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나님의 책망과 치료 (렘15:18) / 존 칼빈
하나님의 책망과 치료 (렘15:18)
먼저 지난번에 본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선지자는 자신이 조롱하는 자들과 함께 앉지 않고 비록 혼자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앉아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방탕이 행해지고 있음을 보았고, 그것은 혹시 자신마저 같은 길로 가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우리는 선보다는 악을 더 잘 좇는 습성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비록 타락할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 머물러 있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악으로 내달릴 때도 히나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그의 말씀에 매달려야 하는데,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가능할 것입니다.
1. 거룩한 분노
선지자는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노란 거룩한 분노입니다. 사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버립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쾌락에 빠져 하니님을 버리는 자들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악인을 벌하기 위한 정당한 재판관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눈 앞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 다른 사람들과함께 방탕하며 죄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멸시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재판관이심을 알았을 때, 선지자는 간담이 서늘해 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인들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의 열심으로 불붙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마다, 그 책망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의 원인이 되는 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안식을 취하고 있을 때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손을 내밀어 우리의 악을 지적하고 책망하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소돔 사람에 대한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가증함을 보시기 위해 내려 오셨고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홍수에 대하여 예언했을 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건축하며 결혼하고 모든 쾌락에 빠지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놀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심판의 손을 기다려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분이 말씀하시는 즉시 우리를 책망하시는 원인인 악을 깨닫되, 그의 말씀이 선포하시는 그대로, 사실대로 지적받은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에 사로 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 바울도 우리에게 분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1 다윗도 “분을 품되 범죄치 말지어다”고 말합니다.2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악행에 대해 분을 품으면, 이 분노는 거룩한 것이며,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화를 낸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유감이라고 하면서도, 그럴 듯하게 자신을 변명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미워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면 당장이라도 분을 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 위선을 예로 들어 봅시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 이웃 중 한사람에게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죄를 범한다면, 그때 우리는 흥분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관련되는 경우 외에는 참된 열심으로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처럼 흥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홍수 가운데서 구원하실 것이며, 우리는 죄를 억제하기 위한 좋은 굴레를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묶어두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 때, 이사야가 말한대로,3 만일 우리가 허영을 좇는 일을 그만 두거나 우리의 잘못을 한탄하기보다 세상의 기쁨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가 최악의 상태로 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4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그것은 우리가 슬퍼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최악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 보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슬픔을 갖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모든 책망을 조롱하는 죄악을 범할 때, 우리는 마땅한 분노로 흥분해야 하며, 다음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해서 악행들에 대해서 진노해야 합니다.
2. 신앙과 인내
선지자는 돌이켜 스스로 한탄하며 말합니다. “나의 고통이 계속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 나는 당신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야단쳤습니다. 내가 기다렸던 도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당신은 내게 말라버린 샘과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치료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슬퍼합니다. 내가 만일 도움을 받았던들 그 샘은 생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싸움을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약속한 도움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인내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참을성 없이 흥분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이 온전치 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믿음이 확고하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것이고, 그 소망은 인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5 이것이 세상과 싸울 때 견지해야 할 순서입니다. 이 점에서 성 요한은 우리가믿음이 있어야함을 말하는데,6 이 믿음은 또한 소망으로 견고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을당하더라도 소망이 있다면 인내를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결핍은 믿음이 연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샘이 마른 것을 한탄함으로써 자신에게 신앙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참을성 없음으로 인하여 실패하지 말고 우리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환난의 충격이 없을 때,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는 너무도 대담하지만 충격이 닥치면 우리는 즉시 좌절합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두려움이라는 시험을 당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선지자 만큼 하나님의 가르침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와 같은 압제를 받을 경우, 대경실색할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을 상실할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고 그가 하늘에 계시는것 조차 잊어버리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도우시도록 그에게로 돌이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선지자가 불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신앙이 없는 자들은 단지 화만 내지만, 선지자는 “아아, 주님,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 앞에 임재해 계심과 그의 약속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선지자가 “나는 왜 계속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이 일시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는 법을 배웁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사람들이 어떤 공격은 잘 버티지만, 다른 공격에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달 아니 일년 내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기를 바라시는 듯이 보이더라도, 이 일로 넘어지지 않도록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선지자에게 임한 것을 생각합시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긴 고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일년 동안만 고통을 준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더 길게 지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일년 동안 고통스럽게 하실지라도, 아니 심지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하신다해도, 우리는 죽음 이후에 있을 그분의 도움을 기다립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 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영원한 소망의 대상
또한 선지자는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라고 반문하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소망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17장에서 말하게 될 내용과 같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정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7 고 말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8 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바라본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더라도 소망이 순간적인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대하여 갖는 소망은 영원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해결된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그러면 그가 끝까지 그리고 이 세상 밖으로 나간 뒤에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에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항상 느끼지 못하고오히려 곤궁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굶주려 먹을 것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갖지 못하도록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생수가 결핍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안됩니다. 샘의 근원이 흐르고 우리에게 물이 모자라지 않음은 어디서 기원합니까? 그것은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생수의 근원으로 여길진대, 그에게 나아갈 때 결핍된 것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궁핍한 상태이고 배부르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임을 배웁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벌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아아 목말라 죽겠다”라고 말하며 물을 마시기 위해 오직 자신을 낮추는 자가 있다면, 목말라 죽어가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설사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고,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심을 깨닫는다고 해도, 겸손히 그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우리를 낮추기를 너무 지체한다면, 잘못이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책망과 치료 - 부당해고가 없으신 하나님
뒤이어 계속되는 말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갈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벌하시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자신의 고백과 자신이 시험 당했음을 알려, 우리가 하나님을의지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도우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잘못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과오를 감추는 것은 커다란 어리석음이며, 그것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께 영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마음이 흔들렸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이길 준비가 된 것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를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원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할 경우, 우리가 책망받는다고 해서 불만을 갖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든 바르게 함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우리를 책망할 때, 그렇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설사 우리를 책망하는 자가 악감정으로 그렇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치료의 일을 행하심을 보면서도,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은 망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탄하였더니 하나님이 나를 구하셨도다.” 이것은 우리가 흥분했을 때,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상태로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가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히나님의 치료하심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면, 너는 무슨 가치가있겠느냐? 하지만 네가 돌아온다면, 네가 말씀을 따른다면, 다시 말해 내가 내 백성을 버리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안다면, 그리고 네가 이러한 육적인 생각들을 잊어 버린다면, 나는 너를 받아들여 내 앞에 세우겠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선지자를 그의 백성 중에서 빼어 내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성경에 흔히 있는 것으로서, 사람에게 하인들이 있을 때, 종들은 분부를 받아 그를 잘 섬기기 위해 그의 면전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물러설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면전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무 이유없이 종을 해고하는 사람들과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섬기는 것에 실패할 경우, 우리를 해고할 수있고, 그의 집에서 내쫒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의 백성 중에 속한 자가 실패한다면 말입니까?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수십 만가지나 되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여 더 이상 그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한다해서 그게 어떻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완전히 방탕하고 우리가 소명을 더 이상 좇기를 원하지 않는 듯 보여도, 그래도 우리에게 “오라, 오라!”라고 말씀하실 정도로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마치 주인이 종을 쫓아낸 다음에 그에게 가서 “여보게! 불쌍한 이여, 어디로 가려는가? 그대는 배고파 죽을걸세, 돌아오게, 돌아오게” 라고 말하듯이, 우리 주님도 이처럼 행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만일 회개한다면, 내가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세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것 중에 하나는, 선지자가 버림받아마땅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다시 돌아오라고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직분에서 물러났던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그 분께 버림받지 않으려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경우, 그 분이 우리를 더 이상 주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갖기를 애쓰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음을 배웁시다. 우리는 소명 안에서 그분께 복종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선악과 귀천의 판단기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임무가, 선한 것을 식별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나쁜 것을 구별하여 그것을 정죄하는 것임을 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가르침에 따를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시고 있는 존재로 인정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이 교훈을 떠나는 자들을 경멸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들이 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역겹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직무로서, 누구도 차별함이 없이 악을 정죄하고 선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에 매달리되 그것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볼 때, 그를 영예롭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악인은 그가 어떤 신분에 있든지 간에 그를 경멸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주님은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악을 인정할 때나, 악에게 아첨할 때,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덧붙입니다. “상황이 어쨌든 간에, 그들이 네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그들에게로 가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악인들이 네게서 등을 돌릴 경우, 네가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면서 화평을 유지하고 있다고말하는데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들이 너를 따라야지, 네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이 평화를 갖기 원한다면 그들이 네게로 와야지, 네가 그들에게 가서는 안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과 악 사이의 분별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밝혀주지 않는 한, 우리는 선을 정죄하고 악을 인정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에게 다소간의 분별력이 있다 해도, 실상 우리는 선악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들이 매우 어리석어 선한 것을 낮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밝혀 주사 숨어있는 것을 명백히 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결코 잘못되지 않는 법을 배워서 확실한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천한 것과 귀한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선과 악에 대해서만 말했을때는, 천한 것과 귀한 것을 말할 때보다는 설명을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악행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는 그것들을 깎아내리지 않으며, 또 아무것도 아니면서 칭송받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지자가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분별력을 갖되 선을 인정하고 악을 버릴 줄 알 뿐만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무엇이 귀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건축할 기초가 없을 경우, 다시 말해 양심이 순수하고 깨끗하여 오직 그의 영광만을추구하는 것이 없을 경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연기로 사라질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입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재판관이시며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으로 언급되는 것은, 재판하는 일이 그에게만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보기에는 이렇거나 아니면 저렇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자만으로 가득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선과 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며, 그 분의 말씀에 동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직무를 행하면서, 분별하기 위해서 그의 말씀에 의지해야 하며, 반대로 행해지는 모든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고 정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된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판결이 이루어질 때, 더 이상 변호해서는 안되고, 판결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맡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규범으로 가져야 한다고 결론 지읍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싸움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식별하려 할 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단지 한두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공격해야 하며, 먼저 각자가 자신을 비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입같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서 받은 직무를 잘 수행하려 한다면, 오직 그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그의 입 같이 되어야 함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자기 뜻대로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선지자나, 사도나, 교사가 아니라, 17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는 스스로 세워진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인정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의 말씀이 우리의 분별력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만을따라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그가 덧붙이는 말로 가봅시다. “그들이 네게로 오려니와”. 여기에는 검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그들이 설교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켜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증오 가운데 있어서는 안되며 화해해야 합니다. 이 화해는 어떤 종류입니까? 물론 같이 마셔야합니다.9 나는 여러분이 책망받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서로에 대해 너그럽게 봐줘야 합니다” 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러한 화해에 화가 있을지어다! 오히려 모든 악덕을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야 하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일치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들의 악행을 돌이키는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네게로 돌이키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직무 가운데서 그의 의무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네게로 오려니와” 라고 말할 때,하나님은 예레미야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선지자의 자격으로 그를 취하고 있는 바, “그들이 먼저 나와 화해해야 하며,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직무가 있습니다. 곧 그들(=하나님의 사역자들)과 평화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스스로 돌이킬 생각을 해야지, “우리는 우리가 해오던 대로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만용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마귀와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혼동만을 가져올 불행한 평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가르침을 좇아 우리의 선한 하나님께 엎드려, 우리가 결코 시험에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 그 분이 우리가 시련 당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를 붙드시되 우리가 그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그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는 여러 방탕함을 저지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백성과 민족들에게도이런 은혜를 베푸시길 원합니다.
*이 설교는 1549년 6월 28일(금)에 행해진 것이다.
*본문에 붙여진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는 것이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말씀]의 편집 구성상 첨가한 것이다.
역주
1.엡 4:26
2.시 4:5
3.사 22:12-14
4 전 7:4
5.롬 5:1-5과 약 1:2,3,12에는 순서가 믿음, 인내, 소망으로 되어 있다.
6.요일 5:4. 세상을 이김과 믿음과의 관계.
7 렘 17:7-8
8.렘 2:13
9.이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성찬을 가리킬 수도 있다. 칼뱅은 지금 화평을 핑계삼아 타협하는 사람들의 변명을 예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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