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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자유신학자다

baromi 2008. 10. 2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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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자유신학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정승원 합동신학대학 교수

흥미롭게도 몰트만 역시 바르트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

얼마전 한국에 온 몰트만은 그래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강연을 했고, 한 복음주의 신앙서적에 그와의 인터뷰 내용까지 나온 것을 보면 더욱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를 복음주의자로 오해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늘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부활 등을 말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복음주의 신학자도 더욱이 보수주의 신학자가 아닌, 한 자유주의 신학자에 불과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의 ‘희망신학’은 사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블로흐는 막시스트적인 종말론을 거부하고 열린 미래를 향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이 세상에는 정체된 정수(essence)란 없고 단지 미래가 밝혀주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미래에 담겨져 있는 약속이야말로 현재에 희망을 주는 확실한 존재적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블로흐와는 달리 미래를 어떤 유토피아적 추상이 아니라 역사속에 진입되는 구체성으로 본다. 더욱이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갑작스러울 정도로 놀랄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고 인간 세계와 약속을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물론 몰트만은 하나님을 어떤 변하지 않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세상과 관여됨으로 나타나고 알려지는 역동성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하나님이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바로 미래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도 없고 현재에 가두어 둘 수도 없다고 한다. 미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현재에 다 나타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계시를 미래에서부터 오는 어떤 약속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전통적 기독교에 주장하듯 계시란 어떠한 명제적(propostional)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계시는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제적이라 한다면 그 계시가 근거하는 미래는 열린 미래가 아니라 닫힌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즉 명제가 그 미래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미래를 담지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즉 미래로부터 오는 자라고 한다. 그의 부활을 과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과 역사의 근저로 본다. 즉 부활을 미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도 미래의 틀로서 정의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와 같이 인간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정의하기보다는 ‘되어감’으로 정의한다. 오직 마지막날에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게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를 초월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는 것이 죄라고 정의한다. 즉 미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일종의 은혜가 아니라 행위를 의지하는 모습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마치 역사의 마지막이 이미 이르른 것처럼 현재에 초점을 두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의 종으로서 미래의 약속을 선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그의 윤리관과 연결이 되는데, 윤리에는 이미 정해진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만이 윤리의 규범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리의 기준은 미래의 결과에 대한 기대라고 한다. 즉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가 우리를 소외당한자들과 눌린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지금의 ‘무엇’에 도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비록 막스적인 개념은 아닐지라도) 혁명을 환영한다.

그의 신학 중 특이할 만한 점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존재론적(ontological)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종의 경세적(economic)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구속사적 차원의 경세적 삼위일체가 아니다. 다른 많은 자유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건 속에서 발생되는 모습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으로 정의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에서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열림을 확증했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을 분석 비판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의 신학은 철저한 변증법적(dialectical) 신학이다. 그가 말하는 미래 혹은 약속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본체론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는 전적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역사속에 비쳐지는, 즉 미래의 약속이 가능성으로 현재에 다가오는 희망은 칸트가 말하는 현상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는 역사속에 내재하는 혹은 계시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초월적-내재적 변증법은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거의 같다고 하겠다. 물론 바르트와는 달리 몰트만은 역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역동성 역시 변증법적 틀안에서의 모습이다. 이런 차원에서 몰트만은 칸트와 헤겔을 종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코 미래의 하나님이 현재 역사속에 현존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멀게는 칸트, 가깝게는 바르트에서 답습했다 하겠고, 미래(혹은 종말)와 현재가 역사라는 존재의 틀속에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된다는 생각은 헤겔에서 왔다고 하겠다. 또한 자기 부정(self-negation)을 통해 하나님이 십자가 고통에서 자신을 나타내었다는 생각 역시 헤겔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가 있다는 초월적 하나님이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은 사실 현재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린 미래로 남겨져 있다는 몰트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미래적 하나님 혹은 약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은(칸트의 본체론적 세계 하나님 혹은 바르트의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과 같은) 현재의 그 무엇과도 결코 동일시 되지 않는 긴장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이것은 칸트의 현상적 세계에서의 범주적 의미나 계시 속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났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초월적 하나님(희망의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잡을 듯 하면서 못잡고 또한 역사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무엇인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듯 하면서도 계속 신비나 가능성으로 남게 되는 그러한 역설적 긴장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래적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고통, 아픔, 갈등 등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바르트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미래적이라는 몰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그의 자유라는 바르트의 생각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 천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는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계셔서 그리스도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감추시고 동시에 전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 미래에 대해 희망하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떠한 근거가 없니는 불가능한 것이다. 몰트만은 그 근거를 추상적 미래에 두는데 그런 미래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그런 미래는 없다고 믿는 것과 그런 추상적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미래가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져 있다고 하는데 만약 희망을 위한 어떠한 근거가 미래에 있다면 그 미래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하게 미래가 열렸다는 것은 일종의 절대적 신적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려는 발상인데 이러한 발상은 비합리적(irrational)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 신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신념은 바로 현재 몰트만 자신에 있는 것이다. 즉 결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 혹은 종말은 구체적 과거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몰트만이 주장하듯 미래에 속한 사건이 아니다. 사도들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몰트만의 십자가-부활 사건 해석은 그 옛날 영지주의나 가현설과 같은 이단 사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 십자가-부활 사건은 계속 우리 현재에 그 구성적(constitutive) 힘을 끼치고 그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활 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규범적 근거와 종말론적 근거가 추상적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즉 희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과거와 현재없이 중립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몰트만은 역사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등식이 아니라 거꾸로 미래-현재-과거라는 등식을 세워 마치 미래가 현재을 구성(constitute)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희망하고 신뢰하는 것은 그 미래가 항상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일 그리고 지금 이루시는 일로 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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