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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신님을 찬송할 것인가? - 브렌덴호프(W.L. Brendenhof) (캐나다 개혁교회 목사)

baromi 2008. 8. 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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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약출판소식 제51호, 2005. 9. 26., pp.7-9.>

 

성신님을 찬송할 것인가?

 

 

                               브렌덴호프(W.L. Brendenhof)  (캐나다 개혁교회 목사)

 


 

삼위일체의 하나님 가운데서 성신님은 가장 적은 관심을 받으시는 분처럼 보인다.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종종 ‘그리스도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더구나 니케아 신조에서는 그분을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성신께서 그렇게 나오신다는 것 때문에, 옳든 그르든 간에, 사람들은 종종 그분을 뒷자리에 둘 분으로 이해했다. 성부와 성자는 우선적인 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특히 그렇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께는 기도와 찬송을 드릴 수 있지만 성신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성신께도 기도와 찬송을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는 것을 네 가지로 논증하겠다.


개혁교회의 예배 원칙에 근거하여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은 여러 곳에서 예배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5주일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고백한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32조에서는 표현만 약간 달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도입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양심을 속박하고 강제하는 모든 인간적인 고안이나 규범들을 배격한다.” 어떤 사람은 개혁교회의 이러한 원칙을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한다. ‘개혁교회 예배의 모든 요소는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명령된 것이나 모범으로 나온 것이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성신께 기도나 찬송으로 경배를 드리라는 분명한 표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금지된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예배 원칙을 공정하게 판단한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조는 도움이 되는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뜻 전체,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 사람의 구원, 믿음 및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뜻 전체는 성경에 명문(明文)으로 기록되었거나, 혹은 바르고 필연적인 귀결로(by 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 성경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예배에 대한 개혁교회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 고백은 우리에게 지침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직접적인 명령이나 분명한 예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고 필연적인 귀결”로 유아세례의 실시를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서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여자들이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이나 본보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실시를 갈라디아서 3:28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부터 “바르고 필연적인 귀결”로 이끌어낸다.


따라서 비록 성신님께 기도하거나 찬송하라는 명령이나 모범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바르고 필연적인 귀결이를 실시할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이 명백하다. 첫째,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참되고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이시다. 둘째,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의 표현처럼, 이분들은 “다 같이 영원하다. 첫째 되는 분도 없고 나중 되는 분도 없으시다”(8조). 셋째, 고대 교회에서 성부와 성자께 예배한 분명한 예들이 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전제에서부터 우리는 바르고 필연적인 귀결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성신은 성부와 성자께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과 똑같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성부와 성자가 찬송과 기도로 경배를 받으시고 세 분이 동등이시라면, 성신께서도 찬송과 기도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예배의 언약적 구조에 근거하여


캐나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짧지만 우리는 예배의 언약적 구조를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고(故) 반도른(G. Van Dooren) 목사와 고 데든스(K. Deddens) 박사가 강조하면서 가르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적인 교제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분의 백성이 응답한다. 이것은 예배의 요소들을 배열하는 방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관점에서도 우리는 성신님께 기도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성신께서 성경의 일차적인 저자임을 베드로후서 1:21에서 배운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성신께서 저자이신 성경을 읽는다. 고린도전서 2:13에서도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신님이 연관되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신님께서 말씀의 봉독과 강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배의 언약적 구조에서 성신님께 찬송과 기도로 응답할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기도와 찬송을 성신께 드리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나 이것은 주 예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자유’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에서 성부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치신 사실은 기도할 때 성신님과 아드님을 부르는 것이 정규적인 것이 아닐 것을 암시한다. 고대 교회가 기도를 할 때 성자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행 7:59; 고전 16:22) 여기에 자유가 있음을 가르친다. 기도에서 (그리고 찬송에서) 성자를 부를 자유가 있다면, 왜 성신을 위해서는 없겠는가?


신앙고백서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조나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교훈을 유용하게 요약하여 준다. 우리가 성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렇다. 이 점에서 특별히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적절하다. 19조에서는 “기독교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 분이] 각각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고백한다. 25조와 26조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삼위일체는 먼저 되신 분도 나중 되신 분도, 더 위대하신 분도 덜 위대하신 분도 없다. 세 위격(位格)은 모두 함께 영원하시고 함께 동등하시다.” 이러한 조문으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께서 삼위일체의 “일차적인” 위격이라는 생각을 씻어낼 수 있다. 또한 삼위 하나님을 각각 예배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앤다. 이것은 27조에서 고백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일에서 일체 안의 삼위, 삼위 안의 일체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여기에서 특히 마지막 부분, 곧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말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싶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찬송과 기도를 포함한다. 이제 우리는 성신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확실히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로부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교회의 역사에 근거하여


마지막 논증은 가장 약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러 시대에 걸쳐 있는 보편적 교회를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고대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이 행했던 관행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들의 관행과 믿음에서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 그들의 관행이 성경의 교훈과 관련이 있음을 볼 때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 발에 맞아야 신발”이라는 속담처럼.


유명한 고대 교부, 히포의 어거스틴(354-430)은 다음과 같이 성신께 기도를 드렸다.


      성신님, 제 안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제 생각이 모두 거룩하게 하옵소서.

      성신님, 제 안에서 행하셔서

              제 일도 거룩하게 하옵소서.

      성신님, 제 마음을 이끌어 주셔서

              제가 오직 거룩한 것만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신님, 저에게 힘을 주셔서

              제가 거룩한 것은 모두 방어하게 하옵소서.

      성신님, 저를 지키셔서

              제가 항상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멘


어거스틴이 4세기와 5세기에 살았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이 시기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신께 기도하는 것이 논쟁거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9세기에는 잘 알려진 “오소서, 창조주 성신”(Veni Creator Spiritus)이라는 찬송이 나왔다. 확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지만, 아마 풀다의 수도원장이고 마인쯔의 대주교인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76-856)가 지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것은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이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절은 다음과 같다.


      오소서 창조주 성신

      우리 마음 살피시고

      큰 은혜 내려 주소서

      새롭게 창조하소서


이 찬송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널리 불렀는데, 개신교회에서도 초기부터 불렀다는 증거가 있다. 특히 독일에서 불렀다. 이후에도 이 찬송은 개신교회의 찬송가에 계속 실렸고, 캐나다 개혁교회가 교회적인 사귐을 나누는 몇몇 교회의 찬송에도 나온다.


다른 예들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두 가지 예는 보편적 [좋은 의미의 ‘가톨릭’] 교회가 성신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데에 어떠한 어려움도 갖지 않았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다른 것이 없이 이것만으로도 그러한 기도와 찬송이 오늘날은 금지되었다는 주장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으로 보증된다면, 성신께 드리는 찬송과 기도는 예배에서 신실한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캐나다 개혁교회의 『찬송』(Book of Praise)에 성신께 드리는 찬송이 둘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가? 교회의 책(찬송과 신앙고백과 예식서)을 개정할 날이 다가오는데, 찬송 위원회에서는 고대 교회의 찬송 “오소서, 창조주 성신”을 포함시켰으면 좋겠다. 이것은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ruches)에 속한 교회들에서 많이 사용하는 『시편 찬송』에도 나온다(청색 판, 393장). 그러면, 성신님을 찬송할 것인가? 반드시 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해야 한다!


* 원문 출처: Clarion, 54권 13호 (2005. 6. 24.), 302-303쪽. 번역: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필자인 브렌덴호프 목사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에 있는 랑글리(Langley) 캐나다 개혁교회의 목사이며, 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출처 : 말씀사랑 교회사랑 책사랑
글쓴이 : 우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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