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은 변 목사의 신학적 전제들을 자기 신학 전제들로 해석해서 비판하는 자기 신학틀에서 나온 동의어 반복어 수준의 비판일 뿐이라는 것이 저의 인상입니다. 공정한 비판글이 되기 위해선 변 목사의 신학론의 전제들을 가지고 그의 논리를 반박하던지 아님 그의 논리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의 신학론과 유사성을 가진 이는 웨슬리라고 현재로선 판단되는데, 그 비교 선상에서 변 목사의 구원론을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학이론이던 아님 다른 사회과학 한 분파의 이론이던 그 이론의 하나의 학파로 정당하게 자리 매김되기엔 역사적 판단, 역사적 시간, 그리고 그 전제들을 받아들이는 일군의 학자, 이론가들이 필요로 합니다. 하나의 학적 전제들을 받아들인 이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생산화하는 것이 이론들의 대부분의 특징입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이란 말의 맥락적 의미를 알면, 결국 변 목사의 구원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이들은 변목사가 자기의 구원론을 형성시켜 왔던 이들의 신학적 전제들, 아님 변 목사 자신의 신학적 전제들을 형성하는 신학적 공리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므로 변 목사의 신학내지 그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입니다. 웨슬리안의 신학론내지 신학전 전제들을 가진이와, 칼빈의 신학전 전제들에 의해서 오랫 동안 신학적 이론을 사고하는 사고 습관을 가진 이와는 신학적으로도 그 출발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무한한 평행선이 있지만, 그러나 신학론이기 때문에 핵심 부분에 대해선 일치합니다. 다만 그 핵심에 진입하기 위한 방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카페에서도 처음에는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변목사가 알미니안신학인 <구원취소>를 주장하기에
알미니안 계통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유일하게 오늘날 교회 안에 포함되는 신학이 개혁신학과 알미니안신학으로 크게 분류된다면
변목사의 신학 중에서 <구원취소>만은 유일하게 알미니안신학 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저희들도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챤도 지옥에 갈 수 있다>라는 책이 나오면서말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장로교목사가 장로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미니안계통의 구원론 주장을 하니..
교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을 했습니다.
baibai 님은 아마 많이 배우신 분이니.. 공동체적 질서와 체계유지를 위한 이념이나 사상이 얾나 중요한지를
알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목사가 한 가지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장의 기원은 <구원취소>에서 연결되어 나온 것으로 이제는 알미니안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신학적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변목사는 <구원은 오직 믿음+율법행함>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예언하니 환상보니 하는 것은 잎사귀입니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당들도 예언하고 환상봅니다. 방언도 합니다.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닙니다.
그 별로인 문제도 문제가 되는 것이 그의 신학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그러한 신비적인 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말하는 신비적인 것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봐드립니다.. 라는 것을 읽을때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나
무당들도 그정도는 다 할 수 있는 것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있는 <감感이 온다..> 혹 <필이 왔어~!>
하는 그것을 예언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바이바이님의 덧글 보니 변목사의 신학 유형이 웨슬레와 비슷하다고 하시는데..
웨슬레 신학을 아십니까? 웨슬레가 언제 구원은 <믿음과 율법행함>으로 받는다고 했었나요?
변목사를 비판하는 이인규권사도 감리교 성도입니다. 그리고 저희 카페에도 감리교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때부터 감리교에서 자라왔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리고 웨슬레신학의 구원론에 대해서도 이미 알만큼 다 아는 분들입니다.
이인규 권사는 이미 전에 교회와 신앙에서 변목사의 신학이 웨슬레신학과 유사한가?에 대한
기사를 썼었습니다. 이인규 권사는 글을 쓸때에 먼저 참고자료로 조직신학책을 참고하고
필요시 교수들의 조언도 받습니다. 기사로 나갈 글이야 당연히 검증을 받겠지요.
아래의 글들은 변목사의 신학이 웨슬레의 신학과 같은 유형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감리교 신자인
이인규 감리교 권사(대림교회)가 2008년 10월 17일과 22일, 네이버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에 ‘변승우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적인가?’와 ‘웨슬레안이 보는 변승우 목사의 구원관’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평신도이면서도 폭넓은 신학적 식견을 가진 이 권사의 글을 보시면 웨슬레안들이 과연 어떤 구원관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변 목사의 주장이 과연 웨슬레적인지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얻으실 겁니다. 그의 글을 2회에 걸쳐 요약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과연 변승우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적인지 살펴보자
(1) 인간의 의지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감리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Free-will)란 구원을 받는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
이러한 주장은 멸망당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신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인간의 책임적 한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택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를 따르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하여 이미 주어진 선재적은총(Prevenient grace)을 주장하며,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은총을 따라 하나님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이 감리교회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은총 안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 감리교의 주장이다.
웨슬레 목사는 “인간구원의 주도적인 역할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참고: 웨슬레복음주의총서, 웨슬레안조직신학, 웨슬레의 조직신학, 선재적은총 등 서적 참고)
(2)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는가? 웨슬레 목사가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것은 ···소위 Hyper Calvinism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캘비니즘(이중예정론)에 대한 반박이었다. 즉 멸망을 당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멸망하기로 미리 예정하였다는 이중예정론에 반박하여, 그렇다면 인간의 멸망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놓은 것 때문이므로, 멸망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멸망의 책임이 된다는 결론을 반대한 것이다.
더욱이 너무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도덕폐기론과 믿음지상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행함을 부정하며 오직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도 안 되지만, 가톨릭의 주장과 같이 행위나 공로사상을 강조하는 것도 반대를 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감리교회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3) 웨슬레 목사의 율법관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할 뿐이다. 어느 감리교회에서 믿음으로 얻는 의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얻는 의나 행함으로 얻는 의를 가르치는가?
“선행은총이 구원에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한다. 사람이 자신을 율법의 거울에 비춰보면 볼수록 그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21쪽).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레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인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위의 책, 169쪽).
(4) 웨슬레의 믿음 웨슬레 목사는 올더스케이트의 회심의 체험에서 그의 신앙의 분기점을 갖게 된다. 그는 그 사건 이전에서는 오히려 도덕적인 선, 하나님께 절대복종, 율법적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1738년 5월24일 그는 올더스케이트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사회자가 <로마서 서문>을 읽자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소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말씀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변승우 목사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행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웨슬레안이라는 변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웨슬레안이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는가? ···
웨슬레조직신학 169쪽은 이렇게 올더스케이트 회심을 결론내리고 있다. 웨슬레에게 믿음이란,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되어지며, 종교개혁자들과 동일한 것이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5) 믿음이 아니라 회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변승우 목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비난이 들어오자, 자신이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행함으로서 회개의 뜻을 정의하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가? 한국교회는 반복적인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구원파의 주장을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죄하고 있으며. 회개의 중요성을 이미 가르치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회개를 강조하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변 목사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교회와 구원파를 혼동하고 있는가?
물론 웨슬레도 회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웨슬레는 믿음과 회개의 관계에서 회개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고 있음으로서, 변승우 목사가 웨슬레안적인 주장을 한다는 사실을 거짓말로 드러나게 한다. ···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웨슬레가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서적 구원방법’이라는 설교에서 ‘이러한 것들은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고 하면서 기회가 있을 따마다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므로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고 분명히 구분한다”(웨슬레조직신학 172쪽).
가장 중요한 것은 변승우 목사의 책 제목과 같이 <진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감리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감리교회는 믿음을 예정에서 끄집어 내어서 믿음을 인간적인 측면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 대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또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하여 믿음보다 회개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변승우 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잘못 가르친다고 비난하며,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
변승우 목사가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추기 위하여 웨슬레의 등 뒤로 숨으려고 하지만, 그의 구원론은 웨슬레안적인 주장이 아니며,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6)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는 주장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는 행함을 무시하여도 좋다거나, 행함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율법폐기론적인 주장과 다르다. 또한 회개를 하지 말라는 정통교회가 있는가? 정통신학적으로 행함은 믿음의 열매가 된다. 더군다나 간음, 도둑질 등 어떤 짓을 하여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한국의 정통교회는 없다.
그런데 왜 변승우 목사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그것은 변승우 목사가 한국교회와 다른 가르침을 갖고 있다는 스스로의 자백이 된다. 회개하지 못한 죄 하나라도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은 20%가 아니라,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이인규 감리교 권사(대림교회)가 2008년 10월 17일과 22일, 네이버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에 ‘변승우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적인가?’와 ‘웨슬레안이 보는 변승우 목사의 구원관’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평신도이면서도 폭넓은 신학적 식견을 가진 이 권사의 글을 보시면 웨슬레안들이 과연 어떤 구원관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변 목사의 주장이 과연 웨슬레적인지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얻으실 겁니다. 그의 글을 2회에 걸쳐 요약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수차례 변명하고 있다. 자신은 웨슬레안으로서 믿음과 함께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웨슬레안은 회개를 믿음과 동등하게 강조하는지, 또 행함도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는지를 살펴보자. 본인은 웨슬레안의 입장으로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적을 인용하여 변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변승우목사는 웨슬레안적인 구원관이 아니며, 펠라기우스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 논쟁을 하였던 사람으로서 “If I ought to, I can”이라고 말하였다. ··· 웨슬레안은 회개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웨슬레가 강조한 인간적인 책임 측면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다.
웨슬레 목사는 믿음을 유일한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였고, 또한 회개와 그 열매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거나 믿음과 동등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변승우 목사가 자신이 행함을 강조한 주장들이 곧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한 것과, 또한 자신이 웨슬레안이므로 행함에 대해서 캘빈주의와 신학적으로 다르다고 변명한 것은 하나의 엉터리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웨슬레 목사가 인간의 책임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행함이나 회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변 목사는 오직 믿음을 말하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기독교인에서 20%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레가 말한 회개는 믿음 이전의 것이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가 아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결합되었다. 둘 다 선행은총에서 나오지만 구원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도구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총으로부터 흘러나오고, 회개가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자주 말한다”(웨슬리안 조직신학, 도서출판 세복, 317쪽).
“웨슬레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그의 ‘성서적 구원의 방법’이라는 설교문에서 그는 회개와 그 열매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단히 필요하나, 그러나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 즉 시간과 기회가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십자가의 도적처럼 이것(행함)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8쪽, 성서적 구원의 방법 2권 451~452 인용).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1744년 연회의 기록을 보면, 웨슬레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a low species of faith)이며, 그 열매는 은혜로 말미암는 결과라 하여 이를 신앙의 범주에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 즉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감각’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회개와 그 열매가 칭의에 불가결하다는 것도 결국은 의롭다함을 받는 유일한 조건이 믿음이라는 그의 주장에 귀결된다고 볼 것이다”(위의 책, 108쪽).
감리교는 물론 행함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회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간주하거나 믿음과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웨슬레안은 변승우 목사와 달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잘못 가르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변승우 목사는 웨슬레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웨슬레안이라는 변명을 취소하여야 할 것이다.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길 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변승우목사는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으로 보더라도 그는 웨슬레안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2장 교리 제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종교의 강령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뻐하시는 바요, 참디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감리교나 웨슬레안은 행함이나 회개를 비록 믿음의 열매로서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웨슬레안이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상한 구원관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 기독교인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 자신의 주장을 웨슬레안적이라고 하면서 은폐를 시도하고, 한편은 계속 자기 주장을 옳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한국기독교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분명히 해놓고, 그것이 문제가 되자, 자신은 웨슬레안으로서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였지만, 그의 변명은 그가 웨슬레안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정한 웨슬레안이고 그가 주장한 행함에 대한 것이 단지 회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거나, 한국기독교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지 말았어야만 하지 않는가? 회개란 믿음과 분리되거나 구별된 별도의 “행함”이 아니며, 회개란 믿음과 함께 연결된 것이다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중에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있었다.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을 듣다보면 드라마의 제목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여신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믿음교회를 다니다가 중단한 신도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데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어요. 함께 교회를 다녔던 우리 아이도 며칠 전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엄마 나 어제 거짓말 했는데 그러면 지옥 가는 거야?’ 그 아이의 고민은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했다고 지옥에 가나요라는 아이의 두려움과 그에 공감하는 한 신도의 고민은 어디서 왔을까? 변 목사의 구원관과 관련한 가르침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변 목사의 구원관을 살펴 보면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부인하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그의 회개관도 일반적인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 )가 입수하여 녹취한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잘 들으세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입니다 .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그는 천국에 가는데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받는 의가 아니라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너희 의’는 뭘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 이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에요. 간음하지 말라, 창기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이웃집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깨끗한 것이 아니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맹세가 필요없을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 돼라. 너희가 예하면 예하고 믿어 줄 수 있는 사람, 너희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믿어 줄 수 있는 사람, ··· 너희는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 돼라. 원수가 핍박할 때도 사랑하라. 믿습니까?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예요. 여러분 이해하세요? 너희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보여 주시고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
여러분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면 만일에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쵸? ‘아니 목사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가 정말 지옥에 가는 겁니까?’ (언성을 높이며: 녹취자 주)정말 지옥에 갑니다!!! (목청을 더욱 높이며: 녹취자 주)정말 지옥에 가요!! 목사라도 지옥에 가고!!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어도 지옥에 가고!! 평생을 교회 다녀도 지옥에 갑니다. 예배당을 지어서 바쳐서도 지옥에 갑니다 !!!”(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너희 의’가 없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이다. 변 목사는 구원과 관련 ‘회개’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회개에 대한 주장이 일반적이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며 그런 믿음은 사람을 지옥에서 건져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승우, 2004,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24p, 은혜출판사).
변 목사가 주장하는 회개는 무엇일까? 변 목사는 위 주장에 바로 이어서 “회개해야 할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위의 책, 28p).
그는 천국에 가려면 ‘사람의 의’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변 목사의 구원관은 ‘행위 구원’이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반박한다.
“저는 단 한 번도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들어서 잘못 듣고 그렇게 오해했을 뿐입니다”(출처 큰믿음교회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 그는 이 카페에 “허~참, 아직도 큰믿음교회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구원관을 설명한다.
“첫째,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셋째,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 자신은 행위구원을 주장한 바가 없다고 큰믿음교회 카페에 글을 올린 변승우 목사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참된 믿음과 회개는 소위 정통교회와는 개념적으로 다르다. 그가 주장하는 참된 믿음에는 ‘믿음의 행함’이 포함되는데 이 행함 중 ‘서기관·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가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 없이는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도 단순히 ‘죄에서 돌아서거나’ ‘지은 죄를 자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하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고 다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대부분 이 질문에 ‘오직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위의 책 36p).
“진실로 회개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위의 책, 43p).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만 모셔 들이면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이 진리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위의 책, 66p).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이 둘은 성경에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이 어떻게 동시에 진리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위의 책, 98p).
그의 주장은 ‘행함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고 말씀한 야고보 사도와도 전혀 다르다.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사도조차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의로 천국에 가야 한다’거나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바는 없다.
변 목사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
“죄 사함은 단순히 십자가 보혈 공로를 믿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주어집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를 거론하며 그것을 믿고 의지하면 무조건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의지한다고 무조건 죄 용서를 받지는 않습니다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65).
“그저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본래 이단 사설입니다 . 이 이단사상이 이제는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들어와 가지고 거짓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번지고 번지고 번지다 보니까 교회 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이 진리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거짓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믿음이라고 했던 야고보는 거짓사도입니까?”(변승우,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년 5월 26일 설교).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자신이 속한 ‘합동정통’ 교단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다. 합동정통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고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도구이다”고 확언해 놓았다. (자료 2 예장합동정통 헌법 참고). 반복하지만 변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가 아니라 ‘사람의 의’로 천국에 가고 그게 없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무시무시한 설교를 한 사람이다.
변 목사의 구원관과 관련한 문제지적의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의 설교가 ‘웨슬레안적이다’고 평가해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변 목사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2008년 10월 2일 큰믿음교회 카페에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큰믿음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란 제목으로 올린 글을 보자. 어떤 목회자가 변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웨슬리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설교를 할 것입니까?” 이에 대해 변 목사는 “‘예. 저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이단으로 매도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라고 썼다.
▲ 변 목사의 카페에 올려진 글
변 목사의 무엇이 웨슬레안적인지, 또, 변 목사 자신도 웨슬레안적인 어떤 부분을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의미가 부정확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론에 있어서만큼 변 목사의 주장은 웨슬레안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통상 웨슬레안적 전통을 따르는 교단을 든다면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성결교, 구세군 등이다. 이들의 교리와 신학은 과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까?
먼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를 정리한 ‘교리와 장정’, ‘사람을 의롭게 하심’ 항목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라고 기재했다.
그렇다면 선행에 대해서는?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웨슬레의 전통을 따르는 감리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단언한다. 선행은 믿음의 열매라고 구분해 놓았다. 변 목사의 주장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
▲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
성결교, 나사렛성결교, 구세군은 어떤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을 보자. 칭의(稱義)에 대해 성결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자기의 선행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인류에게 복음이요, 성경이 가르친 명백한 교리이다 (롬4:4-6, 롬1:17,3:24-26,28, 창 15:6, 롬5:1).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곧 죄사함과 중생함을 받은 자이다”라고 명백하게 밝혀 놓았다. 장로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류의 구원’에 대해 “인류는 하나님께서 한 혈맥으로 지으신 동포요 형제인데 시조의 범죄함을 인하여 타락의 부패성을 가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한 번 제물로 드려 전 인류의 자범죄와 원죄를 완전히 속(贖)하시사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은즉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밖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신빙할만한 구원의 도가 없으며, 교인이 받은 모든 은혜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것이요,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짐을 믿는다 ”고 밝혀 놓았다.
▲ 성결교의 '칭의'와 관련한 교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교회도 헌법에서 ‘칭의’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의 사법적인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범한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며 그를 의롭다고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고 기재했다.
구세군은 교리 8항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는다 ”고 고백한다.
▲ 나사렛 성결교회의 속죄관
네이버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카페의 운영자인 이인규 감리교 권사(대림교회)는 “변 목사의 주장이 담긴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게 하지 말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그는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권사는 변 목사의 두 가지 책을 읽은 후 △그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다 △그는 믿음과 회개를 분리시켜, 회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결국 회개와 율법의 지킴, 순종 등 사람의 의지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이루어놓은 개신교의 전통적인 교리, 이신칭의라는 교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박문수 교수(서울신대, 조직신학)는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와 의 통화에서 “웨슬레안의 구원관에 대해 장로교인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웨슬레안들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신앙을 가르치고 믿는다”며 “다만 장로교와 차이가 있다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뿐이고, 이 의지조차도 선행이나 행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격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회개와 관련, “‘사람이 모든 죄를 남김없이 모두 회개해야 구원된다’는 주장은 완전주의에서 비롯된 것인지 웨슬레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래도 변 목사의 구원관이 웨슬레안적인가? 다시 궁금해진다. 변 목사의 구원관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자료] 합동정통 교단은 물론 웨슬레안까지 구원에 대해 뭐라고 하나?
1. 예장 합동정통의 헌법
문 33. 의롭다 하심이 무엇인가? 답.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정하신 것인데 저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유하시고 그 앞에서 우리를 옳게 여겨 받으시는 것이니 이는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심인데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받는 것이다 . (엡 1:7, 고후 5:19-21, 롬 4:5, 3:22, 24, 25, 5:17-19, 4:6-8, 5:1, 행 10:43, 갈 2:16)
문 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이다 .
제 3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의인에 관하여 2절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고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도구이다 (요1:12, 롬3:28, 5:1). 이 믿음은 의롭게 된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모든 구속적 은사와 함께 있다. 이 믿음은 또한 죽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약2:17, 22, 26, 갈5:6).
2.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교리와 장정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26] 제 12조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범죄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고의로 범하는 죄마다 성신을 거역하며 사유하심을 얻지 못할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죄에 빠지는 사람에게 회개함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얻지 못한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가 성신을 받은 후라도 얻은 바 은혜를 배반하고 죄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생활을 개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거할 동안에 그들이 죄를 더 범하지 못한다 하는 자들이나 죄를 범한 뒤에 참으로 회개할지라도 사유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는 자들은 정죄하심을 당할 것이다.
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제 2장 교리및 성례전
제17조 - 칭의(稱義) -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자기의 선행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 이것이 인류에게 복음이요, 성경이 가르친 명백한 교리이다(롬4:4-6, 롬1:17,3:24-26,28, 창 15:6, 롬5:1).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곧 죄사함과 중생함을 받은 자이다.
제18조 - 성결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경험이다 .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다 (행1:4,5,15:8, 9,1:8, 눅24:49).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음에 믿음이 유일의 조건됨 같이 성결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다(롬5:1, 행15:8, 갈3:4, 요일1:9).
제19조 - 칭의후의 범죄 -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도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성령을 거역하는 죄외에는 회개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요일 2:1,5:16). 고로 범죄한 자에게는 회개를 권고할 것이니 연약한 인생이 성령을 받았으나 절대로 죄를 범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18:21, 요일1:9, 마12:31,32).
제21조 - 인류의 구원 - 인류는 하나님께서 한 혈맥으로 지으신 동포요 형제인데 시조의 범죄함을 인하여 타락의 부패성을 가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한 번 제물로 드려 전 인류의 자범죄와 원죄를 완전히 속(贖)하시사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은즉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밖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신빙할만한 구원의 도가 없으며, 교인이 받은 모든 은혜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것이요,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짐을 믿는다 .
4.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헌법
제6절 속죄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친히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인해 모든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신 것과, 이 속죄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며 모든 아담의 후손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임을 믿는다. 이 속죄는 책임을 지울 수 없는 자와 죄와 분별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은혜에 의해 유효하나 책임 연령에 도달한 자는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에만 유효함을 믿는다. (사 53 : 5-6, 11; 막 10 : 45; 눅 24 : 46-48; 요 1 : 29; 3 : 14-17; 행 4 : 10-12; 롬 3 : 21-26; 4 : 17-25; 5 : 6-21; 고전 6 : 20; 고후 5 : 14-21; 갈 1 : 3-4; 3 : 13-14; 골 1 : 19-23; 딤전 2 : 3-6; 딛 2 : 11-14; 히 2 : 9; 9 : 11-14; 13 : 12; 벧전 1 : 18-21; 2 : 19-25; 요일 2 : 1-2)
제9절 칭의, 중생, 양자 9. 칭의란 하나님의 은혜의 사법적인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범한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며 그를 의롭다고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
5. 구세군
교리 6) 속죄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 8) 믿음으로 의롭다하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는다.
이런 글은 변 목사의 신학적 전제들을 자기 신학 전제들로 해석해서 비판하는 자기 신학틀에서 나온 동의어 반복어 수준의 비판일 뿐이라는 것이 저의 인상입니다. 공정한 비판글이 되기 위해선 변 목사의 신학론의 전제들을 가지고 그의 논리를 반박하던지 아님 그의 논리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의 신학론과 유사성을 가진 이는 웨슬리라고 현재로선 판단되는데, 그 비교 선상에서 변 목사의 구원론을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baibai
신학이론이던 아님 다른 사회과학 한 분파의 이론이던 그 이론의 하나의 학파로 정당하게 자리 매김되기엔 역사적 판단, 역사적 시간, 그리고 그 전제들을 받아들이는 일군의 학자, 이론가들이 필요로 합니다. 하나의 학적 전제들을 받아들인 이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생산화하는 것이 이론들의 대부분의 특징입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이란 말의 맥락적 의미를 알면, 결국 변 목사의 구원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이들은 변목사가 자기의 구원론을 형성시켜 왔던 이들의 신학적 전제들, 아님 변 목사 자신의 신학적 전제들을 형성하는 신학적 공리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므로 변 목사의 신학내지 그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입니다. 웨슬리안의 신학론내지 신학전 전제들을 가진이와, 칼빈의 신학전 전제들에 의해서 오랫 동안 신학적 이론을 사고하는 사고 습관을 가진 이와는 신학적으로도 그 출발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무한한 평행선이 있지만, 그러나 신학론이기 때문에 핵심 부분에 대해선 일치합니다. 다만 그 핵심에 진입하기 위한 방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카페에서도 처음에는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변목사가 알미니안신학인 <구원취소>를 주장하기에
알미니안 계통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유일하게 오늘날 교회 안에 포함되는 신학이 개혁신학과 알미니안신학으로 크게 분류된다면
변목사의 신학 중에서 <구원취소>만은 유일하게 알미니안신학 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저희들도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챤도 지옥에 갈 수 있다>라는 책이 나오면서말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장로교목사가 장로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미니안계통의 구원론 주장을 하니..
교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을 했습니다.
baibai 님은 아마 많이 배우신 분이니.. 공동체적 질서와 체계유지를 위한 이념이나 사상이 얾나 중요한지를
알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목사가 한 가지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장의 기원은 <구원취소>에서 연결되어 나온 것으로 이제는 알미니안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신학적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변목사는 <구원은 오직 믿음+율법행함>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예언하니 환상보니 하는 것은 잎사귀입니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당들도 예언하고 환상봅니다. 방언도 합니다.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닙니다.
그 별로인 문제도 문제가 되는 것이 그의 신학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그러한 신비적인 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말하는 신비적인 것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봐드립니다.. 라는 것을 읽을때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나
무당들도 그정도는 다 할 수 있는 것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있는 <감感이 온다..> 혹 <필이 왔어~!>
하는 그것을 예언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바이바이님의 덧글 보니 변목사의 신학 유형이 웨슬레와 비슷하다고 하시는데..
웨슬레 신학을 아십니까? 웨슬레가 언제 구원은 <믿음과 율법행함>으로 받는다고 했었나요?
변목사를 비판하는 이인규권사도 감리교 성도입니다. 그리고 저희 카페에도 감리교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때부터 감리교에서 자라왔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리고 웨슬레신학의 구원론에 대해서도 이미 알만큼 다 아는 분들입니다.
이인규 권사는 이미 전에 교회와 신앙에서 변목사의 신학이 웨슬레신학과 유사한가?에 대한
기사를 썼었습니다. 이인규 권사는 글을 쓸때에 먼저 참고자료로 조직신학책을 참고하고
필요시 교수들의 조언도 받습니다. 기사로 나갈 글이야 당연히 검증을 받겠지요.
아래의 글들은 변목사의 신학이 웨슬레의 신학과 같은 유형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감리교 신자인
이인규권사의 글입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X3Z/822
과연 변승우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적인지 살펴보자
(1) 인간의 의지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감리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Free-will)란 구원을 받는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
이러한 주장은 멸망당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신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인간의 책임적 한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택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를 따르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하여 이미 주어진 선재적은총(Prevenient grace)을 주장하며,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은총을 따라 하나님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이 감리교회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은총 안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 감리교의 주장이다.
웨슬레 목사는 “인간구원의 주도적인 역할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참고: 웨슬레복음주의총서, 웨슬레안조직신학, 웨슬레의 조직신학, 선재적은총 등 서적 참고)
(2)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는가?
웨슬레 목사가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것은 ···소위 Hyper Calvinism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캘비니즘(이중예정론)에 대한 반박이었다. 즉 멸망을 당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멸망하기로 미리 예정하였다는 이중예정론에 반박하여, 그렇다면 인간의 멸망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놓은 것 때문이므로, 멸망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멸망의 책임이 된다는 결론을 반대한 것이다.
더욱이 너무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도덕폐기론과 믿음지상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행함을 부정하며 오직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도 안 되지만, 가톨릭의 주장과 같이 행위나 공로사상을 강조하는 것도 반대를 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감리교회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3) 웨슬레 목사의 율법관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할 뿐이다. 어느 감리교회에서 믿음으로 얻는 의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얻는 의나 행함으로 얻는 의를 가르치는가?
“선행은총이 구원에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한다. 사람이 자신을 율법의 거울에 비춰보면 볼수록 그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21쪽).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레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인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위의 책, 169쪽).
(4) 웨슬레의 믿음
웨슬레 목사는 올더스케이트의 회심의 체험에서 그의 신앙의 분기점을 갖게 된다. 그는 그 사건 이전에서는 오히려 도덕적인 선, 하나님께 절대복종, 율법적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1738년 5월24일 그는 올더스케이트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사회자가 <로마서 서문>을 읽자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소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말씀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변승우 목사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행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웨슬레안이라는 변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웨슬레안이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는가? ···
웨슬레조직신학 169쪽은 이렇게 올더스케이트 회심을 결론내리고 있다. 웨슬레에게 믿음이란,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되어지며, 종교개혁자들과 동일한 것이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5) 믿음이 아니라 회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변승우 목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비난이 들어오자, 자신이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행함으로서 회개의 뜻을 정의하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가? 한국교회는 반복적인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구원파의 주장을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죄하고 있으며. 회개의 중요성을 이미 가르치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회개를 강조하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변 목사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교회와 구원파를 혼동하고 있는가?
물론 웨슬레도 회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웨슬레는 믿음과 회개의 관계에서 회개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고 있음으로서, 변승우 목사가 웨슬레안적인 주장을 한다는 사실을 거짓말로 드러나게 한다. ···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웨슬레가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서적 구원방법’이라는 설교에서 ‘이러한 것들은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고 하면서 기회가 있을 따마다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므로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고 분명히 구분한다”(웨슬레조직신학 172쪽).
가장 중요한 것은 변승우 목사의 책 제목과 같이 <진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감리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감리교회는 믿음을 예정에서 끄집어 내어서 믿음을 인간적인 측면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 대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또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하여 믿음보다 회개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변승우 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잘못 가르친다고 비난하며,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
변승우 목사가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추기 위하여 웨슬레의 등 뒤로 숨으려고 하지만, 그의 구원론은 웨슬레안적인 주장이 아니며,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6)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는 주장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는 행함을 무시하여도 좋다거나, 행함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율법폐기론적인 주장과 다르다. 또한 회개를 하지 말라는 정통교회가 있는가? 정통신학적으로 행함은 믿음의 열매가 된다. 더군다나 간음, 도둑질 등 어떤 짓을 하여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한국의 정통교회는 없다.
그런데 왜 변승우 목사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그것은 변승우 목사가 한국교회와 다른 가르침을 갖고 있다는 스스로의 자백이 된다. 회개하지 못한 죄 하나라도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은 20%가 아니라,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수차례 변명하고 있다. 자신은 웨슬레안으로서 믿음과 함께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웨슬레안은 회개를 믿음과 동등하게 강조하는지, 또 행함도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는지를 살펴보자. 본인은 웨슬레안의 입장으로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적을 인용하여 변 목사의 주장이 웨슬레안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변승우목사는 웨슬레안적인 구원관이 아니며, 펠라기우스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 논쟁을 하였던 사람으로서 “If I ought to, I can”이라고 말하였다. ··· 웨슬레안은 회개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웨슬레가 강조한 인간적인 책임 측면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다.
웨슬레 목사는 믿음을 유일한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였고, 또한 회개와 그 열매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거나 믿음과 동등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변승우 목사가 자신이 행함을 강조한 주장들이 곧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한 것과, 또한 자신이 웨슬레안이므로 행함에 대해서 캘빈주의와 신학적으로 다르다고 변명한 것은 하나의 엉터리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웨슬레 목사가 인간의 책임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행함이나 회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변 목사는 오직 믿음을 말하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기독교인에서 20%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레가 말한 회개는 믿음 이전의 것이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가 아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결합되었다. 둘 다 선행은총에서 나오지만 구원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도구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총으로부터 흘러나오고, 회개가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자주 말한다”(웨슬리안 조직신학, 도서출판 세복, 317쪽).
“웨슬레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그의 ‘성서적 구원의 방법’이라는 설교문에서 그는 회개와 그 열매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단히 필요하나, 그러나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 즉 시간과 기회가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십자가의 도적처럼 이것(행함)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8쪽, 성서적 구원의 방법 2권 451~452 인용).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1744년 연회의 기록을 보면, 웨슬레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a low species of faith)이며, 그 열매는 은혜로 말미암는 결과라 하여 이를 신앙의 범주에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 즉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감각’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회개와 그 열매가 칭의에 불가결하다는 것도 결국은 의롭다함을 받는 유일한 조건이 믿음이라는 그의 주장에 귀결된다고 볼 것이다”(위의 책, 108쪽).
감리교는 물론 행함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회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간주하거나 믿음과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웨슬레안은 변승우 목사와 달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잘못 가르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변승우 목사는 웨슬레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웨슬레안이라는 변명을 취소하여야 할 것이다.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길 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변승우목사는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으로 보더라도 그는 웨슬레안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2장 교리
제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종교의 강령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뻐하시는 바요, 참디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감리교나 웨슬레안은 행함이나 회개를 비록 믿음의 열매로서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웨슬레안이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상한 구원관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 기독교인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 자신의 주장을 웨슬레안적이라고 하면서 은폐를 시도하고, 한편은 계속 자기 주장을 옳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한국기독교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분명히 해놓고, 그것이 문제가 되자, 자신은 웨슬레안으로서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였지만, 그의 변명은 그가 웨슬레안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정한 웨슬레안이고 그가 주장한 행함에 대한 것이 단지 회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친다거나, 한국기독교의 20%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지 말았어야만 하지 않는가? 회개란 믿음과 분리되거나 구별된 별도의 “행함”이 아니며, 회개란 믿음과 함께 연결된 것이다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중에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있었다.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을 듣다보면 드라마의 제목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여신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믿음교회를 다니다가 중단한 신도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데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어요. 함께 교회를 다녔던 우리 아이도 며칠 전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엄마 나 어제 거짓말 했는데 그러면 지옥 가는 거야?’ 그 아이의 고민은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했다고 지옥에 가나요라는 아이의 두려움과 그에 공감하는 한 신도의 고민은 어디서 왔을까? 변 목사의 구원관과 관련한 가르침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변 목사의 구원관을 살펴 보면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부인하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그의 회개관도 일반적인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 )가 입수하여 녹취한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잘 들으세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입니다 .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그는 천국에 가는데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받는 의가 아니라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너희 의’는 뭘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 이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에요. 간음하지 말라, 창기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이웃집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깨끗한 것이 아니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맹세가 필요없을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 돼라. 너희가 예하면 예하고 믿어 줄 수 있는 사람, 너희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믿어 줄 수 있는 사람, ··· 너희는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 돼라. 원수가 핍박할 때도 사랑하라. 믿습니까?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예요. 여러분 이해하세요? 너희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보여 주시고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
여러분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면 만일에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쵸? ‘아니 목사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가 정말 지옥에 가는 겁니까?’ (언성을 높이며: 녹취자 주)정말 지옥에 갑니다!!! (목청을 더욱 높이며: 녹취자 주)정말 지옥에 가요!! 목사라도 지옥에 가고!!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어도 지옥에 가고!! 평생을 교회 다녀도 지옥에 갑니다. 예배당을 지어서 바쳐서도 지옥에 갑니다 !!!”(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너희 의’가 없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이다. 변 목사는 구원과 관련 ‘회개’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회개에 대한 주장이 일반적이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며 그런 믿음은 사람을 지옥에서 건져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승우, 2004,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24p, 은혜출판사).
변 목사가 주장하는 회개는 무엇일까? 변 목사는 위 주장에 바로 이어서 “회개해야 할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위의 책, 28p).
그는 천국에 가려면 ‘사람의 의’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변 목사의 구원관은 ‘행위 구원’이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반박한다.
“저는 단 한 번도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들어서 잘못 듣고 그렇게 오해했을 뿐입니다”(출처 큰믿음교회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
그는 이 카페에 “허~참, 아직도 큰믿음교회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구원관을 설명한다.
“첫째,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셋째,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대부분 이 질문에 ‘오직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위의 책 36p).
“진실로 회개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위의 책, 43p).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만 모셔 들이면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이 진리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위의 책, 66p).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이 둘은 성경에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이 어떻게 동시에 진리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위의 책, 98p).
그의 주장은 ‘행함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고 말씀한 야고보 사도와도 전혀 다르다.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사도조차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의로 천국에 가야 한다’거나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바는 없다.
변 목사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
“죄 사함은 단순히 십자가 보혈 공로를 믿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주어집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를 거론하며 그것을 믿고 의지하면 무조건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의지한다고 무조건 죄 용서를 받지는 않습니다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65).
“그저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본래 이단 사설입니다 . 이 이단사상이 이제는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들어와 가지고 거짓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번지고 번지고 번지다 보니까 교회 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이 진리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거짓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믿음이라고 했던 야고보는 거짓사도입니까?”(변승우,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년 5월 26일 설교).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자신이 속한 ‘합동정통’ 교단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다. 합동정통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고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도구이다”고 확언해 놓았다. (자료 2 예장합동정통 헌법 참고). 반복하지만 변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가 아니라 ‘사람의 의’로 천국에 가고 그게 없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무시무시한 설교를 한 사람이다.
변 목사의 구원관과 관련한 문제지적의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의 설교가 ‘웨슬레안적이다’고 평가해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변 목사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2008년 10월 2일 큰믿음교회 카페에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큰믿음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란 제목으로 올린 글을 보자. 어떤 목회자가 변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웨슬리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설교를 할 것입니까?”
이에 대해 변 목사는 “‘예. 저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이단으로 매도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라고 썼다.
통상 웨슬레안적 전통을 따르는 교단을 든다면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성결교, 구세군 등이다. 이들의 교리와 신학은 과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까?
먼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를 정리한 ‘교리와 장정’, ‘사람을 의롭게 하심’ 항목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라고 기재했다.
그렇다면 선행에 대해서는?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웨슬레의 전통을 따르는 감리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단언한다. 선행은 믿음의 열매라고 구분해 놓았다. 변 목사의 주장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
‘인류의 구원’에 대해 “인류는 하나님께서 한 혈맥으로 지으신 동포요 형제인데 시조의 범죄함을 인하여 타락의 부패성을 가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한 번 제물로 드려 전 인류의 자범죄와 원죄를 완전히 속(贖)하시사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은즉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밖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신빙할만한 구원의 도가 없으며, 교인이 받은 모든 은혜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것이요,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짐을 믿는다 ”고 밝혀 놓았다.
구세군은 교리 8항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는다 ”고 고백한다.
박문수 교수(서울신대, 조직신학)는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와 의 통화에서 “웨슬레안의 구원관에 대해 장로교인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웨슬레안들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신앙을 가르치고 믿는다”며 “다만 장로교와 차이가 있다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뿐이고, 이 의지조차도 선행이나 행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격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회개와 관련, “‘사람이 모든 죄를 남김없이 모두 회개해야 구원된다’는 주장은 완전주의에서 비롯된 것인지 웨슬레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래도 변 목사의 구원관이 웨슬레안적인가? 다시 궁금해진다. 변 목사의 구원관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자료] 합동정통 교단은 물론 웨슬레안까지 구원에 대해 뭐라고 하나?
1. 예장 합동정통의 헌법
문 33. 의롭다 하심이 무엇인가?
답.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정하신 것인데 저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유하시고 그 앞에서 우리를 옳게 여겨 받으시는 것이니 이는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심인데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받는 것이다 .
(엡 1:7, 고후 5:19-21, 롬 4:5, 3:22, 24, 25, 5:17-19, 4:6-8, 5:1, 행 10:43, 갈 2:16)
문 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이다 .
제 3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의인에 관하여
2절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고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도구이다 (요1:12, 롬3:28, 5:1). 이 믿음은 의롭게 된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모든 구속적 은사와 함께 있다. 이 믿음은 또한 죽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약2:17, 22, 26, 갈5:6).
2.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교리와 장정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26] 제 12조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범죄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고의로 범하는 죄마다 성신을 거역하며 사유하심을 얻지 못할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죄에 빠지는 사람에게 회개함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얻지 못한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가 성신을 받은 후라도 얻은 바 은혜를 배반하고 죄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생활을 개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거할 동안에 그들이 죄를 더 범하지 못한다 하는 자들이나 죄를 범한 뒤에 참으로 회개할지라도 사유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는 자들은 정죄하심을 당할 것이다.
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제 2장 교리및 성례전
제17조 - 칭의(稱義) -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자기의 선행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 이것이 인류에게 복음이요, 성경이 가르친 명백한 교리이다(롬4:4-6, 롬1:17,3:24-26,28, 창 15:6, 롬5:1).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곧 죄사함과 중생함을 받은 자이다.
제18조 - 성결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경험이다 .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다 (행1:4,5,15:8, 9,1:8, 눅24:49).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음에 믿음이 유일의 조건됨 같이 성결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다(롬5:1, 행15:8, 갈3:4, 요일1:9).
제19조 - 칭의후의 범죄 -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도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성령을 거역하는 죄외에는 회개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요일 2:1,5:16). 고로 범죄한 자에게는 회개를 권고할 것이니 연약한 인생이 성령을 받았으나 절대로 죄를 범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18:21, 요일1:9, 마12:31,32).
제21조 - 인류의 구원 -
인류는 하나님께서 한 혈맥으로 지으신 동포요 형제인데 시조의 범죄함을 인하여 타락의 부패성을 가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한 번 제물로 드려 전 인류의 자범죄와 원죄를 완전히 속(贖)하시사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은즉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밖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신빙할만한 구원의 도가 없으며, 교인이 받은 모든 은혜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것이요,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짐을 믿는다 .
4.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헌법
제6절 속죄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친히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인해 모든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신 것과, 이 속죄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며 모든 아담의 후손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임을 믿는다. 이 속죄는 책임을 지울 수 없는 자와 죄와 분별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은혜에 의해 유효하나 책임 연령에 도달한 자는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에만 유효함을 믿는다.
(사 53 : 5-6, 11; 막 10 : 45; 눅 24 : 46-48; 요 1 : 29; 3 : 14-17; 행 4 : 10-12; 롬 3 : 21-26; 4 : 17-25; 5 : 6-21; 고전 6 : 20; 고후 5 : 14-21; 갈 1 : 3-4; 3 : 13-14; 골 1 : 19-23; 딤전 2 : 3-6; 딛 2 : 11-14; 히 2 : 9; 9 : 11-14; 13 : 12; 벧전 1 : 18-21; 2 : 19-25; 요일 2 : 1-2)
제9절 칭의, 중생, 양자
9. 칭의란 하나님의 은혜의 사법적인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범한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며 그를 의롭다고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
5. 구세군
교리
6) 속죄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
8) 믿음으로 의롭다하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