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거듭난 자의 죄 지음에 대한 호레이스님의 댓글 모음.
밑의 두 게시글에 있는 호레이스님의 중요한 덧글을 따로 올립니다.
상당히 중요한 글이고, 그 덧글 자체가 많은 양을 상당히 압축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덧글을 따로 프린트 해서 성경구절 찾아가면서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중생한 자아"로 보고 그것을 "중생한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은 논리비약입니다. 어느 교단의 강도사 글인지 몰라도 '중생한 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결론내리는 것은 제가 우려하고 있는 결론들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한 자를 말하지, 그 중생한 자의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중생한 영이라면 "자"라는 관사를 헬라어에서 "영"이 중성이므로 중성관사(토)를 써야하는데 남성 관사(호)를 쓰고 있네요. 그러니까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 "마다" 여기서 "마다"도 영을 받는 다면 중성 "판"을 써야하는데 남성인 "파스"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생한 자는 남성 관사를 쓰기에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원어를 모르면 해석하지 말라는 말은 안했고 도움이 될까 해서 기록했는데 푸대접 받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분들이 해석해서 제가 구지 해석할 필요도 없구요. 그리고 구지 답글을 많이 달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원문의 해석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하자. ---> 본문은 거듭난 자라고 할지라고 육과 영이 더러워질 수 있기에 자신을 깨끗케하자는 말 이라고 봅니다.
저도 malkut님의 지적에 공감하고 또한 동감합니다.
고후7:1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백영희목사의 견해가 위의 요약된 글에 나타나는 것과 일치된다면, 고후7:1같은 구절은 백목사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결정적으로 가르킨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거듭난 자 속에는 '영'이 있습니다만, 그 '영'에 '거듭난 자'를 제한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원어의 문법)에 근거할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 malkut님의 지적입니다. 저는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진합태산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후7:1에 보면 '육의 온갖 더러운 것'만 지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맥락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은 자들, 중생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권면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합니다. 중생한 자들의 '영'도 더러운 것에 더럽혀져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malkut님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구절을 대한다면, 중생한 자의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석이 불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인지 아닌지는 백영희목사의 글을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가기를 다시 부탁 드려봅니다
롬8:9~11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중생한 자의 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중생한 자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만, 그 중생자 안에 있는 성령님과 중생자 자신의 영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10절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할 때의 그 영은 중생자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영은 인간의 요소들 중의 하나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할 때의 '몸'은 우리의 생물학적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육신, 곧 죄의 실체와 법을 지고 있는 flesh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영희목사님의 입장이 중생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확실합니까? 제가 보기로는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는 아닌 듯 한데요. 그리고 '중생한 자는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잃을 죄는 짓지 못한다'는 것이 근거도 없는 단정이라고만 하시는데, 저는 비록 그런 주장이 세련되지는 못했다고 여기지만 그래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근거가 분명하지요. 왜냐구요? 중생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성도의 견인교리에서 표현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가장 확실한 근거이지요. 중생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작업이요 선물입니다. 그렇게 중생시킨 인생으로 하여금 구원을 잃을만한 죄를 짓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습니까?
저는 결코 중생한 자의 영, 중생한 사람(혹은 자)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과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민감한 셈이지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flesh와 body의 차이입니다. 보통 삼분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차이를 간과합니다. body는 우리의 생물학적 몸입니다. 죄의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죄의 실체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몸으로 번역되거나 살로 번역되는 이 flesh는 아주 복합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뉘앙스, 곧 죄의 실체를 담거나 죄의 법을 담고 있는 몸이라고 할 수 있지요.
Horace님 제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이 그것인데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 확실하게 답변을 주십시오. 다른 분도 다 이 답은 안하고 계시고 엉뚱하게 하나님을 대입시키시는데요. 구원을 잃을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 하는 점입니다. 그 경계가 어디이기에 구원을 잃을 죄가 있고, 구원을 잃지 않을 죄가 있다는 말인지요?
죄의 실체를 담을 수 있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단순히 몸(body)에서 flesh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로 어떤 점이 더 부각되어서 죄의 실체를 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는 것인지요? 그게 마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구원을 잃을 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고 한다면, 그것은 우선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중생자는 죄를 지을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구원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선한 짓을 많이 하여도 구원을 얻지 못한 자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어떻게 변별하느냐 하는 문제이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제가 그들의 책에 관심을 갖고 또한 번역했던 것도 이 문제이지요. 질문을 하나만 하신다고 하더니, 연속으로 올리셨군요. 뒤에 올리신 질문은 뒤에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중 뒤에 보실 때에 flesh와 body의 차이에 대한 것도 지금 제가 간단히 답변해 놓을 터이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바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해를 시도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풀어가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하였지만 그 완성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에 이미(already) 도래하였지만, 아직(yet)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곧 우리가 이미(already) 중생받았다고 하지만 아직(yet)은 그 모든 것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긴장(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긴장'이라고 합니다)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구원받은 자 안에서도 여전히 갈등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중생한 사람 안에 있는 영과 혼, 혹은 육체의 갈등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사적 시각을 놓치는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중생한 사람은 이미(already)의 구원받은 자, 곧 '올 세대(the age to come)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직(yet) 그 몸 안에 남은 죄(the indwelling sin)을 지니고 있습니다. 갈등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올 세대'에 속한 것은(그것을 앞에 말씀드린 것과 관계시킨다면, 성령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과 영은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합니다. 하나님지향적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때 내 몸 안에 남아있다고도 할 수 있(이때 몸과 내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법은 자기중심적이요. 이 두개의 힘, 세력, 방향력이 상호갈등하고 있는 각축장이 바로 '중생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제나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축장이 중생자'라고 한 말은, 때로는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구속사적 이해를 전제로 한다면, 그 문맥을 통해서 이 '영혼'이나, '영'이 모두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자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의 '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참된 믿음과 동반해서 중생한 사람들 속에 들어오게 되는 일종의 습관적 원리('중생'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습관적 원리'의 유입'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로서의 '성령의 원리'와 여전히 그 중생한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남은 죄의 원리'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원리에도 습관이 작용하고 이전의 습관이 남은 죄 속에도 작용합니다. 습관을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요. 하나는 하나님 지향적인 습관이요 다른 하나는 자가지향적인 습관입니다. 혹은 전자는 구심적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원심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개의 힘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벌어지는 전쟁이 영적 전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전투이지요. 중생한 자(생명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가지게 된 자)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곧 자아지향적인 습관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아지향적인 생각이나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후회하고 회개하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따라서 행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