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신학자료

[스크랩] 성경원본에 대한 노우호 목사의 주장

baromi 2009. 5. 1. 08:31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성경 영감설을 말할 때 일부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보수를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원본에는 사소한 고장도 없이 완전했을 것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배워서 믿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해 왔습니다.

문제는 우리 원본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확인할 길은 없다는 것은 인정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사본들을 대조 해 가면서 살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은 사본들이 많아서 대조를 해 보면 그 안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사본들끼리의 사소한 차이 정도의 이상인지 아예 원본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본 대조학의 상식입니다.

1. 대문자 사본이 원전에 가까운 것이고 소문자 사본이 후대의 것입니다.

2. 뛰어 쓰기가 잘 된 것이 후대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연대가 앞선 것입니다.

3. 한 두 글자의 첨가와 누락의 차이는 사본들끼리의 차이로 보게 됩니다.

4.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절을 첨가한 한 흔적들은 거의 쉽게 드러나게 됩니다.

5. 한절 정도가 빠진 경우는 오히려 원본에 더 가까운 사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6. 아예 몇 절이 더한 경우도 후대 사본에서 발견되어 첨가로 보게 됩니다.

7. 이러한 고장들은 상당수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로써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문제는 결코 사본에서 발생한 문제의 수준을 넘어서

원본에서부터 발생한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한 번 이에 대하여 살펴 주셨으면 해서 제시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1.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 누락된 문제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지)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 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태에게 3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교리를 만들고 또

그렇게 주장만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마태는 다시 한 대를 빼서 14대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3 번째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한 대(브다야)를 누락시켜서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맞추라고 감동하셨다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 대씩 맞춘다고 좋아질 것이 아마 것도 없고 그렇게 해야할 원칙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본을 만드는 사람의 실수에서 비롯된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이 실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분을 모든 사본이 꼭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마태가 이런 것 없이 완전한 영감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복음서를 기록했었는데 제 1 필사본 기록자가

임의로 이렇게 고장을 낸 것이로 하면 말은 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약 원본을 기록하는 마태에게 성령께서 오류가 없도록 감동과 감독을 하실 수 있었지만 제 1 사본의

필사자가 이렇게 큰 변조를 하도록 방치하셨는지는 아무도 설명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셋째, 마태가 한 사람의 무리한 기록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라는

다윗의 이름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글자를 숫자로 고쳐서 더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님의 실수가 아니라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은 부분입니다.

 

 

3.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은 적절하지 않았던 구절이 상당히 있습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 고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고 부적절한 적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으시면

해당 본문에 대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를 더 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너무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도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일부 보수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건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공격이 끝없이 몰려 오게 될 때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상당한 부분이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독단적으로 무슨 주장들을 항부로 떠들면

그야말로 오늘날의 목회자 신학자들까지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매도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人格的 靈感)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읽어 보시고 견해가 다르시다든지

제가 드린 말씀 속에 실수나 무리한 주장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그리고 에스라하우스를 찾은 분들에게

정직하게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이라도 검증없이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 저의 이성과 양심에 반하는 것을 주장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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