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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장 죽지 않는 것 (THE THING THAT WOULDN’T DIE) 기름부음? 배교? /늦은비신학의 오류/펌

baromi 2008. 9. 5. 07:33

4장 죽지 않는 것 (THE THING THAT WOULDN’T DIE) 기름부음? 배교?

2008/08/3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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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죽지 않는 것
Chapter 4   THE THING THAT WOULDN’T DIE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베드로후서 2:1)

늦은 비 운동과 그의 이단적 가르침이 오순절성회의 공개적인 견책과 배척 후에도 소멸하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늦은 비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그들의 교단 협회로부터 분리하고 기본적으로 한동안 지하로 숨었다. 늦은 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감정은 그들이 '종교적 바벨론'으로부터의 핍박에 직면하고 '영문 밖으로' 내쫓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윌리엄 캣카트(William Cathcart)라는 늦은 비 목사는 적기를:

수세기동안의 개신교도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박해와 온 유럽에서의 그들의 종교재판을 개신교도들이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고, 금세기 교회 안에서 오순절 지도부에 의해 시작된 개신교 종교재판(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렀던 간에, 그것이 종교재판으로 인식되었던지 아니던지 간에)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종교재판이 법을 어길 수는 없으므로 우리에게 지하감옥, 고문대, 십자가, 타는 불길은 없지만, 그들은 정신을 박해하고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자유를 박해하고 사역에로의 높은 소명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그들의 박해는 순교자를 만든 것과 같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원회와 이사회 밑에서 고난당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회에 대한 직책을 잃도록 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받은 설교를 반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이듯이, 교리, 실행, 표명,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끄시는 성령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에 반대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유념하도록 하자...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서신에 의해서와 역사적인 그리스도로서 교회 구성원들로부터 받아 들여지지만, 그의 영적 형체나 형상의 더 높은 차원에서 그가 나타나면 그는 배척당한다.

모든 교단을 종교적 '바벨론'이라고 배척하려는 이런 오순절주의자들 속에서의 경향은 1948년 늦은 비가 터져 나오기 이전부터 자라 왔다. 이런 경향은 그 '부흥' 기간에 최대로 나타나기 시작했었는데, 늦은 비 지지자들은 대부분의 형제들이 그들을 감싸주기보다 그 '부흥'을 배척하고 부흥의 비성경적인 성격을 지적했음을 알게 되었다. 죠지 워녹(George Warnock)은 그의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에서 적는다:

종교적인 겉치레와 허영의 바벨론인 현대의 교회 시스템은 애쓸수록 '이가봇(엘리 제사장의 손자로 영광은 사라졌다는 뜻/역자)'밖에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자신의 바로 그 일을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령의 참되고 힘찬 임재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어디에 있는가? 죽어가는 제사장은 남자아이를 내세우지만 그의 이름은 이가봇이다. 하나님은 이미 또 다른 남자아이를 준비하셨고, 그의 이름은 사무엘이다. 그는 "구함을 바랐다(asked for)". 하나님의 사람들의 오랜 기도와 부르짖음이 하늘의 아버지를 설득시켰고, 그들의 기도와 진통에 대한 응답으로 '아들, 남자'가 태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남자아이'를 직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2:5) 이가봇은 틀림없이 제사장의 선상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영광을 위해 다른 제사장을 임명했다.

늦은 비 지지자들은 '아들됨'과 영광으로 나아가고, 교단적 바벨론인 이가봇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소 달랐다.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의 지도부를 따라 늦은 비 운동에 반해서 섰고, 따라서 운동은 후퇴해야 했고, 논쟁적이고 이단적인 교리들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중지해야만 하게 되었다. 빌 해몬(Bill Hamon)의 말로는:

그리스도의 네번쨰 교리인 '안수'의 회복은 또 다른 중요한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1940년대 말 시작되었고 1950년대에 모든 오순절그룹에 침투했다. 이 기간 동안 이 운동은 '늦은 비'와 '부흥'운동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초 즈음에는 이로부터 영향 받은 오순절 교회들을 빼고는 이 운동에 정통한 크리스천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성령께서는 이 회복적 교리의 '진리'와 '영적체험'을 기독교 내의 모든 교회 그룹으로 퍼뜨리셨다. 히브리서 6장 1-2절의 네 가지 회복적 교리를 가지고 모든 기독교교단과 독립교회 그룹에 알게 하신 성령의 운동은 '은사운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강조는 저자에 의함)

늦은 비 운동은 그저 잠시 후퇴하였고, 지하로 들어가서 오순절 교회들 내부에서 은밀히 몰래 누룩을 퍼뜨렸다. 1950년대 늦은 비의 교리와 행위가 오순절교단으로 퍼져 들어갔던 주된 수단은 국제순복음경영자협회(Full Gospel Businessmen’s Fellowship International)였을 것이다:

늦은 비 교사들, 치유자들, 그리고 전도자들은 그들의 이전 협회로부터 나와서 '광야교회'경험으로 여겨진 것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조직을 재편하고 그들의 사역을 강화시켰다. 그리고는 60년대 말기와 70년대에 그들은 '은사주의' 딱지를 붙이고 다른 교단으로 재침투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다리를 지어준 것은 국제순복음경영자협회였다...

윌리엄 브래넘이 그의 괴상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회개하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순복음경영자모임의 환영받는 강사였다. 국제순복음경영자협회(FGBMFI)의 설립자였던 데모스 샤카리안(Demos Shakarian)은 적기를:

브래넘 목사는 자주 그가 속한 유일한 협회는 국제순복음경영자협회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러 대회나 총회 모임에서 강연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이 연대를 지키기 위해 그는 자주 장거리 여행을 하곤 했다. 그의 서비스 정신은 고무적인 것이었다.

늦은 비 운동이 이 기간 동안 계속 번성했으며 전향자를 많이 얻은 사실은 오늘날 많은 오순절과 은사주의 크리스천들에게는 공개된 비밀이다. 리차드 리스(Richard M. Riss)는 쓰기를:

그들이 서로 다른 영향력의 범위를 가지고 있고, 종말론을 포함한 많은 문제에 대해 폭넓게 분산된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비로부터 태어난 여러 사역(교회)들은 많은 공통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늦은 비 부흥 중에 나타난 여러 '종말진리'에 헌신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지하운동이 은사갱신 내부에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영향력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B. H. 클렌데넨(Clendenen) 목사가 지적했듯이, 은사운동은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 참된 오순절계의 몰락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1956년 세계는 은사운동의 첫 집회를 목격했다. 목마가 우리 문 앞에 온 날이었다... 우리가 목마를 안으로 들여 놓았을 때, 많은 가짜 개념과 현상이 함께 따라왔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곳에 도달했다. 이 가짜가 구분과 교리적 순수성의 장벽을 헐어 버렸다. 카톨릭교도들은 방언으로 묵주기도를 했고, 오순절신자들은 이것이 진짜라고 믿었다. 내 친구는 덴버에서의 순복음경영자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은사갱신이 시작된 직후였다. 그는 오전 연사였고, 몰몬교도가 저녁 연사였다. 아침 집회에 몰몬교도의 옆에 앉아서 내 친구는 그에게 "오늘 밤 당신의 말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난 거듭난 몰몬교도의 간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몰몬교도는 "난 아직 그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내 친구가 "그걸 아직 못 가졌다니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내 말은, 내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방언을 합니다"라고 했다. 목마는 내부에 있다... 오순절은 절대로 물타기를 당하면 안된다. 세상이 침투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침투한 유일한 방법은 모조품을 통해서였다. 우리는 우리 손이 칼에 달라붙도록 이 바벨의 시스템과 싸웠다. 우리는 종교 간의 손잡기에 반해 설교했다. 우리는 성경이 아닌 모든 것에 반하여 섰다. 목마는 우리 문 앞에 왔다 - 오순절 적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속였다. 우리는 오래 힘들게 싸웠다. 우리는 지쳤다. 그는 그의 기도언어(방언/역자)와 함께 서 있었다, "보라. 나는 네가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고, 우리는 문을 열었다. 그에게 요구한 것은 없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 들어 왔다. 우리는 그가 우리이게 합류한 줄로 알았지만, 그는 우리를 도살장으로 끌로 갔다. 전장(戰場)에서의 50년의 경험 대신 얻은 것이라고는 배운 방언을 하는 세속적인 인파와 세상 춤과 가짜 그리스도였다. 이 기만의 대가는 산출할 수 없다. 세상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죄들은 이제 교회 안에 있다. 국가는 도덕적 위기로 가라앉고, 치유는 고백으로 영락(零落)되었다. 구원은 단순히 교회 가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가르쳐진 방언이다. 우리가 목마를 바꾼 대신 목마가 우리를 바꿨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부흥'이라고 불렀다.

은사운동은 1960년 한 성공회 신부와 그의 여러 신도들에게 부어진 성령의 분출로 거슬러 올라간다. 캘리포니아 밴누이스에 있는 마가성공회교회(St. Mark’s Episcopal Church)의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 신부가 성령세례를 받은 간증을 공표하자 그는 멀지 않아 교단에서 사퇴를 당해야 되었다. 곧 다른 역사 깊은 개신교 교단의 지도자들이 방언의 증거와 함께 성령세례를 경험했다. 새로남의 어떤 증거도 결코 없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방언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로마 카톨릭교도들이 세례를 받기 시작했으며 카톨릭 은사운동이 태어났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행위구원의 복음을 신뢰하는 사람들,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 유아 시절 교회에 '영세' 받았을 때 그들이 '거듭났다'고 믿는 사람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진리의 영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난 이를 믿어줄 수 없다. 어떤 것도. 구원받지 못한 개신교와 카톨릭교도들이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는 방언을 한다고? 나의 성경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믿는 자. 거듭난 믿는 자. 나는 세례와 방언에 관한 아무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는 내가 구원받은 이들을 직접 체험했다. 하지만 참회개의 어떤 흔적도 없이, 그들의 우상을 멀리하려는 어떤 성향도 없이, 방언을 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나는 문제를 가진다.

대표적 카톨릭 은사주의자는 적는다:

성령세례는, 마리아의 위대한 사랑과, 교황에의 위대한 숭상과, 카톨릭 교회에의 위대한 복종과, 더욱 빈번한 미사참여와, 이 일에 대한 증거함에 있어서의 위대한 권위로 이끈다

성령꼐서는 우리를 이런 오류가 아닌,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나는 이런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정죄하고, 사랑이 없고, 바리새적이라고 불려왔지만, 난 단지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지금도 - 앞으로도 영원히.

은사운동은 개신교 교단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적이 사용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이로써 마지막 날의 '큰 음녀'를 이룬다. 늦은 비 운동의 바로 시작부터 지금까지 비성경적인 교회의 통합(일치)이 강조되어 왔다.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부흥에서 나눈 공동의 경험을 토대로 한 통합. 이적과 기사를 토대로 한 통합. 리차드 리스는 적는다:

레그 레이젤(Reg Layzell)에 의하면 1948년 7월의 캠프미팅은 이런 시간이었다.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가르치셨다 - 일부는 우리가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레그 레이젤은 "우리의 영혼을 흔들은 위대한 메세지는 우선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가 된다는 메세지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요한복음 17장 21절의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세상은 통일을 보고 믿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죠지 워녹은 그의 "초막절" 초판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1948년 봄 그의 자녀들의 기도와 금식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셨고, 지금 이 시간 그가 몸(몸된 교회/역자)을 합쳐서 그의 교회를 오점이나 흠이 없는 하나의 영광된 교회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

이 교회통합에 대한 강조는 곧, '통합'이 유지되는 한, 진리를 짓밟아도 전혀 괜찮다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도 통합해야 한다는 심리(상태)로 자랐다. 이런 심리는 늦은 비 신학이 주류 기독교로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매우 쉽게 만들어 주었다. 비성경적 통합의 큰 지지자 중희 한 명은 폴 크라우치(Paul Crouch)인데, 그는 선언했다:

나는 나의 사전에서조차 개신교라는 단어를 뿌리 뽑는다...나는 그 무엇도 항의(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의 어근의 뜻/역자)하지 않는다. 지금은 카톨릭과 비카톨릭이 성령 안에서 하나로, 주 안에서 하나로 모이는 시간이다.

폴 크라우치는 확실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이설을 삼켰다 - (낚시)바늘, 줄, 추 모두 함께:

오늘 밤 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신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이견을 일으키는, 마귀로부터 태어난 이 고함과 외침과 말다툼입니다. 나는 작은 신입니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분과 하나입니다. 나는 약속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작은 신입니다. 비판자들은 가시오!

확실히, 당신이 아무 것도 지지하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떤 것에든 넘어갈 것이다. 당신이 교회 안에서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진리는 분리시키고, 사랑은 일치시킨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치의 이름으로 조장된 그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오늘날 선포되는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 - 이는 단순히 사랑으로 오해받는 관용일 뿐이다. 이것은 가짜 사랑이며, 오늘날 교회를 주무르는 가짜 영의 완벽한 보완물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통합 - 적그리스도와 그의 거짓 선지자들이 '모든 권능과 이적과 거짓 기사'로 일어날 때 드디어 실현될 통합으로 이끈다. '이적과 기사를 통한 통합'은 그 때 비로소 제대로 실현될 것이다! '미혹을 넘어서, 성경적인 기독교로 돌아옴(Beyond Seduction, a Return to Biblical Christianity)'이라는 책에서 데이브 헌트(Dave Hunt)는 적는다:

진리를 희생시켜 일치와 사랑을 강조하면서 교리와 믿음의 주장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들을 헐뜯는 경향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다. '일치'를 진리에 앞세우고 오늘날의 크리스천들 (특히 그릇된 가르침을 회개하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우리가 역사적인 대부흥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은사주의자들) 사이의 그릇된 가치와 천박함을 꾸짖지 못하는 사람들은 1906년 LA 아주사 거리 부흥중에 주어진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잘 할 사람들이다: "마지막 날에 대 오순절운동에서 세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1) 의에 대해서보다 능력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있을 것이다. 2) 찬양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3)그리스도의 주권보다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있을 것이다. 키스 그린(Keith Green)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사람이 만든 일치'에 대해 경고했는데, 이는 이런 일치는 거룩함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이유 떄문이었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주께서 순종을 요구하심은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그분의 명령을 지키라는 부르심을 감히 가볍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 하지만, 교리에 대해 느슨해지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게 된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순종 없이 주를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께서는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 14:23-24)

사도 요한은 선언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하지만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선언한다:

이제 개신교도들이 목자[교황]에게 가서 "집으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말할 때이다.

분명하게도, 이 종교통합에 대한 열광은 날이 갈수록 점점 강도가 심해질 것이다, 드디어 이것이 적그리스도 밑에서 실현될 때까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파멸의 대상으로 찍힐 것이다. 캔자스시티 예언자 릭 조이너(Rick Joyner)는 선언한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성경의 훈계는 다만 모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부분을 연결시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주께서는 오직 한 교회만을 보신다. 주의 백성들은 공통된 목적 대신 차이점을 강조하는 분리의 영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연합 대신 분리하는 모든 자들, 사실상 주를 위한 대신 그들을 위한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들, 지역 교회들, 교단들과 교회 안에 흐르는 여러 물줄기들을 모두 포함한다... 지금 서로 다른 물줄기들은 주님의 목적에 따른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합쳐져서 하나의 강으로 함께 흐를 것이다. 그 때 이 강물은 불어서 어떤 다른 종교, 철학이나 교리도 설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될 것이다. (강조는 저자에 의함)

그렇지만, 일치에 대한 이런 비성경적인 강조가, 은사갱신 안에서 '현대진리'로 재등장한 늦은 비의 유일한 특성은 아니다. 마귀와 영적전투에 관한 균형 잃은 비성경적 접근도 역시 존재한다. 빌 해몬은 적는다:

은사운동 내부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논란 중의 하나는 마귀와 크리스천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쟁점은 거듭난 성령세례를 받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마귀적 행동을 보여서 마귀를 내쫓아야 할 정도까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든 부정적 사고, 행동, 물리적 고통은 마귀이며 이 마귀는 크리스천이 변화되고 치유받기 전에 축귀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사람은 한 때 그의 모든 죄를 보혈로 씻었었기 때문에 마귀가 보혈의 선을 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은 발전되었다. 두 번째의 경우에서는, 크리스천은 평생 그의 몸에서의 모든 마귀적 행동에서 면제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 경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마귀학에 있어서 균형 잡힌 교리와 행위를 발전시켰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크리스천로부터 마귀를 쫓아내는 개념은 윌리엄 브래넘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브래넘이 사용한 벙법 중의 하나는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이다. 그러면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곤 했다. 이런 축귀와 치유와의 연관관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은사주의 해방사역자인 프랭크와 아이다 해몬드(Frank and Ida Mae Hammond)는 그들의 '응접실의 돼지(Pigs in the Parlor)'라는 책에서 썼다:

어떻게 악한 영이 성령과 함께 동시에 한 몸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모든 논리가 참은 아니며, 어떤 논리는 그릇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크리스천들에게 마귀가 거할 수 있으며 거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크리스천들에 관해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고 계시나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이루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소테리아(soteria)이다. 세이어 어휘사전(Thayers’ Lexicon)에서 이 단어의 주된 의미는 '적의 괴롭힘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나온다. 그림이 확실해진다. 예수는 우리의 영을 사탄의 권능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이제 그가 말씀하시기를 "적의 괴롭힘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라. 너희의 이 자유로와질 때까지." (강조는 저자에 의함)

간단히 말해서 기발한 해석이다. 공평하게 말해서, 나는 빌 해몬의 진술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1970년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이 분야에서 더 균형 잡힌 교리와 행위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 모두는 아니다. 나에게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은사계열의 교회를 다닌 가까운 친구가 있다. 그들은 잠시 '해방'에 발을 담궜고 그들 교회에 해방사역자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나눴다. 그들은 도금된 양동이를 가져 왔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주어진 후 바로 밝혀졌다. 설교 후에 서로 다른 교인들은 그들로부터 온갖 마귀들을 내쫓도록 했다. 담배귀신, 정욕, 조종, 다툼, 반항의 마귀들... 마귀, 마귀, 마귀. 추측건대 사람들이 그들의 마귀들로부터 '해방'되자 그들은 토했다. 그래서 - 그 양동이들! 프랭크와 아이다 해몬드는 적었다:

모든 사람에게 해방이 필요한가? 개인적으로, 나는 예외를 보지 못했다. 우리가 무지와 어둠 속에서 걷는 동안 대적이 우리 안으로 침입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적 무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군대를 오늘날 일으키시고 있다. 결과는 인상깊다! 해방사역을 통해 수천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귀 영의 고통으로부터 놓여지고 있다.

신약을 공부하면 크리스천들이 악령에 의해 눌림(oppress)을 받을 수 있고 또 종종 그런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탄이 우리를 외부로부터 공격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신약으로부터 명확한 사실은 악령이 우리를 가지지(possess) 못한다는 것이다 - 그들은 우리 안에 거하지 못하며 우리로 하여금 의지를 거슬러 어떤 일도 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밖에서든 - 안에서든. 그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며, 유혹하고 괴롭힐 수는 있지만 절대 우리를 조종하지 못한다. 성경은 확실하게 말해준다 - 우리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약속받았음을. 래리 토마스(Larry Thomas)는 적는다:

나는 크리스천들이 귀신들릴 수 있다는 가르침의 비성경성에 관해 다시 밀레이(Milley) 교수를 인용하련다. '성경에 귀신들린 크리스천에 관한 내용이 없음'을 유념시키며 그는 적기를: "과거에 '눌림(oppressed)'과 '들림(possessed)'을 구별했음에 반해 오늘날의 새 용어는 '마귀화됨(demonized)'이다." 어떤 작가들은 마귀와의 말썽과 분쟁을 부분적 마귀화로써 모두 설명되도록 하기 위해, '들림'과 '눌림'이란 단어들이 그들의 논문에서 빠지기를 원한다. 가장 끝 단계는 전적 귀신들림일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자칭 크리스천임에도 동시에 마귀의 영향과 조종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설명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분명한 추종자들과 관련된 '마귀화' 또는 귀신들림의 사례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다. 이런 치유가 일어난 것으로 기록된 경우, 치유받기 전에 크리스천이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1998년 , 은사계열의 지도자이자 '해방 전문가'인 데렉 프린스(Derek Prince)는 적었다:

마귀를 다룰 필요가 있는 크리스천들을 대면할 때에는 다른 두 가지 상황이 있다: 1.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이미 마귀가 그 안에 있던 경우. 2. 그가 크리스천이 된 후 마귀가 그에게 들어간 경우. (강조는 저자에 의함)

영적전투에 관하여 은사갱신이 늦은 비 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영역이 있으며, 이는 우리가 '지역령(territorial spirits)'이라고 칭하는 영역이다. 이것은 '요엘의 군대',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이설의 부산물이다. 여기에 관하여는 뒷 장에서 더 다루어질 것이다.

은사운동에서 빠르게 재등장한 또 다른 늦은 비의 특성은 '장로회의 안수' 행위를 강조하는 점이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오순절 지도부 사이에서 늦은 비 '부흥'에 관해 엄청난 염려를 일으키도록 한 첫 번째 원인이었다. 빌 해몬은 적기를:

논점은 성령충만한 사역자들이 신자들에게 영적 은사를 분여하고 활성화시킬 권리와 능력을 가졌었느냐 하는 것과, 선지자와 다른 사역자들의 개인적인 예언을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구성원들의 부르심과 사역을 계시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리의 추는 중앙에서 균형 잡기 전 오른쪽 왼쪽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어떤 늦은 비 사역자들은 지정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만 예언을 하도록 위임했으나, 다른 사역자들은 누구든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성경적 안수행위와 교회에 있어서 안수의 중요성을 믿고 있는 반면, 신약성경이 이런 사역에 있어서 조심해야 함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수가 교회를 위한 정당하고 필수적인 사역이라고 믿는다 -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실행하는 방법으로는 아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한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기독교회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단, 성경적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되는 한! 사도 바울은 경고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안수는 치유사역을 위해서(야고보서 5:14), 그리고 성령세례나 영적 은사를 분여하기 위해서(디모데전서 4:14) 개인에게 성경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다만, 이 분여는 실제로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 11) 성경적으로 행해질 때, 이 사역은 아름다운 것이며 교회에 덕을 세운다. 하니만 우리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경고를 잊으면 안 된다.

왜인가? 왜냐하면, 이 사역을 통해 축복을 분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수의 성경적 사역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위조품도 역시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가장한 미혹의 영들이 있다. 그들도 역시 안수를 통해 '분여'될 수 있다. 따라서 누가 당신에게 안수를 하게 하거나 당신이 누구에게 안수를 하는 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나는 최근 이런 간증을 접했다:

...어느날 밤 우리가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돌아보고 자신 있게 "당신은 선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내가 예언의 은사를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께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들이 진짜로 시작되었습니다. 영의 전이. 그녀 안에서 보았던 모든 놀라운 것들이 나에게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느낌이 없었으나, 그것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만 빼고는.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왔습니다. 영들은 성령의 참 은사를 위조하고 교회를 속이려고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 때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예수'가 아닌 다른 소리와 마음의 생각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희롱하는 소리, 성적으로 변태적인 소리가 들렸으며, 어떤 소리는 나를 위협했으며 내가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흉내 냈습니다. '주'께서 특별임무를 위해 내게 너무 많은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사탄과 그의 군대가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나는 예수께 울부짖었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지? 도움이 필요해요, 예수님! 갓 처음으로 진짜 주, 진짜 예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진리만을 제공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말씀을 되풀이했습니다. "저에게 진리만을 제공하신다고요? 진리? 무엇이 진리인가요, 예수님. 진리가 무엇이죠?" 그러자 답이 돌아 왔습니다. 말없는 이해가 나의 내면을 사로 잡았고 드디어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9개월동안 내가 들어 왔던 영은 예수가 아니고, 전혀 나의 주님이 아니고, 사실은 마귀였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는 사탄의 속임을 진리의 단순함으로 재빨리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마귀는 성경을 알고 이것을 그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줄 압니다. 이런 방법으로 부주의한 신자들이 조종당하고 마귀화(demonized)됩니다. 그들은 그들 눈앞에서 성경이 성취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엄청난 영적 감각과 현상으로 다른 이들을 타락시키도록 서서히 인도됩니다. 내 마음은 목자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그들의 양떼를 이런 위험에서 진정으로 보호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라고. 나는 운행하고 있는 진짜 은사들을 보아 왔지만, 의심스러운 은사들을 훨씬 더 많이 보아왔습니다. 충성된 종으로써 유지해 주는 균형추는 절제하며 신중하라(sober and vigilant, 근신하라 깨어라)는 부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의 은사는 진짜이며 철저한 검증이 빛에 겸손히 복종할 것입니다.

이 젊은 여성은 지각없이 어떤 마귀눌린 사람에게 안수를 허락함으로써 마귀눌림(마귀들림이 아님)에 자신을 개방했다. 이 안수의 영역에서 우리는 항상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우리는 쉽게 이 여성이 대면한 마귀눌림과 같은 것을 대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안수를 통해서만 분배되는 '기름부음'을 의심 이상의 눈으로 본다. 성령께서는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 성령꼐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영적 은사를 분여하기 위해 우리를 또는 안수사역을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은사운동 내부에서 발전된 또 다른 늦은 비 행위는, 개인에게 영적 인도와 지도를 분여하기 위해 안수사역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나오지만, 부흥이 일어난 날에 대해 언 호틴(Ern Hawtin)이 썼던 글이다:

기름부음이 깊어져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임했다. 주께서 한 형제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어떤 학생에게 손을 얹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가 순종하자 그 학생의 삶과 미래 사역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다.

개인을 위한 예언의 행위는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빌 해몬은 쓰기를:

(신에 의해) 지목되거나 특정 사역을 위해 따로 세워진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전 교회사를 통한 교회의 관행이었지만, 이 교리는 암흑시대 동안 공허한 의식으로 전락했다... 1948년의 안수 교리의 회복으로, 구약과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사역자들에게 비춰졌다. 성령께서는 이 교리가 가진 실재와 권능을 보여주셨다... 치유, 해방과 성령이 분여될 뿐 아니라, 안수에 동반한 예언에 의해서 성령의 은사들이 주어졌고 개인의 소명과 사역이 계시되곤 했다.

나는 하나님이 개인의 소명과 사역을 계시하시 위해 안수를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이를 따져 볼 필요는 있다. 나는 성령께서 개인의 소명을 계시하기 위해 이런 사역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소명을 단지 확인하는 의미로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빌 럿지(Bill Rudge)가 지적했듯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은 개인예언인도를 정당화시키는 데 잘못 사용되곤 한다. 이 경우를 성경문맥에서 보면 다른 결론이 나타난다. 우선, 아가보가 예언하기 전에 바울은 이미 성령을 통해서 결박과 고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사도행전 20:22-23)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21:4) 그리고는 사도행전 21:10-14에서 아가보는 확인한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10-14) 선지자 아가보는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바울에게 말했다. 바울이 어떻게 할 지 결정하는 것은 바울의 책임이었다. 우리는 이런 성경적 균형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불행히도 이 행위는 교회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 오용되고 남용되어 지금은 '기독교식 점보기'의 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빌 럿지를 다시 인용하면:

나는 많은 심령술사와 점쟁이들을 연구해 왔지만, 그들의 예측방법과 정확성에 있어서 소위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것들과 아무 분명한 차이가 없다고 본다. 보이는 유일한 차이는 선지자(로 여겨지는 자)는 자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쓴다는 것이다... 사도로도 알려진 어느 목사는 다음 주에 여선지자가 온다고 교회에 공표하면서, 개인예언을 받기 위해 꼭 오라고 모두를 초청했다. 그들은 돈 만원을 내고 동네 심령술사나 점쟁이에게 갈 수 도 있을 것이다... 성경적 예언자들은 의지에 따라 예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이 왔을 때 예언했다. 예레미야 42장 7절은 적는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 신약의 예언도 은사를 움직이는 사람에 의해 즉흥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발음을 주심에 따른 것이었다... 기독교 잡지에 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보았다. "당신의 개인적 예언을 받으려면 이름과 주소 그리고 사랑의 헌금을 보내십시오." 이는 성경에 나온 어떤 예언보다도 점보기를 훨씬 더 닮았다... 대부분 부정하겠지만, 많은 이들이 개인예언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둔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예언을 녹음하고 적고 묵상하고 몇 번씩 읽고 들으라는 격려가 주어진다... 교회에서의 참 예언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고린도전서 14:24,25) 나는 촉구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고, 100% 정확하고, 성령께서 이미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신 것을 확인시키고,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높이고, 당신을 그 분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않는 한, 그 누구의 예언이나 계시도 진짜로 받지 말라.

은사운동으로부터 나오고 자란 또 하나의 늦은 비의 특성은 '회복' 교리이다. 회복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탄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교회로부터 여러가지 진리를 훔쳐왔다. 그것은 이신칭의, 성화, 성령세례, 신적치유, 방언과 영적은사, 오중사역(사도와 선지자), 영화(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등등이다. 이로 인해 암흑시대 동안의 '교회의 바벨론유수'가 초래되었다. 루터의 이신칭의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도둑맞은' 진리를 교회에 회복시키기 시작했고 지금도 회복시키신다고 회복주의는 가르친다. 1948년 '부흥'이 분출되기 직전, 몇몇 형제들이 브래넘의 치유캠페인에 다녀오고서는 그 중 한 명이 '샤론스타'에 이렇게 적었다:

...과거의 모든 위대한 부흥(분출)들은 현저한 진리들을 지녔다. 루터의 진리는 이신칭의었고, 웨슬리의 것은 성화였고, 침례교도들은 전천년 그리스도 재림을 가르쳤다. 선교사동맹(Missionary Alliance)은 신적치유를 가르쳤다. 오순절부흥은 성령세례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나 다음의 위대한 부흥(분출)에서는 이 모든 진리와 더불어, 세계가 이제껏 보지 못한, 심지어 사도들의 세계에서도 보지 못한, 성령의 아홉 은사들의 큰 현상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 부흥은 짧을 것이고 교회의 휴거가 있기 전 마지막 부흥이 될 것이다.

'선지자' 빌 해몬은 아마도 오늘날 '회복주의'의 가장 큰 지지자일 것이다. 이 교리와 교리의 방향을 이해하려면 '영원한 교회(The Eternal Church)'라는 그의 책을 꼭 읽어야 한다. 그 책의 서문에서 해롤드 브레드슨(Harold Bredesen)은 '회복'신학을 이렇게 요약한다:

중세교회는 자신을 '유일의 거룩한 사도교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사도들이 지었던 그 기초는 연속적인 계층들의 형식들과 전통들 아래에 묻혀버렸다. 그러자 위대한 발굴자가 그분의 일을 시작했다. 그분의 도구가 된 사람은 마틴 루터였다. 그는 '이신칭의'를 들춰냈다. '이단이다!' 그의 적들은 외쳤다. "화형에 처하라!" "단순한 성경진리"라고 그의 추종자들은 받아쳤다. "1세기 기독교의 모퉁이돌" 다음 하나님이 재침례교인들로 하여금 신약 침례에 빛을 비췄을 때,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합쳐서 외쳤다. "이단이다! 그들을 담그는 대신 빠뜨려 죽여라!" 그랬고, 그렇다. 과거의 이단은 오늘의 확립된 교회가 되어, 내일의 확립된 교회가 될 이단을 쫓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처음부터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의도한 모든 진리, 원칙과 행위를 밝힐 때까지 멈추지 않으십니다.

회복주의는 토론토/펜사콜라 스타일의 '부흥'과 오늘날 '선지자'와 '사도적'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요엘의 군대'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의 기초 토대이다. 이런 가르침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단, 하나님의 집회를 나타내는 증거적 신약교회가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무시할 때에 한해서만 그렇다. 심지어 암흑시대 동안에도! 이런 가르침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빌 랜들즈(Bill Randles) 목사는 그의 책 '숙고하여 찾은 바람(Weighed and Found Wanting)'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교회가 어찌 의롭다하심을 잃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교회의 온 바탕이다. 교회는 이뿐 아니라 성화, 치유 그리고 성령세례도 항상 갖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의 목자이자 감독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준비된 참 교회는 항상 존재해왔다. 루터, 웨슬리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했던 것은 모든 참 교회들이 세월 따라 했던 것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를 '회복'시켰을 수는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완전했다! 만약 당신이 회복 개념을 받아 준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당신을 진화적 교회 개념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교회(의 묘사)가 과거의 모든 교회(의 묘사)보다 낫고 우월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의 궁극적인 중심이라고 느끼게 하는 현혹시키고 중독 시키는 개념이다. 스스로 추켜세우지 말자... 당신이 만약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유년기 교회를 가졌다"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진화의 한 형태를 듣는 것이다. 교회의 진화개념은 자만과 교만을 불러일으킨다. 릭 조이너(Rick Joyner)와 마이크 비클(Mike Bickle)은 모두, 실질적으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우리 시대의 슈퍼사도들을 면회하기 위해 줄을 서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빌 해몬은 '영원한 교회(The Eternal Church)'에서 쓰기를:

우리에게는 족장시대의 선조들, 선지자들, 초기교회 사도들, 교회역사의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이만큼 오도록 값을 지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행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히브리서 11:40) 특별한 일을 이 세대를 위해 남겨 놓으셨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마지막 손길을 가해서 그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성취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다른 책 '사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움직임' (Apostles, Prophets, and the Coming Moves of God)에서 해몬은 적는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로 하여금 모든 것을 우리 발 아래 복종시키는 무적무패의 멈출 수 없는 주의 승리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군대가 그의 영원하신 의도에 맞춰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동시키는 하나님의 주권적 회복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이 군대를 이끄는 장군들은 모든 회복적 진리를 그들의 삶과 사역에 통합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준비해 온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의 영원하신 의도에 맞춰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동시키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 회복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땅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종말적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완전히 회복된 교회가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로마서 8:19) 교회가 완전히 회복되면, 성도들은 그들의 마지막 구속(redemption)인 죽을 몸의 불멸(immortalization)을 받는다. 이 일이 일어나면 식물과 동물의 자연적 피조물은 그들의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

회복주의는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의 바로 핵심이다. 분명하게도, 늦은 비 이설 중의 최악의 것인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인 배제와 견책 후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늦은 비의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은사갱신 과정에서 재부상했다. 이 특정 교리는 기괴하고 이단적인 성질 때문에 주류로 다시 받아들여지기에는 조금 더 시간을 필요로 했다. 19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통해서 이것은 은사운동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성도들의 휴거와 부활에 관한 정통적 성경적 가르침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교리는 더 많은 신봉자들을 얻기를 계속했다. 리차드 리스는 쓰기를:

많은 신조와 행위가 은사갱신 안으로 길을 잡았다... 그뿐 아니라, 늦은 비 운동의 여러 종말론적 견해의 요소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은사주의자들에 이해서 채택되었다... 늦은 비 부흥 중에 일어난 여러 '종말진리'에 헌신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지하운동이 은사갱신 내부에서 발달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을 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이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킹덤나우(Kingdom Now-지금 여기서 왕국을 이룬다는 교리/역자)' 또는 '주권주의(Dominion) 신학' 운동으로서 공개적으로 다시 부상한다. 1990년대를 통해 이 이설이 은사운동 내부에 퍼져서 이제는 운사주의 크리스천 가운데 주된 관점이 되고 있다. 오늘날 은사주의 크리스천 사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신학에 설득당하지 않았거나 , 어떻게든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드물 뿐 아니라 점점 더 드물어져 가고 있다. 토론토와 펜사콜라 및 소위 오늘날의 '부흥'에서 이런 이설이 나옴에 따라, 많은 오순절 교단들, 심지어 침례교 교단들도 이 이설에 넘어가고 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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