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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회심자료]손양원목사의 가정교육(2)

baromi 2006. 9. 2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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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과 같이 개개인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학습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
정이 하나의 교육적 단위로서 그 교육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는 부쉬넬의 지적과도 같이 개개인을 주일학교 학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
정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행한 것은 아직도 우리는 가정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기독교 가정교육의
중요한 터전이 된다. 앞으로의 사회는 모든 면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 가운데서
모든 전통적인 것과 고정적인 것은 모두가 변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참으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은 언제까
지나 변화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터전이다. 이런 점에서 가정의 교
육적 역할기능은 실로 중요하다고 본다.

제 3 장 호레이스 부쉬넬의 가정교육론 이해

17세기 이후 가정을 장(場)으로 하는 기독교 교육의 가능성을 처음 신학적으로
풀이한 사람은 호레이스 부쉬넬이었다.) 은준관, op. cit., p. 198.
부쉬넬로 하여금 신학형성과 기독교 교육을 위한 가정 교육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 이면에는 몇 가지 사상의 영향이있었다고 본다.


부쉬넬이 활동하던 때의 뉴잉글랜드 지방은 신학적 논쟁이 활발하였다. 쉘톤 스
미스(Shelton Smith)는 부쉬넬에게 영향을 끼친 세 가지의 신학 논쟁을 그의 저서
에서 설명하고 있다.) S. Smith, Horace Bushnel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p. 374.


첫째는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양극화 현상이고 둘째는 자유주의적 칼빈주의자인 나다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와 보수적 칼빈주의자인 베네트 타일러(Benet Tyler)의 충돌인데 이들의 충돌은 회중교회가 수년 동안 영적 갈등으로 분리되어지게 하였다. 셋째로는 유니테리안주의 내에서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데오드르 파커(Theodore Parker)의 진보적 관념에 대한 충돌이었다. 특히 부쉬넬의 어린시절에 강한 영향을 주었던 초기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교리와
8세기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대각성 운동은 부쉬넬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회중교회 계약교리에 의하면 교회에 속해 있는 교인들의 자녀들은 부모들과 함께 연대적으로 거룩하다(federally holy)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흥회의 회심 일변도의 신앙과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불가피한 심판을 강조했던 부흥사 들의 설교에 대해 반발하고 나선 부쉬넬은 사랑의 하나님 부모의 교육적 책임 어린이의 보호를 외치며 가정을 계시의 매개로까지 이해하고 그곳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Ibid.

부쉬넬은 생각하기를 가정은 유아세례(infant baptism)의 신앙적 근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의 매개체라고 보았다. 즉 가정이란 부모와의 관계, 자신의 근원이라는 관계에서 절대적 유기적 연합체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는 매개체의 언약 공동체인 것이다.) 윤종만, H. Bushnell의 입장에서 본 가정종교교육,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p. 31.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매개체로서의 가정은 가정정부(Family government)라는 방법의 범주에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은준관, op. cit., p. 216.

부쉬넬은 자녀들의 신앙적인 성장과 양육에 있어서 가정의 비중을 크게 강조한
사람이다. 즉 기독교 교육의 성패는 교회학교가 아니라 가정과 부모에게 달려 있
다고 보는 것이다. 어린이의 신앙적인 성장은 순간적인 회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보고 가정은 성장 과정을 통하여 아동들을 회심시
키는 은혜의 장이라 하였다. 부쉬넬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경건 안에서의 성장
즉, 자녀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영적인 변화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보고 이러한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모는 교육자로서 성경에 있는 지식이나 교리를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가 신앙과 사랑의 화신으로 신앙과 사랑의 분위기를 지녀야 한다
고 보았다) Ibid., pp. 207-208.


. 호레이스 부쉬넬의 종교적 사고는 그의 삶을 통한 다양한 경험들과
그 시대 사상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 장에서는 부쉬넬의 교육 사상의 기
초가 되는 그의 생애와 지적 배경과 신학을 다루고자 한다.


부쉬넬의 교육 사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그의 저서인 『기독교적 양육(Christian
Nurture)』을 중심으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양육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 이
해, 교육목적과 내용, 교육의 장, 그리고 교육방법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부쉬넬은 보수적 복음적 기독교교육 학자들에 의해서 진화론자로 낙관주의 신학
자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 사상이 정통주
의의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입장이 어느 편에 있든지 그의 공헌 한가지는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기독
교 가정에서의 기독교적 양육 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한 그의 교육 신학적 해석이
다. 그에 의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기적 관계(organic connection)로 인해 부
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전수되기에 어린이의 신앙은 기독교 가정에서 형성된다. 이
러한 유기적 관계의 전제에서 언약(covenant)사상 에 근거한 유아세례를 자녀의
신앙에 대한 부모의 봉인(seal)으로 설명한다.) 장병일, 호레이스 부쉬넬의 사상 이해, 『기독교와 교육』(서울: 서울신학대학 기독교 교육 연구소, 1989), pp. 50-51.

제 1 절 부쉬넬의 생애와 신학 사상

1. 부쉬넬의 생애(1802-1876)

부쉬넬은 1802년 4월 14일 커네티컷트주 리치필드의 반탐(Bantam)이라는 마을
에서 아버지 엔자인 부쉬넬(Ensign Bushnell)과 어머니 도사 부쉬넬(Dotha
Bushnell)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작은 거리에서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원래 감리교인 이었고 어머니는 성공회 교인이었다. 그러나 부쉬넬
이 출생한 곳에는 오직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만이 있어서 부쉬넬 가족
은 그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리고 그 회중교회의 신앙 생활은 훗날 그의 신학
사상과 교육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뉴 프레스톤(New Preston)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부쉬넬은 1821년에 그의 기독
교적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고, 1823년 예일대학에 입학해 1827년 졸업하기까지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영국의 시인 철학자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
리지(Samuel Tayler Coleridge)로서 그가 1825년에 출판한 반성의 촉진들(Aids
to Reflection) 은 부쉬넬에게 종교적 진리가 완전하게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느
냐는 지적인 의혹을 갖게 하여 결국 부쉬넬은 종교란 강력한 표출을 위해서 일차
적으로는 정서에 호소한다고 확신하였다. 즉, 기독교는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오
히려 윤리적이고 영적인 감각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졸업 후 커네티커트 주의 노르위치(Norwich)에서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고 뉴욕
시의 신문 잡지에도 관계했으나 모두가 자신의 직업일 수 없다는 생각에 1829년에
법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예일로 다시 돌아온 부쉬넬은 대학에서 조교 일을 맡게
되었다. 1831년 예일대학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대각성 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기독자의 삶을 결심한 후 1831년 예일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1833년까지
공부했다. 당시 부쉬넬이 공부하던 신학교에는 기독교 신학의 지적인 논증 가능성
의 이론으로 유명한 테일러(Nathaniel W. Taylor)교수가 지도하고 있었으나 부쉬
넬 자신은 테일러의 새 안식처 신학(New-Haven Theology)'의 종교 교리에는 동
의하지 않았다. 부쉬넬은 언어 자체가 영적인 실체를 표현할 수는 있다고 해도 정
확한 논리적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영적 실체는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
기 보다는 차라리 느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학부를 졸업하고 커네티커
트 하드포드(Hartford)에 있는 북부 회중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아 목회를 하였다.
그 곳에서 그의 설교는 큰 감동을 주었으며 교회뿐만이 아니라 지역 시민을 위한
사회 운동에도 앞장을 선 지도자로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한지 얼
마 되지 않아서 기관지염과 폐병이 발병해서 그의 생애 대부분을 질병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그 때를 가리켜 broken industry") W. Walker, “Horace Bushnell”Christian Nurture by Horace Bushnell (New York: The World Publishing Co, 1967), p. 37.의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부쉬넬은 1842년 웨슬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6년에는 거의 한해를 유럽에서 요양 생활로 보냈다. 1847년 상당히 신학적 체계를 갖춘 논문이자 그의 첫 작품인
“기독교 양육에 관한 논설"이 나왔고, 이것은 또한 1861년 확대 보충되어 『기독
교적 양육(Christian Nurture)』으로 나왔는데 이 한 권의 책으로 부쉬넬은 기독교
교육의 아버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1849년 부쉬넬은 특히 성육신 사건과 삼위일체
가 그리스도의 체험의 진리들이라고 하는 주장이 담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
님(God in Christ)』이라는 제명의 책을 발행했다. 이것은 당시의 통용되던 뉴-잉
글랜드 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비록 하트포드 중앙 위원회는 부쉬넬이 그
회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패어필드 서부 연합회는 그
렇지 않았다. 이 사건은 1849년에서 1854년까지 커네티커트주의 일반 연합회의 연
속적인 회합에서 숙고되었으며 부쉬넬의 견해에 커네티커트주의 목사들 중 거의
아무도 공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합은 공식적으로 부쉬넬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부쉬넬은 1856년 쇠약해진 건강을 돌보기 위해 켈리포니아에서 요양 생활
로 보냈다. 1859년에는 그의 북부 조합 교회에서의 모든 목사 직무를 그만 두었으
며 1876년 2월 17일 별세하기 전까지 하드포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저작 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858년 새로운 삶을 위한 설교(Sermons for the New life)"
및 수필집과 논문집을 출간했고 특히 은퇴시기에 『자연과 초자연(Nature and
Super Nature)』을 내놓았다.


1848년에는 뉴잉글랜드의 세 개의 신학교 졸업식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설교를
하였다. 즉, 그 당시 전적으로 유니테리안 경향에 있었던 하버드에서는 속죄 에 관
한 설교를 했고 정통파가 득세하던 안도버(Andover)에서는 도그마와 성령 에 관
하여 그리고 모교인 예일 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 에 관해 설교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계속 저술 활동을 하여 많은 책을 세상에 남겼다.

2. 부쉬넬의 신학사상의 구조

부쉬넬의 신학은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요인의 결합에서 이루어진 소산으로서 제
네바의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의 절대 복종, 반종교개혁 시기에 있었던 초기 개신
교와 로마 카톨릭주의 간의 충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청교도의 경건주
의와 정치적 변혁 매사추세스에서의 요나단 에드워드의 생명이 넘치는 설교 등의
모든 것이 그의 신학을 낳게 한 요소들이다.) W. R. 루드, 『기독교 교육』, 손승희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p. 14.


부쉬넬의 신학은 엄격한 칼빈주의였다.) Ibid., p. 13.부쉬넬의 신학이 정통주의 신학을 거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정통주의 신학을 거부했다고 보기보다는 부쉬넬의 의향은 그 신학적 스타일을 고쳐 보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 같다.) Ibid., p. 17.
신학의 목표가 논리적으로 꽉 짜여진 체계에 있을 때 그 신학의 방법은 철저하게 논리적이 될 것이고 정서적으로 융통성이 없게 될 것이다. 부쉬넬은 기독교는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감각에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지성은 마음대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지 억제 당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 정신도 꼭 묶이어 있을 것이 아니라 널리 풀어져야
할 것이다.부쉬넬은 신학 체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연역적인 방법에 의존하기보다는 귀납적
인 방법으로 그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려 했는지 모른다. 부쉬넬이 1847년 기독교
적 양육 에 대해 발표한 이후 그는 많은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주로 신학적 비
판으로서 가장 혹독한 비판은 보수적 칼빈주의자인 베네트 테일러(Bennet Tyler)
로부터 받은 도합 80페이지에 달하는 일곱 통의 편지였다. 테일러는 이 편지에서
부쉬넬이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며 회심을 신적인 영역으
로부터 자연적인 수준으로 옮겨 버렸다고 한다. 부쉬넬은 당시 전 미국을 강하게
휩쓸던 대각성 운동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세상
속에 악을 낳는 일밖에 허용되지 않는 인간관에 반기를 든다. 부쉬넬에 의하면 인
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육체적인 존재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자연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피조물이긴 하지만 이성과 의지를 활용함으로
써 인간은 자연적이기보다는 초자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웨인 R. 루드(Wayne R. Rood)는 기독교 교육 이해 에서 부쉬넬의 신학적 위치
를 역설적 이었다고 설명한다.) Ibid., p. 13.즉, 부쉬넬은 신학적으로 칼빈의 신의 주권성에
근거하고 있어 한편으로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다른 한편으
로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의 청교도적 경험이 오히려 회중교회를 정치에 적극
개입하도록 만든 자유주의 입장을 부쉬넬은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준관, op. cit., pp. 199-200.부쉬넬은 하나님의 이해를 정통적인 신학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경험적 차원에서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부쉬넬의 시대에는 칼빈주의가 엄격한 뉴잉글랜드식 스토아 철학
으로 화하여 신학자의 머리를 하나의 윤리적 명제 둥지 속에 즉 절대적 창조주로
서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 전체를 포괄할 수 있다고 보는 하나의 상호 연관된 논리
적 명제권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W. R. 루드, op. cit., p. 14.


부쉬넬에게 있어서 불만은 그들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그들의 도식화한 방법은 정삼각형 중앙에 하나님을 놓고 각 꼭지점에는 성부, 성자, 성령을 놓고 세 변에 각각 이 아니다 를 써놓고 각 꼭지점을 줄로 이은 선상에는 이다 를 써놓는다. 이것을 읽으면 하나님은 성부이시다. 하나님은 성자이시다.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
다. 성부는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성자가 아니다 가 된다. 부쉬넬은 수학적 개념
형식이 정확한 것처럼 삼위일체 교리를 기만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 개념도식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내면성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쉬넬이 깨달은 것은 모든 인간적인 범주란 하나님을 묘사하기엔 부적
당한 범주라는 것이었다.) Ibid., p. 15.

요약을 하면 부쉬넬의 신학 사상에는 두 가지 주류의 사상적 흐름이 결정적 영
향을 던져 주었다. 그 하나는 18세기에서 시작한 대각성의 부흥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부쉬넬의 반발을 일으켰는데 특히 죠나단 에드워즈(Joanathan
Edwards, 1703-1758)의 가혹한 심판 위주의 설교는 부쉬넬을 부정적으로 자극시
켰다. 반대로 부쉬넬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상은 독일 이상주의였으며 그것
은 영국의 낭만주의 학자이었던 사무엘 테일러 콜러리지(Samuel Tayler
Coleridge)를 통하여 미국 대학가에 스며든 것이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고조
한 자유주의적 사조는 부쉬넬의 대학 시절에 급격한 사상적 변화를 경험할 만큼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부쉬넬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체질화되었
던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언약 공동체의 경험이 그의 신앙적 근거가 되었고 그
위에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부쉬넬은 교리를 언약 공동체로 이해했다
는 점에서 칼빈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은준관, op. cit., p. 199.
그러나 부쉬넬이 칼빈주의의 정통성을 계승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전통과 정통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칼빈주의를 새로운 비판정신과 시대적 상황의 문제 속에서 재해석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당시의 대각성 부흥운동의 심판적 권위주의의 신앙에 대한 거센 반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의 교육 신학적 시도는 칼빈주의를 언약공동체와 이성을 매개로 풀이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요컨대 부쉬넬의 신학사상은 신과 인간사이의 단절을 전제하여 성인(개인)의 돌
변적 감정적 회심을 강조한 심판적, 권위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연속을 전제하여 공동체 속에서의 경험과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의
편으로 기울어졌고 성인 중심 신학에 반발하여 어린이도 영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기독교 교육의 근거를 마련했다.

1) 신관
부쉬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전부로서 스스로 있는
자 ) W. R. 루드, op. cit., p. 15.
즉, 영원하고 무한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이시다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것
도 그 이하의 것도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쉬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인
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체
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쉬넬은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며 증명할 수 없는 신
비적 질(mystical quality) 의 차원에 계신 분이라고 보았다.) 은준관, op. cit., p. 200.
그러므로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영원하신 분 이시다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경험 안에서 연결되어질 때 영원한 타자이신 하나님이 나
의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인식되게 된다고 본다. 즉, 하나님은 절대적 타자의
위치에서 초월적이며 영원하신 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며 그 계시가 인간의 경험(이성)안에서 연결되어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면에서 부쉬넬은 또한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 선다. 즉, 부쉬넬의 신학적 위치는 그 성격상 양면성을 지닌다고 본다.

2) 기독론
부쉬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신
적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인 면
에서가 아니라 구속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쉬넬이 제시한 예
수 그리스도의 상은 얼굴의 복음 ) W. R. 루드, op. cit., p. 19.
이라고 표현되었다. 부쉬넬에게 있어서 얼굴
이라는 말은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진 인격적 현존(personal presence)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함
께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하나님 전체적 초월 사건의 형태 (an all-transcending
fact-form)) Ibid., p. 20.
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인격화하였다. 아울러 신적 그리스도에 참여하게 되는 매개는 인간의 경험이고) 은준관, op. cit., p. 200.

이 같은 신적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경험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 속에 참여하
게 되는 윤리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참
여라는 경험의 유추(analogy)) Ibid., p. 201.
를 통해 모든 사람의 죄 속에 대신 참여함을 의미
하게 된다. 그래서 부쉬넬은 기독론을 대속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뿐 아니라 윤리
적인 참여로도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부쉬넬의 기독론 역시 그의 신관의 경우와
같이 신학적 위치에 있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3) 인간관
하나님의 본성이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에서가 아니라 관계성 속에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것처럼 부쉬넬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자연계에 속하는 물질적 존
재(physical being)만도 아니요, 관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만도 아닌 영과 육의 관계성 속에서 표출될 수 있는 제 3의 존재라고 본
다.) Ibid.

인간은 자연과 초자연의 중간에 위치한 제 3의 위치, 그리고 그들을 연관시키는
제 3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한 부쉬넬의 통찰력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 적
인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동시에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다. 인간에 대한 부쉬넬의 생각이 정통 신학에 비해 낙관적이지만
인간은 그가 처한 가정이나 국가, 문화 등의 압력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
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이들의 압력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 인간을 위해 기독교 가정의 부모는 신앙으로 아이들을 양육할 때 인
간의 선한 의지를 굳게 유지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존재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쉬넬은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기는 하나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간관은 인간이란 교육이나 역사의 진전에 의
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보는 비관적 인간관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점
에서 그는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 들였다고 볼 수 있다.
부쉬넬에 의하면 죄란 능력의 상실(incapacity to overcome)") Ibid.
을 의미한다. 죄
는 우리의 삶의 각 영역에 침투하여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데 인간의 의지는 이들
의 압력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는 가정이나 교회는 그 의지를 확고히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의도
하시는 새로운 존재로 나갈 수 있다고 보며 부쉬넬은 인간의 죄와 그 치유가 사회
적 용어로서 서술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부쉬넬에게 있어서 죄란 개인적이
라기보다는 관계 적인 사회의 압력이란 관점에서 이해했다.

4) 구속론
부쉬넬의 구속론은 그의 신관과 기독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하나는 구속에 대한 이른바 객관적 이해이다. 이
는 곧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짐을 받게 되는 대속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구속에 대한 주관적 이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의
사건은 인간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어야 하고 능력상실의 죄된 인간에게 능
력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인간들을 구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Ibid., pp. 201-202.
부쉬넬은 세계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인간이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구원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장(場)을 부쉬넬은 가정과 교회라고
부르고 있다.

제 2 절 부쉬넬의 교육 사상

부쉬넬은 그 당시 신앙 부흥 운동이 어린이를 불신자로 취급하고 어린이는 회심
이 필요한 존재지 교육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 반대하여 어린이는 그리
스도인으로 양육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이런 의미에서 부쉬넬
의 교육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쉬넬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아동에 대한 그의 이해는 그의 인간관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주고 있으며 부모
를 통해서는 인간에 대한 간접적인 이해를 주고 있다.

1. 아동 이해

부쉬넬은 인간 이해를 영적 존재만도 아니요, 육적 존재만도 아닌 오히려 두 가
지 본성을 포괄, 초월하는 제 3의 존재라고 보았다.) H. Bushnell, Christian Nurtur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7), p. 15.
이와 같은 그의 입장에서 받
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낙관주의적 견해로서 본체론
적으로 인간 안에는 신성한 물질이 주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타락이나 죄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선을 파괴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교육이란 인간의 이 선
한 것을 유발 계발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비판주의적 견해로서 아동은 본질상 죄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형태의 교육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다만 성인이 되어서 스
스로 결단성을 경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근본적인 변화를 갖게 된다는 견해
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을 부쉬넬은 강하게 반대하면서 어린이는 죄 가운데서 성
장해서 어느 정도 성숙한 나이가 되면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이는 이 세상에 올 때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존재 ) Ibid., p. 4.
로 온 것이라고 보았다.
부쉬넬은 부모가 그리스도인인 아이들과 불신자인 부모를 가진 아이들을 구분하였
는데 전자는 양육 받아야 하는 반면에 후자는 회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Ibid., p. 10.
부쉬
넬은 신앙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매개는
두 가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 하나는 회심 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장성한 사
람들이 신앙과 경건으로 돌아오는 길이며 또 다른 하나의 길은 가정 이라는 매개
라고 보았다. 특별히 가정을 통한 힘은 자녀들의 신앙과 경건을 불러일으키는 결
정적인 요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쉬넬은 아동들을 죄인만도 아니요 완전한 선인만도 아닌 존재로서 아동들 속
에는 어른들이 발견할 수 없는 거룩한 원칙의 씨(seeds of holy principle) ) Ibid., p. 5.

가지고 있는 영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며 그것은 계속해서 자극되고 계발되
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성장은 저절로 자라는 식물적인 과정
이 아니다.) Ibid., p. 15.
그것은 악과의 투쟁 실패와 구출 타락과 구원의 이중적 경험을 통
해서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존재이다.) Ibid.
즉 어린이는 영적으로 갱신되는 가
능성의 존재이면서 죄의 참혹성과 선의 가치를 함께 배워 가면서 성장하는 존재이
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유전에 의한 죄인이 아니며 그렇다고 나면서부터 본질적으
로 절대적 선이 어린이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쉬넬은 그리스도인이란 선한
것을 그 자체만을 위하여 그저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 Ibid., p. 9.
라고 주장했다. 부쉬
넬은 어린이가 선한 삶 을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고 하
는 것을 암시했다. 부쉬넬은 어린이에게는 자신의 의지가 없기 때문에 부모들의
신앙이 어린이의 신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부모들의 의로운 본성이 어린이에
게 전이된다고 믿었다. 악이 어린이에게 전가될 수 있다면 의로움도 그들에게 전
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있음을 전제할 때 자
녀들도 그 계약의 분담 자로서 부모의 믿음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
거에서 어린이는 부모와 함께 믿음의 인 치심인 세례를 받고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영적으로 새로워진 존재로 자라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기독교 교육이란 이런 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며 이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기독교
교육이라 불리어 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양육 의 요약이라 할 수 있
다.
부쉬넬은 어린이가 교육을 받는 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Ibid., pp. 234∼236.
하나는
인상 이나 느낌 으로 영향을 받는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 영향을 받는
시기 이다. 부쉬넬은 이것을 언어사용 이전의 시기와 언어사용 이후의 시기로도
표현하였다. 부쉬넬은 어린이는 그가 보는 모든 것으로부터 오는 인상(impression)
을 향해서 항상 개방된 존재라고 보았다.) Ibid., p. 82.
즉 어린이의 성격은 개방된 상태에서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결국 어린이의 개방된 상태
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어린이의 개방 속에 인상을 주는 행위이므로 기독교 양육
의 전제는 어린이는 다른 존재가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부모 이해

부쉬넬은 그의 저서 기독교적 양육 에서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 하는 종교교육
의 대전제 중 하나는 가정의 부모가 하나님의 돌보심(nurture of the Lord) 아래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Ibid., p. 10.
즉 하나님은 부모 안에 있고 부모들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앙을 체험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부쉬넬의 견해
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신앙적 교육적 책임이 절대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는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이며 이
권위는 가정 치리 라는 방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이 권위는 사랑을 말하고
사랑이 모든 법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질서가 되는 상태이다.
기독교 가정 안에서 부모가 차지하는 근본적인 위치는 하나님과 아동사이의 관
계 형성과 신앙을 매개하는 일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부모로서의 잘못된
교사상은 그리스도의 빛(in the light of Christ) 아래 있지 않은데서 원인이 된다
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 있지 아니한 부모의 가르침의 진리는 결코 내
적 능력 을 가지지 못하며 이 내적 능력이 없는 진리란 부모가 한낱 의무와 저질
적인 사상과 왜곡된 의견으로 강요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부쉬넬은 기독교 교육의 성패는 교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부모에 달려 있기 때문
에 부모가 철저히 기독교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진정한 아버지 됨 어머니 됨의 기
독교적 양육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Ibid., pp. 68∼71.
부쉬넬은 부모의 위치와 자격에 대해 다
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첫째, 부모가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부모의 삶 자체는 부모의 교
훈보다 더욱 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가정의 분위기가 자녀들의 양육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Ibid., p. 70.

셋째, 가정에서 부모가 어떤 도식화된 원칙만을 고집하고 그 원칙의 틀에 아이
들을 맞춰 교육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기독교적인 양육을 위해 부모가 취할 태도
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Ibid., p. 222.
어린이는 무한한 영적 가능성의 존재이므로 부모는 어
린이들 안에 있는 거룩한 씨앗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
넷째, 부모들이 진실성과 성실성을 갖지 못하고 허위나 위선으로 모든 것을 행
할 때 그러한 태도는 자녀들을 위선자로 만드는 것이다.) Ibid., p. 223.

다섯째, 부모의 나쁜 도덕성과 도덕성의 결핍은 자녀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여섯째, 기독교적 악 또는 종교적 악 ) Ibid., pp. 224∼229. ①부모가 경건한 체함(sanctimony)②부모의 종교적 편견
(bigotry)③부모의 광신주의(Christian fanaticism)와 비판적이고 흠잡는 습관
(censorious habit)④부모가 신앙적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갖지 못함⑤부모의
불안(anxiousness).
이 있는데 부모의 불안은 믿음이 적다
는 표시이며 이러한 부모의 신앙태도는 자녀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본다.
부쉬넬은 부모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자녀에게 불안을 표시해서는 안 된
다. ) Ibid., p. 260.
고 하였다. 불안은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일을 대할 때 불안하게 만들고 자
신 없는 인간으로 형성하며 종교를 멀리하게 만든다. 자녀들의 품성은 부모의 것
을 닮는 모방의 나이 ) Ibid., p. 214.
이다. 그러므로 부쉬넬에게 있어서 부모 이상으로 좋은
교사는 없다는 것이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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