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이런 중생관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어떻게 연중론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번역첨가)

baromi 2012. 8. 7. 03:38

중생이 순간적이 아니고 단계와 과정이 있다고 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

 

Abraham Kuyp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AMG Publsher:2001, p.311~312.

 

For a correct idea of the entire work of grace in its different phases let us notice the following successive stages or milestones: 은혜의 전체역사에 있어서 그 여러 가지 단계들에 있어서의 정확한 개념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단계의 연속적인 단계들이나 지계표들에 주의하도록 합시다:

 

1. The implanting of the new life-principle, commonly called regeneration in the limited sense, or the implanting of the faith-faculty.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것, 이것은 보통 제한된 의미에서 중생이라고 불려지는데, 신앙의 패큘티가 심겨지는 것입니다. This divine act is wrought in man at different ages; when, no one can tell.이러한 신적인 행위는 여러 연령층의 사람 속에서 일어납니다.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누구도 말할 수가 없지요. We know from the instance of John the Baptist that it can be wrought even in the mother's womb. 세(침)례요한의 예를 보아서 어머니의 태에서조차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And the salvation of deceased infants constrains us, with Voetius and all profound theologians, to believe that this original act may occur very early in life. 일찍 죽은 유아들의 구원문제는 보에티우스와 모든 박식한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의 원래 행위가 아주 일찍 생애의 초기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믿게 합니다.

 

2. The keeping of the implanted principle of life, while the sinner still continues in sin, so far as his consciousness is concerned. 이렇게 해서 심겨진 생명의 원리를 유지하는 일이 계속되는데, 됩니다. 그러는 중에 죄인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생활합니다. 자신의의식에 관한 말입니다. Person who received the life-principle early in life are no more dead, but they life. 생명의 원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제 죽은 사람이 아니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Dying before actual conversion, they are not lost, but saved. 실제의 회심이 일어나기 전에 죽는다 하더라도 잃어버린 바 된 것이 아니고, 구원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In early life often manifest holy inclinations, sometimes truly marvelous. 인생의 초기에 간혹 거룩한 기질이 표현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진정으로 놀라운 일이기도 하지요. However, they have no conscious faith, nor knowledge of the treasure possessed.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의식하지 못하며,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보물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The new life is present, but dormant; kept not by the recipient, but by the Giver - like seed-grain in the ground in winter; like the spark glowing under the ashes, but not kindling the wood; like a subterraneous stream coming at last to the surface. 새 생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잠재적인 것입니다; 그 생명을 수여받은 사람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주신 분이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 마치 겨우내 땅 속에 곡식의 씨가 숨어있는 것 같이; 마치 화로의 재밑에 파묻혀있던 불씨처럼, 화로속의 나무를 태우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불씨는 살아있는 것 같이; 마치 땅 밑에 숨어있던 지하수가 지표상으로 표출되는 것같이 말입니다.

 

3. The call by the Word and the Spirit, internal and external. 말씀과 성령에 의한 내적이고 외적인 부르심이 있습니다. Even this is a divine act, commonly performed through the service of the Church. 이것조차 신적인 행위이지만, 교회의 봉사(홀리죠이: 전도/교육/설교/상담등의 활동)를 통해서 흔히 행해집니다. It addresses itself not to the deaf but to the hearing, not to the dead but to the living, although still slumbering. 이것은 듣지 못하는 귀먹어리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에게 들려지고,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행해집니다. 살아있더라도 아직 졸고 있는 사람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It proceeds from the Word and the Spirit, because not only the faith-faculty, but faith itself- that is, the power and exercise of the faculty - are gifts of grace.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이뤄지는데, 그것은 신앙의 패큘티만 아니라 그 패큘티로 능력을 갖고 실행되는 믿음 그 자체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The faith-faculty cannot exercise faith of itself. 신앙의 패큘티가 저절로 신앙을 행사하게 할 수 없습니다. It avails us no more than the faculty of breathing when air and the power to breathe are withheld.그것은 공기도 없고 숨쉴 능력도 없다면, 숨쉬는 패큘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Hence the preaching of the Word and the inward working of the Holy Spirit are divine, correspondent operations.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성령의 내적 역사하심은 신적이면서 상호 일치되는 작용인 것입니다. Under the preaching comes effectual, for the sleeper arises. 말씀이 선포되는 중에 효력이 일어나고, 잠자고 있는 자가 이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홀리죠이 사족: 한국크리스챤들이 중생론에 있어서 헷갈리는 것은, 위의 카이퍼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패큘티’라는 용어에 대한 기본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으로도 보입니다. 대학교의 교수요원들 말할 때 ‘패큘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능력이 행사될 수 있게 하는 어떤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귀와 귀가 듣는 것을 구분해 볼 때, 귀는 패큘티이고, 이 패큘티에 의해서 듣는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시에 신앙의 패큘티가 들어온다는 것은, 믿을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갖는 그 구조물로서의 그 무엇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행사하여 그 패큘티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 표면화되어지는 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중생이요, 회심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신앙의 패큘티가 생기고 말씀을 듣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좇아서 그 패큘티로 반응하게 되어서 믿음(혹은 회개)을 갖게 되어 넓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게 되니, 세계3대개혁신학자 중의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좁은)중생>믿음(회개)>(넓은)중생” 이해를 정확하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20세기 개혁신학자이니, 17세기후부터 좁은 의미의 중생만을 시사하는 것으로 중생이란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는 이승구교수의 평가는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못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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