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튜레틴의 중생개념 이해에 있어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점
튜레틴의 중생개념 이해에 있어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점
Francis Turren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II, P&R, p.522.
"As conversion can be considered under a two fold relation, either as a habitual or as actual, so both God and man certainly concur, but in such a way that in both the glory of the whole action ought be ascribed entirely to God alone." Habitual or passive conversion takes place by the infusion of supernatural habits by the Holy Spirit. on the other hand , actual or active conversion takes place by the exercise of these good habits by which the acts of faith and repentance are both given by God and elicited from man. Through the former, man is renovated and converted by God. Through the latter, man, renovated and converted by God, turns himself to God and performs acts. the former is more properly called regeneration because it is like a new birth by which the man is reformed after the image of his Creator. The latter, however, is called conversion because it includes the operation of the man himself. Now although in the order of time, they can scarcely be distinguished in adults (in whom the action of God converting man is never without the action of man turning himself to God), still in the order of nature and of causality the habitual ought to precede the actual and the action of God the action of man.
(번역: 회심이 이중적인 관계, 곧 습관적이거나 실제적인 것으로 고려될 수 있듯이, 하나님과 인간은 이 모든 행동에 있어서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방식으로 협력하게 된다. 습관이거나 수동적인 회심은 성령님께서 초자연적인 습관을 주입하실 때 일어나게 된다. 반면에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회심은 이 선한 습관이 활동할 때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믿음의 활동과 회개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기도 하고 또 인간에게서 나오기도 한다. 전자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개선되고 회심하게 된다. 반면에 후자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의해 개선되고 회심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행위를 하게 된다. 전자에 대한 더 적합한 명칭은 중생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창조주의 형상으로 새롭게 개혁되는 새로운 출생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회심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직접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적 순서에 있어서 이 둘은 성인의 경우 거의 구별되지 않지만(그 사람 안에서 그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는 결코 자신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의 행위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중생과 회심의 본성과 인과성의 순서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전히 습관적인 회심(중생)이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회심(회심)에 앞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행위가 사람의 행위보다 먼저 일어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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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튜레틴의 글을 읽고는 튜레틴이 수동적 회심(좁은 의미의 중생?)과 능동적 회심이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위의 문장을 기술한 튜레틴이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위에 언급된 책의 p.524).
“XVI. Hence it appears that man is not like a log and a trunk in his regeneration, as our opponents falsely charge upon us. (결론적으로 사람은 중생시에 통나무나 등걸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고 우리를 비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1) The will is receptive(dekikon) subject of grace; this cannot be said of a trunk.(의지는 은혜를 수용하는 주체입니다. 나무등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2) The Spirit does not force the will and carry it on unwillinly to conversion, but glides most stweetly into the soul(although in a wonderful and ineffable manner, still most suitably to the will) and operates by an infusion of supernatural habits by which it is freed little by little from its innate depravity, so as to become willing from unwilling and living from dead. (성령께서는 의지를 강제하시거나 사람이 원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회심케 하시지 않습니다. 영혼속으로 가장 부드럽게 스며들어 오십니다(놀랍도록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의지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그래서 초자연적 습성의 유입에 의해서 작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에 의해서 의지가 그 내적인 부패의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little by little} 해방되어져서 원하지 않던 의지가 원하게 되어지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3) The will so renewed and acted upon immediately acts, converting itself to God and believing. (그렇게(이미: 역자 강조) 새로워지고 활동되어진 의지는 즉각적으로 활동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튜레틴은 분명히 이런 기술을 통해서 중생의 과정에서 의지가 “점차적으로”(little by little)변화하게 되고, 그렇게 이미 변화되어진 의지가 “즉각적으로” 활동하여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동적 회심과 능동적 회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두 번째 이유는, 문화적 요소와 관해서입니다. 튜레틴의 글을 해석할 때에 튜레틴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벌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튜레틴의 글에 있어서 “...in the order of time, they can scarcely be distinguished in adults....”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튜레틴이 속한 문화적 상황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인 사회에서 유아세례를 어릴때 대부분 받아야 했고, 유아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릴때부터 교회에서 어떤 것들을 설교하며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어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성인들의 경우, “어떤 기회를 통해서 정확한 복음을 듣게 되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유효한 부르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scarecely be distingushed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경우들에서조차도 과연 유효한 부르심이 언제 일어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곧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유아세례를 받지도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런 기독교문화 속에서 복음을 직간접적으로 들을 기회는 부지기수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유효한 부르심”은 좀 더 일찍, 곧 앞에서 말하였던 “어떤 기회를 통해서 정확한 복음을 듣게”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튜레틴이 말한 습관적 회심과 실제적 회심이 scarecely be distinguished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두 가지 요소 곧 (1) 곧 바로 이어 설명하는 중생의 과정의 특징을 튜레틴 자신이 설명하는 것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고, 또한 (2) 튜레틴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결론은, 결코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회심)을 튜레틴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들의 상황, 곧 선교지적 상황을 고려해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