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구원의 기초 /이광호목사님(박모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baromi 2008. 5. 22. 22:31

구원의 기초 

(이 글은 부산 서면교회 박창진 목사님의 서신에 대한 이광호 목사님의 답신입니다)

박창진 목사님께,

평안하신지요? 지난번 강의차 부산에 갔을 때 박목사님을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앞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공부에 진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다른 목사님을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가, 교회에 유익을 끼칠 뿐 아니라 목사님의 삶에 커다란 즐거움을 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목사님의 <제한속죄>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동일한 글을 저에게 뿐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께도 보내셨다 하니 어떤 답변이 왔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목사님의 글을 읽고 어떻게 답변을 해야할지 무척 어려웠습니다. 주제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성경신학과 교의학적 입장에서 동시에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절대선택'에 대한 교의는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그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앞에서 제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과 교의학적 입장에서 동시에 살펴져야 할 내용일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단일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절대선택'에 관한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불안전한 우리가 보기에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을 때 과연 우리는 그 본문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교의학이 필요한 이유는, 그런 다양한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교훈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들어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구절'들이 여러군데(고후5:14,15; 딤전2:4,6; 요일2:1,2 등 참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그의 전적인 선택에 달려 있으며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구절(8:30; 1:4,5,11; 3:11; 딤후1:9 등 참조)들도 여러군데 나타납니다.

신학자들은 교의학에 있어서 '구원론'을 다룰 때 위에 언급한 구절들을 기초하여 교의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봐라,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론'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문제이며 그에 대한 기준을 두고 이단여부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 펠라기우스나 중세의 알미니우스 등은 인간의 자력구원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사상을 따르는 펠리기안들이나 알미니안들은 인간의 자력구원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서 많은 애들을 썼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선택'이나 인간의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점에 두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의 '절대선택'과 인간의 '전적타락'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과 기쁘신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이미 자기백성을 선택'해 두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세 전에 택해두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1:21).

오늘 우리 시대에도 구원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만인구원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구원의 확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는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절대선택' 교리를 양보하고 있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다양한 성경구절들이 서로 상반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해야만 할까요? 저는 성경말씀에 나타난 이런 다양한 구절들이 주어진 것은 역시 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교훈이라 믿으며 이는 교의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선 '만인구원설'이나 인간의 의지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구원의 기초를 '하나님의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는 말씀에 나타나는 '사랑'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오해 때문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혹 저의 견해를 따로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들은 주로 구원의 기초를 '하나님의 사랑''인간중심 구원론'에 두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대해 혼선을 빚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려 하셨다'는 데서 일차적인 구원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지요. 그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로 결말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며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결코 죄인인 상태로 용납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그 죄인을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백성만이 심판에서 제외되고 그와 더불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따름입니다. 여기서 저는 '구원의 기초'를 명확하게 정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는 구원의 기초가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회복'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게 되신 것은 먼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 대해(인간으로 말미암는) 원래 의도하신 바 '하나님의 영광회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부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은 불쌍한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의도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 회복에 있다면, 이 세상에 사는 죄된 인간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그저 그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이 인간의 자기행동이나 자기 의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요리문답 제1문항에서 '사람의 첫째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이와 조화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어떤 생각이나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본질적이며 당연한 삶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자기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이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구원의 기초'에 대한 저의 생각을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해 혹 목사님의 다른 생각이 있다면 우리 주변의 건전한 성경신학자들이나 교의신학자들의 견해를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면 저 역시 그러한 내용들을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박 목사님의 길고 성의있는 글에 비해 저의 짧고 거의 즉각적인 답변임을 생각할 때 죄송한 감이 듭니다. 지난번 글에서 저에게 질의하신 내용이 이 글에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여겨지니 약간의 참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박 목사님께서 보내신 동일한 글에 대해 혹 다른 교수님들로 부터 답변이 있었다면 저도 그 내용을 한번 보고 싶다는 말씀을 아울러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0. 10. 23

이광호 목사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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