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람들은 어째서 하나님을 거절하는가 (이사야 8:6-7)/로이드존스설교
사람들은 어째서 하나님을 거절하는가 (이사야 8:6-7)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의 말씀과 그 글들이 순서상으로 구약의 끝부분에 매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러한 순서로 구성된 것은, 예언서들보다 앞에 배치되어 있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예언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진정한 정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예언서야 말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특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드러납니다. 예컨대 예언서들은 단순히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도 그 중요성이 대단히 큽니다. 구약 전체는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 나아가 이 역사의 마지막 단계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들은 특히 예언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서가 특별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이유입니다.
구약의 다른 여러 책들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로부터 시작하여 새롭고 특별한 민족으로 성장할 때 까지의 이스라엘에 관한 기사를 읽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 오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을 겪었습니까! 그들의 앞길은 얼마나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까!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들과,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베푸신 특별한 기적들 및 기사들을 봅니다. 이전까지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만난 민족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한단계 한단계씩 따라가고 있는 이 유대인들의 역사만큼 낭만적이고 흥미진진한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정복, 위대한 다윗왕파 그의 왕국, 그리고 솔로몬의 위대하고 화려한 왕국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으며 타락하고, 신앙의 기준은 점점 더 낮아지기만 하며 ,왕국의 영토는 둘로 갈라지고 문제들이 생겨나고 곤경과 난국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언서들과 열왕기 및 역대기 일부분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최후에 대해서 말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큰 곤경을 만나고 국가적인 재난과 수치를 당하여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진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한 시대의 종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삶의 원리와 그 과정이 종언을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추악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의 비극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언서에는 이러한 내용 이외에도 장차 이스라엘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권고와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백성들에게 권고하고 말씀을 선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향해 경고하고 심판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두가지 길을 제시했으며 , 각각의 길에 뒤따라 올 결과에 대해서도 철저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앙의 수호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보증해 주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의 위대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백성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며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의 경고를 들은 왕과 백성들은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비웃었으며 심지어 비난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죄악된 생활을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을 신뢰했으며 교만하고 수치심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이사야서 및 예언자들이 선포한 경고의 말씀을 쓸데 없는 횡설수설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의 말씀들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요컨대, 예언서는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예언서들에는 이스라엘이 쇠퇴하고 멸망당한 이유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끔찍한 일들이 다가올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했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종족이나 한 나라의 과거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있는 일로써 , 살펴볼 눈을 가진 사랄들은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언제나 귀한 교훈을 배우고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연구를 한다고 해서 언제나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이 예언서들은 문제의 윈인까지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서의 말씀들이 그토록 축자적으로 그리고 그토록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예언서들이 제시하고 있는 원인이 당시의 실제적인 원인이었다는 점은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의 죄와 문제점들을 드러내주기는 했지만 자신을 존경하라고명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언자의 시각과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고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말해줄 때, 우리의 생각은달라질 것이며, 비로소 예언자에게는 우리보다 더 높은 영적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예언자를 그저 몽상가나 망상가로 취급하여 쫓아버리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예언자가 미리 선포했던 일들이 모두 다 실현될 때면, 정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예언자가 참으로 미래를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역사란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제 멋대로 이유없이 일어나는일이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보고 기록하는 사건들은 특별하고 영원한 법칙이 살짝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세속적인 역사의 관점이나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실패를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그저 한나라의 국력이 약해져서 그 뛰어나고강했던 자리를 잃어버린 경우라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사건 자체의 흐름에 따라, 혹은 역사와 삶을 지배하는 어떤 규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멸망의 과정 자체를 추적하는 일은 별 다른 어려움 없이 분명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한시라도 빨리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 주시는 하니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멸망의 과정은 멈춰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재난의 벼랑끝에 서서 막 떨어지려 하는 그 순간까지도, 예언자는 그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또한 하나님을 거절할때 초래될 결과에 대해서 그들에게 경고 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건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설명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모든 난관들이 일어난 것이며,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한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한 것이 결국 가장 큰 죄라고, 또한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에 의해 나타날 결과는 멸망과 비참함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초대 교회는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모든 사도들처럼, 또한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그래야 할 바대로, 성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우리에게 경계를 주기 위해서' (고전 10:11)기록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일반적인 원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도 적용되는 원리인데, 우리는 이 원리를 피하거나 무시하여 위험에 빠지곤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해주셨던 일들을,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안의 모든 이들을위해서 동일하게 행해주십니다. 조건은 여전히 똑같은것입니다.
이제 오늘밤 살펴볼 이 본문에서 우리는 제가 이제까지 말한 일들을 전형적으루 아주 고스란히 보여주는사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의미가 깊었던 어떤 시기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중대하고도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을 백성들에게 말해주며 거기서 벗어날 방법도제시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사상에 의지하기를 더 좋아하며, 인간의 도움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예언자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때부터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경고와 위협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한 결과로 주어질 것은 무섭고 끔찍한 재난밖에 없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예언자의 말씀들은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 모두 다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의 사건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만나보겠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 저는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은 신비한 설화나 낭만적인 소설이 아니라 실제의 역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며 그 말씀하신 일들을 또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겠다고 예고하신 그 일을 반드시 수행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혐오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현대인의 삶이나 현대인의 지식에 비해서 어편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지적인 사람들은 결코 이러한 시류때문에 실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류는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시류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그러하며, 앞으로 올 날들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태초로부터 이미 말세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 말씀은 너무나도 명확한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정교하고 지적인 능력이 없더라도 그 뜻을 분별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1.모든 난관의 원인은 죄
첫째로, 어려움과 난관 및 삶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죄의 결과입니다.
혹 성경의 가르침을 전혀 모를지라도, 우리는 순전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 위에서 이 원리를 분명히 견지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다면, 그러한 상황이 생기게 된 원인과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하는것이 현명한일일 것입니다. 원인은 찾아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상황만을처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제에 맞서서 그 원인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성경은 다른 모든 인간적인 사상이나 개념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주변에서 , 그리고 자신의 통제 바깔에 있는 여러 다른 요소들이나 세력들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인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운명이나 우연을 탓합니다.
이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책임을 피하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 외의 다른 것으로 돌리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환경을 탓합니다. 물질적인 빈곤이나 교육의 부재 때문에, 타고난 성격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못 만나서, 경제의 불황이나 번영 때문에, 그리고그밖에 많은 다른 요소들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라고,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고 불행한 지경에 놓여 있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로서는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설명이 전적으로부적절하며 불충분한것이라는사실을 밝혀 줄 만큼, 참으로 진지한 사상이 없는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성찰하는 일만으로도 이들의 생각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반박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사실을 들어 그들의 생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사회복음’ 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과 토른을 벌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마치 미리 준비해 온 말들을 쏟아붓는 듯 한 태도로 현재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빈민촌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많은 사람들을 복음화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열악한 생활환경을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저는 “당신은 죄와 비참함과 고통은오직 런던의 동쪽 변두리(빈민가가 모여 있는곳- 역주)에만 있고, 서쪽에는 전혀 없는줄로 아느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당신은 정말, 그러한 지역에 사는 이들을 구원하는 일이 재산이 즘 있는 이들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믿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면서 그들은 너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환경은 완벽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변 여건이나 생활환경에 대한 그의 주장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육과 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죄와 비참함파 불행이 문맹자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문제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다른 원인들, 변명들, 설명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딛고 일어선 위대하고고귀한 인물들의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진정한 성공이 '지혜롭고 신중한 사람들' 의 전유물은 아니며 잔인한 운명, 즉 박해와 감금파 죽음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그 평온함과 침착함을 결코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인생과 역사의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생의 고난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외적인 조건의 문제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소극적인 현실이든적극적인 현실이든)현실에 직면할때 여지없이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외적인 조건이 다른 모든 것들을 좌우하는 요소이며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도 부인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상태나 어떤 조건에 있든지간에 전적으로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인간 본성에 대한 모독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인간을 생명이 없는 기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며, 인간의 영과 혼에 대한 신념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정말로 이상한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독립성에 대해서 자랑하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현대인들, 또 기독교는 인간을 속박하고 제한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현대인들이 정작 삶의 난관과 비참함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언제나 자신들을 스스로의 통제 바깥에 있는 어떤 힘이나 원인에 의해 완전히 좌우되는 단순하고 생명 없는 기계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분명하고 명확한 성경 말씀과 교훈에 접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서론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에덴이라는 낙원에서, 즉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조건에서 타락했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건대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예언서를 썼던 당시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문제를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째서 그렇게 끔찍하고 절망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어찌 다 그러한 고통의 시대로 변해버린 것입니까? 그들의 환경과 그들의 나라는 완전했으며 그들의 지식과 문화는다른 어떤 나라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러한 어려움에 빠졌던 것입니까? 그 답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주변과의 싸움에 말려든 것도 아니고, 큰 어려움 가운데서 일어서려고 시도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는 위대한 민족이 주변국들과 강대국에 대항하면서 발전해 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큰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한 상태에 놓이게 된 한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쇠퇴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했으며 그분의 율법 지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병하신 길로 걸어가기를 거부했으며. 그 길을 따라 살기 또한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그들은 행복했고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자신들의 앞길에 나타난 난관들도 어렵지 않게, 오히려 영광스럽게 극복해냈습니다.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모든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사 57:21)는 것은 하나의 법칙, 그것도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지금 평화롭게 보인다고, 지금 행복이 넘친다고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후에도 한 동안은 모든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문제가 다가왔는데, 이는 결국 올 것이 온 셈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사는 동안 만나지 않는다면 죽을 때, 죽을 때도 만나지 않는다면 죽은 다음에라도 반드시 만나게 될 문제였던 것입니다. 혹시 바로 지금 우리 앞에도 이 문제가 다가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도 이 문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를 안고도 진정으로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와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난관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으로 이 사태를 설명해줄수 있겠습니까?
주변이나 환경을 탓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똑같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변명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이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 서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분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그분의 법과 그분의 방법에 따라 계획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여러분의 인생과 이 세상에서 정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행복이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그분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였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과 곤경의 원인입니다.
2. 죄, 우리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들은 것 만으로 만족하거나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멈춰버린다면, 우리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히나님의 법과 그분이 정해주신 삶의 길을 거절함으로 해서 곤경에 빠지게 되는것, 이것이 바로 죄의 근본 성격입니다 더 나아가서 죄란 그러한 곤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오늘의 본문에서 아하스왕과 그의 백성들을 책망했던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조롱했기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를 통해서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가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백성들에게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께로 돌아와 의지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확증해 주십니다. 그분은 기꺼이 과거의 일을 용서해주시며, 이스라엘의 모든 잘못과 모든 악을 도말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께 반항해도 하나님께서는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기꺼이 그들을 다시 한번 찾아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는 눈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동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경의 원인이 된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곤경을 만난 이스라엘의 불쌍한 처지를 바라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윈의 손길을 베푸시고, 계속적으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 구원을 받아들이라고 백성들을 설득하시며, 가장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들에게 호소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해결책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수단이나 권고를 의지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했었는지, 그리고 역사전체에서 하나님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지만,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구해주시며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이보다 더 큰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그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비웃으며 교만하게도 그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삶의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절하고 비웃은 이스라엘은, 이제 인간에게 눈을 돌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계획으로 문제와 곤경에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 아물을 버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하여 죄를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며 , 악하고 왜곡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주는 일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자유와 용서를 거부하고, 그것들을 다시 하나님의 면전을 향해 던져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적나라한 죄의 본성을 목격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멸시받고 거절당한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애석한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고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곤경에 처한 인생에게 구원을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구원을 거부하며 다른 것을 믿기를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3.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거절했는가?
이 어리석음, 이 죄악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옛 이스라엘 자손들의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며, 오늘날 사람들의 죄악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줄 구원의 길, 채워주되 영원히 채워 줄 그 구원의 길을 그토록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그럼으로써 인류는 계속적으로 자신을 망치고 전능자를 거절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나 명백한 이유들이 있는데, 이 이유들은 죄가 얼마나 교묘한 것인지, 또한 그 죄가 인간의 본성을 얼마나 끔찍하게 왜곡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그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1)문제의 근본 원인을 인정하지 못함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곤경과 문제들의 근본 원인 및 성격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불 순종하면 그 결과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지만, 그제서라도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 곤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사실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등을 돌리는 한편,자신들이 보기에 하니님보다 훨씬 좋아보이고 활씬 우월해 보이는 다른 신, 다른 종교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이 이제 와서 그러한 행동들이 다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 하셨습니까? 너무나 극심한 곤경과 끔찍한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러한 지경에서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자존심을 다 버려가면서까지 구원받을 만큼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모든 곤경의 원인이며, 이 모든 난관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자신들의 곤경을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다른 나라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는데 승승장구하는가?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운과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세련된 외교술과 책략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수모를 당하거나 회개할 만한 일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회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다른 나라 종교들의 가르침에 비해서 유치하고 원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도 않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가 모든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도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악을 고백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저 구원을 얻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인류는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이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이단 종교가 나타나는 것이나, 평화와 구원의 길을발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현실만 보아도. 인류가 얼마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준 복음을 말입니다. 여전히 문제의 원인은 ‘교만’ 입니다. 우리는 위로를 얻기 원하고 구왼을 갈망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계속해서 고통 당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우리 자신의 죄라기보다는 남의 죄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어려운 시간들은 우리에게 오지 말았어야 할 시간들이었다는 식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줄 마술과도 같은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구원의 소식이란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것은 우리이고,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곤경은 마땅히 당해야 할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식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방법을 미워하며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최후의 수단으로써나 고려해 볼 만한 방법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됨을 고백하고 우리의 죄가 모든 곤경의 원인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존재이며, 또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현재의 우리 모습이 저열하고 악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구원으로 가는 첫걸음이 됩니다.
(2)자신들의 능력과 방법을 의지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경에 대한 설명 중에서 위의 설명과 한쌍을 이루면서 밀접하게 연관되는 또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들의 방법과 능력으로 곤경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방법을 훨씬 우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충고하고 역설하는 예언자들의 말은 어리석은 지껄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자신들의 곤경이 하나님께 대항했던 스스로의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으므로 자연히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했던 것'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생각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자신들이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수 없이 많은 실패를 했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방법과 생각을 신뢰했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서로를 설득해 나갔습니다.
인류는 개인적인 병이든, 국가적인 병이든, 세계적인 병이든, 모든병들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이렇게 낙관적으로 보는 것만큼 이상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생의 행복과 평화와 성공을 좇고 있으며, 항상 '이제' '곧’ 그 것들을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 하나 어겨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이론들과 낙관주의의 엄숙한 다짐만을 옳은 것이라고 집하며 허황된 소리에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평화, 행복의 희망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상관하지도 않은 채 빠져듭니다. 그들은자신들이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우월하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면서, 현대의 도덕적인 혼돈과 타협책들을 즐깁니다. 인류는 수세기를 지내오면서 끊임없이 실패해왔고,희망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감에 차 있고 여전히 교만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하 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 또한 받아들인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서 자신들의 방법으로 계속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이아말로 그들이 그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강하게 반대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구원을얻고 싶으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을 다 중단하고 조용히 서서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그저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대단한 민족, 대단한 역사를 행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원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구윈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거짓 신들도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 동안 사랑했었던 모든 죄악들과도 작별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그리하여 '어리석고 무지하며 전혀 흥미롭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였을것입니다. “그럴수는 없다! 구원을 받으려고 그런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너무 과한 일이다." 그들은 구원을 원했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너무나 불행하고 불안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건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일만은 너무나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논리적인 사고를 했으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구원의 조건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였다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히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자신들을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해주는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이보다는 더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서 계속 살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부터 건져냄을 받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미혹을 믿지 말라 음란하는자나 우상숭배하는자나 간음하는자나 탐색하는자나남색하는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것을 나타내는 시점입니다.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그토록 잔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던 자기의 죄악을 이제는 미워한다는 것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 입니다.
히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3)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을 깨닫지 못함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을 거부한 것은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한 현실을 제대로 깨닫지도,실감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들은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롯의 경고도 믿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롯은 소돔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그성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얼마나 자주 모세의 권위를 조롱했으며 , 그의 명령과 경고를 얼마나 철저히 무시했습니까?
그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으며, 심지어는그렇게 지혜로왔던 솔로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그들은 이사야를 비웃었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해주는 말들도 그들의 귀에는 모두 다 너무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 들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막지 않으면 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더 무지한 사람들에게 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그들에게 도래할 멸망에 대한 경고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 경고들이 말하는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며, 세상일들이 그렇게까지 위기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자신의 역사가 이러한 환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 환상을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지지해 줄만한 증거라고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여전히 심판이나 지옥같은 것은 없다고, 또한 지금 인간이 어떤 상태이건간에 결국은 모든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가르침은 도외시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과 구약의 경고들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길로 만행하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은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기록으로서의 예언서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는여기에서, 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들을 신뢰하였으므로, 멸망이 속히 임하고 필경 끔책한 일들이 그들 위에 임하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된 것처럼,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우리 주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이사야의 예언도 모두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형별과 천벌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여러분의 말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은 유치하고 미숙한 것이라고 화신해 마지않습니다. 또한 성경은 첫 날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는 했지만, 20세기의 시민들을 계몽해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대담은 이렇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갈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1:24-25).
4.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그러나 여기까지만 말씀 드리고 그만 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을 귀하게 생각하고 또한 그 영혼이 재난과 어두움의 영역으로부터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고로, 여러분께 호소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구원의 방법' 을 여러분께 보여드림으로써, 결론적으로 여러분께 호소하고자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따분하고 험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렇게도 영광스럽고 그렇게도 놀라운 구원을 거절한 인간이란 얼마나 비극적인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곤경에 빠져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계십니까? 불행하며 괴로우십니까? 인생이라는 싸움이 힘겹고 너무 격렬하게 느껴지십니까? 이러 저러한 개인적인 문제나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또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 때문에 오늘밤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은 아닙니까? 미래의 삶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이 시간 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1)가까이에 있다.
첫째,복음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램, 즉 자신들의 땅을 벗어나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들에게 나아가서 동맹을 맺고 도움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예루살렘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 ,그 곳에서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 ,그리고 그 곳에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전해주는 가장 영광스러운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며,하나님의 구원도 예루살렘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실로아의 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가서 찾고 살펴보고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 정확히 찾아옵니다.
죄의 소굴에서 낙심하고 계십니까? 복음이 그곳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마음이 지치고 상했으며 낙담해 있습니까? 복음은 그 곳으로도 찾아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하나님의 아들께서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옆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단지 자신을 보기만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시간과 장소가 바뀌어도 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필요로하는 곳, 그분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라면 그 분은 언제나 그 곳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십시오!
(2) 단순하고 비천하기도 하다.
둘째,그러나 단순하고 비천한 것도 구원의 방법이 됩니다. 사람들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거절했습니다. 사람의 방법에 비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고요하고 겸손합니까? 사람들은 군사와 군대를, 조직을, 떠들썩한 일들과 활동들을 신뢰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에 비해 구약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단순합니다.
그분은 울부짖지도 않으셨고 큰 소리를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한 갈대를 끈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사42:3).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기준으로 이 일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언제나 이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 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모든이들에게 열려 있는 길입니다. 너무나 고귀하고 난해해서 박적한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해내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불가능한 일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주셨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분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며,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감사를 표시하는 일 뿐이라고 말해줍니다.
구원의 길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한 구원의 길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린아이라도 그 길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지극히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도 모두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 아 물을 따라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고 말씀하십니다.
(3)지속적이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적이며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꺼이 의지하던 왕국들은 일시적인 것들이었으며 , 계속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 분은 항상 동일하십니다. 환경의 변화는 그분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간에 그분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줍니다.
가뭄이 와서 모든 것을 말려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아의 물은 변함없이 천천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물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일시적인 기분과 생각, 변화무쌍하고 결국은 참된 만족도 주지 못할 인간의 계획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밤 실로아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은 만족을 얻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씻겨질 것입니다. 그 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새롭게 되고 새로운 활기를 얻으며, 새로운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며,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기 위해서 지금도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저주의 길인 것입니다. 실로아의 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구원을 얻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