((Inst., 3.2.8).

 

우리들은 그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서 고안되어 사용되고 있는, 형성된 믿음과 비형성된 믿음 사이의 그 쓸데없는 구분을 반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도 없는 사람들이, 구원을 위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그 어떤 것을 믿고 있는 자라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없는 그런 교리를, 성경에서는 반대하고 있는데도 믿음이라는 명칭으로 건방지게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강요,3.2.8).

 

내가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중세신학의 형성된 믿음’(formed faith)비형성된 믿음’(unformed faith)의 구분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도 아니고,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도 없는 사람들이었는지 아닌지를 따지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윗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표현, 곧 비형성된 믿음과 같은 것을 믿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성경에서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칼빈은 왜 비형성된 믿음과 같은 것을 믿음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칼빈은 딱히 비형성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문맥을 통해서 이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 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Nothing more absurd than their fiction can be imagined. They would have faith to be an assent by which any despiser of God may receive what is offered from Scripture….The beginning of believing already contains within itself the reconciliation whereby man approaches God. But if they weighted Paul’s saying, ‘With the heart a man believes unto righteousness,” they would cease to invent that cold quality of faith”(Inst., 3.2.8).

 

그들이 상상해 낸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라는 것을 동의와 같은 것처럼 여겨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성경으로부터 제공되고 있는 그것을 단순히 동의함으로써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여기려는 것 같습니다……믿음의 시작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 화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된다는 바울의 말을 그들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냉정한 지적 동의(that cold quality of faith)를 믿음으로 여기는 식의 고안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강요,3.2.8).

 

이런 맥락에서 분명한 것은, 칼빈은 비형성된 믿음’(unformed faith)라는 단어를, ‘냉정한 지적 동의’(that cold quality of faith)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칼빈의 비판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과연 지금 그가 비판하고 있는 비형성된 믿음’(unformed faith)라는 단어가 지금 칼빈이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 당대에 그런 냉정한 지적 동의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단어가,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 자신들에 의해서 지금 칼빈이 비판하고 있는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검토한 바에 의하면, 결코, 스콜라주의자들은 비형성된 믿음이란 개념을 칼빈이 비판하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최소한 아퀴나스의 사용에 있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참고,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 2a2ae.)].

 

저의 관심은, 아퀴나스 등의 중세 스콜라주의의 이 개념에 대한 구분과 그 사용을 옹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에 대한 칼빈의 비판의 논리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칼빈의 말에 좀 더 초점을 맞춰보았으면 합니다. 칼빈은, 지금 비형성된 믿음과 같은 것이 믿음이라고 여겨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러한 칼빈의 말은, 냉정한 지적 동의와 같은 류의 비형성된 믿음은 결코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면에서, 칼빈의 비판은 일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란 그 믿음자체 내에 이미 마음의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냉정한 지적 동의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 곧 말도 안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렇게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믿음이라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중세 스콜라주의에 대한 동의도 아니고, 칼빈의 신학체계에 대한 전면도전도 아닙니다. 단지 소박하게, 과연, 칼빈의 논지가 성경의 관찰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칼빈의 다른 주장들이 성경의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 문제, 비형성된 믿음이라는 용어와 그 개념을 비판하고 있는 칼빈의 논리전개에 있어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성경에서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 그 논리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과연 그러한가 살펴보았던 것 같은 마음입니다. 야고보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면서 귀신도 갖고 있는 믿음을 언급한 것을 떠올려 보면, 비록 믿음이라고 하는 말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닌 경우를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고보의 말을, 칼빈이 한 말, 구원받지 못한 믿음믿음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는 말을 반박하는데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칼빈이 이런 류로, ‘믿음이란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것을 몰랐를 리 없기 때문입니다(참고, 강요,3.2.13.).

 

하지만, 그가 요한복음830-31절에 나오는 믿음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이 구절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은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 유대인들이 계속되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마귀의 자녀들로 평가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44).

 

이 부분을,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Although the Jews were then not unlike a dry and barren soil, God did not allow the seed of His Word to be lost completely. Against all hope and amid many obstructions, some fruit appears. But the Evangelist imprecisely calls faith what was only a sort of preparation for faith. For he is saying nothing better about them than that they were disposed to receive the teaching of Christ”(The Gospel According to St.John, 이태릭체는 저의 것).

 

유대인들은 그 당시 메마른 토양과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도록까지는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전혀 하지 않아도 그리고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열매가 맺히긴 합니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지금 단지 믿음에 대한 준비(what was only a sort of preparation for faith)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믿음(faith)이라고 부정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단지 그는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주석, 이태릭체는 저의 것)  

 

위에 제가 이태릭체로 강조해 두었읍니다만, 칼빈은, 지금 사도요한의 표현을 부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의문은, 과연,이런 칼빈의 지적이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 과연 칼빈주의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표현, 사도요한의 표현이 영감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이 사도요한의 표현을 문제삼고 그것을 부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자칫하면 성경의 영감성과 연결해서 문제가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분명하게 유대인들이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준비하였다, 혹은 믿음을 가질 경향을 가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유대인들이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칼빈이 지금, 사도요한의 표현을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칼빈의 평가를 문제삼고 파고 들어가면, 칼빈이 제시하였던 믿음의 본질에 대한 논의들에 함정이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사도요한의 표현을 부정확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 바로 이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표현이 과연 부정확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번역에 문제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맥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칼빈이 사도요한의 용어에 대하여 부당하게 평가한 것을 지적하였다고 해서, 그의중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구절들로 인하여, 잘못된 믿음조차도 믿음이라는 너무나 놀라운 개념을 희석시키고 왜곡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분노할 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변질되어졌고, 그런 일은, 바로 지금 이 시대에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시 던져 보아야 할 필요가 있도록, 현대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혼동되고 있습니다. 칼빈처럼 다시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믿음이 참된 믿음인 양 횡횡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믿음인데도, 구원받게 하는 믿음인 양 교회내에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행들을 지적하고 고발하기 위해서, 과연, 칼빈이 지금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보여주었듯이, 사도의 표현, 성경의 표현조차도, 부정확한 것이라고 보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라면, 칼빈조차도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칼빈에게서 자유하게 될 때, 우리는 칼빈을 감동시켰던 성령의 영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소원하는 것은, 칼빈의 영이 아니라, 칼빈을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참으로 그러한가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기록된 주의 말씀이 우리들 모두에게 살아있는 능력과 지혜의 말씀으로 주장되기를 소망합니다.

 

과연,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다가, 우연히 발에 걸린 돌부리 하나를 파고 들다 보니,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참된 믿음의 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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