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렙 목사의 기독교TV 설교 녹취록
이갈렙 목사, 2008년 3월 2일 기독교TV설교 갈렙의 요한복음(2) <세상에 비추인 그 빛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의 ‘그’를 예수로 연결시키는 것은 가당찮은 해석이다” “오늘 주제는 ‘세상에 비추인 그 빛은’이라는 주제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장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절에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11절 하반 절에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이 구절 속에 ―
10절 ‘그’로,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라고 하는 이 ‘그로’에 근거해서 이 박대받은, 환영받지 못한 예수로서, 이 예수를 본문 처음으로까지 거슬러 모시고 올라가서 그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로,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곧 하나님으로 간주하면서 3절에 나타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하는, 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켜가지고서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해석들을 하고 그렇게 믿기까지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무리한 해석이고 가당치 않은 전개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수를 처음 본문의 내용으로까지 거슬러 모셔가서 예수가 다 하신 것처럼 그렇게 들어왔고, 알아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만물, 곧 천지창조 그 태초에 문장 상으로 보아서 예수님이 지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시지도 않았고, 또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고, 그 예수님 말씀에 의하여 나갔던 말씀이 어떻게 작품을 냈겠습니까?
세상을 지을 때 그 태초에는, 요한복음 1장의 태초 곧 ‘도’안에 계셨을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 보내어진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보내어진 천지창조 때 태초에는 하나님 말씀이 가라사대로 오신 것이지 예수의 말씀이 가라사대로 왔던 것이 아니라 그런 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로 2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여기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한 ‘도’를, 이 말씀의 ‘도’를 갖고 계시었던 ‘아버지 하나님’ 태초에 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문장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 태초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천지창조 때에 수면을 운행했던 창세기 1장 2절, 수면을 운행한 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이 아니요, 아버지 하나님의 신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면서 작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천지창조 때에 그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또 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 궁창이 있으라 … 궁창이 있었고', 또 1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광명이 있으라 하시매…' ― 그 하나님 아버지의 하신 말씀, 그가 보내온 말씀에 의해서 광명이 있고, 궁창이 생기고, 빛이 있게 되고, 만물이 있게 되었던 것이지 결코 이 문장으로 보아서 '그의 아들 예수가 가라사대…'라고 기록한 데가 없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타나게 되신 예수님으로서는 태초의 천지창조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예수는 아직까지 이 창세 때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 관한 말씀, 그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예수는 하나님의 ‘도’ 가운데 있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 태초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도’ 안에는 물론 계셨습니다마는, 그 ‘도’ 안에 그대로 계신바 되다가 천지창조 훨씬 후에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에 그 ‘도’가 우리 가운데 와서, 이 지어진 세상에 와서 나타났을 뿐이니 어떻게 가라사대, 가라사대 하신 말씀으로서 지어진 이 천지만물이 예수님의 가라사대로 되었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때 당시에는 '가라사대'할 수 있는 그런 입을 가지시지도 않았습니다. 또 그런 '가라사대'할 수 있는 상황도 그는 갖고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7절 지어진 사람도 '아들 예수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 형상과 그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계신 말씀, 그 말씀 안에 아직도 가두어져 있었던, 그렇게 가두어져 있다가 먼 후일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타나게 되신 예수님으로서 어떻게 이 창조에 관여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3절에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만물, 이 만물 역시도 어떻게 예수님이 지으신 것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인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문법적으로, 아주 문법적으로 조물주는 아버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또 분명한 것은 나중에 나타나신바 되신 예수셨어도 그 역시 태,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그 한 ‘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도’와 함께 같은 ‘도’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던 생명 중의 하나였다” “원래의 하나님의 ‘도’ 안에, 그 ‘말씀’ 안에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있었으니 ―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곧 이 말씀이 아니라 4절이 기록하고 설명하는 그대로 ‘그 말씀 안에 있던 생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가볍고 여기고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곧 이 말씀이 아니라 4절이 표현한대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던 그 도, 그 말씀 안에 있던, 말씀 속에 있던 한 생명이었다’라는 바로 설명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 곧 태초에 하나님에게 한 ‘도’가 계시니라' ― 이 ‘계시니라’라고 할 만큼 이 도는 어떤 법전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전해준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도’는, 이 ‘도’ 안에 생명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도’, 이 하나님의 갖고 계셨던, 창세전부터, 영원 전부터 태, 태초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던 이 말씀 안에 있는 ‘도’는 생명이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창세기 1장 29절에 나타난 채소로서 씨를 맺게 하고 나무로 열매를 맺게 하는 그런 식물의 생명이 그 말씀 안에 들어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30절을 살펴보면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그런 동물들의 생명들과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도’ 안에 들어 있는 말씀들의 내용과 같이 그 생명들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그 ‘도’ 속에 있는 말씀들은 식물이면 식물의 생명, 동물이면 동물의 생명, 그리고 사람이면 사람의 생명,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의 생명이면 독생 하신 아들의 생명 그 말씀과 같이 그 말씀의 내용대로 전부 생명을 갖고 계셨으니 이 ‘도’를 가리켜, 이 하나님 갖고 계셨던 ‘말씀’을 가리켜 '계시니라'라고 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표현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본서에서 어떤 생명들을 취급하려 한 것으로 여겨집니까? 요한복음 1장 4절을 살펴보면 ‘그 안에(그 ‘말씀’, ‘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 안에 있는 여러 생명 가운데 제자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중점적으로 주제 삼아서 나타내려고 하는 그 생명은 여러 생명들 가운데 예수의 생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당시 흑암에 사는, 이 어두움에 사는 백성들에게, 소망이 없는 백성들에게 빛으로 비출 그런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주재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요한의 글의 시작에서부터 발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설명하려한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진리의 말씀’, 그 안에 있었던 생명 중 예수의 생명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을 살펴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7절에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무엇을 증거하러 왔습니까?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이 하나님이 ‘도’ 가운데 나타난 그 큰 섭리 가운데 어느 부분을 나타내려고 했느냐 ―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도’ 즉, 이 ‘진리의 말씀’, 그 안에 있었던 생명, 그 생명들 중에서도 다른 생명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 이 예수의 생명인데 이 예수의 생명이 이 땅에 비추어져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누구를 위하였는가? 흑암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될 수 있는 생명으로 오게 되었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이 요한복음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면 그가 나타내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도’ 안에, 그 ‘도의 말씀’ 가운데 있었던 생명들 가운데 한 생명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 그 생명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라고 하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니 ―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거나, 또 태초에 계신 말씀 그 자체가 아니시라, 오히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그 말씀 가운데 있는 한 생명, 곧 예수의 생명일 뿐이라는 것. 그 한 생명 말씀 속에 있었던 예수의 생명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바로 인간에게 빛이 될 수 있는 그 부분만을 증거하려고, 그리고 백성에게 나타내려고 ‘요한이라는 사람이 왔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셨던 하나님의 ‘도’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그 ‘도’, 그 ‘말씀’ 안에 있던, 동식물의 생명들과 함께 ‘도’ 안에 들어있었던 또 다른 사람의 생명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이로되, 그의 생명은 곧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이었으므로 어두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비추일 빛이 되었고, 그리고 그를 영접하는 인생으로 하여금 예수처럼, 하나님처럼 영생하게 하는 생명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우리가 그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영광을 보니) 그는 하나님의 다만 독생자의 영광이요' ―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요, 아들의 영광일 뿐이었지 그가 곧 하나님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모세, 예수 그리스도, 거대한 천지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 중심 사상에 눈과 귀를 가져야 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을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심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그것은 왜 입니까? 그의 영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한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모든 영광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표현들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또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보내주실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의 말씀과 함께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있었던 하나님의 ‘도’에서 같이 있다가 나타난바 된 것이니, 율법 분야를 나타낸 모세의 분야,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같은 ‘도’ 안에 있었던 은혜 분야를 나타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빛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도’ 가운데 한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모세가 율법을 나타내고, 창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와서 천지를 지었던 그러한 것들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원래부터 가지고 계신 한 ‘도’ 안에 계시다가 때가 되어 은혜의 빛을 비춰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 뜻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영광의 빛으로 나타난바 되었으니 모세의 율법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본래 모세의 것도 아닌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도 아닌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천지창조하게 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도’가 때를 따라서 창세 때에는 창세의 말씀이 이 땅에 와서 말씀을 이루어내었고, 율법의 때에는 모세를 통하여 이 땅에 와서 그 말씀으로써 하나님의 ‘도’와 ‘진리’를 나타내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때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에게 비추인바 빛 된 그 모든 예수의 일들은 전부 하나님의 한 도에 같이 있다가 때를 따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낸 것뿐인 것이니.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지창조의 모든 일들로서 우리는 보여지는 모세를,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지는 이 거대한 천지를 중심하여 섬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세로서, 이러한 예수로서, 이러한 천지창조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 중심 사상에 눈과 귀를 가진 ― 그야말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하여서 더욱 확고히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갈렙 목사, 2008년 3월 9일 기독교TV설교 갈렙의 요한복음 (3) <예수는 다만 하나님의 독생자>
“요한복음 1장 4절의 ‘그’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생명’ 또 ‘빛’ 이것이 예수님의 특성임에 비추어서 요한복음 1장 4절의 '그 안에 있는 생명 또 그 생명에 있는 빛'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4절의 ‘그’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생각하시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 충실해서 본다면 예수의 특성인 ‘생명’과 ‘빛’은 ‘그 안에 생명, 그 안에 빛’이라고 했기에 이 4절의 ‘그’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을 옛날로 돌려서 전에 국어 공부하던 시절로 한 번 돌아가서 헤아려봅시다. ‘그이 혹은 그것, 저이 혹은 저것, 이이 이것 등 지시대명사라고 하지요. 이 지시대명사는 반드시 그 대명사 바로 앞에 예시된 인물에 국한해서 혹은 사물에 국한해서 지정하여 지시하는 대명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본문에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허나 이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라고 기록하지 아니한 이상 여기서 4절의 ‘그’를 ‘예수라’라고 해석함은 전혀 가하지 않습니다. 여기 요한복음 1장 2절, 3절의 그는 다만 그 지시대명사 앞의 1절에 있는 ‘말씀’을 지칭할 뿐이다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국어요, 이것이 정직한 문장의 바른 해석입니다.
4절에 '그 안엡' ‘그’ 안에 라는 것은 그러니까 ‘말씀’ 안에가 되는 것이지요.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 혹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이 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계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포괄하고 있는 ‘말씀’ 전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리고 또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도 굳이 말할 수 없으며, ‘그 생명에 있는 빛’ 이것이 세례 요한이 규정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야 할 만한 그런 한계였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이시지 예수가 아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요한복음의 오픈 구절이었던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는데 이 태초에 계신 ‘말씀’ 이 ‘말씀’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시지 아들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장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또 예수를 증거할 사명을 받아 왔던 세례 요한이 그것을 분명하게 세분해서 자기의 나타낼 바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초에 계신 ‘말씀’을 가리켜서 ‘그’라, ‘그’라 라고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이실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입니다. 또 모든 문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하는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하는 그 ‘그’는 그 말씀하신, 그 ‘말씀’을 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 것이지 아직도 나타날 생각도 하지도 않고, 먼 훗날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에 비로소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에 만물을 지으실 때 사용된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천지만물이 이루어졌다 그것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져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오늘날 어찌해서 그 ‘말씀’ 안에 있던 예수가 오히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자리를 잡았고, 급기야 이 예수 그리스도가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져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정작 예수님 자신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 하반 절을 살펴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너희가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분명히 순서의 선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처럼 아버지 하나님보다 예수님을 더 위에 바깥에 올려서 칭송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렇게 믿고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잡아주신 말씀이 '너희가 하나님 즉 내 아버지를 믿으니 그 아버지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는 지극히 적은 부분인 나를 믿으라'라고 요구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곧 아버지가 될 수 없고, 그 아버지의 독생자, 그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의 영광에 불과하다. 예수님 자신은 자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에 불과하다’라고 함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낼 수밖에 없을 만큼 그때 분위기가 어쩌면 오늘날 혹 이들께서 아들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게 된 이때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굳이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해도 됩니다. 이렇게 위치가 하위가 상위되고, 상위 자리에 계셔서 영광 받으셔야 될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 아래로 들어가게 된 이것은 아마 이 때문이라 생각이 됩니다. 요한복음 1장 9절로 10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요한복음 1장 9절로 10절에 보면,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한 바로 이 구절입니다.”
“계란이 곧 닭이 아닌 것처럼 태초의 하나님의 ‘도’(요한복음 1:1의 말씀을 의미한다: 편집자주)은 아버지 하나님의 소유였지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10절에 ‘…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분명하게 또 말씀을 하고 있으니 그럼 천지만물은 과연 누구에 의하여 지어졌다는 것인가? ‘참 빛’이 지은 것인가, 아니면 저 1절, 2절에 있었던 ‘말씀’ 곧, 아버지 하나님이 지은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1절서부터 10절까지의 문장을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헤아려서 살펴본다면 둘 다 이어야 맞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도 만물을 지었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고, 뒤에 있는 ‘참 빛’ 그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었다라고 하는 것도 맞는 문장으로 짜여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2절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4절에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 안에 빛이 있었다’라고 하는 그런 구조 형태로서 ‘하나님에게 영원 전부터 태, 태초에 도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을 앞서 시간, 시간들에서 말씀을 드려왔고, 여러분은 이해하고 계실 줄로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이 ‘도’의 구조 형태는 마치 계란의 유정란 씨가 노른자위에 연하여 있고, 또 그 노른자위는 흰자위가 그리고 그 껍질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 껍질과 흰자위 안에 있는 노른자위요, 그 노른자위 안에 있는 씨 ― 이런 구조가 계란입니다. 달걀입니다. 그렇다면 이 달걀 가운데 바깥에 있는 껍질, 바로 그 밑에 있는 흰자위 또 그 안에 쌓여있는 노른자위가 핵심이겠습니까, 아니면 맨 안에 있는 이 씨 곧, 병아리가 될 이 씨알이 핵심이겠습니까? 물론 이 씨가 핵심인 것입니다. 이 계란에 씨가 핵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1장 15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씨로,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 갖고 있은 아들의 씨, 이 아들의 씨로 오히려 모든 선지자와 율법 이 말씀, 이 율법보다 상위 개념이요 앞선 자였다 그렇게 설명을 이 달걀의 구조로서 드려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말씀’ 그리고 또 ‘말씀’ 안에 ‘생명’, 이 ‘생명’과 연결된 ‘빛’이 서로서로 말미암고 말미암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그런 구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생명’이든지 ‘빛’이든지 그리고 이 ‘말씀’이 불가분리의 구조로 된 하나님의 둘도 셋도 아닌, 따로 따로도 아닌 ‘한 도’ 안의 구조가 그랬다 그것입니다.
이 불가분리 한 구조로 된, 말미암고 말미암은 하나님의 이 ‘도’이어서 3절에 '만물이 그 말씀으로 지어졌다'라고 하는 해석이나, 그리고 10절의 '그 빛으로 말미암아 지어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둘 다 옳은 것이다 그것입니다.
직간접적으로 전부다 연관이 있도록 유기적인 관계가 되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세 전에 계셨던 ‘한 도’였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아버지 하나님의 소유였을 뿐, 그 예수가(그 독생자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인 것이 아니요, 그 ‘말씀’과 그 ‘빛’이 그 ‘생명’이 곧 아버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계란이 따로 한 계란을 유지하고 있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그 계란이 곧 수탉이요 그 어미 닭이 아니라 그 수탉과 어미 닭의 소유로 있었던 계란 그 수탉과 어미 닭의 것이었던 것처럼 이 하나님의 ‘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유였지 이 ‘도’ 속에 있는 ‘말씀’이나 이 ‘도’ 속에 있는 ‘생명’ 혹은 ‘빛’을 가리켜서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계란은 수탉이 낳아서 수탉이 때를 따라 생명을 다시 탄생시킬 수탉 소유의 계란인 것이지 곧 그 계란이 닭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의미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