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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하나님의 의란? http://cafe.daum.net/keeper77

baromi 2010. 3. 24. 10:26

의(義)란?


작성자 윤철희

들어가면서


    과연, “의”(義)란 무엇인가? 무릇 보통의 범인(凡人)인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정당한 것’ 또는 ‘올바른 것’ 그리고 ‘정의롭고 누구에게도 공평한 것’ 등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과거 우리나라 5공 정부 시절에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정부 슬로건이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집단적 집체교육 등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거짓된 것의 팽배가치가 전체 이익을 주로 지배함으로써 소수의 정당한 정의로운 진정한 의(義)에 굶주린 자들이 적지 않게 핍박를 당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오늘날의 현대사회 속에서는 사회곳곳에 부정부패와 거짓이 난무하고, 특히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린 일부 기독교 교회안에서 까지도 세상적 음행과 거짓과 술수가 횡횡하고 있으며, 심지어 빙산의 일각인 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공개적으로 드러난 이러한 일들은 종종 대중매체를 통해서 세상속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도되곤 한다.


    필자는 그래서 기독교인이 갖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義)를, 일종의 선포적 개념에서의 종말, 이미 선언된 하나님의 심판 및 증언으로 간주하면서 이 시대에 과연 기독교인이 신앙의 올바른 사상정립으로 가져야 할 칭의(稱義)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면서 이와 함께 기록된 성경에서의 복음(福音)의 정당성을 함께 서술, 병행하면서 본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특별하게도 지금의 한국 기독교 교회는 칼빈적 개신교의 역사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점차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양태와 이상 야릇한 또 다른 복음의 종교적 의식을 본 받고 치장한 나머지 진정한 생명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늬만 화려한 종교인을 양산해 내는 일에 점차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임을 바라보면서 애절하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본 글을 전개해 나고자 한다.


펼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의(義)는 칭의(稱義-Justification)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딱딱한 마루에서 잠자는 것과 금식, 심지어 손과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것을 해 보았지만, 죄의식으로 인한 그의 영혼의 평안에는 별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드디어, 그는 로마서 1:17절에서의 “하나님의 의(義)”를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의인은 오직믿음으로(sola fide)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씨는 서서히 지펴지게 되었던 것이다.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


    이처럼, 우리 기독교회의 의(義)는 법정적인(forensic) 칭의의 성격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이 법정적 칭의(히,히필형으로 짜다크)는 구약의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창세기15:6) 신약의 바울은, 로마서 4장3절과 갈라디아서 3장6절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바로 위 창세기 15장6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3장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디카이오수네 데우<dikaoosyne theou>)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의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a righteousness from God)로 NIV성경은 올바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 의미는 ‘의롭게 하다’가 아니라, ‘의롭다, 선포하다’의 뜻으로 이 사람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긴다는 즉 전가 또는 덧입힘(imputation)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것은 선포적이며, 법정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칭의(Justification) 차이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트렌트 종교회의)의 칭의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를 개신교회의 칭의와 간락히 비교하면서 논증하겠다. 이 문제는 은혜의 출발성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전제(proposition)를 낳는데, 신앙적 복음의 칭의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적(神的) 근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엡2:8) 로마 카톨릭교회는 은혜를 단지 우월성과 필요성으로만 여기지만, 개신교는 오직은혜(sola gratia)로만 이루어지는 믿음의 유일성만을 강조한다.


    이러한 또 다른 차이점은 로마 카톨릭교회는 시초적(initial) 또는 원래적 칭의와 최종적 칭의의 2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는 반면에, 개신교는 앞에서 언급한 법정적(forensic)인 단회적(once for all) 칭의를 말하고 있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점를 보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원래적 칭의는 신자(信者)의 도덕적이며 체질적인 영적 변화(translation)를 주는 중생적 세례를 통한 주입된 은혜(an infusion of grace)로 말미암아 칭의를 가져온 다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적인 은혜적 통로(수단)(Instrumental cause/기독교강요3권1장, 웨스트민스터고백서11장2문)의 요소가 아닌 부차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으며, 칭의의 은혜를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심히 살펴볼 문제로, 로마 카톨릭교회(트렌트 종교회의)의 최종적 칭의에 있어서는, 선행을 통하여 즉, 미사를 통한 영적공급, 신부의 고해성사를 통하여 칭의가 성장할 수 있다고 트렌트 신조에서 공공연히 말하고 있고, 또한 칭의된 자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선한 공적으로 영생이 보장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공효(imputation of Christ's blood work)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justification by faith) 성령의 적용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도의 구원은 믿음의 결과인데 반하여, 로마 카톨릭교회는 선행의 보상으로써 구원관을 가짐에 따라, 전혀 판이한 차이를 나타나내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이니라”(롬6:23)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라는 말씀과는 절대적으로 반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칭의론을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개신교의 성도(聖徒)의 위치는 법적 지위의 변화로써 성도의 본성인 내적 중생(rebirth)의 변화를 소유하고 있는 바, 칭의(稱義)의 개념으로써 이것의 내용은 우리의 죄가 구속주에게 전가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로 전가(Imputation)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칭의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영원한 성삼위의 작정(Factum Salutio) 안에서 택함을 입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처절한 사랑을 왜곡하는 것으로, 베푸시는 은혜스러운 성격을 흐리게 함으로써, 이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심장을 더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롬1:16)


또 다른 복음(칭의)의 변종 요소와 방향


  이제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의 칭의에 관한 잘못된 관점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독교 개혁교회안에 슬그머니 들어온 로마 카톨릭적 요소들 외에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사상의 우상적 종교의 상이한 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개혁교회인 개신교회(장로교 등)는 이러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묵과하거나, 자의적인 우상 숭배적 습관과 종교 의례적 관용에 의하여 일부 삯꾼들의 종교적 악한 사치 놀음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기독교’ 라는 종교적 관념(다른 복음)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지만, 쉽사리 말씀으로의 향방으로 개혁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방어화 되어 길들어진 인지적 장벽으로 선행적 공로와 율법적 명령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인 마냥, 그 위선된 야누스적 가면이 우리의 현재적 실존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조직신학적으로 구원의 출발인 복음(福音/유앙겔리온)의 한 요소로써 칭의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교회안에는 잘못된 많은 복음(칭의)의 방해된 요소들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복음전도시에 구도자를 대상으로 교회에 나오도록 선심적 미끼로 선물 공세를 한다던지, 또는 인간의 본질적 죄인됨을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강조함으로 뒤틀린 복음을 심겨줌으로써 구원의 속성인 종말론적이 아닌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 기복적인 구원관을 가져오게 하는 행위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소위, 구원받아 축복받고 물질적으로, 병으로부터 치유 받음으로 계속 축복받아 성령 받았다는 ‘삼박자 구원론’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비본질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로써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잘못된 구원관이 복음주의적 개신교회안에 팽배되어 있는 오늘의 작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난 한 십자가의 구속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진정 깨닫고 그의 생애를 이 복음을 위하여 기꺼히 사용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새로운 사상을 전하거나, 또는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조주이며, 구속주되시는 그 분의 뜻대로 그는 복음을 전적으로 승복, 이러한 믿음의 수납의 터 위에서 피조물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에서 이 참다운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한다”는 그의 고백의 참 뜻은 “십자가의 도”(호 로고스 호 오토우 스타우로우)를 말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나 이 세상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인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비밀의 경륜가운데서의 복음(福音)을 이 세상의 기준과 안목을 가지고서 복음 그 자체를 높이려고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적인 이중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복음을 결코 변질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별히 주의 할 것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전함’에 너무 신경 쓰다가 그 내용을 변질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복음은 언제나 이 세상이 볼 때에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준과 시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의도하여 조작하거나, 복음 전달이 이 세상의 관점에서 효과적으로 적용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복음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의 미련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삼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고전1:21)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고 필자는 이것을 확신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믿는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1:16)


나오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칭의에서 출발된 복음의 비밀은 위대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조직신학적으로 여러 개혁신학자들의 중생, 칭의, 부르심 등등의 순서적 일치를 합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들의 통일된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시적으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칭의(Justification)는 현재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는(right standing for God)상태를 확보하는 것으로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재차 확신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가 법정적인 의미로써 선포적으로 비록 주어졌다 하더라도 계속되는 죄의 영향아래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칭의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가볍게 취급하여서는 아니 될 것을 명심하게 된다. 밧세바의 간통과 우리아를 살해한 다윗의 범죄가 그리하였으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부정한 자요, 더러운 옷이요, 다 쇄패함이 잎사귀 같은 존재(사64:6)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이 한 없는 은혜의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복하고 통회하는 찢긴 심령의 의미는 더욱 더 중요한 가치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유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義)에 기꺼히 복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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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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