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개혁주의님께... "아들도 모르고" 에 대해서
개혁주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일위이성의 특성을 전혀 염두하지 않고
신성만을 염두하고 지금 이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위격간의 고유성을 전혀 염두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기 고유의 위격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아들도 모른다는 그 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측면에서 각 위격간의 고유성과
아들의 일위이성을 적용해야한다고 봅니다.
개혁주의님의 이러한 질문은 과거 그레이스님도 한번 질문을 한 적 있었고
그에 대해서 제가 덧글로 답변을 적었었습니다.
아래의 주소로 가시면 그 글과 덧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PO/1893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측면>에서 볼때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육신-십자가 대속(죽음)-부활과 승천-재림>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은 끝나지 않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아들은 행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재림까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날에 오시는 것이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사역이므로 오직 아버지만이 그러한 결정을 하시며 그러한 아버지의 결정에 아들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둘째는 삼위일체의 위격적 관계측면>에서 볼때에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하신 분이시나 아버지가 곧 아들이 아니며, 아들이 곧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라. 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와 같은 식의 사고(아버지가 아는 것을 아들이 모른다면 어떻게 동등하냐?>는 삼위의 각 위격의 인격(정확히 신격)을 전혀 염두하고 있지 않은 개념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간 인격적관계를 염두하지 않고 오직 기계적 측면으로만 바라본 것입니다. 기계적 측면이란 각 위격들의 능력이 동등하다면 서로의 생각도 다 알 것 아니냐는 아주 능력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능력적 존재, 즉 베니힌이 말한 인격 없는 능력만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적>으로 볼때 아버지의 뜻이라고 주로 성경에서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은 주최자가 아버지라는 것이며, 아들과 성령은 그 아버지의 뜻을 기뻐 시행하는데, 이는 능력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위격간의 관계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아버지는 우월한 신, 아들과 성령은 덜 우월한 신.. 이라는 잘못된 신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성자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령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위격들은 무질서와 혼란의 관계가 아닙니다. 삼위들은 참질서이시며 참된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자와 성령은 아버지께서 뜻을 정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 뜻을 성자와 성령이 행하는 것을 원하시며 성자와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고 시행하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에 의해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눅22:42 아버지의 뜻이어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분명히 성자도 독립적으로 뜻이 있음을 잘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잫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더 원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성자의 뜻이 아버지의 뜻보다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아마 물을 것입니다. <그럼 왜 성자와 성령은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길 원하나?> 그것은 삼위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결과이므로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완전히 다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면에서 성자와 성령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2위가 제1위였다해도 제3위가 제1위 였다해도 제2위와 3위가 제1위의 뜻에 따르는 위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는 동등하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격들의 위격적 관계>와 <각 위격들의 사역적 관계>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위의 사항을 <능력적 관계>로 접근하면 잘못된 신관 특히 잘못된 삼위일체론이 형성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베니힌 또는 여호와의 증인 꼴 납니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자기 형제요 가족이라고 했는지 그 의미를 능력적 면에서 해석하면 위 구절은 꽤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
그리고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한 위격입니다.
인성은 참 사람의 특성들인 의식과 아는 것과 육체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개혁주의님의 원리대로 적용하면
예수님의 인성의 아는 것과 의식이 신성의 모든 뜻과 계획을 다 깨닫고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래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위이성에 대한 정리된 카페의 글입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2Ff/249
<Human person이 아니신 예수님이 어떻게 가장 personal하실 수가 있는가?>
저는 예수님이 한 person이심을 믿고 또한 그것이 divine person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견해는 교부들이 작성한 칼케돈신조와 개혁주의신조들과 일치한다고 이해합니다. 성경과도 가장 일치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의 이 부분과 관련된 토론들을 검토해 보면서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저의 양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저의 견해를 어떤 이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human person이 아니고 divine person 이기만 하면서 어떻게 personal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고 질문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human person이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impersonal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personal 하신 분이심을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다는 것을 주장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divinity와 humanity를 서로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충분히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저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humanity를 강조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의 human person되심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오늘 이 글에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여러 번 강조해 왔거니와 person과 nature에 대한 개념의 차이입니다. 구체적으로 human person과 human nature의 차이를 설명하겠습니다. Human nature는 인간이 공통적으로(in common)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을 말합니다. 곧, 죽음, 지, 정,의, 영혼, 의식,육체와 같은 속성들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의식(consciousness)과도 같은 속성들이 human nature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의식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자의식도 이것에 해당됩니다. 아는 것, 느끼는 감정,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라면 공히 가지게 되는 일종의 공통된 속성(본성, nature)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무엇을 느끼는 것, 의식하는 것, 의지하는 것 등등이 인간의 공통적인 human nature라고 한다면, 바로 그 무엇을 느끼는 존재, 의식하는 존재, 의지하는 존재가 바로 human person이라는 것입니다. Human nature가 느끼는 것이라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느낌과 의지의 속성(nature)를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가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지금,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속성이 바로 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그 속성을 가지고 그 속성을 표출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바로 human person입니다. 이런 면에서 nature는 capacity라고 한다면, person은 그 capacity를 실행하는 주체로서의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속성 그 자체를 human nature라면, 생각하는 속성을 표출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존재는 바로 person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human nature를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person입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나 혼자만의 개별적이 존재됨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person입니다. 이것은 내가 독립적인 개체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이것에 대해서는 데카르트가 오해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밝히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 혼자만으로서의 이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로서의 나는 또한 관계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person입니다.
이러한 human person과 human nature의 차이를 예수님의 person에 적용시켜 보게 되면, 저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셨습니다. 고뇌라는 것은, divine nature에 속한 속성이 아닙니다. 고뇌한다는 것은 human nature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human nature가 고뇌하였다고 하는 것은 nature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nature라는 것은 고뇌할 수 있다는 일종의 인간공통의 속성이지, 그 nature가 고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human nature가 고뇌하였다고 하는 말을 한다면, 그 뜻은, 고뇌라는 예수님의 human nature가 고뇌한 것이라는 뜻이 되고, 결국, 고뇌가 고뇌하였다는 말도 안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human nature로서 고뇌하였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고뇌하였다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 분만의 유일하고 독특한 그의 person이 고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질문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 예수님의 person이 human person이라고 해야만 예수님의 참인간됨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예수님의 human person이 고뇌할 때에, 예수님의 divine person은 고뇌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예수님 안에 두 개의 person이 있어서 한 person이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의지할 때에 다른 person은 다른 것을 의식하고 의지하거나 하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표현은 “예수님이 고뇌하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든다면, 피를 흘린다는 것은 human nature입니다. Divine nature는 피를 흘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때에 피를 흘린 것은 바로 예수님, 이 세상에 홀로 구속의 대사업을 성취하신,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예수님의 person이 피를 흘린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몸에서 피가 흘렀습니다만, 누구의 몸이냐고 할때에 예수님의 person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다시 질문해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 person은 human person인가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사람되심을 주장한답시고, 그렇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에 예수님의 divine person은 아무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고 하고, 그것을 더욱 밝혀 말하기를 예수님의 divine person이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사도행전20:28에 나오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을 human person이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을 변개시키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Human nature에 해당되는 어떤 속성(예,피흘림)을 때로는 이렇게 divine nature를 가지고 있는 divine person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일반적으로 “속성교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속성교류”의 방식으로 표현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그 설명을 미루겠습니다).
현재로서는, divine person이신 예수님이 human nature로서의 고뇌와 피곤함과 눈물과 간절함으로 피섞인 기도를 드린 것들에 대해서 말함으로 예수님의 personal하심과 참사람되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해야만 예수님의 사역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human person이 있다거나, 혹은 그가 human person이시다는 것은 그의 참사람되심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예수님의 person의 일치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을 아주 이상하게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 one Jesus를 주장한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human person과 divine person이 하나의 person로서 활동하는 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Human person이 아니시면서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충분히 참사람되심을 경험하시고 체험하시고 우리 인간이 겪으실 죽음을 통과하심으로서 더욱 참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중보가 되시고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죽음을 통과할 때에 그 고통과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을 human person이 겪도록 내버려 두고, 전혀 고통도 없이 전혀 고뇌도 없이 전혀 피눈물도 없이 태연하게 부동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 divine person은 결코 성경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human nature를 지니심으로 우리와 꼭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가지시고 피흘려 죽기 까지 하신 바로 divine person으로서의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성경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른 예수는 없습니다.
한백성 홀리죠이
몇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제가 잘 몰라서요?? 1) 창1:26-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이 때의 이 사람은 human person 입니까? divine person 입니까? 2) 요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에서 이 육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human person 입니까? divine person 입니까? 위의 홀리죠이님의 설명으로 05.06.16 09:52
는 제가 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입니다...육신(flesh)는 nature 입니까? person 입니까? 05.06.16 09:53
창1:26의 사람은 human nature를 가진 human person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신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1:14의 '육신'은 human nature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human person도 아니고 divine person도 아닙니다. 말씀(divine person)이 육신(human nature)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05.06.16 14:58
신조들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칼케톤신조와 웨신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05.06.1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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