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신학자료

[스크랩] Re:Re:Re:여기에 대한 저의 공개적인 답변

baromi 2009. 5. 1. 08:30

답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을 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답변을 요구하셨기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하려고 해도 목사님의 문제제기가 많아서 길어질 것 같습니다.

 

우선 복음서 안에 있는 차이와 누락과 의도적인 편집의사를 마치 축자영감에 문제가 있는 식으로 이해하시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유기적인 영감을 인격적인 영감으로 해석하시면서 성경기자의 생각과 의도와 목적을 성경을 읽는 자들이 믿고 따르기에 오류가 없도록 간섭하셨다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유기적인 영감이 성경기자의 생각과 의도와 목적만이 아니라 그 생각을 가지고 기록한 문자와 문법과 문장에도 오류가 없다는 유기적, 축자영감을 따르고 있습니다. 축자영감은 결코 목사님의 생각처럼 기계적 영감이 아닙니다. 인격적, 유기적 영감이지만 단어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 축자영감입니다. 물론 원본에 한해서입니다.

유기적 축자영감을 따른다면 당연히 성경기자의 생각에 따라서 같은 사건이라도 기록 의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고 어떤 사건이 누락이 될 수도 있고 인물을 누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의 점진성과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구약기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신약에서는 더 분명하게 깨달아 구약을 인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구약보다 확대 발전되는 의미가 포함되겠죠. 복음서에서는 그와 같은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문제로 제기하신 마태복음의 구약인용 문제도 전부 그와 같은 맥락으로 충분히 설명가능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와 같은 마태의 의도적인 누락과 확대와 삭제와 차이를 마태의 실수와 오류로 단정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분명히 위의 글에도 밝히셨듯이 원본에 고장이나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태가 구약 인용을 무리하게 하고 잘못되게 한 것이 사본번역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원본부터 그렇다는 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성경무오설을 믿는 다고 말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원본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셔야 정직한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셨으니까 문제에 간략하게 답해보겠습니다.

간략하게 답하는 이유는 이 논쟁이 목사님이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학계에서는 충분하게 검토되고 진행이 되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아실 것이라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아신다면 제가 간단하게 답한다고 그 내용조차 간략한 것이 아님도 잘 아실 것이고 목사님의 주장이 이 문제의 다양한 견해 중에 성경무오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가까운 것임도 아시리라고 사료됩니다.

 

1. 사7:15절의 인용문제입니다.

목사님은 이사야가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을 의식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인의 잉태를 의식하고 한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마태가 그것을 동정녀탄생의 성취라고 인용한 것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처럼 이사야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분명히 이사야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모르고 전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마태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을 예표했던 예언이라고 깨달아서 그것을 구약의 성취라고 기록한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계시의 점진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히브리어 ‘알마’(젊은 여자)논쟁을 마치 처녀로 번역하면 안되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사람들의 이해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마’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성경험이 있는 젊은 여자를 뜻하며 처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알마는 구약에서 7회 사용되는데 2번은 명백히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5번은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사용됩니다. 알마가 성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젊은여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신학적으로도 이미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알마를 처녀가 아니라 젊은여자로 번역한다고 해도 젊은 여자의 범주에는 처녀도 분명히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본문의 문맥도 처녀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본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아하스왕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징조를 주시는 장면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징조란 일반적인 현상을 징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통해 확신을 주는 사건이나 현상을 징조라 그럽니다. 목사님의 해석처럼 단지 젊은 여자가 성관계를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징조가 될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어떻게 징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겠다는 약속이라야 하나님이 아하스왕에게 주신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믿고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내가 돕고 지키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내가 하면 가능하다. 그처럼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미의 징조가 처녀탄생의 징조입니다. 징조는 징조가 되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님이 제시하신 기본적인 성경해석원리에 충실한 해석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뒤이어 나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 사실을 더욱 강화시켜줍니다. 비록 목사님의 주장처럼 표면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무관하게 보이지만 사7:14절에서 언급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사8:8,10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으며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우는 구출자에 대한 기술이 9:6-7, 11:1-2에서 계속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사7:14절은 이사야 시대의 역사적인 한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예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한 사상의 출발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7장의 젊은 여자(처녀)에서 태어나는 그 아이가 단순한 어린아이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인물로 이사야6-12장에 걸쳐 발전되어 가는 구속사적 중대임무를 띤 메시아적 인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7:14절은 주전 8세기경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된 예언인 동시에 메사아의 탄생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그러한 구약의 그와 같은 의미를 깨달아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시고 마태의 인용이 잘못된 인용이라고 주장한다면 목사님은 성경원본의 오류를 인정하는 주장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처음구절입니다. 첫 구절부터 계시의 점진적인 성격은 간과하시고 마태의 실수와 잘못을 주장하시니 나머지 구약인용도 다 그러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됩니다.

 

2. 제기하신 2.3번의 문제는 마태복음의 족보 문제입니다.

목사님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세 사람의 왕을 누락시키고 14대의 틀을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오류이고 실수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14대라는 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묻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목사님은 정말 목사님이 인격적영감, 유기적영감이라고 부르는 그 영감을 믿고 계십니까? 마태가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3왕을 누락시키고 14대의 틀을 가진 족보를 예수님의 족보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너무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유기적 영감, 인격적 영감이 무엇입니까? 성경저자가 자기의 관점과 주장을 위해 자료들을 종합하고 편집하고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 과정 중에 얼마든지 삭제하고 필요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류는 아닙니다. 실수도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하신다면 문제는 마태가 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14대 라는 틀을 가지고 설명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밝히고 푸는 것이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몫이 아니겠는지요? 그리고 그렇게 밝히려고 애쓰는 많은 해석들을 아마도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석 책만 몇 권보아도 그런 연구들은 금방 드러납니다. 제가 굳이 여기 그 설명들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마태가 의도를 가지고 14대의 족보로 기록한 것을 마치 변명할 수 없는 원본의 오류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맟추라고 감동하셧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기적영감을 믿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신지요? 도무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갑니다. 차라리 목사님이 마태의 족보는 분명히 마태가 실수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본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신다면 이해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목사님은 나는 성경무오를 믿는다. 원본에 문제가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여기에서는 원본에 고장이 있다. 사본상의 오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사본들이 다 똑같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라고 볼 수 없다. 원본을 기록한 마태의 실수라고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주장중 어느 것이 자신의 주장인지요? 나는 원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입니까? 아니면 원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입니까?

 

3. 목사님은 마1:22, 2:15, 2:18, 2:23, 27:9을 들어서 이 구절에서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이 무리한 인용이므로 축자영감이 유기적영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무리하게 인용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으로 원본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국 원본의 고장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기하신 구절들을 성경본문이나 원어성경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고 다시 답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 시피 이 구절들은 목사님이 발견해낸 구절들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팽팽하게 논쟁해왔던 구절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들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마치 본문을 잘 모르는 양, 아니면 원어를 잘 모르는 양, 그리고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보지 않고 어설프게 학설이나 교리만 믿고 떠드는 사람으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으로 어린 영혼들을 미신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로 매도하고 있습니다.(축자영감을 믿으면 미신을 믿는 것같은 늬앙스입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이 처음에는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다가 이제는 한걸음 물러서서 유기적 영감설과 축자영감설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시는지요? 이런 부분들은 참 아쉽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목사님의 세미나에 6일 동안 참석하면 신학교 6년 동안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장담하신 것과 방불한 표현들입니다. 조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5. 목사님이 제기하신 마태복음의 구절들을 답변해드립니다.

 

1)마2:15절의 호11:1절의 인용이 무리하다는 주장입니다. 목사님은 여기서도 내 아들을 불러낸다는 마태의 인용을 문제 삼으십니다. 호세아11:1의 ‘내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데 마태가 그것을 예수님으로 인용한 것은 마태의 무리한 적용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도 계시의 점진성과 이스라엘-예수님의 모형론을 인지하신다면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나온 출애굽의 사건이 장차 진정한 아들인 예수님에게 성취될 것을 내다본 모형적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모형론적 이해를 통해 호11:1절을 예수님께 적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 때문이겠죠.

 

2)마2:17-18절의 렘31:15절 인용이 무리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체를 보시면 어렵지 않게 해결됩니다. 렘31:15절에서 라헬의 통곡은 라마에서입니다. 라마는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묻혔던 무덤이 있던 곳입니다. 또한 라마는 주전 586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모였던 장소입니다.(렘40:1) 그렇다면 라헬의 통곡소리는 그녀의 자손이 포로로 끌려가서 다시는 그녀 곁에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렘31:15절은 예레미아가 남방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예견하며 그 슬픔을 라헬의 이름을 빌려 노래한 내용입니다. 마태는 이 노래 중 한 구절이 헤롯이 살해한 아이들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통곡으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마태의 해석도 성령의 감동하심이었습니다.

 

3)마2:23절의 나사렛 예수란 칭호문제입니다.

목사님은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태의 인용도 잘못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 문제는 인용구의 도입구가 다른 도입구들과 다르다는데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용구를 이끄는 단어가 다른 인용구와 다르게 ‘레곤토스’가 아니라 ‘호티’입니다. 그리고 ‘호티’를 받는 선지자의 수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디아 톤 프로페톤.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것을 볼 때 마태는 다른 인용구절처럼 구약의 한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의 예언들을 종합한 한 주제를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 나사렛이란 마을 자체가 언급이 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은 곳곳에서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나사렛의 사회적 지위를 사용해서 이러한 구약 전체의 예언들을 유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의 예언들이 공통적으로 예견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유기적 영감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의 오류나 실수가 아닙니다.

 

4)마27:9절의 유다의 배반문제입니다.

목사님은 이 부분이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스가랴11:13절의 내용인데 마태가 예레미야라고 한 것이 무리한 적용내지 잘못된 적용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사본의 문제가 아니라 원본의 문제임을 강하게 시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유기적 영감을 믿으신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스가랴11:12-13절이 가장 직접적인 연관구절이지만 유다는 은전삼십개를 돌려주면서 그것을 무죄한 피값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죄한 피는 스가랴에는 없는 표현으로 예레미야 19:4절을 반영한 것입니다. 결국 마27:6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돈을 ‘피값’으로 규정한 것과 7절에서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고 8절에서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배경이 전부 예레미야 19:1-13절의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우는 힌놈 골짜기에 대한 예언에 기초합니다. 마태 당시는 ‘피밭’이라고 불리우는 아겔다마가 힌놈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렘19:1-13절의 예언이 유다의 죽음과 대제사장의 피밭 매입으로 성취되었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 표현들이 스가랴11:13절과 더 가깝지만 마태는 그 내용이 슥11:13절만이 아니라 렘19:1-13절의 예언을 종합적으로 성취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선지자로 스가랴가 아닌 예레미야를 언급한 것이고요. 유기적 영감을 정말로 받아들이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목사님이 소개하신 목사님의 파일을 다 읽어볼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찿아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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